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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간이 된 신화, 무령왕_이여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1.05 BoardLang.text_hits 11,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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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1월(통권 25호) [서평] 인간이 된 신화, 무령왕– 정재윤, 2021,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푸른역사 – 이여름(고대사분과) 들어가는 말 2021년은 무령왕릉이 발굴된지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 기념전시가 2021년 9월 14일부터 2022년 3월 6일까지 전시 중에 있다.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부터 시작하여 현재 어떻게 보존되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과 금동신발, 다양한 장신구 등을 보면서 백제의 우아함과 아룸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해당 전시만으로는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떠한 생애를 살아왔는지를 알기엔 부족함이 있다. 이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책이 2021년 10월에 출간된 정재윤 저서의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이다. 저자인 정재윤은 30여 년간 백제사를 전공한 연구자로서 현재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재직하고 있으며 백제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공주 백제 문화제 집행위원장을 담당하고 있다. 저자는 전공자의 시각에서 백제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아쉬웠을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고구려와 신라와 다르게 백제는 의자왕, 삼천궁녀 등 멸망에 대한 이미지가 크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중심으로 민족의 역동성을, 신라는 통일 이후 오늘날 민족문화를 형성 및 발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과 삼천궁녀, 황산벌전투 등으로 상징되는 멸망의 이미지만 부각이 되었다. 저자는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해 가장 백제적인 인물로 무령왕을 선택하였다. 무령왕릉과 그와 함께 나온 유물들은 백제의 문화를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는 사료 몇 줄에 불과하지만, 고고학적 자료와 함께 저자의 합리적인 추론을 거쳐서 비어있는 구멍을 메꾸어가며 저술하여 저자의 목표대로 무령왕의 이야기가 신화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실감 나게 다가온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백제사의 역주행, 무령왕릉의 발굴’로 무령왕릉의 발굴과 함께 출토된 주요 유물을 설명하면서 무령왕릉의 가치와 그로 인해 확인 할 수 있는 문화강국으로서의 백제를 보여준다. 2부 ‘탄생과 성장’에서는 무령왕의 성장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3부는 ‘국인공모(國人共謀)’이다. 단어 하나하나 풀면 나라사람이 같이 어떤 일을 꾀하고 의논한다는 것이다. 무령왕이 백제에 귀국한 이후의 활동을 단편적인 사료와 함께 영산강 유역에 있는 전방후원분이라는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고 동성왕 사후 무령왕의 즉위까지 실감나게 볼 수 있다. 4부는 ‘갱위강국’으로 무령왕이 왕이 뒨 후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다루었다. 이 글에서는 모든 내용을 다룰 수 없지만 저자가 밟아간 발자취를 최대한 따라가고자 한다. 이에 먼저 무령왕이 어떻게 신화화 되었는지 살펴보며 그 이후에 무령왕의 생애에서 중요한 특징을 보면서 어떻게 신화적 인물이 역사적 인물로 재탄생 하는지 공유하고자 한다. [caption id="attachment_9359" align="aligncenter" width="500"]그림 1.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정재윤, 2021)의 표지[/caption] 가장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 이는 무령왕릉발굴을 평하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무령왕릉에서 12종 17점의 국보를 포함하여 5,200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믈의 양과 질은 최고의 성과이지만 발굴 과정 속에서 과열된 취재 경쟁과 그에 미흡한 대처로 인한 소실된 정보들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그 이후 생성된 온갖 비화들은 무령왕릉을 신성하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무령왕릉은 발굴 이전에도 일제강점기시절 가루베지온의 도굴을 우연에 우연을 거쳐 살았다는 점에서 그 신성성이 더 강조되며 무령왕을 신화적 존재로 승격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저자는 이렇게 신화적 존재가 된 무령왕을 그의 인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환상 속 인물이 아닌 실존한 역사적 인물로 소생시켰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유물은 묘지석이다. 묘지에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무령왕과 왕비의 정보와 함께 땅의 신에게서 땅을 산 매지권이 기적혀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령왕의 이름과 나이가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 기록으로 인해 허구로만 여겨졌던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이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무령왕은 점차 역사적 인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령왕 탄생의 미스테리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무령왕에게 신비함을 더해주는 것은 그의 탄생에서도 더해진다. 작은 어촌 마을의 전설이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였으며 그 주인공이 사마 곧 무령왕이었다. 그 외에도 무령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백제 제21대 왕인 개로왕 혹은 개로왕과 제22대 왕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 제24대 왕 동성왕 이렇게 세 인물이다. 이 가운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성왕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에 기록된 무령왕의 나이보다 적어 논의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개로왕과 곤지 둘 중 누가 무령왕의 친아버지인지 저자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하며 사실적 검증에 중점을 두어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가지는 의의 중 하나는 무령왕의 성장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규슈와 가와치지역에 남아있는 백제인들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삶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령왕이 일본에서 어떤 배경을 가지고 성장했는지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충분한 밑거름이 된다. 기록에는 없는 하지만 존재하는 즉위과정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 백제에 세력이 없었는데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저자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인 모대(동성왕)과 함께 귀국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무령왕은 동생인 동성왕을 즉위하는데 일조하였지만 동성왕의 견제에 의해 토착세력이 강한 영산강 유역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무령왕은 백제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무령왕을 도와 활동한 세력이 무령왕과 함께 백제로 건너온 왜인집단으로 제시한다. 근거로 바로 전방후원분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반도에 있는 전방후원분은 학계에서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 중 하나이다. 이 무덤양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라는 한정된 시점에 영산강 유역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방후원분의 출토품으로 백제의 위세품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와 정치적 연결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덤양식이 나타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는 무령왕이 백제에서 활동한 시기이자 백제 중앙에서 영산강 유역에 지배력을 강화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추론이 허구라 치부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전히 갑론을박이 존재하며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비판적으로 이 책을 읽어본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갱위강국 무령왕은 나이 40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왕이 되었다. 왕이 된 무령왕 앞에 쌓여있는 문제는 산더미 같았다. 무령왕은 가장 먼저 반란을 진압하고 기근에 굶주린 백성들을 궁휼하는 등 국내문제부터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나라를 부유하게 한 이후 강력해진 군사력을 기반으로 고구려와 임나 등을 공격하여 영역을 확장하여 일본과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로를 안전하게 확보하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면서 백제는 이전과 다른 나라가 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9360" align="aligncenter" width="436"]그림 2. 양직공도 북송모본 백제사신도, 무령왕대 파견된 백제 사신의 모습과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적혀있다.[/caption] 그 결과 무령왕은 521년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갱위강국更爲强國] 선포하였고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작을 받아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나오며 저자는 가장 백제적인 인물로 무령왕을 선택했다. 이 책에서 무령왕의 생애를 짚어보면서 무령왕이 역사적 인물임을 상기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저자는 부족한 사료들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엮어나갔으며 그 결과 생생하게 무령왕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백제문화를 대표하기에 모자르지 않다. 백제 문화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로 표현이 가능하다. 이 말은 온조왕이 새로 지은 궁실에 대한 평이지만 백제 문화를 관통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시각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반영할 수 있다. 한중일 이 세 나라가 온라인상에서 치열하게 문화를 자국의 것이라 싸우고 있다. 이에 해결 방법으로 백제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