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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⑫] 식민지 해방에 나선 혁명가 남매들 : 김형선·김명시·김형윤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12.06 BoardLang.text_hits 21,362
웹진 '역사랑' 2021년 12월(통권 24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식민지 해방에 나선 혁명가 남매들


: 김형선·김명시·김형윤


 

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 지난 연재 보기





붙잡힌 ‘조직과 도피의 귀재’

1933년 7월 15일 자정, 인천경찰서 수사대는 오랫동안 뒤쫓던 사상(思想) 관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은신처를 급습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지하운동의 배후인 김형선(金炯善, 1904~1950)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스무 살의 홍운표라는 청년뿐이었다.주1) 포위망을 벗어난 김형선은 버스에 올라 영등포로 이동했다. 영등포부터 걸어서 오류동으로 간 그는 다시 기차를 타고 소사로 향했다. 아마도 인천을 거쳐 상하이로 갈 생각이었던 듯하다. 소사부터는 다시 걸었는데 김포로 잘못 들어섰다.

숨기에도 탈출에도 더 편하다고 판단했던 걸까? 고민하던 김형선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승합자동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경인가도에는 이미 촘촘한 포위망이 짜여 있었다. ‘조직과 도피의 귀재’ 김형선은 결국 불심검문에 걸려서 체포되었다. 일제 경찰은 경성과 신의주 그리고 선천 등지에서 다잡은 김형선을 이미 세 차례 놓친 바 있었다. 혹여 다시 놓칠까 악명 높은 특별고등과 주임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가 직접 오토바이로 김형선이 탄 수송차를 호위했다.주2)

대관절 김형선이 누구길래 일제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았던 걸까? 당시 《동아일보》는 김형선이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갖는 위상을 이렇게 적었다.

김형선은 제2차 공산당 사건 이후 기보한 바와 같이 계속하여 엄중한 경계망을 어렵지 않게 돌파하고 들락날락 5차나 하면서 유명한 사건마다 배후에 숨어 지도를 하야 왔으되 한 번도 경찰에 피검되어 경찰서 문안에 들어서 본 일이 없었다. 그 까닭에 경찰 측에서는 근 10년을 두고 그를 검거코저 백방으로 고심하였으나 목적을 달치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검거한 것이다.
다른 사회운동자들은 대개가 한두 번씩 검거되어 복역들을 한 관계로 그 사람의 성질과 기타의 관계를 알고 있는 까닭에 무슨 사건하면 그 사건에서 무슨 취조를 진행하게 되므로 그다지 힘이 들지 아니하나 김형선에 있어서는 관계된 사건은 첩첩이 많되 한 번도 취조하야 보지 못하였으므로 취조의 단서가 제1차 공산당 사건 이후 오늘까지에 이르는 동안 해내(海內)·해외에서 계속한 지하운동을 전부 들추어 나게 된다 한다. 이 사람의 취조는 해내·해외를 통하야 조선 사회운동의 역사를 들추어냄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 한다.주3)


일본 경찰이 김형선을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까닭을 알 수 있다. 박헌영이나 이재유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김형선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뛰어난 조직가 중 한 사람이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이래로 10여 년 동안 국내외를 종횡하며 각종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일제 경찰은 여러 가명을 사용한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어떻게든 체포하려고 벼르는 참이었다.주4) 위 기사 내용 그대로 김형선의 10여 년의 행적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와 다름없었다.



[caption id="attachment_9277" align="aligncenter" width="1532"]1933년 10월에 작성된 김형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caption]

김형선은 1904년 5월 7일에 경상남도 마산포 언덕배기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생선 행상을 하는 어머니 김인석이 4남매를 길렀다.주5) 그중에서 맏이인 김형선을 비롯하여 김명시(金命時, 1907~1949)와 김형윤(金炯潤, 생몰년 미상) 3남매가 식민지 해방 투쟁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김형선은 1917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점원과 부두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마산창고회사의 서기로 5년여 동안 일하다가 실직하고, 1926년부터 조선일보 마산지국을 경영했다.

김형선은 노동자로 일하면서 마산청년회·마산노동회·마산해륙운수노동조합 등에 가입해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노동운동과 관련을 맺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김형선은 1924년 8월 5일에 마산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같은 달 17일에는 마산공산당을 조직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하자 이 두 조직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마산 야체이카(세포) 조직으로 각각 재편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지만 금방 풀려났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가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피신했다. 1927년 1월에 광둥성 광저우(廣州)의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가 곧 상하이로 돌아와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공산당 장쑤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 배속되어 한때 그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1929년 6월에는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 구연흠, 홍남표, 조봉암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人獨立運動者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소’ 같은 사내, 조선에서 공산당 재건을 꿈꾸다

1930년 7월 중국공산당은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하달했다. 상하이에서 맡은 일을 정리하고 김단야와 협력하여 조선에서 운동을 조직하라는 명령이었다.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을까?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1926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정식 지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부 승인이 취소되었다. 코민테른 동양부는 지금까지의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비판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을 직접 지도하고 나섰다.

‘12월 테제’라고 알려진 〈조선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승인을 취소한 이유를 알려준다. 코민테른은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당을 구성한 점’과 ‘노동자와 연대가 부족했던 점’을 조선공산당 위기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분파투쟁’을 청산하고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등을 통해 기층 대중(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공산주의 세포를 형성하여 아래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기본 방침을 제시했다.

[caption id="attachment_9278" align="aligncenter" width="357"]1925년 조직된 제1차 조선공산당(책임비서 김재봉)의 조직도. 검거 당시에는 보도되지 못하다가 《동아일보》 1927년 9월 13일자(7면)에 뒤늦게 보도되었다. 분파주의 등의 비판도 받았지만, 제세력의 참여 속에 결성된 최초의 조선공산당이었다.[/caption]

〈9월 테제〉와 〈10월 서신〉으로 알려진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과 범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의 문서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방침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1년에 창립된 프로핀테른과, 그 산하에서 태평양 연안의 운수노동자연합을 토대로 1927년 상하이에서 출범한 범태평양노동조합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굳건한 혁명적 당’이 없는 상황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과 노동자 조직을 위한 출판 활동을 강조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테제와 서신을 운동의 원칙과 실천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과거 여러 분파에 속했던 활동가들이 다투어 재건운동에 나섰다. 코민테른 동양부는 재건운동에 나선 ‘서울상해파’와 ‘ML파’ 등을 혁명운동에 해로운 분파로 간주하고 그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힘썼다. 더 나아가 코민테른은 재건운동을 직접 지휘했다. 사상의 중심인 기관지 창간을 계획하고 편집국원을 선임했으며, 출간비용도 제공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잡지 《콤뮤니스트》이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한 김단야를 비롯한 당재건 운동가들을 ‘콤뮤니스트 그룹’이라고 한다. 노동 현장의 세포 조직을 중시했던 ‘콤뮤니스트 그룹’은 공장 안에 ‘콤뮤니스트 독서반’을 조직하여 독서반에 가입한 선진노동자를 조직가와 지도자로 성장시키려 했다. 그들은 ‘콤뮤니스트 독서반’을 기반으로 만든 지역 당조직들의 연결망을 구축하여 지역 위원회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했다.주6)

이러한 사명을 부여받은 김단야와 김형선은 향후의 활동 방향과 역할을 분담했다. 김형선은 1931년 2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국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갔다. 김단야가 상하이에서 간행한 《콤뮤니스트》와 격문, 팸플릿 등을 국내로 보내면 김형선이 이를 배포하며 노동자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안동과 신의주에 마련된 연락 거점을 통해 잡지를 받았다. 상하이에서 《콤뮤니스트》 150부가 연락책인 독고전(獨孤佺)을 통해 김형선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이런 다량의 운반은 위험하고도 어려웠기 때문에 원본을 가져와 국내에서 인쇄하기로 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콤뮤니스트 그룹’에 합류한 김형선의 여동생 김명시가 1932년 3월 중순 《콤뮤니스트》 4호 원본과 격문들을 트렁크 뚜껑에 숨겨 국내로 반입했다. 김형선은 경성과 인천 등지에서 출판물의 배포망을 만들며 활동했다. 김명시도 인천의 제사공장과 성냥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이들은 메이데이를 맞이하여 잡지와 격문 등을 곳곳에 뿌리는 선전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에 이 그룹의 활동이 발각되고 말았다. 남매는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다. 김형선은 간신히 상하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김명시는 신의주의 국경을 넘기 직전 압록강 부근에서 고등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주7)

여동생 체포의 슬픔과 자신을 잡으려 혈안이 된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무릅쓰고 김형선은 불굴의 의지로 다시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갔다. ‘콤뮤니스트 그룹’은 1932년 7월 현재 조선 안에 20개 안팎의 세포단체를 조직했고 그 성원은 90명이었다.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더욱 강해진 경찰 감시망에 맞선 비합법조직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주8) 김형선 혼자만의 힘은 아니지만, 그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 성과였다.

이 당시 그의 동지들은 김형선을 ‘소’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직하게 운동에 임하는 그의 성품에 견주어 붙여진 별명이리라.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도 자기 형제들의 수난 기록인 《사슬이 풀린 뒤》에서 친형 오기만과 함께 활동한 김형선을 만난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오기영은 처음 만난 김형선이 마치 소처럼 “볼수록 온순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신념을 쏟아놓을 때에는 “그 온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에는 홍조가 돌고 눈에서 불이 이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김형선은 오기영에게 “남동생은 부산 감옥에, 여동생은 신의주 감옥에 있어. 그래서 아마 나는 잡히면 서대문 감옥에 있게 될 것만 같”다고 “재미있는 공상처럼”주9) 말했다.

김형선의 예감은 곧 슬픈 현실이 되었다. 여동생 김명시는 신의주 감옥에 있었고, 남동생 김형윤도 마산에서 이승엽과 비밀결사인 ‘볼세비키사’를 만들어 잡지 《볼세비키》를 제작·배포하면서 노동자를 조직해 적색노동조합을 만들려다가 체포되어 형을 살고 있었다.주10) 결국 김형선도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면서, 세 남매가 흩어져 동시에 부산·경성·신의주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

[caption id="attachment_9279" align="aligncenter" width="1347"]김형윤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caption]

김형선은 8년형을 선고받고 그 형기를 모두 채웠다. 일제 관헌은 수감 중인 그에게 전향을 강요했지만 그는 끝끝내 거부했다. 형기는 만료되었지만, 김형선은 ‘전향하지 않은 죄’로 다시 ‘예방구금’되어 풀려나지 못했다. ‘경성 트로이카’로 활동했던 이재유(李載裕)도 마찬가지로 구금이 지속되어 결국 청주교도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이재유와 달리 김형선은 끝내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햇수로 14년여의 감옥 생활에서 벗어나 해방된 나라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caption id="attachment_9280" align="aligncenter" width="317"]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낸 애국지사들. 1945년 8월 16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독립 운동가들과 군중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들 군중 속에서 14년여 만에 풀려난 김형선도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caption]

그러나 해방의 감격은 금세 잦아들었고 그는 다시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해방 이후 김형선은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국원이 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대회에서 의장단으로 선임되었으며,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미군정 치하에서 되살아난 식민지 시절의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주11) 1950년 9월 한국전쟁 때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잔 다르크’, 여장군 김명시의 삶과 죽음

1949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은 한 여성의 자살 사건을 보도했다.

일제 시 옌안(延安) 독립동맹원으로서 18년 동안을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부녀동맹 간부로 있었으며 현재 북로당 정치위원인 김명시(43)는 수일 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평경찰서에 구속되었었다 하는데 유치된 지 이틀 만에 철창 속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하였다 한다. 즉 그는 구속되자 동 경찰서 내 독방에 구류되었는데 간수의 눈을 피하여 유치장 벽을 통한 수도 ‘파이프’에 자기의 치마를 찢어서 걸어놓고 목을 걸고 앉은 채로 자살한 것이라 한다. 이 급보를 접한 서울지검에서는 오제도, 선우종원 양 검사가 현장을 검증하였는데 자살로 판명되었다 한다.주12)


자살의 정황은 상세했지만, 사람들은 김명시의 자살에 의혹을 표했다. 의혹이 사라지지 않자 당시 내무부 장관 김효석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본적을 경남 마산시 만동 189번지에 두고 현주소 서울시 종로구 유상동 16번지에 사는 무직 김명시(42)라는 여자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난 9월 29일 서울시 경찰국에서 부평경찰서로 유치 의뢰한 것으로 지난 10일 오전 5시 4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에 있는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주13)

장관의 답변으로 의혹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따르면, 김명시는 서울시 경찰국에 체포되었다가 부평서로 옮겨졌다. 당시는 좌익에 대한 고문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김명시는 어쩌면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발표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도 그에 이르게 한 어떤 외적 충격과 계기가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런 의심을 하는 까닭은 죽은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니라 김명시였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42세의 무직 여자’라는 김명시에 대한 내무부 장관의 건조한 설명은 사실 지독한 모욕에 가깝다. 불과 4년 전에 《동아일보》는 그녀를 “조선의 잔다르크”라 치켜세웠고,주14) ‘여장군 김명시’로 칭송되며 조선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영웅이었다. 김명시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대중이 그리 열광했을까? 그녀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1925년에 공산대학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7년도에 파견되어 상하이로 와보니 장개석(蔣介石) 씨의 쿠데타가 벌어져서 거리마다 공산주의자의 시체가 누었더군요. 거기서 대만, 중국, 일본, 비율빈〔필리핀〕, 몽고〔몽골〕, 안남〔베트남〕, 인도 등 각국 사람들이 모여서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하고 또 그 이면에서는 중공한인특별지부 일도 보게 되었습니다. 28년에 무정(武亭) 장군을 강서(江西)로 떠나보내고 그다음해 홍남표 씨와 만주에 들어가서 반일제동맹을 조직했습니다. 그때 마침 동만(東滿) 폭동이 일어나서 우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치러 갔습니다. 그다음 걸어서 헤이룽강을 넘어 치치하얼을 거쳐 톈진, 상하이로 가던 때의 고생이란 생각하면 지긋지긋합니다. 상하이에 가니까 김단야, 박헌영 제씨가 와 계시더군요. 그다음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코뮤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기관지를 발행하다가 메이데이 날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을 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되어 7년 징역을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두 살까지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주15)




[caption id="attachment_9282" align="aligncenter" width="343"]김명시. 《동아일보》 1933년 9월 26일자 기사 〈조선공산당재건사건 조봉암 등 공판개정〉에 실린 사진이다.[/caption]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밝힌 자기 이력 중 한 대목이다. 열아홉 살 때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유학한 일부터 신의주 감옥 시절까지 그의 삶의 경로가 술회되어 있다. 김명시는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배화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오빠 김형선의 후원 덕분이었다. 하지만 곧 김형선이 실직하는 바람에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즈음 김명시도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으며, 1925년 10월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향했다.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친 근대 지식의 중요한 한 통로가 바로 중국과 소련이다. 조선의 많은 청년들이 베이징과 상하이, 그리고 소련의 교육 기관에서 근대적 지식을 습득했다. 1921년에 개교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도 근대 한국에 큰 영향을 끼친 교육기관이다. 이 대학은 코민테른 산하 공산주의 혁명가 양성기관이었다. 소련 내 소수민족과 아시아 여러 나라 출신 학생들이 입학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온 학생들은 조선학부에서 공부했다.

[caption id="attachment_9283" align="aligncenter" width="509"]오늘날 모스크바 푸시킨 광장에 자리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왼쪽 건물). 출처 : globalsouthstudies.as.virginia.edu[/caption]

1924년 당시 공산대학에는 조선인 120명이 재학하고 있었다.주16) 김명시는 권오직, 김조이, 고명자, 김희원 등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선발한 유학생 21명 중 한 명이었다. 대학에서는 ‘스베틸로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했다.주17) 김명시는 입학한 지 일 년만인 1926년에 대학을 중퇴했다.주18) 코민테른은 그녀를 상하이로 보내 운동의 현장에 투입했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홍남표, 조봉암 등과 장쑤성위원회 한인지부에서 일했다. 이어서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하고 1929년에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로 가서 반일제동맹을 결성했으며, 1930년 간도 일대에서 일어난 동만폭동 때에는 무장대와 함께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공격했다. 그리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콤뮤니스트 그룹’에 합류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명시는 1932년 3월 중순 《콤뮤니스트》 잡지와 격문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해 국내 총책인 오빠 김형선에게 전달하고 인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메이데이 선전전이 발각된 후 김명시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창이자 동지인 고명자에게 40원을 받아 국경으로 향했다. 그는 신의주에 잠입하여 국경을 넘어서기 직전 백마강역 부근에서 체포되었다.주19) 조직의 연락책이었던 독고전의 배신 때문이었다.주20)

이렇게 체포된 그녀는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예심 기간 1년을 포함하여 스물다섯에서 서른두 살까지 꼬박 7년의 청춘 시절을 차디찬 신의주 감옥에서 보냈다. 신의주 감옥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혹독한 추위로 고초를 겪은 곳이다. 김명시와 함께 재판을 받은 조봉암은 이곳에서 손가락 일곱 마디를 동상으로 잃었다. 김명시도 발에 동상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옥살이를 견뎌냈다.

1939년 만기 출소한 김명시는 주저 없이 국경을 넘어 전선에 합류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했던 무정의 연락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화북지대 여성부대 지휘관으로 최전선에서 전투와 선전전을 벌였으며, 1942년 결성된 ‘조선독립동맹’의 베이징·톈진 책임자로 일하며 허정숙과 여성동맹을 꾸리고 조선의용군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평양으로 간 대다수 독립동맹원들과 달리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김명시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고,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남조선여성동맹 선전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좌익에 대한 탄압의 국면에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임신 중인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고, 신의주 감옥의 혹독한 추위도 이겨낸 불굴의 투사였던 김명시. 그런 그가 유치장에 앉아서 목을 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대중의 칭송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해방 직후, 그녀를 취재하는 기자에게 김명시는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주21)라고 토로했다. 이 말은 마치 지나친 겸양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명시는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제 갈 길만을 걸어왔던 혁명가였다. 그녀의 토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과 혁명에 대한 아쉬움과 그것을 이루겠다는 결의가 아니었을까?

 

‘빨갱이’라는 냉전의 주술을 넘어서

김형선·김명시·김형윤 남매들은 수난의 삶을 살았고 그 최후도 비극적이었다. 부천경찰서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은 김명시의 운명도 슬프지만, 김형선과 김형윤은 어디서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들 남매가 묻힌 곳 또한 확실치 않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14년을 감옥에 갇혔던 김형선, 7년의 수감 생활을 견디고 다시 거친 대륙의 전선에서 총을 들고 직접 일제와 6년 여 간을 싸웠던 김명시 등의 가열한 투쟁을 생각하면 참으로 참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남매들은 왜 이런 비참한 운명에 직면한 것일까? 해방의 감격은 잠시뿐이었다. 곧이어 미·소 냉전이 시작되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그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벌였던 투쟁의 가치마저 부정되었다. 김명시를 ‘국가보안법 위반의 무직의 여자’라고 설명하는 내무부 장관의 회견에서부터 이미 예감되듯이, 한국 사회에서 이들 남매의 독립투쟁은 잊혀졌으며 ‘빨갱이’라는 낙인만 남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북한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신문기사는 김명시를 ‘북로당 정치위원’이라고 보도했지만, 창립 당시와 북로당 2차 당대회의 정치위원 명단에 김명시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주22)

이들 남매는 ‘빨갱이’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열망했고, 투쟁을 통해 되찾을 새로운 나라가 빈곤과 차별, 불평등을 극복하고 진보적 복지국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8시간 노동제, 소작제의 혁파, 학교 교육의 민주화 등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동력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던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꿈꾸었던 급진적 이상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 사회를 진보시키는 데에도 일조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식민지의 어둠에 맞서 싸웠던 투사들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외면해 왔다. 아니, 단지 외면만 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악마화했다. 김형선은 법정에 나왔을 때 “목덜미까지도 여윌대로 여위고 심문을 받을 때는 섰는 것조차 힘이 들고 숨이 차는 듯”했다. 사회주의자들을 ‘아카(アカ, 빨갱이)’라 부르면서 고문하는 일본의 특고들에게 “처음 잡혔을 때 열 두 시간을 계속하여 고문을 당했”주23)기 때문이다. 김명시와 김형윤이 받았을 고문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형선과 김명시는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경찰에 붙잡혀 취조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제 특고에서 대한민국 경찰의 옷으로 갈아입은 이들이 그들 앞에 섰다. 김명시의 죽음이 타살인지 자살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아마도 자신을 ‘아카’라고 부르던 자들로부터 다시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고통당하는 그 치욕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라는 주술이 횡행했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염원한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고문당하며 죽었다. 모두에게 묻고 싶다. ‘빨갱이’란 무엇인가? ‘빨갱이’는 고문당하다 죽어도 되는 존재인가?

 

미주

주1) 홍운표는 김형선과 함께 활동하다 검거되어 치안유지법으로 실형을 살았다. 홍운표의 가택 수색에서 상하이에서 온 편지가 발각되었으며, 이를 단서로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대가 박헌영을 체포하여 경성으로 이송했다. (〈홍운표 가택수색으로 의외에 소재판명〉, 《동아일보》 1933년 8월 8일자)
주2) 〈백주에 자동차 몰아 경성 잠입타가 피체〉, 《동아일보》 1933년 7월 16일자.
주3) 〈십년 전부터 지하운동에 국경 잠입 전후 오차〉, 《동아일보》 1933년 7월 18일자.
주4)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김형선이 쓴 이명(異名)으로 김형수(金炯譱), 최상문(崔尙文), 최상순(崔相淳), 권평근(權平根), 김원식(金元植) 등을 적고 있다.
주5) 5남매라는 자료도 있지만, 이름이 확인되는 것은 4남매뿐이다. 막내 여동생인 김복수(金福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주6) 코민테른의 〈12월테제〉와 프로핀테른과 범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의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9월테제’), 〈조선의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비서부의 서신〉(‘10월서신’)의 내용과 그 문건들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4-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6~23쪽 참조.
주7) 이상은 최규진, 위의책, 108∼110쪽 참조.
주8) 임경석, 〈잡지 ‘꼼뮤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근대전환기 동아시아 삼국과 한국-근대인식과 정책》,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 511쪽.
주9) 오기영, 《사슬이 풀린 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91쪽.
주10) 오기영, 《사슬이 풀린 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94쪽. 오기영은 김형윤이 “징역을 치르고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감옥에 끌려가 역시 해방과 함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형윤 역시 ‘볼세비키사’ 이후 다른 활동으로 감옥에 갇혔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진 못했다.
주11) 〈남로당 감찰위원 김형선 씨 무사 석방〉, 《신민일보》 1948년 3월 4일자.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 김형선 씨는 작년 12월 6일 피검되어 종로서에 유치중이던 바 지난 26일 석방되었다.”
주12) <김명시 자살>, 《경향신문》 1949년 10월 11일자.
주13) <치안염려 없다 택시 이부제 실시를 고려>, 《경향신문》 1949년 10월 14일자.
주14) <독립동맹은 임정과 협조>,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자.
주15)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독립신보》 1946년 11월 21일자.
주16) 한국외대 디지털인문한국학연구소 엮음,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집 1 문서번역집―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192~1938)의 한인들》, 한울아카데미, 2020, 20쪽.
주17) 임경석, 〈젊은 여성 동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한겨레21》 1320호, 2020. 07. 03.
주18) 한국외대 디지털인문한국학연구소 엮음,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집 1 문서번역집―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192~1938)의 한인들》, 한울아카데미, 2020, 133쪽. 제2한인소조 평정서 논의 회의록에 따르면 스베틸로바(김명시)는 소조 평균 이하. 1년간 사업 결과 불만족. 계속 학업 불가능(한국외대 디지털인문한국학연구소 엮음, 위의책, 145쪽)으로 평가되어 있다.
주19) 김명시가 체포되는 자세한 경위는 지중세 편역,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 돌베개, 1984, 211~213쪽.
주20) 임경석, 〈젊은 여성 동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한겨레21》 1320호, 2020. 07. 03.
주21)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독립신보》 1946년 11월 21일자.
주22) 여장군 김명시의 서훈 신청을 해 온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그에 대한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당시 신문보도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에 따르면, 국토통일원에서 펴낸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자료집>(1988)과 2차 대회 자료집을 검토했지만 정치위원 명단에 김명시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 이른바 혁명열사들을 안장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도 김명시의 ‘가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북한 정권과 관련이 없는 김명시의 서훈을 요청하고 있다. 김명시의 서훈에 대한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윤성효, <김명시 장군, 누구보다 독립운동 강하게 했는데>, 《오마이뉴스》, 2021년 11월 8일자 참조.
주23) 오기영, 《사슬이 풀린 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114쪽.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