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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③] 京城小景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12.06 BoardLang.text_hits 3,336
웹진 '역사랑' 2021년 12월(통권 24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京城小景


<京城小景 말하는 사진(一)~(十)>, <<동아일보>> 1921.7.23.~8.1.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 지난 연재 보기





다시 1921년 <<동아일보>>이다. 1921년 7월 23일~8월 1일 <<동아일보>>는 <경성소경 말하는 사진>이라는 기사를 10회 연재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 작성자가 판단한 당시 경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10개의 풍경을 사진으로 제시하고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말하는 사진’이라는 표현처럼 설명의 글을 앞세우기보다 이미지로 생각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1921년은 당연한 말이지만, <<동아일보>>의 창간 초기이기도 하고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를 막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연재물은 막 창간한 조선어 언론이 바라본 문화통치 초기 변화한 경성 사회상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10회 연재를 모두 다루기는 어려우므로 1, 2, 5, 7회 기사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연재물의 게재순서, 제목, 소재를 일별하고 이 글에서 살펴보지 않을 기사의 내용을 좀 더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요사이 교동보통학교 옆에 괴장히 큰 벽돌 2층집을 짓는 것은 그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보는 바이다. 이것은 경성부에서 21만원의 거액을 들여서 신축하는 보통학교로 이러한 보통학교는 조선 제일이라고 무슨 큰 사업이나 하는 듯이 경성부 당국자는 의기양양이다. 움막 속에서라도 선생님만 있으면 배우려고 머리를 싸고 덤비는 이 세상에 21만 원이면 7만 원짜리 학교 세 곳은 넉넉히 지을 터인데, 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려는 아동에게 2학년 정도의 입학시험을 보여서 체질을 하는 이 판에 무슨 천주학으로(대단한 이유로) 이 따위 사치를 하는가. 이것이 과연 성의 있는 태도인가. 낙성한 후에 사진엽서나 만들어서 정보위원회이라든가 하는 총독부 광고국에서 외국 사람에게 광고하는 자료로는 훌륭하겠지. (<京城小景 말하는 사진(一) 엽서의 재료, 조선 제일의 보통학교>, <<동아일보>> 1921.7.23.)


“요사이 교동보통학교 옆에 굉장히 큰 2층 벽돌집을 짓는 것은 그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보는 바”라는 말로 시작하는 1회차의 소재는 교동보통학교 교사 증축이다. 운현궁 바로 남쪽에 위치한 교동보통학교는 1894년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기관인 관립 교동소학교로 개교하여 병합후 교동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조선인의 일제 보통교육에 대한 태도는 크게 보아 3.1운동을 기점으로 ‘기피’ 내지는 ‘거부’에서 ‘수용’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들어 보통학교 진학 경쟁율은 크게 높아졌다. 이에 대응하여 경성부는 1921년 하반기 관내 4개 보통학교의 학급을 증설하기 위해 교사를 증축했는데, 교동보통학교는 1921년 9월 현재 이미 준공한 상태였다(<新築中의 四普校>, <<동아일보>>, 1921.9.20.). 1회차 기사는 이 공사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기사의 논조는 사뭇 비판적이다. 교동보통학교 교사 증축 예산이 21만원인데 “움막 속에서라도 선생님만 있으면 배우려고 머리를 싸고 덤비는 이 세상에 21만원이면 7만원 짜리 학교 세 곳은 넉넉히 지을 터인데” “이 따위 사치”를 한다는 것이다. 당국이 보통교육 확대에 진정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완공한 후에 사진엽서나 만들어서” “외국 사람에게 광고하는 자료”로나 쓰려고 한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다.

경성부가 나름대로 거액의 예산을 투입하여 교동보통학교 교사를 증축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은 별도로 따져볼 수 있겠지만 1회차 기사는 보통교육의 양적 확대가 시급한데 식민지권력은 교동보통학교와 같이 상징성이 큰 학교(조선인 중심지인 북촌의 한복판에 위치, 주로 조선인 상류층의 자제가 다니는)를 증축하는 과시성 사업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3.1운동 이후 고조된 이른바 조선인의 ‘교육열’과 그에 대한 식민지권력의 대응이 만나고 엇갈리는 미묘한 지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caption id="attachment_9266"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1> 경성소경 기사 속의 교동보통학교 신축 교사의 막바지 공사 모습과 학교의 위치(1914, 경성부명세신지도)[/caption]

요사이 남대문으로 출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숭인지문(숭례문의 오기)이라는 현판 밑에 눈서투른 양옥집 하나가 생겼음을 볼 것이다. 이것이 경성 뿐 아니라 동양 제일이라고 어느 편에서는 한 자랑거리로 여기는 경찰관파출소인데 그 제일이라 함은 파출소 한 개에 만원이라는 건축비가 든 까닭이라 한다. 경성의 대소은행은 남대문통에 모여 있으므로 여러 은행의 이문 같은 남대문을 잘 지켜달라는 의미인지는 모르나 이것은 전부 은행집회소에서 건축을 하여 경찰에 기부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라는데 경찰에서는 이 파출소의 낙성한 때에 남대문소학교를 빌려 조선에 처음으로 낙성식도 거행하였다. 재등총독이 부임한 이래로 총독부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잘한 일을 일일이 셀 수 없도록 많은 모양이라 하나 그 중에 경찰 확장이 제일 유명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경찰 확장에 제일 힘을 많이 들인 ‘문화정치’는 필경 동양 제일의 파출소까지 산출하였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로 보면 이 굉장한 파출소는 또한 ‘재등기념탑’이라고도 할는지... (<京城小景 말하는 사진(二) 齋藤기념탑, 동양 제일의 파출소>, <<동아일보>> 1921.7.24.)


2회차 기사의 소재는 1921년 6월말 신축한 남대문 파출소이다. 이 파출소는 여러 모로 특별했던듯 하다. “연와로 건축하여 파출소 중에는 제일대 건물”이라는 언급도 보이며(<南門派出所 落成式 擧行期>, <<조선일보>>, 1921.6.28.) 숭례문 바로 옆이라는 위치도 범상치 않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마치 고적인 숭례문의 경비 초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묘사한 문헌도 많이 있다.)

[caption id="attachment_9267"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2> 경성소경 기사와 일제시기 사진엽서 속의 남대문 파출소[/caption]

그런데 기사에서는 이 곳에 파출소를 신설한 이유를 “경성의 대소은행이 남대문통에 모여 있으므로 여러 은행의 이문(里門) 같은 남대문을 잘 지켜달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주지하듯이 남대문통(남대문로)은 황금정통(을지로)과 더불어 여러 은행, 보험회사, 신탁회사 등이 모여있는 일제시기 경성의 핵심 금융가였다. 아마도 남대문통의 ‘입구’에 해당하는 숭례문 옆에 파출소를 신설한 것은 이 같은 거리의 특징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caption id="attachment_9268"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3> 일제시기 경성 금융가의 핵심이었던 남대문통 2, 3, 4정목(1924, 경성시가지도), 특히 숭례문에서 조선은행에 이르는 거리(3, 4정목)에는 대부분 은행의 지점이 입지해 있다.[/caption]

또 일제시기 파출소의 일반적인 모습을 다양하게 보기는 어려우나 남대문 파출소는 “파출소 한 개에 만원이라는 건축비”를 들여 외관에 상당한 신경을 썼으며, “남대문소학교(1907년 개교한 서울의 대표적 일본인 소학교 중 하나, 남대문로 4가에 위치)를 빌려 조선에 처음으로 낙성식도 거행”하는 등 여러 모로 ‘특별한’ 파출소였다. 건축비도 “은행집회소 대표 중서희구남(中西喜久男; 1874년생, 1906년 나가사키 18은행에 입사하여 바로 조선으로 건너왔으며, 1910년대에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장, 평양농공은행 지배인 등을 지낸 금융인) 외 38명이 경비 부담”을 했다(<만원 짜리 파출소>, <<동아일보>>, 1921.7.10.).

그런데 기사는 마침 이 무렵 준공한 파출소 한 개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재등총독이 부임한 이래로 총독부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잘한 일을 일일이 셀 수 없도록 많은 모양이라 하나 그중에 경찰 확장이 제일 유명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경찰 확장에 제일 힘을 많이 들인 ‘문화정치’는 필경 동양 제일의 파출소까지 산출하였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로 보면 이 굉장한 파출소는 또한 ‘재등기념탑’이라고도 할는지...”라는 비아냥 섞인 언급이 잘 보여주듯이 문화통치기 경찰기구 확대를 비판한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전환하면서 경찰기구를 확대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간단히 인원만 보더라도 1918년말 헌병 8천여명을 포함, 1만3천명 전후였던 경찰의 총수는 1919년말 1만5천명을 넘었으며, 경찰기구(경찰서, 주재소, 파출소 등)의 수도 1,861개에서 2,761개소로 증가했다. 이에 더하여 1920년 초 총독부는 2차로 순사 3천여명을 더 증원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1919, 20년의 경찰 증원은 일제시기 전기간에 걸쳐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고 한다.

다시 남대문 파출소로 돌아와보면 이 파출소는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존재했다. 6.25전쟁기 총격으로 파괴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1950년대에도 건재했다. “왜정 때부터 남대문 옆 모서리에 붙어있던” 그래서 “풍치를 해칠 뿐 아니라 미관상 좋지 못하다고 일부 시민들의 비난을 받아왔”던 이 파출소는 5.16군정 말기인 1963년 5월 비로소 철거되었다(<남대문 파출소 이전>, <<동아일보>>, 1963.5.9.). 그리고 며칠 후 5.16 직후 시작된 남대문 중수 공사의 준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아마 이 때에 맞추어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서울의 도시 풍경은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상당한 부분 (일제시기의) ‘경성 그대로’ 내지는 (전쟁으로) ‘파괴된 경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에서 서울로’의 변화는 5.16 이후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남대문 파출소도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라졌던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269"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4> 1950년대의 남대문 파출소와 1963년 5월 14일 남대문 중수 공사 준공식[/caption]

7회차 기사의 소재는 조금 독특하다. 구조물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건축물도 아니며 무엇보다 지상에 있어 눈에 잘 띄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묻는 ‘지하의 거물’이다. 여기에서 ‘지하의 거물’이란 하수도를 뜻한다.

황금정 삼정목에서 창덕궁통 신작로에 관수교 남편으로는 요사이 굉장한 역사가 벌어졌다. 도로의 중앙을 깊이와 너비 열자 가량이나 파고 그 속에다가 쇠로 뼈를 만들고 양회로 사방을 다져서 상하 좌우가 각기 한간씩 되는 네모진 홈을 묻는다. 이 곳에는 본래 길을 닦을 때에 두아름이나 될 만큼 큰 하수도를 묻었는데 이것은 또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내용 이야기를 들으니까 매년 장마철에 큰비가 오면 약초정과 앵정정의 뎌함한 땅에는 물이 들어서 거주하는 사람이 들어서 아무리 큰비가 오더라도 수환이 없게 하려는 기특한 뜻으로 총독부에서 여러 만원의 돈을 들여서 이와 같이 조선 제일의 큰 수도를 묻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일은 활동사진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보다 매우 좋지만은 경성의 시가도 남편만 위주로 하여 살기 좋게 만들려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약초정, 앵정정의 수해를 막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마는 사정이 같은 다른 곳을 나중으로 밀어버리는 것은 마치 경성전기회사에서 용산에만 임금 구역을 철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경성의 교동, 사동 바닥은 소낙비 한줄기만 쏟아져도 대로가 통처서 개천이 되고 장마통에는 방고래 속의 맹꽁이 소리에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할 지경인데 총독부의 세력 있는 관리가 자주 다니지 아니하는 곳이니까 자세히 모르는 듯 하나 이러한 곳에도 속히 무슨 방법을 베풀 수가 없을까. (<京城小景 말하는 사진(七) 지하의 거물, 조선에 제일 큰 하수도>, <<동아일보>> 1921.7.29.)


“황금정 삼정목에서 창덕궁통 신작로에 관수교 남편”이란 현재 돈화문로와 연결되는 청계천 남쪽 을지로 3가 일대를 말한다. 기사는 남촌의 약초정(若草町; 중구 초동), 앵정정(櫻井町; 중구 인현동)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을지로 하수도 공사하는 모습을 새로운 풍경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기사의 취지는 하수도 공사를 소개하는 것이라기보다 비슷하게 장마에 취약한 북촌의 교동(校洞; 종로구 경운동, 낙원동), 사동(寺洞; 종로구 인사동)에는 대책을 세우지 않음을 비판하는 데 있다. 하수도와 같은 도시 인프라의 시설에서 남북촌 간의 차별이 있음을 지적하는게 기사의 핵심인 셈이다. 마치 일본인이 많이 사는 용산은 1구역의 전차 요금을 받으면서, 조선인이 많이 사는 마포, 청량리는 추가로 2구역 요금을 받는 경성전기의 처사처럼 말이다. (“마치 경성전기회사에서 용산에만 임금 구역을 철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caption id="attachment_9270" align="aligncenter" width="287"]<그림 5> 경성소경 기사 속의 황금정통 하수도 공사[/caption]

이 기사는 1920년대 초의 시점에서 지하에 관을 묻는 이른바 암거(暗渠) 하수도가 도시의 새로운 주요 인프라로 인식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신식’ 시설을 어느 지역에 먼저 하느냐가 꽤나 민감한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병합 이전까지 암거는 일본 측에 의해 간간히 축조되었다. 당대의 기록은 아니지만 1927년 경성부가 간행한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에는 1910년 이전 일본 측의 하수도 공사 기록이 실려 있는데, 축조 지점은 대략 철도 부지와 일본인 거류지인 남촌 일원이었다. 이에 반해 경성 도심부 대부분 하수도는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 개거(開渠; 실개천) 상태였다.

병합 후 총독부는 예산 문제 때문에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거쳐 1918~24년 비로소 경성부 제1기 7개년 하수도 개수 사업을 시작했다. 7회차 기사가 묘사한 공사 풍경이 바로 이 제1기 사업이다. 제1기 사업의 결산을 확인해보면 주로 간선 하천인 청계천, 욱천(旭川; 대략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원효로를 따라 흐르는 만초천[蔓草川]의 일제시기 명칭)과 직접 연결되는 물길 16개를 정비했다. 그 중 ‘선진적인’, 그리고 예산이 많이 소요된 암거 공사 지점을 구체적으로 보면 남촌 방면으로는 당시 남산 남록 현재 소파길에 위치한 총독부 청사 부근과 황금정통 일대를 주로 정비했으며, 북촌에서는 종묘 오른편의 전매국 공장과 동대문경찰서 부근,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등 관립학교 밀집 지역을 주로 정비했다. 결과적으로 일반 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도 포함된 남촌과 달리 북촌은 관변 기구, 관립 학교 등이 입지한 곳이 공사 대상이 된 셈이다. 7회차 기사에서 문제 삼는 ‘차별’의 실체는 이러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1, 2회차 기사는 보통학교와 파출소를 소재로 문화통치기 변화한 식민통치 방침에 비판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총독부가 ‘민의창달’을 내세운 중추원 제도 개편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4회차, <묘지규칙> 개정 후 가족묘 열풍을 풍자한 9회차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하겠다. 하수도 부설을 다룬 7회차는 일제시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도시 인프라 구축에서 민족간 ‘차별’ 문제이다. 실효성 없는 경성부영주택을 비판한 8회차도 크게 보면 같은 취지라고 하겠다. 그런데 거물급 친일파 윤덕영의 저택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소재로 한 5회차는 다소 맥락을 달리한다.

고종태황제 부태묘 당시에 황송한 생각도 없이 분참봉 첩지를 함부로 팔아먹었다는 혐의로 검사국에 가서 식은 땀을 흘린 윤덕영씨는 다만 이 사건으로 세상의 비평을 일신에 모아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기기괴괴한 일로 항상 경성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중에도 머리가 남북으로 내어 밀어서 특별 주문이 아니면 모자를 얻을 수가 없다 하는 일과 궁사극치의 양제집을 인왕산 밑에다가 지은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경성의 북편에 시가를 흘겨보는 이 양제집을 바라볼 때에는 천하에 희한한 짱구머리를 생각하고 자동차로 경성의 가로를 다니는 윤씨를 볼 때에는 조선 제일로 사치한 인왕산의 양제집을 생각한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이르는 그 집이니 당초 프랑스 어느 귀족의 집 설계서를 프랑스공사로 갔던 모씨가 얻어온 것을 가져다가 지었다는데 역사를 시작한 지가 십년이 넘었고 비용을 들인 것이 삼십만 원 이상이나 아직도 준공이 되지 못하였는데 벽돌 한 개가 범연한 것이 없고 유리 한 장도 보통의 물품은 쓰지 아니하여 보통 건축으로 알고 도급을 맡았다가 밑져서 패가한 건축업자도 한 두 사람이 아니오 재판도 몇 차례씩 한 일을 보아도 이 집이 얼마나 교묘한 것임을 알겠다. 친동생은 빚에 쫓겨서 만리타국에 외로이 눈물을 뿌리는 중에 그 형은 엄연히 조선 제일로 사치한 아방궁의 주인이다. 세상 사람은 이 아방궁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 까닭을 더 이상히 생각한다. (<京城小景 말하는 사진(五) 명물 아방궁, 조선 제일의 사치한 집>, <<동아일보>> 1921.7.27.)


이 기사를 읽다 보면 내막을 일부러 알아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소문과 진실’이 어지럽게 등장한다. 윤덕영이라는 자는 누구이길래 언뜻 보아도 자랑스럽지 못한 사건에 얽혀 검사국을 드나드는 것이며, 그런 중에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은 호화롭기 짝이 없는 집은 어떻게 지은 것이며, 그의 동생은 왜 빚에 쫓겨 해외를 떠도는 것인가?

해평 윤씨 가문의 윤덕영(1873~1940)은 1894년 과거에 합격하여 개화 관료로 여러 직책을 거쳤다. 1906년 그의 동생 윤택영(1876~1935)의 딸이 황태자비(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로 책봉되면서 주로 궁내부의 고위 직책을 맡아 궁중의 친일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1910년 병합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시종원경으로 궁중의 불만과 잡음을 제압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표현으로 “부중(府中; 정부)의 이완용, 궁중의 윤덕영”이라고 했다. 일제시기 이왕직 장시사장 등을 맡아 활동했는데, 위 기사에 나오듯이 고종 장례 때 참봉 첩지를 팔아 이익을 챙기거나 후일 이왕직의 구왕실 친용금을 유용하는 등 시시때때로 금전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추원 고문, 부의장을 거쳐 박영효 사후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다. 간단히 요약하면 거물급 친일파임에는 틀림 없으나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전형적인 ‘모리배형’ 친일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사에 등장하는 “조선 제일로 사치한 양제집”은 윤덕영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고 불린 그의 저택으로 현재 서울의 ‘핫 플레이스’ 중 한 곳인 서촌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이다. 이 일대는 조선후기 송석원(松石園)이라고 불렸는데 이른바 위항문학운동의 무대가 되었던 풍광이 좋은 곳이다. 그리하여 선행연구에 따르면 권세가 사이에서 여러 차례 소유관계가 바뀌었는데, 윤덕영은 대략 병합 직후 이 일대 토지의 소유권을 확보하고 자신의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에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서양식 대저택임을 알 수 있는 벽수산장의 설계도는 위 기사에 따르면 “프랑스공사로 갔던 모씨가 얻어온 것”을 윤덕영이 입수한 것이었다. 모씨는 여흥 민씨 세도의 일원이자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1874~1948)을 가리킨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주프랑스 공사였던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에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항의문을 제출하고, 고종의 밀지를 받아 미국을 방문하는 등 반일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포기하고 귀국했다.

[caption id="attachment_9271"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6> 경성소경 기사와 1956년 영화 <서울의 휴일> 속의 벽수산장
* 영화는 휴일날 중산층 부인이 모여서 한담을 나누는 장면이다. 후경의 벽수산장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caption]

벽수산장은 대략 1910년대 완공되었다고 하나, 위 기사는 “역사를 시작한 지가 십년이 넘었고 비용을 들인 것이 삼십만 원 이상이나 아직도 준공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외관은 완성되었으나 내부 공사가 여전히 덜 끝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벽수산장은 “경성의 북편에 시가를 흘겨보는”이라는 표현처럼 경성 시가지를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압도적인 규모로 지어진 초호화 저택으로서 반대로 시내에서 보았을 때 눈에 금방 들어오는 건축물이었다. 그만큼 볼 때마다 윤덕영이라는 친일파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었다고 하겠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호화로운 집을 일컫는 ‘아방궁’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272" align="aligncenter" width="514"]<그림 7> 벽수산장(원안)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가지의 조망[/caption]

기사는 “세상 사람은 이 아방궁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 까닭을 더 이상히 생각한다”는 말로 끝난다. 윤덕영은 병합 당시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1917년 순종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켜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또 사례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고도 이미 썼듯이 여러 차례 금전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더하여 동생 윤택영이 황실과의 가례 과정에서 빚을 많이 져서 궁지에 몰렸음에도 도와주지 않았다. 윤택영은 1920년 7월 빚 독촉을 피해 베이징으로 도피했으며(“빚에 쫓겨서 만리타국에 외로이 눈물을 뿌리는 중”), 이후에도 베이징과 경성을 오가며 궁색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기사의 말미에서 친동생도 돌아보지 않는 윤덕영의 탐욕스러운 삶이 세간에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벽수산장은 윤덕영이 신봉한 중국계 종교인 홍만자회(紅卍字會) 법당으로 사용되다가 그의 사후 가세가 기울면서 미츠비시에 매도되었다. 광복후에는 병원, 미군 장교숙소 등으로 쓰였으며 1954년부터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언커크; UNSCURK) 청사가 되었다. 1966년 2, 3층이 전소된 끝에 1973년 철거됨으로써 사라졌다(<언커크 本部에 큰 불>, <<동아일보>>, 1966.4.5.). 그러나 지금도 이 부근에서는 벽수산장의 유구로 짐작되는 것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말 없이 서있는 돌기둥에서 캐낼 수 있는 우리 역사의 뼈아픈 이야기는 적지 않다고 하겠다.

[caption id="attachment_9273"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8> 벽수산장의 화재 모습(<<동아일보>>, 1966.4.5.)과 현재 옥인동에 남아있는 벽수산장의 유구(2017.11.11., 필자 촬영)[/caption]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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