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기획연재

[고려 인물 열전⑦] 여말선초 혁명기의 책략가, 윤소종의 부상과 몰락_현수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12.06 BoardLang.text_hits 2,642
웹진 '역사랑' 2021년 12월(통권 24호)

[고려 인물 열전] 

 

여말선초 혁명기의 책략가, 윤소종의 부상과 몰락


 

현수진(중세1분과)


* 지난 연재 보기





고려 말 슈퍼스타들

오랫동안 정치 사회적인 혼란과 부패가 축적되어 온 고려 말. 이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주역이라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 역사에 관심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도 최근 방영된 여러 사극에 등장했던 몇몇 이름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단연 첫 번째 주연으로 꼽힐 것이다. 그의 곁에서 새 왕조의 통치 사상과 시스템을 확립했던 정도전과 조준도 그에 버금가는 슈퍼스타이다. 이성계 세력에 반대해 몰락하는 고려 왕조와 운명을 함께 했던 이색이나 정몽주도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주연이 있다. 고려 말 극렬한 정치판 속에서 이성계 세력이 이길 수 있도록 정치 전략을 입안한 인물, 그럼에도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 바로 윤소종이다. 오늘은 고려 말 혁명기의 또 다른 주연, 책략가 윤소종의 삶을 들여다보자.

 

학자 집안 수재의 탄생

1365년(공민왕 14), 당대 최고 유학자 이색이 주관하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냥 급제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 현실이나 경전의 뜻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과거 답안의 일종인 대책문(對策文)이 선배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제한 인물이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윤소종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윤소종의 장원 급제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시문(詩文)이 노성했다는 평가를 들었으니 말이다.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 현 베이징시)에서 중국 최고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다 고려로 돌아와 성리학을 전파한 이제현은 윤소종의 글재주가 기이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소종의 학문 실력은 집안에서 쌓은 것이다. 『고려사』 효우(孝友) 열전에는 윤소종의 아버지 윤구생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조상에 제사지냈다는 사실이 실려 있다. 당시 고려에 『주자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인물이 흔하지 않았기에 이 행위가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풍은 윤소종의 할아버지인 윤택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윤택은 일곱 살 때부터 책을 받으면 곧 외워버릴 만큼 영특했고,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뛰어났다고 한다. 무송현(茂松縣, 현 전북 고창군)의 향리였다가 과거에 급제해 개경으로 올라온 윤택의 조부 윤해는 그런 손자가 장차 가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감격했다.

윤택은 충숙왕에게 공자의 수제자 안회라고 불릴 만큼 신임받았다. 그는 공민왕에게 『상서(尙書)』 무일편이나 『대학연의(大學衍義)』 같은 유학 경전, 고려 초 유학자 최승로의 상서문 등을 강의하며 불교를 멀리하라 간언한 인물이기도 했다. 윤택은 평생 베옷을 입고 해진 이불을 덮었으며 종종 아침저녁 끼닛거리가 떨어지기도 했을 만큼 청빈하게 살았다. 윤소종은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리학에 대한 소양을 쌓으며 자랐다. 나중 일이지만 윤소종도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지더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청빈함 역시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caption id="attachment_9259" align="aligncenter" width="4928"]1367년(공민왕 16) 다시 지어진 성균관. 현재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다. 이색은 공민왕의 명으로 성균관을 다시 지은 뒤 정몽주,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삼고 많은 학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이색의 문생(門生)이자 제자였던 윤소종도 이 무렵 이색 및 그의 학생들과 교류를 나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caption]

 

젊은 개혁가들의 만남

21세에 장원 급제한 윤소종은 곧바로 사신(史臣)인 춘추관 수찬으로 임명되었다. 윤소종이 사신으로 지내며 남긴 평을 살펴보면 젊은 시절부터 간언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366년(공민왕 15)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묻힌 정릉(正陵)의 일꾼이 충선왕묘인 덕릉(德陵)의 나무를 다 베어다 재실을 짓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윤소종은 신돈이 권력을 잡은 후 어진 사람들이 배척당하고 소인들이 군주 면전에서 아첨하지만 대간(臺諫)들은 입을 닫았다고 비판했다. 대간은 어사대 관원으로서 관료를 감찰하는 업무를 맡은 대관과 중서문하성 낭사의 관원으로서 군주에 대한 간쟁을 맡은 간관을 합친 말이다. 고려 시대에는 대관과 간관이 대간으로서 간쟁과 탄핵 등의 업무를 함께 수행했다. 윤소종의 사신평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소인을 배척해야 하는 군주의 직무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공민왕에 대한 비판이면서, 이를 바로잡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대간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윤소종은 간관인 정6품 좌정언이 되자 간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1373년(공민왕 22)에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려 김흥경과 환관 김사행을 탄핵하려고 했다. 김흥경의 죄는 군주에게 아첨하여 군주의 판단을 흐리는 것이었고, 김사행의 죄는 죽은 노국대장공주의 영전(影殿) 공사를 부추겨 백성들의 골수를 뽑아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소종의 간언이 담긴 상소는 공민왕에게 닿을 수조차 없었다. 동료 간관 김윤승과 우현보가 여러 달 동안 근무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윤소종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말은 잘 모르지만, 김윤승과 우현보에게 이 사안을 청탁한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윤소종은 파직되고 말았다.

윤소종은 몇 년 뒤인 1379년(우왕 5) 서적과 상소문 따위를 관리하는 관청인 전교시의 관리로 복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381년(우왕 7) 모친상을 당해 본가가 있던 금주(錦州, 현 충남 금산군)로 내려가 여막 살이를 하게 됐다. 윤소종은 금주에 기거하는 동안 그를 찾아온 남방 학자들에게 수업을 해주기도 했고, 지방민들의 생활을 목도하며 현실 문제를 성찰하기도 했다. 그중 이 시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은 조준과의 교류였던 듯하다. 조준은 이 무렵 윤소종에게 모친을 추모하는 만사(挽詞)를 보냈다.

그 옛날 문정공 뵈었을 소싯적 曾謁文貞小少時
친히 가르침 들으며 옷깃을 여미었네 親承敎授得摳衣
장원은 또한 평생의 벗이니 狀元亦是平生友
오늘 북망산에 든 볕에 슬픔 이기지 못하네 今日邙陽不勝悲
- 조준, 『송당집(松堂集)』, <대제 윤소종 어머님에 대한 만사(尹待制紹宗慈氏挽詞)>




[caption id="attachment_9260" align="aligncenter" width="3638"]조준이 윤소종의 어머니를 추모하며 쓴 글. 조준의 문집인 『송당집』에 실려 있다. (이미지 출처 : 한국고전종합DB)[/caption]

조준은 문정공, 즉 윤소종의 조부 윤택을 뵙고 가르침을 들었을 적을 회상하며 윤소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시에서 조준은 윤소종을 ‘평생의 벗’이라고 불렀다. 『고려사』 허금 열전에는 그들을 ‘나이를 잊은 벗(忘年友)’이라고 지칭하는 표현도 나온다. 윤소종은 조준과 교류하며 고려의 미래를, 개혁을 함께 논의했을 것이다. 이 경험은 이후 윤소종의 인생 행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위화도 회군의 명분 만들기

1388년(우왕 14) 5월 22일,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요동 정벌을 위해 명나라로 출격하던 좌우군도통사 이성계 군대가 위화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할 수 없는 네 가지 이유를 들며 우왕과 최영에게 몇 차례 회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결과였다. 6월 1일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는 시가전 끝에 우왕과 최영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다. 쿠데타는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쿠데타를 집권으로 잇는 것이었다. 때마침 사후 처리를 위해 흥국사에서 회의 중이던 이성계를 찾아와 그 방안을 제시한 인물이 있었다.

전교부령 윤소종이 군대 앞에 와서 정지(鄭地)를 통해 우리 태조를 만나 뵙기 청하고, 「곽광전(霍光傳)」을 품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그 내용을 들으니, 조인옥이 극진히 다시 왕씨(王氏)를 세우자는 의견을 펼쳤다. - 『고려사절요』 권33, 우왕 14년 6월


모친상을 마치고 복직한 윤소종은 이성계의 개경 함락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지에게 이성계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한 뒤 「곽광전」을 바쳤다. 곽광은 한나라 무제(武帝) 사후 8살의 나이로 즉위했던 소제(昭帝)를 대신해 신료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인물이다. 곽광은 소제가 죽고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자 음란하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하고 선제(宣帝)를 즉위시켰다. 이러한 곽광의 행위는 상나라(은나라) 명재상 이윤(伊尹)의 일화에 비견되어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윤은 탕왕(湯王)을 도와 상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다. 이윤은 탕왕의 손자인 군주 태갑(太甲)을 할아버지를 닮지 않아 부덕(不德)하다는 이유로 쫓아냈다가 그가 개과천선하자 다시 군주로 맞아들였다. 즉, 이윤 고사는 유능한 신료가 부덕한 군주를 추방해도 된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이 고사는 중국사에서 신료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는 데 종종 활용되었다.

추후 정지의 언급에 따르면, 윤소종과 정지는 회군 직후 “이윤·곽광의 고사로 시중(이성계)에게 돌려 말했다”고 한다. 즉, 윤소종은 부덕한 군주를 쫓아낸 신료인 이윤과 곽광의 고사를 이성계에게 바침으로써 이성계가 우왕을 쫓아낸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고사에 따른다면 이성계는 명재상 이윤에 비견되어 부덕한 군주인 우왕을 쫓아낼 정당성을 갖게 된다. 『고려사』 조준 열전에 따르면 조준도 윤소종과 정지의 정치적 행보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소종과 조준은 이 시기 무렵부터 이성계의 편에 서서 자신들이 원하는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이성계는 윤소종이 올린 계책을 채택했다. 이성계 자신이 이윤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우왕을 선위시키고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윤소종의 이러한 행위는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을 선정할 때 “회군할 때 옛일을 끌어들여 사직의 큰 계책을 돕도록 하였으니 또한 가상하다”며 높게 평가되었다. 이 무렵 특정한 유학적 고사를 끌어들여 정치적 정당성과 명분을 확립하는 전략이 유효한 정치적 전략으로 부각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윤소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이성계의 최전방 공격수

윤소종은 1388년(우왕 14) 12월, 회군 직후 인사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간관인 우사의대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간관이 되자마자 이성계 세력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다. 윤소종은 얼마 전에 죽은 우왕대 권신 이인임에 대해 “관을 꺼내 목을 베어버리고 집을 못으로 만들어 천지와 조종(祖宗)의 노여움을 풀고 백성들의 억조(億兆)의 울분을 풀어 달라”고 주장했다. 최영에 대해서는 “공은 한 나라를 덮었으나 죄는 온 천하에 가득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윤소종의 간언이 얼마나 극렬했던지, 이듬해 2월 윤소종이 구세력의 미움을 받아 성균대사성으로 전임된 이후에야 이인임의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

윤소종은 대사성이 되어서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조준이 창왕에게 전제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윤소종은 자신의 좌주(座主)이자 스승인 이색과 대립하면서까지 이성계, 정도전과 함께 지지했다. 윤소종은 조준을 설득해 이색의 수제자 이숭인을 처형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윤소종은 이색이 이숭인을 칭찬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그를 참소했다고 한다. 또 대사성으로서 서연(書筵)에 참석한 윤소종은 창왕이 『논어』를 배운 지 13개월 되었으나 매일 새로 학습하는 건 많아봤자 서너 글자에 불과하다며 그에게 탕왕이 이윤을 대한 것처럼 스승인 자신을 존중하라고 간언하기도 했다. 윤소종의 눈에 실제로 창왕이 흡족하지 않았던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일 테지만, 창왕의 부덕함을 부각해 향후 정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389년(창왕 1) 11월, 이성계 세력이 최영의 조카 김저를 하옥시키며 정쟁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김저가 하옥된 이유는 그가 이미 폐위된 우왕을 찾아가 이성계 암살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는 지난 9월 권근과 윤승순이 명 황제에게 받아왔다는 외교 문서가 공표되었다. 이 외교 문서에는 놀랍게도 “군주의 지위는 왕씨(공민왕)가 시해된 이후로 후사가 끊겼다. 이후 비록 왕씨를 가칭하여 다른 성씨로 왕을 삼았으나 삼한(三韓)이 지켜오던 좋은 법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다.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자손, 즉 왕씨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유명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이 발발하자마자 우왕과 창왕이 유배되었고, 이성계 세력은 마침내 공민왕비 정비(定妃)의 교지를 빌어 공양왕을 옹립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있다. 권근과 윤승순이 9월에 가져온 뒤 11월에 공표된 명 황제의 외교 문서는 기존 연구에 따르면 사실 위조된 것이다. 결국 명나라 황제의 이름을 빌려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며 이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난신적자라고 문서 내용을 조작한 이들은 이성계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계를 위해 창왕 폐위 및 공양왕 옹립을 위한 계책을 낸 책략가는 누구였을까.

사료가 없어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 책략가 중 한 명이 윤소종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이 위조 문서에서 우왕과 창왕을 ‘난신적자(亂臣賊子)’라고 지칭한 표현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난신적자란 군주를 시해한 신료(난신)와 아버지를 시해한 아들(적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맹자는 공자가 난신적자를 주벌하고자 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해석했고, 그 이후 난신적자를 주벌하는 것이 『춘추』의 큰 뜻이라는 논리가 통용되었다. 윤소종은 이인임의 부관참시 및 최영의 처벌을 주장할 때부터 줄기차게 이 논리를 이용해 숙적을 공격해 온 인물이었다.

이후 『춘추』 난신적자 논리는 이성계 세력이 반대 세력을 공격하는 주요 명분이 되었다. 12월 5일 대간은 우왕과 창왕 및 그들을 옹립한 이색 부자, 조민수, 이숭인, 하륜, 권근을 처형하고, 이미 사망한 이인임을 부관참시하라고 주장하였다. 대간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신적자는 누구나 주벌할 수 있으므로 명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들을 처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 상소가 올라간 지 10여 일이 지나지 않은 12월 14일에 우왕과 창왕이 처형되었다.

그 직후인 12월 21일 윤소종은 조준의 추천으로 간관인 좌상시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또다시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한다. 윤소종은 남아 있는 인물들 중 대표적인 반이성계 세력으로 볼 수 있는 변안열을 처형해서 난신적자를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결과 변안열이 국문을 거치지도 않고 처형되었다. 윤소종은 다시 난신적자 중에는 무리 짓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고 하면서 변안열 일파인 조민수와 권근 등을 처벌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성계 세력은 『춘추』 난신적자 논리를 활용해 이색을 축출하고, 우왕과 창왕을 처형하며, 변안열, 조민수, 권근 등을 처벌하였다. 『춘추』 난신적자 논리는 이성계 세력의 정치 공세에 명분과 당위성을 제공했던 것이다. 윤소종은 고려 말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이성계 세력이 가장 필요했던 정치적 명분을 제공하고 이를 실현했던, 책략가이자 최전방 공격수였다.

[caption id="attachment_9261" align="aligncenter" width="748"]윤소종의 정치 공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변안열(1334~1390)의 묘역.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원나라 출신으로 공민왕대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고, 우왕대에 이성계, 최영 등과 함께 왜구를 격퇴했다. 위화도 회군 후 조준 등이 제안한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가 난신적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caption]

 

책략가의 몰락

윤소종은 좌상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390년(공양왕 2) 1월 경연 강독관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는 경연 강독관으로서 공양왕을 가르치며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대학』에 대한 성리학적 주석서인 『대학연의』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간관 좌상시로서는 반(反) 이성계 세력을 공격하는 데 박차를 가하는 한편, 이윤과 탕왕을 이상적인 군신상으로 예시로 들며 공양왕이 승려 찬영을 국왕의 스승으로 삼는 것에 반대했다. 또 대간이 군주 면전에서 간언하는 법을 폐지하는 데 반대했고, 대간의 지방 파견에도 반대했다. 관리들이 뇌물로 받은 노비와 토지를 회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양왕은 윤소종의 극렬한 탄핵에 반발해서 그를 간관직에서 해임하고 예조판서라는 다른 관직으로 보내버렸다.

곧이어 윤소종은 금주로 추방되었다. 윤소종이 이성계가 군자를 등용하지 못하고 소인을 가까이한다고 비판하자, 공양왕은 그가 사직을 보위한 공이 있는 이성계를 욕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쫓아낸 것이다. 윤소종은 그때까지 이성계의 책사로 활약한 것이 무색하게 고려 멸망 및 조선 건국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조선 건국 직전인 1392년(공양왕 4) 4월 정몽주 세력이었던 간관들이 조준, 정도전, 남은과 함께 윤소종을 탄핵해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던 것이 고려 멸망 전 마지막으로 보이는 그의 행적이다. 결국 윤소종은 회군공신에는 봉해졌으나 개국공신이 되지는 못했다.

윤소종이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못했던 정확한 이유는 사실 알지 못한다. 1390년(공양왕 2) 이색의 관직을 삭탈할 때 윤소종이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성계 세력과 갈라섰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설령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라도 이색은 윤소종의 좌주이자 스승이었기 때문에 윤소종이 차마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사료 그대로 윤소종이 공양왕의 미움을 사 쫓겨난 뒤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공양왕의 발언 저 뒤편에 이성계를 비판하고 다니는 윤소종을 경계한 이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윤소종의 날카로운 혀와 책략이 이제는 자신이 몸담은 정치 세력을 겨누자 초장부터 싹을 잘라버리지는 않았을까.

[caption id="attachment_9262" align="aligncenter" width="4000"]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묻힌 왕릉.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왕릉이라기에 초라한 모습이 고려 왕조의 몰락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caption]

수재로 자라 시대 변혁에 가담한 인물, 윤소종은 1392년(태조 1) 10월 조선이 건국된 후 정3품 병조전서로 지제교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고려사』 수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8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직하였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정도전과 조준이라는 주연들에 가려진 조선 건국의 또 다른 주역, 윤소종의 삶은 개혁이라는 순수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누군가는 직접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1. 사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송당집』
『목은문고』
『태조실록』
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 춘천: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2. 연구
강지언, 「고려末 尹紹宗의 政治活動 硏究」, 『이대사원』 28, 1995.
도현철, 「고려말 윤소종의 현실인식과 정치활동」, 『동방학지』 131, 2005.
현수진, 「고려시기 『춘추(春秋)』 난신적자(亂臣賊子) 논리의 활용과 변화」, 『한국중세사연구』 66, 2021.
현수진, 「고려시기 伊尹 故事와 그에 나타난 군신관계」, 『역사학보』 244,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