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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시론
[『역사와 현실』(121호) 시론]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_장세윤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11.05 BoardLang.text_hits 14,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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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1월(통권 23호) [『역사와 현실』(121호) 시론]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홍범도의 귀환’과 관심의 고조 올해 8월 15일 밤 저명한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국립 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봉환 당시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직접 공항에 나가 유해를 맞이하고, 대전현충원 유해 안장식에도 직접 참가하여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홍범도 유해봉환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되었으나, 북한의 반대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27년 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한다. 특히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때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유해봉환을 요청하면서 급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초에는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던 2020년에 한・카자흐스탄 양국이 유해 봉환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지만, ‘코로나19’사태로 인해 1년여 미뤄졌고 올해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8.16~17)을 계기로 한국으로 봉환하게 되었다. 정부(국가보훈처)는 이번 유해봉환 과정이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한 독립 영웅을 잊지 않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한다는 보훈의 가치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강조하였다.주1) 보훈처는 홍범도 유해봉환과 관련하여‘뜨거운 국민추모 및 참여 열기’를 확인하는 등 이번 유해봉환의 의미와 성과를 강조하였다. 2013년 10월 말 홍범도 서거 70주기에 즈음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를 방문하고 ‘홍범도 장군 서거 70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에 참가했던 필자는 지난 8월 15일 밤에 모 방송의 현장 중계방송 해설을 진행하며 생생한 현장감과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도 하였다. 1995년 8월 크즐오르다를 방문했던 이원규 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현지의 상당수 한인 지도자급 인사들은 한국 정부가 홍범도의 유해를 국립묘지(현재 국립현충원)로 옮기려는 시도에 대해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를 옮기면 어떡하느냐고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많은 유지들은 크즐오르다의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면 젊은 세대가 홍범도 묘역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고 한다.주2) 이러한 생각은 실제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의 세대간 경험과 의식의 차이가 크다는 한 사회학자의 의견으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 민족・고국(한국 혹은 조선)이나 고향(연해주)에 대한 인식이나 의식 등에 대한 세대간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주3) 필자 역시 역사적 유적이나 의미있는 기념물, 유물은 현지에서 잘 보존하고 관리하며 후세 교육 등에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현지 보존과 관리, 활용이 어렵다면 연고지나 고향인 한국, 북한 등으로 옮겨 의미있게 기억, 기념,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번에 홍범도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는 데는 한국정부의 의지도 강했지만, 홍범도 관련 유족 등의 한국 봉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홍범도 유해 봉환과 묘역 조성 이후 유명인사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홍장군 묘역을 방문, 참배하고 온라인상으로도 관심이 고조되는 등 국내외에 상당한 감동과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인사들은 홍범도의 행적과 유해 봉환의 타당성 여부, 대한민국장 추서주4)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홍범도의 생애와 독립운동 등에 대해 연구해온 연구자의 한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간단한 의견을 밝혀보고자 한다.주5) 1.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최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홍범도는 앞으로 학계에서 규명해야 할 부분이 매우 많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그의 명성이나 뛰어난 활약상에 비추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하에서 그의 투철한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 양력 10월 12일) 평안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주6) 부친의 성함은 홍윤식(洪允植)이었다고 한다.주7)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출산후유증으로 타계했다고 한다.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된 홍범도는 숙부댁에서 농사일을 거들었고, 이웃 마을의 지주집에서 꼴머슴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뒤 15세 때인 1883년 중반경 나이를 올려 평양에 신설된 친군서영(親軍西營)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1887년 병영 안의 부조리에 항거하여 탈주하고 말았다. 그 후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제지소에서 종이를 만드는 노동자가 되어 일했으나, 임금을 주지않고 동학 입교를 강요하는 주인과 싸우고 뛰쳐나오고 말았다. 다시 1890년경 금강산의 신계사(神溪寺)라는 절에 들어가 약 1년 반동안 행자승으로 머물며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였다. 이 때 부근 절의 여승으로 있던 단양(丹陽) 이씨를 만나 후일을 기약하게 되면서 함께 절을 떠났다. 1895년경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홍범도는 강원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소수의 의병부대를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는 한편, 활빈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했다. 특히, 1896년 8월에는 저명한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거느리는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일부 기록도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주8)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거의 아무런 재산이 없던 홍범도는 1897년부터 1904년 중반까지는 부인 단양 이씨의 처가가 있던 함경남도 북청에 살면서 농업과 사냥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9월에는 함흥에서 일어난 항일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북청일대에서 명포수로 이름을 날리면서 포수들의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는 ‘안산사(安山社) 포계(砲契)’의 포연대장(捕捐大將)으로 추대되어 동료포수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포수들의 권익신장에 노력하는 한편,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한 일대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특히 일제는 그들의 침략을 강화하기 위해 1907년 9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시행하여 대한제국의 포수들이 사용하고 있던 수렵용 총기를 회수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하였다. 사실상 사냥용 총기를 빼앗아가는 일제 당국의 이 조치는 사냥을 주요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포수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홍범도는 1907년 11월 차도선(車道善)과 함께 포수들이 중심이 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후치령(厚致嶺) 등 함경도 개마고원 일대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이후 일본군과 수십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연승을 거듭하여 일본의 침략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주목되는 사실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일본 관헌과 민족을 배반하던 친일세력은 물론, 일부 부패 관리 및 탐학한 부호도 응징하여 일반 서민들의 큰 환영과 성원을 받았다고 하는 점이다. 이후 북한지방에서 홍범도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민중 사이에 많은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한국통감부 등 일본 당국의 ‘토벌’과 탄압이 강화되고,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는 등 어려움이 가중되자 결국 1908년 11월 경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건너간 뒤, 다시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후일의 항일투쟁을 도모하였다. 즉 홍범도는 1910년 6월부터 연해주의 권업회(勸業會)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만주를 오가며 차후에 있을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1919년 초에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는 등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고조되고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자, 이 해 9월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독립군병사 200여 명을 이끌고 중국 연변(북간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두만강 연안의 국경지대에서 여러 번의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교란하였다. 1920년 6월에는 중국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 골짜기에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 군대 및 안무(安武)의 국민회 독립군 부대 등과 연합하여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격퇴하고, 120여명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봉오동전투(일명 봉오동대첩)’이라 한다. 또 같은 해 10월 하순에는 500여 명의 독립군부대를 이끌고 화룡현(和龍縣)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 독립군 부대 등과 연합하여 수백 명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대첩, 청산리독립전쟁)이라 한다. 홍범도가 영도하던 대한독립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이처럼 소위 ‘간도출병’으로 출동한 수만명 규모(직접 전투한 상대는 5천여명의 히가시 마사히코 지대[東正彦支隊] 등)의 일본군에 매복 및 기습공격을 가하여 큰 손실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1921년 초 연해주를 거쳐 같은 해 6월까지는 거의 러시아 자유시(당시명 알렉셰프스크, 현재의 스보보드니)로 집결하게 되었다. 자유시에 모인 수천 명의 한인 독립군(의용군) 부대는 ‘자유시사변(일명 자유시참변, 흑하사변)’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극동(원동)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혹은 제5군단) 직속 한인여단으로 개편되었다.주9) 자유시사변 당시 홍범도 독립군 부대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의 이동이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와 상해파(대한의용군)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결국 군정의회(코민테른 극동부)의 주도권 장악을 가능케 하였다.주10) 홍범도는 적군 제5군의 제1여단장(일부 기록에는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주11) 1922년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뒤,주12) 2월 초에 독립군 대표자격으로 레닌을 만나고 금화 100루블과 권총 등을 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1922년 말 고려군혁명군에서 제대하고 1923년에 제대군인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에서 협동농장을 이끌었다. 1927년 10월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듬해부터 1937년까지 연해주의 협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러나 1937년 9월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아랄해(海) 부근 사나리크로 이주했다.주13) 이듬해에는 카자흐스탄의 소도시 크즐오르다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주14)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올해 8월 그의 유해 봉환에 즈음하여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머슴, 사냥꾼, 그리고 노동자 출신의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그는 일반 민중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는 그와 싸웠던 일본군조차 높은 평가를 내릴 정도로 뛰어난 독립운동가요 무장투쟁가였다. 그의 투쟁은 미국과 중국 등 외세의 영향력 확대와 국제화, 세계화, 정보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국내외적으로 주체성의 위기와 엄중한 상황을 맞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그는 의병에서 독립군, 나아가 국제지원 세력과 연대하여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간 한국독립운동, 특히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로 부각되어 왔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 등의 타율적 강요로 왜곡된 한국근대사를 ‘주체적 투쟁의 역사’로 전환시킨 주역의 한사람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1920년 전후 독립전쟁 시기 홍범도의 언설과 그에 대한 평가 일찍이 고려 말의 관료이자 문호인 이색(李穡)은 문장이란 바깥으로 드러냄인데,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마음의 드러남은 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문장은 말의 정화(精華)로서, 말은 꼭 마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행동한 사실의 열매라고 보았다.주15) 그렇다면 홍범도는 독립전쟁 당시에 어떤 말과 문장을 남겼던가? 그는 1919년 12월 발표한 대한독립군 대장(大將) 명의의 유고문(喩告文)에서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여, 우리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위로 임시정부가 있어서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주관하며, 아래로 민중(民衆)이 단결하여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우리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 (중략) 당당한 독립군으로 몸을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 사이에 던져서 반만년 역사를 영광되게 하며,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주는 것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本義)이다!” 라고 강조하였다.주16) 102년 전에 벌써‘민중’이란 용어를 쓰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봉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그는 1920년 중반 중국 동북(만주)의 독립전쟁 과정에서 자신의 독립군 부대를 후원하는 동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권회복을 뜻한 이래로 이미 10년의 세월을 보냈으며, 독립의 의군(義軍)을 일으켜 한족(韓族)의 독립을 힘써 외친 이래 1년 반을 지냈다. (중략) 우리들 의로운 독립군 부대들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고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평소의 의지 관철에 분투함으로써 우리 한민족 독립을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외쳐, 죽은 뒤에야 그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부하에게 훈시하고 있다.”주17) 참으로 대단한 독립군 대장의 기개와 의지, 용기를 표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주위의 동료와 친지, 그와 싸웠던 일본군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후원한 간도 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은 그의 인품과 헌신, 나라사랑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君)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소위 ‘의병대장’으로 왜적과 여러번 싸워 대승을 거두어 상대할 적이 없었고, 왜인들이 ‘날으는 장군(飛將軍) 홍범도’라고 부르며 감히 접근이나 저항하지도 못했습니다. 또 우리의 이번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오동 전승’ 역시 홍범도의 공입니다. 이 모든 것이 홍범도의 일편단심으로 인한 것이며, 홍범도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라가 있을 뿐이고, 자기 몸과 가정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독립운동에 열성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칠 정도로 헌신하고 있으니, 우리 동포 모두가 숭배하고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지경입니다.”(밑줄은 필자)주18) 이러한 구춘선의 평가 내용을 주목하고, 그 의미와 교훈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홍범도의 애국심과 연변지역 한인 동포들과의 깊은 유대관계에 대해 일본 정보 당국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감탄스런 기록을 남겼다. 홍범도가 1920년 6월 초 봉오동전투를 눈앞에 두고 부하 2명과 함께 부근의 산봉우리에 올라 멀리 보이는 조국 내륙지방을 보며 “내 몇 년만에 고국산천을 바라보는 것이냐”하고 긴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는 보고가 있는 것이다. 이 비밀보고는 “홍범도의 애국심의 깊이에는 우리도 경복(敬服)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며, 중국 연변(북간도)지역 한인 동포들이 그를 숭배하는 것이 매우 심하고, 북한 및 연변지방 지리에 밝기가 마치 신(神)과 같다고 보고했다.주19) 더구나 1920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 당시 그와 싸웠던 일본군마저도 매우 호의적 시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10월 하순 이도구 어랑촌(漁朗村) 및 봉밀구(蜂蜜溝)에서 일본 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 부대는 독립군이라고 불리는 홍범도가 인솔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풍의 인물로서 김좌진과 같은 재질(才質-부류)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부하로부터 하느님(神)과 같은 숭배를 받은 그가 독립군의 각파가 항상 행동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의사 소통이 안되는 것을 개탄하고… (중략) 각 독립군의 단호한 결심이 없음을 분개하여 단독 행동으로 함경남도 삼수(三水)·갑산(甲山) 방면으로부터 국경을 습격하여 여론을 환기하고, 독립군의 기세를 보이겠다고 한 분격적 열정은 그의 성격을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주20)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홍범도의 말과 문장,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평가와 일반 한인 동포들의 인식, 그리고 그와 씨웠던 적인 일본 당국의 평가 내용을 주목하고, 그 의미와 시사점을 반추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27년 결국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지만, 이 시기까지 그의 애국심과 민족주의자적 면모는 위의 언설과 주위의 평가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군이나 정보 당국은 내부 보고서나 첩보 보고서, 개인적 평가에서는 위와 같이 호의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후일 자신들의 공식 입장을 반영한 공식 보고서나 공식 출판물에서는 그러한 입장을 감추고 독립군을 평가절하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주21) 따라서 우리는 일본 당국의 각종 보고서나 전보, 공식・비공식 기록을 다양한 시각에서 엄밀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1921년 6월 ‘자유시사변’과 홍범도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포고와 방침에 호응하여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들은 본격적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중국 연변(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진입작전’ 등 개별적 소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의 연합을 모색했다. 이러한 협동작전의 성과가 바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이었다. 일제 당국 역시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세력의 국내 진입작전의 목적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우쓰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關) 조선군 사령관은 1920년 6월 11일자 일기에서 독립군의 국내진입 목적을 나름대로 분석하였다. 그는 예하 19사단장에게 보낸 훈령에서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입안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주22) 그 내용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은 국제연맹회의에서 독립운동으로 책응하기 위하여 일면으로는 무기를 휴대하고 강을 건너 조선 내지(內地)에 침입을 기도하는 동시에, 조선 내지에서도 소요를 야기하려고 함.”주23)이라고 적시되었다. 그동안 독립군의 국내 진입 목적을 대체로 단순화하여 “독립전쟁의 전개와 국권회복”이라는 어쩌면 일면적인 목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홍범도 등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 목적은 국제적 입장에서의 발언권 강화, 혹은 교전단체로의 인정, 한민족의 일제 통치에 대한 저항 등을 국내외에 과시하고, 국내외의 호응을 얻으려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과 의도를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평가되는 자유시사변 당시 홍범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일부 논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최근 일부 언론이나 인사들이 제기한 홍범도의 ‘자유시사변(1921년 6월 28일)’ 가담설이나 ‘자유시 학살’ 개입설, ‘한국독립군 대학살’, ‘독립군 학살 공모’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주24) 오히려 허재욱(許在旭, 흔히 허영장[許營長]으로 불림) 휘하 부대 등 홍범도 관련 독립군부대가 이 사변의 피해자라 할 만 했다. 왜냐하면 허재욱의 의군부(義軍府, 무장 해제 당시에는‘총군부’소속) 독립군은 이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홍범도 부대와 함께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사변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주25) 또한 나중에 홍범도가 자유시사변 관련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한사람으로 참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형(징역형 2년)을 받은 독립군은 3명 뿐이었다.주26) 자유시사변 직후부터 상해파 등의 반발과 상해파 대표단의 외교적 노력, 코민테른 한국위원회의 「한국문제 결정서(1921.11.15)」 등으로 이 재판의 결과가 사실상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주27) 물론 홍범도는 재판에서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고 하지만, 불행한 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홍범도는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과 한인사회당 적위군의 창립에 관계했다.주28)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李東輝)가 기획하고 홍범도가 이에 부응했던 계획, 즉 만주와 연해주지역 한인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단일 독립군단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러시아(소비에트) 혁명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베리아 알렉셰프스크(현재 자유시)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북상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해주지역 니항(尼港) 의용군부대와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자유대대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중국 동북(만주)에서 온 독립군부대들은 양 세력의 대립 와중에서 코민테른 원동부(극동부)와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하는 고려혁명군정의회(軍政議會)를 통합의 주체로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홍범도는 1921년 6월 2일 휘하 부대원 440여명을 이끌고, 안무와 최진동은 6월 9일 각각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그동안 주둔했던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고려혁명군 교관으로 임명되었다.주29) 그리고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홍범도 등 독립군 부대가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간 이유는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 ‘혁명러시아 당국 및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권위’ 인정, 그리고 ‘무기・식량 등의 원활한 공급(즉 보급문제)’이라는 현실문제에 대한 고려가 컸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군정의회측이 이르쿠츠크로에서 데리고 온 군대, 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명과 카자크 기병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측의 강한 무력에 대한 인식 또한 고려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이었다.주30) 이러한 이유로 홍범도・최진동・안무 등 북간도 지역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하여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한 것이다. 고려혁명군(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파)과 대한의용군(이동휘 계열의 상해파)이 통합부대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던 시기에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들이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간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큰 영향을 끼쳤다. 양측의 균형이 무너지고 고려혁명군측이 우세를 점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내림으로써 휘하의 독립군 세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일 상해파로부터 ‘배신자’라고 지탄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면 홍범도는 1923년 8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자유시사변 당시 피해를 입었던 상해파계열 독립군 출신인 김창수와 김오남에게 테러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주31) 4. 자유시사변 이후 홍범도의 행적과 그의 사상 홍범도는 자유시사변이 일단락된 뒤인 1921년 9월 연해주 지방에서 고려공산당 중앙간부 명의로 ‘우리 고려 노동군중에게’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독립군이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언급하는 한편, 싸워야할 대상은 일제뿐만 아니라, 동족 내부의 관료와 유산자, 가짜 공산당원 등도 해당된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주32) 그는 또 같은 해 10월 1일자로 ‘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 등’의 이름으로 「자유시사변에 대한 의병장들의 포고」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도 내부 ‘악분자’의 구제(驅除), ‘붉은 혁명사상으로 단결하여’ 일본침략주의를 박멸하자고 주장하였다.주33) 물론 이 문서들은 홍범도 개인이 아니라, 같은 독립군 부대 사령관인 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과 공동 명의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 문서는 여러 독립군 장교들의 의견을 집약해서 문장에 능한 참모가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홍범도가 자유시사변 당시에 가담했던 군정의회(이르쿠츠크파)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서로는 홍범도의 사상이나 이념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처했던 여건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어가는 경향과 입장, 주・객관적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현재 국내외 각지에서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 공적은 대부분 인정하지만, 러시아 이동 후의 행적이나 코민테른 당국과의 관계 등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규면(金圭冕)이나 강근(姜根, 일명 姜會元) 등 상해파 계열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김규면은 홍범도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원동부장 슈미야츠키 등에 ‘이용’당해 ‘조선독립군의 총지휘자’처럼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 등을 만나는 등 행세하고 다닌다고 비판했다.주34) 또 강근 역시 회고록에서 중국 동북의 밀산현(密山縣) 십리와에서 한인 무장세력 통합 조직인 ‘대한독립군’ 군대의 고문관 ‘벼슬을 차지했다’고 하며 비판적 모습을 보였다.주35) 그의 사상을 살피기 위해 1941년 후반기에서 이듬해 전반기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홍범도 일지」(이함덕 필사본)주36) 관련 부분을 검토해 본다. 이 자료를 보면 항일투쟁 못지 않게 친일매판적인 관료나 부호, 지주 등에 대한 응징과 군자금 징수, 봉건적 수탈에 대한 반대투쟁 등의 사례가 많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반봉건(反封建) 투쟁과 계급투쟁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투쟁형태가 상당수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일지’를 통해 그의 항일투쟁 당시 주된 타격 대상이 어떤 세력이었고 또 그러한 투쟁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생각과 이념(사상)을 어떻게 평가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각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소(紙所) 주인놈은 자본가입니다. 삼년 고삯(임금-필자)에서 일곱달 고삯을 못찾고 … 야간에 그 놈의 집에 뛰어들어 그놈들을 다 죽였습니다.”주37) “덕원읍 좌수로 있는 전성준 놈의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 사백 팔십원을 달래가지고 무달사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주38) “함흥 초리장 유채골 동네에 와 밤에 달려들어 부자놈 아들놈 붙잡아다가 일화(일본돈) 이만 팔천 구백원을 빼앗아 군비(軍費)에 쓴 일이 있습니다.”주39) 이 일지 내용은 사회주의국가 소련과 그 연방인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당원으로 살아가던 홍범도의 정치・사회의식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그가 ‘일지’ 등 자신의 기록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이나 사상을 설파하거나, 주장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입장에서 홍범도는 소련공산당 당원이었지만,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과연 철저한 ‘주의자’였는지는 추후 심층적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5.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말년의 홍범도 홍범도가 중・소 국경지대인 수청(노우니콜라에프카)의 ‘레닌의 길(뿌찌레닌나)’ 꼴호즈에서 일하고 있던 1935년 경 작성한 홍범도 조사서(발췌본)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모의 사망으로 8살 때 고아가 되었다. 네자인까촌 〈노븨뿌찌〉(새길)산업조합 직원, 국방지원협회 및 국제혁명투사 지원단체 위원 등을 역임했다. 모스크바에서 1922년에 200루블 어치의 금과 무기를 상으로 받았다. 1919년에 뽀크롭스크구역에서 백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였고, 정치학교를 졸업하였다. 노년기에 퇴역”주40) 이 조사서를 보면 홍범도는 소련에서 당원으로 입당한 뒤 정부 관련 및 국제지원단체 위원으로 일하며 국제감각과 정치의식을 길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그가 정치학교를 졸업한 사실은 이러한 추정을 확실히 뒷받침한다. 또 그가 1932년 7월 작성한 ‘자서전’에는 ‘전 조선인 공산군 여단장’이란 직함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주41) 때문에 이 시기의 홍범도는 사회주의자로서 상당한 정치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말 러시아 연해주지역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 홍범도의 위상과 그의 이미지, 상징성은 매우 컸고, 그의 독립운동 내용과 사실, 그가 남긴 기록이나 회고, 연극 ‘홍범도’ 등을 둘러싼 이야기나 전설은 꽤 널리 유포되었다.주42) 그런데 한인들의 강제이주 직전인 1936~37년에 이미 연해주지역 한인 지도자들의 체포와 처형이 대거 이루어졌다. 2,000여명에 달하는 한인 지도자들 대부분이 체포되고 처형당하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짧은 기간 동안에 급속히 강제이주가 가능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주43) 이 시기 연해주에서의 한인 숙청은 지도급 인사들 전체를 대상으로 단행되었다. 내무인민위원회 원동변강의 책임자에 따르면, 앞의 기록보다는 많은 2,500명의 한인들이 체포, 처형되었다고 한다. 당시 극동(원동)지역에 거주하던 한인 약 18만 명 정도였으므로, 인구의 약 1.5%에 달하는 큰 비중이었다. 시베리아내전 시기 빨치산 대장으로 유명한 한창걸,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도 숙청되었다. 1930년대의 스탈린 숙청을 피한 이인섭(李仁燮)은 1935~6년간에 상해파, 국민의회파, 이르쿠츠크파, 엠엘파 등 모든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출당, 처형되었으며, 그동안 여러 방면으로 양성되었던 한인 인재들이 “전부 없어지고 말았다”고 회상했다.주44) 홍범도를 비롯한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당하게 된 결정은 1937년 8월 21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인 몰로토프와 전연방 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스탈린이 서명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의와 전연방(全聯邦) 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 No.1428-326cc’였다고 한다.주45) “극동지역에서 일본 간첩활동 방지, 혹은 일본 간첩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한인들을 이주시킨다는 이 결정에 따라 러시아 극동의 연해주(沿海州)에 살던 고려인들은 1937년 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된 고려인 숫자는 1938년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총 20,789가구 98,454명이었다.주46) 또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보고서에 의하면 1937년 10월 29일 당시 우즈베키스탄에 16,272가구 76,525명이 이주되었다. 따라서 1938년 2월까지 연해주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은 모두 37,061가구에 174,979명이나 되었다.주47) 1937년 러시아 원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한인 강제이주는 강제이주에 저항하는 한인들에 대한 탄압과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강제이주가 시작된 1937년 8월 21일 이후부터 그해 말까지 모두 1,100여 명이 체포되어 800명 이상이 총살당했다. 그들에게 적용된 혐의의 대부분은 ‘반혁명선동’이나 ‘반소비에트선동’이었다. 강제이주 실행 이후 한인 탄압은 주로 강제이주에 반대할 사람들을 사전에 제거하거나, 실제로 강제이주에 반대한 사람들을 조사해 골라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48) 이처럼 무서운 ‘대숙청’시기에 홍범도는 살아남았다. 물론 고령에다가 1919년 말 극동지방에서 러시아 백파와 싸웠고, 한인들을 이끌고 협동농장을 이끌기도 했던 원로 항일빨치산 출신이었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원만한 성품과 폭넓은 인간관계, 고려인 동포사회와의 깊은 유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홍범도는 독소(獨蘇)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11월 초 교포신문인 『레닌기치』에 ‘이전 빠르찌산 - 홍범도’ 명의로 ‘원쑤를 갚다’라는 글을 직접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나는 지금 늙엇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쓰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으니들! 모도 무긔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주49)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이 무렵 직접 당국을 찾아가 참전을 호소했지만, 워낙 고령이었기 때문에 거부되었다고 한다. 위의 기고문 내용은 그러한 전승을 뒷받침한다. 최근에 홍범도의 말년의 생활에 대해서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대하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가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일한 사실, 즉 그의 말년의 생활을 우리의 시각으로 (비극적이라고) ‘사실’로 규정해 버린 것이 오히려 비극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주50) 독립전쟁의 영웅, ‘민족영웅’ 홍범도 역시 스탈린치하 한인들이 겪었던 강제이주라는 비극을 면치 못했다.주51) 그러나 홍범도를 비롯한 고려인들은 강제이주당한 척박한 이주지에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갔는데, 현지 고려인 사회는 ‘큰 어른’, 정신적 지주로 홍범도를 모셨다고 보는 것이다. 1940년대 전반, 나이 70이 넘었지만 말년의 홍범도는 열정을 갖고 고려인 사회의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이고자 했고, 실제로 당당하고도 기개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주52) 홍범도! 그는 분명히 뛰어난 무장(武將)이 갖추어야 할 용기, 희생, 헌신, 겸손 등의 덕목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요구되는 시대정신과 그 시대의 민족적・계급적 요구의 구현에 충실히 앞장섰다. 물론 그 역시 한 인간으로서 한계도 있었지만, 진정 애국자였고, 포용력있는 참된 지도자였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독립운동 과정에서 잃었다. 자신의 삶과 혼을 오롯이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그리고 중앙아시아 한인 사회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그처럼 20여년간 줄기차게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에 혼신의 정열과 노력을 기울인 인물은 정말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도 그의 중앙아시아로의 이주와 말년의 행적을 치우친 감정이나 이념으로 재단하기보다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이 처한 새로운 환경과 사회・인간관계에 적응하며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독립군 영웅,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지역사회 지도자로서 자리잡아가는 역할과 위상을 올바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6. 몇가지 시사점과 향후 과제 이번 홍범도 유해 봉환과 관련하여 그 의미와 시사점, 향후 과제 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1) 홍범도 유해 봉환의 의미와 시사점 이번 유해 봉환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독립운동 영웅’의 유해를 봉환, 반장(返葬)했다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고 본다. 홍범도와 다른 독립운동가, 민족해방운동가들, 달리 보면 유명・무명의 저항자, 이단아(異端兒), 창조적 소수자, 초인(超人)들이 꿈꾸고 이루고자 했던 참된 가치와 이상을 주목해야 한다. 즉 독립, 자유와 정의, 평등,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 등 공화(共和)의 가치와 공화제, 이를 뒷받침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전세계 민중의 연대와 단결, 국민(민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앞장서고, 공동체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헌신과 희생정신 등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희생을 무릅쓴 독립운동가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와 이념, 그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고, 미래의 가치체계와 새로운 꿈, 이상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때 이번 유해 봉환의 진정한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홍범도 유해 봉환을 계기로, 당장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북한과 공동 추모행사와 학술회의・학술사업, 공동 조사・연구, 관련 유적(지) 조사・연구 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북한 당국은 홍범도 유해의 한국 송환을 계속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추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연해주지역 등)의 고려인 동포사회 등과 연계한 여러 사업을 추진하여 해외 동포사회와 연대를 강화할 필요도 있다. 또한 이번 홍범도 유해 봉환과 훈장 (상향)추서 등을 계기로 부당하게 저평가된 독립유공자나 독립운동 계열・단체는 없는지 재검토도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 남북화해와 민족통일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좌파・무정부주의 또는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에 대한 조사・연구와 발굴, 포상 확대도 긴요하다. 2) 새로운 자료 발굴과 분석, 활용 필요성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여러나라에는 한인 민족운동이나 이주사, 생활사,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관련 비공개 자료들이 아직도 산적해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의 적극적 발굴과 분석, 활용이 절실하다. 물론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므로,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아직도 연구가 별로 되지 않은 강제이주 전후시기 한인 탄압과 강제 이주의 실상 규명도 시급하다. 홍범도처럼 비교적 일반 대중에 많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나 이와 관련된 조직이 남긴 기록, 시대적 배경을 알게 해주는 기본 텍스트, 회고록이나 일지 등 기본자료나 일제 관헌들이 남긴 정보자료 등 1차 자료의 발굴과 수집, 연구 등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홍범도가 남긴 일종의 회고록인 「홍범도 일지」에 대한 연구와 분석・평가, 활용, 특히 다양한 관점에서의 검토와 콘텐츠 응용・활용차원에서의 조사・분석, 활용방안 등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3) 국가적・사회적 기억의 다양성 확보와 이야기하기, 의미 반추 필요 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주53)라고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명시하고 있다. 꼭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동안 정부와 관련 기관, 단체, 학계 일각에서도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일면적 역사인식과 기억, 기념사업을 추진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전후하여 ‘임시정부 법통론’이 다시 조명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전쟁기념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공공 전시공간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광복군 등 군맥의 정통성이 강조되면서 사회적 기억의 편향성이 보편화되고 있으며,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군사단체들과 한국광복군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나 주제들이 배제되고 있다고 한다.주54) 한편 북한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매우 편협한 역사인식이 북한현대사의 주류로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사회적 기억의 편향성’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홍범도 유해 봉환을 계기로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 독립전쟁기에 우리 민족이 전개했던 다양하고 치열한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의 다양한 실상과 관련 인물, 단체 등을 다각적으로 재평가하고, 그동안 소외된 인물이나 운동계열, 관련 지역은 없었는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 동북지역(만주)이나, 중국 관내지역에서 중국공산당 세력과 연대하여 투쟁한 세력, 사회주의계열 운동, 러시아 시베리아・연해주 지역 민족운동 등에 대한 심층적 연구와 교육이 절실한 실정이다. 또한 홍범도 유해 봉환을 계기로 우리는 홍범도와 관련된 개인, 또는 집단 ‘서사(敍事)’적 측면에서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기초한 진실된 ‘이야기하기’, 그 이야기의 전파와 확산, 후대 교육 등을 중요한 과제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4) 향후 과제 그동안 연구가 미진했던 국제관계, 특히 러시아 혁명세력의 지원과 연계,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고있던 이동휘(李東輝) 등 한인 민족운동 세력의 동향, 그와 연계된 민족운동과 시베리아 한인 의용병, 빨치산 활약상 등을 심층적으로 규명할 필요도 있다. 또한 한인 디아스포라 문제와 관련하여 한・러, 한・카자흐스탄, 한・우즈벡 교민, 주류사회와의 협력 및 교류강화 등을 추진할 필요도 있다. 또 러시아 시베리아 및 연해주 지역 민족운동 분야의 연구・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교과서나 개설서에 잘못 서술된 내용을 시급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현행 대부분의 교과서에 서술되고 있는 ‘대한독립군단’이나 ‘자유시사변’ 등에 대한 올바른 서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주55) 한편, 오늘날 일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홍범도의 소련공산당 입당과 일부 사회주의사상 수용 및 사회주의 조직 관련 행적, 1920년대 중・후반~4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국가에서의 말년 행적 등을 현재의 관점에서 무리하게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당시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나라가 없는 약소민족, 이산 소수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족해방운동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럽게 선택한 생존과 투쟁의 한 방편・과정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애초에 ‘역사(Historia, Historiai[複數])’는 오늘날의 ‘역사’나 ‘역사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탐구(探究), 탐구를 통해 얻은 지식, 또는 탐구 결과에 대한 서술’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고 한다.주56)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나 해석이 아니라, 나름대로 과학적 조사나 연구에 근거한 과학적 인식의 소산이라는 것을. 자의적(恣意的) 판단이나 해석이 아닌 합리적 판단과 나름의 객관적 서술이 절실한 이유일 것이다. 현재 상당한 관심과 논란이 되고 있는 홍범도 유해 봉환과 그를 둘러싼 여러 논의도 ‘과학적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미주> 주1) 국가보훈처 보도자료,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안장식으로 마무리, 이를 통해 독립정신을 잇고 국민통합 계기 마련 - 보훈처,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주요 성과 밝혀」 2021년 8월 19일, 보도자료 2쪽 주2) 이원규, 1996 「크질오르다에 남은 홍범도의 자취」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2, 자작나무, 234~235쪽 주3) 정근식, 2003 「중앙아시아 한인 연구의 전환을 기대하며」 『사회와역사』 63, 한국사회사학회, 231쪽 주4) 강규형 교수(명지대)는 “1962년 박정희정부가 홍범도를 건국훈장 2등급 ‘대통령장’을 서훈할 때는 홍범도의 자료가 절대적으로 미비했지만, 지금은 그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느냐”며 “홍범도는 일생을 소련정부에 충성했고, 봉오동전투의 공적은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 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장’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뉴데일리』 2021년 8월 25일). 주5) 장세윤, 1991 「〈洪範圖 日誌〉를 통해 본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1992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 독립기념관 : 1997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독립기념관 : 2007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 역사공간 : 2021 「〈홍범도일지〉 재검토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청산리독립전쟁」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선인 : 2021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의 주요 쟁점 검토」 『재외한인연구』 54, 재외한인학회 등 참조. 주6) 홍범도는 1921년 12월 경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극동민족대회’ 참석자들에 대한 ‘조사표(앙케트)’에 1867년 8월 27일생으로 기입하였다(그러나 그는 후일 이력서와 일지 등에서는 1868년생으로 기록하였다). 그는 이 조사서에 직업은 ‘의병’, (대회 참가) 목적과 희망을 ‘고려 독립’이라고 표기하였다. 직업과 목적・희망을 이렇게 표기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주7) 姜德相, 1984 「義兵大將・洪範圖の生涯」 『朝鮮獨立運動の群像』, 靑木書店, 82쪽 참조. 주8) 柳麟錫, 1973 『毅菴集(上)』, 경인문화사, 369~370쪽에 유인석이 홍범도와 주고받은 편지 3통이 한문으로 실려있어 두 사람이 상당한 친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9) 자유시사변에 대해서는 임경석, 2003 「자유시의 비극」,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396~427쪽 참조. 주10) 홍범도의 이 때 행적에 대해서는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한국사연구회, 249~252쪽 참조. 주11) 홍범도는 1932년 7월 작성한 자서전에서 1921년 후반 이르쿠츠크에서 제5군 조선인 제1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는 한인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상세한 내용은 박환 편, 1997 「홍범도 자서전」, 『재소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국학자료원, 124~125쪽 참조. 주12) 상세한 내용은 임경석, 2003, 앞의 글, 495~538쪽 참조. 주13) 반병률, 2014 「홍범도 연보」 『홍범도 장군 -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한울, 251쪽 주14)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필자의 2007 앞의 책, 역사공간 내용을 축약 정리한 것임. 주15) “文章 外也 然根於心 心之發 關於時…”(李穡, 「栗亭先生逸藁序」 『牧隱文藁』 卷8(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 1973 『高麗名賢集』 3, 편집부, 857쪽) 및 “文章 人言之精者也 然言未必皆其心也 皆其行事之實也…”(「動安居士李公文集序」 『牧隱文藁』 卷8(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 연구원 편, 1973 앞의 책, 853쪽]) ; 김시업, 1996 「목은의 군자의식과 민생·풍속시 (1)」 『牧隱 李穡의 생애와 사상』, 지식산업사, 367쪽에서 재인용. 주16) 독립기념관 소장 「喩告文」. 현대어에 맞게 필자가 내용을 일부 수정함. 주17) 姜德相・梶村秀樹 編, 1970 「間島地方武力不逞鮮人ノ動靜ニ關スル件」 『現代史資料』 27, みすず書房, 360쪽 주18) “此洪範圖君卽於敝邦 所謂義兵大將時與倭屢戰勝捷 所向無敵 倭人 稱爲飛將軍洪範圖 不敢近接抗抵者也 且今日我獨立戰爭第一回卽鳳梧洞戰勝 亦一洪君範圖之功也 盖此洪君之所以一片丹心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其家,鞠躬盡瘁 死而後已的熱誠 使我同胞 無非崇信者也”(구춘선, 「홍범도의 三子 龍煥의 무죄석방을 청함(號外 譯文)」 『한국독립운동사』 43, 국사편찬위원회) 주19) 姜德相・梶村秀樹 編, 1970 앞의 책, 360쪽 주2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군대 출동 후에 있어서의 간도 불령선인 단체의 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578~579쪽 주21) 예를 들면 식민지 조선 주둔 일본군인 ‘조선군’ 사령부는 1926년에 내부 비밀자료로 『間島出兵史』를 간행했는데, 여기에서 홍범도 등 독립군 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 군의 토벌 진척과 더불어 간도 및 琿春 지방의 민심이 일변하였다. 특히 10월 하순 독립단의 정예로 자타 공히 믿어온 홍범도, 김좌진 등의 一隊도 거의 鎧袖一觸[갑옷 소매한번 스치는 정도로 쉽게 상대를 물리침]이 되어 결국 사방으로 흩어지는 운명에 빠지자 이후 우리 군의 진가를 이해하고 귀순 및 자수를 신청해오는 자가 빈번해지고 속출하기에 이르렀으므로…”라고 그들의 ‘성과’를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2019 『간도출병사』, 경인문화사, 118쪽). 주22) 宇都宮太郞關係資料硏究會 編, 2007 『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陸軍大將宇都宮太郞日記』 3, 岩波書店, 408쪽 주23) 위의 각주 21번 참조 주24) 「독립군 유인·학살 ‘자유시 참변’에 가담… 홍범도 ‘친소 괴뢰’ 논란」 『뉴데일리』 2021.8.16. ; 「‘자유시 학살’ 개입 홍범도… 생존 독립군 50명에 유죄 판결까지 했다」 『뉴데일리』 2021.8.25.) ; 「‘독립군 학살 공모한 공산주의자’ 홍범도 유해 대전현충원 임시안치」 『펜엔드마이크』 2021.8.16. ; 박노자, 「홍범도 유해 송환, 고려인 사회 여론은 무시」 『조선일보』 2021년 8월 17일 ; 송평인, 「볼셰비키 홍범도에게 바친 최고 예우」 『동아일보』 2021년 8월 25일, A34면 등 참조 주25)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52쪽 주26) 윤상원, 2017 앞의 논문, 254~256쪽 주27) 임경석, 2003 앞의 책, 475~494쪽 주28) 그러나 그가 한인사회당에 입당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앞의 러시아 ‘극동민족대회’ 참석 당시 제출한 1921년 말의 ‘조사표(앙케트)’에서 어떤 정당에 속한 적도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주29) 김준엽·김창순, 1986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청계연구소, 305・308・312쪽 ;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한국사연구회, 249쪽 주30) 윤상원, 2017 앞의 논문, 249~251쪽 주31) 「(주해)홍범도 일지」 『홍범도 장군 -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94쪽 주32) 그 성명서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환기하며 단합할 지어다. 우리 의병대들을!! 그들은 일찍 서북간도에서 일본 군벌주의자를 박멸하는 전쟁에 아름다운 이름과 거룩한 성적을 날아내였나니라. 동무들이여! (중략) 주의할 지어다 우리의 수적(讎賊)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 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 및 유산자이며 홍(紅)〇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한 가면공산당원들이로다. (중략) 동무들이여 잊지 말지어다. 일본 군국주의자와 전쟁하는 동시에 세계 만방에서 압박받는 노동자 동지들이 후원하리라. 또는 이 동지들이 멀지 아니하여 압박계급과 대전(大戰)을 개(開)하리니 이 대전은 참으로 우리를 해방시키고 세계로 하여금 진리의 낙원을 형성하리니 정신을 가다듬어 전투준비에 급급(汲汲)할진저. 진실한 자유 고려국민 만세!!! 지금에 진행되는 세계혁명의 총참모부인 제3국제공산당 만세!!! (밑줄은 필자)一千九百二十一年 九月 十五日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제3국제공산당 고려부)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許在旭) 안무 이청천” (「우리 고려 勞働群衆의게」 1921.9.15 ; 윤상원, 2002 「자유시사변과 홍범도」 『역사연구』 10, 역사학연구소, 281~282쪽에서 재인용) 주33) “…우리 각 의병대들은 間島戰爭 후로부터 노서아 黑龍洲로 향할 생각이 發芽되지 아니하였는가. (중략) 흑룡주에서는 이와같은 慘劇을 鑄出하는 동시에 일꾸스크에서는 고려공산당 중앙간부 수립대표회를 소집하여 제3국제공산당 고려부를 조직하였다. 이는 고려의 독립만 목적함이 아니라, 세계 압박자이고 침략가들과 전투하기로 목적함이니라. (중략) 흑룡주사변이 우리의 혁명대업에 前轍을 作하였도다. (중략) 우리는 속히 행렬에서 악한 분자를 驅除하고 붉은 혁명사상으로 단결하여 同侔들 있는 그곳에 다달아 同侔들의 선봉이 되어 亞細亞에 압박주는 일본침략주의를 박멸하기로 목적하고 玆에 경고하노라. (밑줄은 필자) 고려혁명군대 만세!!! 세계혁명 만세!!!一千九百二十一年 十月 一日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제3국제공산당 고려부) 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이청천”(「자유시사변에 대한 의병장들의 포고」 1921.10.1 ; 윤상원, 2002 앞의 논문, 271~273쪽 : 277쪽에서 재인용) 주34) 박환, 1998 「노병 김규면 비망록」 『재소한인 민족운동사』, 국학자료원, 297~298쪽 주35) 박환, 1998 앞의 책, 362쪽 주36) 김세일, 1990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5, 제3문학사, 244~246쪽 주37) 「홍범도 일지」 1쪽 ; 김세일, 1990 앞의 책, 298쪽 주38) 「홍범도 일지」 2쪽 ; 김세일, 1990 앞의 책, 299쪽 주39) 「홍범도 일지」 8쪽 ; 김세일, 1990 앞의 책, 305쪽 주40) 「홍군 근위대원 조선인 유격대원 홍범도의 조사서 발췌문」 ; 박환, 1997 『재소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국학자료원, 126쪽 주41) 「홍범도 자서전」 ; 박환, 1997 앞의 책, 124~125쪽 주42) 카자흐스탄 및 우즈베키스탄 지역 한인 이주사 관련 자료로는 블라지미르 김, 김현택 옮김, 2000 『러시아 한인 강제 이주사 - 문서로 본 반세기 후의 진실』, 경당 참조. 주43) 윤상원, 2013 「소련의 민족정책 변화와 1937년 한인 강제이주」 『사림』 46, 수선사학회, 7~75쪽 주44) 윤상원, 2013 앞의 논문, 74쪽 주45) 일부 기록에는 문서번호가 ‘No.1428-326ss’로 달리 표기되기도 하고, 번역자에 따라 문서 제목이 일부 달라지기도 한다(블라지미르 김, 2000 앞의 책, 33쪽 : 35쪽 참조). 이 책을 보면 「인민의원회의와 전소연방(全蘇聯邦) 공산당 중앙위원회 명령」 No 1428-32ss(1937.8.21) ‘극동구 국경지역으로부터의 한인 이주에 대해’, 「소연방(蘇聯邦) 인민의원회의 명령」 No 1467-377ss(1937.9.28) ‘극동지역으로부터의 한인 이주에 대해’로 번역, 정리되어 있다(35~38쪽). 특히 No 1428-32ss (1937.8.21) 문서의 6항은 “소연방 인민의원회의는 이주와 관련해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와 한인들의 반발, 소동에 대비해 적절한 대책을 수립하도록 한다”고 하여 한인들이 강제이주에 반발할 경우에 대비하라는 지시까지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36쪽). 주46) 홍웅호, 2017 「홍범도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생활」 『사림』 61, 수선사학회, 161쪽 주47) 홍웅호, 2017 앞의 논문, 162쪽 주48) 상세한 내용은 윤상원, 2020 「1937년 강제이주 시기 한인 탄압의 규모와 내용」 『한국사학보』 78, 고려사학회, 263~291쪽 참조 주49) 홍범도, 「원쑤를 갚다」 『레닌의 긔치』 1941년 11월 7일자, 4면 ; 반병률, 2014 『홍범도 장군 -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143~145쪽에서 재인용. 주50) 홍웅호, 2017 앞의 논문, 177쪽 주51) 박 왈렌찐, 「인민의 추억 속에 길이 살아 있다」 『레닌기치』 1988년 12월 27일, 3면 ; 홍웅호, 2017 앞의 논문, 177쪽에서 재인용. 주52) 홍웅호, 2017 앞의 논문, 177쪽 주53)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헌법」 주54) 정호기, 2021 「사회적 기억매체에 담긴 한국광복군」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9・64쪽 주55) 현재 많은 연구나 개설서, 교과서 등에서 만주 독립군 부대들이 1920년 12월 중·러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에서 10개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이만으로 건너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대한민국 공보처, 1949)에서 연유하는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한 것은 일본 정보문서였다. 그러나 근래 연구에 따르면 대한독립군단은 실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추후 ‘자유시사변’의 진상 규명과 교과서・개설서의 정확한 서술, 그리고 1920년 말에서 이듬해 전반기까지의 독립군 통합단체 ‘대한독립군’ 조직설 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교과서 반영 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윤상원, 2013 「만들어진 ‘신화’ :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대한독립군단” 서술의 문제점」 『한국사학보』 51, 고려사학회, 316~317쪽). 주56) 헤로도투스, 김봉철 옮김, 2016 『역사』, 도서출판 길, 2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