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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옛 사람들은 사리장엄구를 어떻게 인식했을까?_이철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9.05 BoardLang.text_hits 6,248
웹진 '역사랑' 2021년 9월(통권 21호)

[나의 학위논문] 

 

옛 사람들은 사리장엄구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구례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연구


 

이철호(중세1분과)


 

1. 들어가며

사리장엄구는 우리에게 매우 찬란하고 아름다우며 강력한 인상을 준다. 열반한 부처님이라는 인식 속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늘 옛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했을까? 왜 그렇게 했을까? 라는 명제를 늘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명제를 중심으로 논문을 진행하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 다뤄지는 사리장엄구는 전남 구례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다(이하 ‘화엄사 사리장엄구’).

서탑 사리장엄구는 1995년 6월 21일부터 9월 18일 해체수리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동탑 사리장엄구는 1999년 10월 해체수리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는 60~90년대에 석탑을 수리하면서 발견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많은 사리장엄구를 조사하기에는 인력과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화엄사 사리장엄구 보고서가 미 발간된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2. 논문의 구성과 방향

보고서가 미 발간됨에 따라 본 논문에서 화엄사 사리장엄구의 출토 위치와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매우 도움이 된 것은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인 발굴 당시 기안된 행정문서였다. 필자는 이 행정문서에 적힌 도면과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운 사진 등을 분석하면서 90년대 후반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두 번째, 출토 위치, 출토품 수량 등 기본적인 자료 파악이 가능해지면서 유물 한 건 당 양식, 도상 등 미술사적인 방법론을 적용하여 편년을 시도하였다.
세 번째, 편년 된 사리장엄구를 중심으로 사리장엄구의 봉안시기와 봉안과 관련한 의식 진행의 가능성, 발원의 이유, 사리봉안의 방식 등 특징을 규명하고자했다.

3. 화엄사 사리장엄구의 출토 현황

국가기록원의 행정문서와 당시 신문 기사, 유물 실견 등 조사를 통해 화엄사 서오층석탑(이하 ‘서탑’) 1층 탑신부의 장방형 사리공과 원형 사리공 그리고 기단부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고 수량은 20건 96점(일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엄사 동오층석탑(이하 ‘동탑’)은 1층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20건 376점(일괄)의 사리장엄구가 출토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서탑에서 사리공을 마련하고 봉안되었으나, 동탑에서는 사리공 없이 봉안된 것이다.

화엄사 오층석탑은 쌍탑 혹은 비쌍탑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고 필자는 비쌍탑 의견에 무게를 싣고자 했다. 쌍탑으로 조성된 경우 사리장엄구의 봉안 방식과 사리장엄구의 형태와 양식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4. 사리장엄구의 양식과 편년

출토된 화엄사 사리장엄구 가운데 모든 물품의 양식을 파악하고 편년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서탑은 8세기부터 10세기로 편년되었다<표1>, 기존 연구에서 서탑은 건탑 이후 한 번도 수리되지 않은 석탑으로 알려졌으나 사리장엄구가 8-10세기로 편년되어 지속적인 재봉안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탑은 나말여초,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로 편년이 가능하였다<표 2>. 동탑은 조선시대에 중수되었다는 것을 <중수기>를 근거로 선행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사리장엄구 양식 파악과 편년을 통해 조선시대 이전에도 사리장엄구가 지속적으로 재봉안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동 이중 원통형 사리합>은 근대에 제작된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으나 표면에 가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전근대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다. <장명사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의 사리합 표면에 가질 자국보다 제작기술이 떨어져 적어도 997년 이전인 나말여초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특히 <청동 이중 원통형 사리합>과 <녹색유리사리병>은 표면 일부에 불에 그을린 듯 찌그러지고 기포가 생긴 모습이 있는데 이는 외부 충격으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5. 사리장엄구의 봉안시기와 특징

1) 서 오층석탑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재봉안되었기 때문에 봉안된 유물이 8세기부터 10세기의 것으로 혼재된 상태이다. 통일기 신라 사리장엄구의 봉안과 재봉안과 관련한 소의경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이하 ‘『무구정경』’). 『무구정경』은 미타산(彌陀山)과 법장(法藏)이 당나라 무주(武周) 말년인 장안연간(701~704)에 한역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경주 황복사지 사리장엄구> 외함 명문을 통해 706년 이전에 한역이 완료되자마자 유입되었다.
사리장엄구 재봉안의 이유를 과연 『무구정경』에서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외함 명문을 통해 692년(효소왕 1년)에 건탑 이후 706년(성덕왕 5년) 탑을 중수하고 사리장엄구를 추가한 것을 알 수 있다. 14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 탑을 중수하고 사리장엄구를 재봉안한 것은 당시 신라가 겪고 있던 기근, 자연재해를 신성력으로 극복하고자 함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는 <불국사 삼층석탑>이 1038년(정종 4년)에 지진으로 석탑이 손상되지 수리를 했던 내용을 담은 기록으로 당시 발견되었던 사리장엄구를 별도에 장소에 보관하여 공양하고, 석탑 수리가 끝난 뒤 재봉안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사리장엄구가 성물로 인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리장엄구가 재봉안되는 이유는 경전의 영향 이외에도 다른 이유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신사리장엄구인 『무구정경』이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무구정경』의 확산이 실물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무구정경』이 실물로 출토된 것은 <불국사 삼층석탑>, <나원리 오층석탑> 외에는 출토 사례가 없으며, 『무구정경』 신앙의 확산은 관련 기록을 통해 서만 확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은 <탑인 다라니>와 <무구정경 다라니 필사본>이 서로 겹쳐서 발견되었다. <탑인 다라니>는 목도장에 탑의 모습을 조각 후 찍은 것이고 <무구정경 다라니 필사본>은 『무구정경』 전체를 필사한 것이 아닌 주문(진언)만 일정한 양식 아래 필사하였다.

“…단을 만들어 위를 깨끗이 하고 이 다라니 일흔일곱 벌[本]을 베껴 쓰되, …쓴 주문은 탑 속에 넣고 그 탑에 공양하며, 혹은 진흙으로 작은 탑 일흔일곱 기를 만들고 주문 한 벌씩을 탑 속에 넣어 공양할 것이니라. … 법대로 이 주문을 아흔아홉벌을 써서 상륜당의 사방 주위에 두고, 또 이 주문과 주문의 공덕을 써서 상륜당 속에비밀하게 넣어 두라. … 진흙으로 작은 탑을 만들고 그 안에 이 다라니를 모시면, 이것은 곧 9만 9천의 작은 보배탑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라.…”


『무구정경』을 살펴보면 ‘반복’ 강조하며 의식 속에서 반복 행위를 통해 신성성을 증가된다. 신성한 반복 행위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또 다른 유물은 기단 적심석에서 출토된 <청동 불상틀>이다. <청동 불상틀>은 전불(甎佛)을 만드는 도구로서 나무, 돌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던 일반적인 사례와 달리 금속으로 제작하고 고리를 달아 휴대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무구정경』작단 의식을 진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무구정경』의식과 관련한 기록은 <봉화 축서사 사리외함>이 주목된다.

“승려 언부(彥傅)의 어머니 이름은 명단(明端)이고, 이찬 김양종[金亮宗公]의 막내딸이다. (명단이) 스스로 큰 서원을 밝히고 불탑을 세워 정토에 갈 공덕과 속세의 삶을 이롭게 하고자 했다. (언부는) 이 뜻을 효성스럽게 받들어 탑을 세우고 불사리 10개를 넣고 『무구정경』에 의한 법회(제단)를 열었다. 법회의 설법을 맡은 승려는 황룡사의 현거(賢炬)이다. 당 함통 8년(867)에 세운다. / 석장은 신노(神孥)이다.”


867년(경문왕 7년)에 제작된 <봉화 축서사 사리장엄구>에서 황룡사 승려 현거가 『무구정경』에 의해 법회(제단)을 열었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통일기 신라 『무구정경』 의식을 담당한 승려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양종은 신라의 금입택(金入宅)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양종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축서사 사리장엄구를 발원할 때 완숙한 의식 진행이 가능한 승려가 황룡사에서 초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식을 진행하는 승려의 존재는 통일기 신라 밀교계 경전 유입과 유통이 증가하고, 경전의 이해가 깊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리장엄구 봉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갈항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758)에서 발견된 준제진언은 당시 신라에 밀교계 경전의 이해가 깊고 사리장엄구 봉안 시 밀교적 모습이 강화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밀교, 다라니 전문 승려는 통일기 신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것 같다. 최치원이 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문」 중 염지(念持)와 주사(呪師)라는 표현이 주목되는데 이 둘은 다라니와 주술을 담당하는 승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통일기 신라에는 다라니, 의식 등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엄사는 9세기 화엄종찰 가운데 한 곳으로 언급되고, 수계를 주는 계단사원의 역할을 할 정도로 사세가 컸다. 따라서 서탑에 사리장엄구가 봉안되었을 당시 다리니 의식을 전문으로하는 승려를 초빙하여 『무구정경』 작단의식을 진행했을 것이다. 의식을 진행하는 승려는 『무구정경』을 암송하고 참여자들은 다라니를 필사하거나 종이에 탑인을 찍기도 하며 일부 참여자들은 손에 흙더미를 올리고 전불을 찍었을 것이다. 『무구정경』의식과 사리 봉안 의식이 종료되면서 결과물인 탑인, 다라니 필사본은 법신사리로, 불상틀은 기단부에 봉안되었을 것이다.



2) 동 오층석탑

동탑 사리장엄구는 나말여초,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봉안되었다. 나말여초 시기 구례는 후백제 지역으로 견훤과 그 호족세력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이들은 민중을 포용하기 위해 종교와 관계를 맺었고 이 행위 중 하나가 922년 미륵사 개탑과 승과고시인 선불장(選佛場)을 실시한 것을 살필 수 있다. 사리장엄구 봉안도 호족이 민중을 종교로서 포용하는 과정에서 봉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화엄사사적기』에는 1325년(충숙왕 12년)에 왕사인 조형(祖衡)이 왕명으로 감전(紺殿)을 지었는데 정확한 감전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왕실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가능하다. 고려시대에는 왕실 후원 아래 동탑이 수리되는 등의 과정으로 사리장엄구가 재봉안되었고, <금동광배>와 <연화대좌>가 이때 매납되었을 것이다.
17세기 중엽 벽암각성과 그 문도들에 의한 중수는 조선시대에서 사리장엄구를 재봉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엄사 중창불사의 시점은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이 벽암의 행장을 기록한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행장(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신년에 화엄사를 고치기 위해 돈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어 1630년부터 1632년은 시주를 모으는 기간이며, 예산이 확보되자 1632년부터 중창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화엄사사적기』 중창 불사 기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화엄사 승려들로서 이들은 전란 이후 화엄사를 지킨 98명의 승려(대덕 98명)이다. <동탑 중수기>에 대덕공주를 벽암으로 기록하고 있어 벽암과 그의 문도들이 중심이 되어 동탑을 중수하였을 것이다.
<동탑 중수기>에 석수, 집노, 조역, 화주를 제외하면 제작에 참여한 승려는 168명으로 대부분 『화엄사사적기』 중창기록에 언급된 승려들과 일치한다. 최근 발견된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석가불 시주질>(이하 ‘<시주질>’)과 <동탑 중수기>에 참여한 승려를 비교해보면 약 20명이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과 동탑 제작에 참여하였다. 경오, 두희, 언신은 『화엄사사적기』와 <시주질>에 기와를 제작하는 소임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지영은 단청화주로 기록되어 있다. 쌍조는 <시주질>과 <동탑 중수기>에서 모두 별좌를 담당하고 있다. 불상 제작에 참여한 승려는 대부분 <동탑 중수기>에도 등장하고 일부 승려의 소임이 일치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표 3>.

17세기 중엽 대웅전과 대웅전 불상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동탑 중수기>에도 등장하고 있고 그 인원도 여타 작품에 참여한 승려들보다 높다. 이는 불상과 대웅전이 제작되면서 동탑도 함께 중수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동탑은 벽암각성이 시주를 모아 불사를 시작하는 1632년부터 대웅전과 대웅전 불상이 완성되고 현판이 제작된 1636년 사이에 중수되었을 것이다. 대웅전과 대웅전 불상이 왕실 후원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 앞에 위치한 동탑도 이와 관련되어있을 것이다.
사찰에서 탑을 수리할 때 쌍탑 가람일 경우 함께 수리하는게 일반적이나 동탑에서는 서탑 사리장엄구와 공반연대를 가진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은 대웅전 앞 오층석탑(동탑), 각황전 앞 오층석탑(서탑)의 별개 구조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각 전각에 해당하는 탑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했을 것이다.
동탑 기단부에서 발견된 다량의 화엄석경이 이미 현 대웅전 위치에 자리했던 장육전이 소실되고 내부에 봉안한 화엄석경을 수습한 뒤 성물로서 동탑 중수 당시 매납했을 것이다. <청동 이중 원통형 사리합>과 <녹색유리사리병> 표면에 불에 그을려 손상된 흔적은 전란으로 탑이 도괴되면서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17세기 중엽 중수 당시 사리합과 사리병을 수습하여 직물로 포장하고 사리합 하부에 중수기를 넣어 재봉안했을 것이다. 특히 사리병을 직물로 포장한 것은 사리병이 조선시대에도 성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사리봉안이 『무구정경』이라는 경전의 영향이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새롭게 유행하던 불복장의 영향아래 봉안된 것이라 생각한다. <금동광배>와 <연화대좌>는 불상으로 세트로 매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대좌와 광배의 크기와 비례가 일치하지 않아 원래 불상 두 개를 넣었는지 등의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광배와 대좌에 금도금이 남아있어 17세기 중업 동탑 중수 당시 소중한 물건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이를 사리합과 함께 1층 탑신에 봉안했을 것이다.

6. 나가면서

구례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통일기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방대한 시간을 보유한 사리장엄구가 봉안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비록 정확한 사리장엄구의 출토 경위, 현황 파악은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아쉬운점으로 남아있다.
화려하고 공예기술이 집약된 통일기 신라 사리장엄구와 달리 구례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아름답고 화려한 공예품이 없고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기물과 기형이 주를 이루는게 특징이다. 인간의 염원, 바램 등을 담은 물건이 꼭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하는지에 의문점이 늘 있다. 종교는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의지처다.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봉안되었는지를 살피는 것 보단, 당시 사리장엄구를 봉안하면서 손에 쥐고있었던 흙, 향나무, 유리구슬 한 개에 담긴 염원을 이해하고 그들의 인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