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1년 8월(통권 20호)[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북간도 청년 시인의 죽음과 부활
: 시인 심연수와 동생 심호수
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1. 북간도의 두 청년 시인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차가운 감방에서 조선 청년 하나가 짧은 생을 마감했다. 북간도의 시인 윤동주(1917-1945). 그가 죽은 뒤 반년 가량이 지난 1945년 8월 8일, 만주국 왕청현 춘양진 기차역 근처에서 다시 한 청년이 군경의 총에 살해당했다. 또 다른 북간도의 시인 심연수(1918-1945).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원한 윤동주처럼, 심연수도 “마음 가운데 불의의 때가 묻거든 사정없는 빨래방망이로 두드려 씻어 주소서”
주1) 라며 깨끗한 삶을 염원했다.
심연수는 1918년 6월 28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심연수 일가는 고향을 떠나 십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만주 등지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1935년 심연수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일가는 간도 조선인들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용정에 정착했다. 1940년 스물 두 살의 뒤늦은 나이에 동흥중학교를 졸업한 심연수는 1941년부터 도쿄의 니혼(日本)대학전문부 예술과에서 유학했다. 1943년 9월 만주로 돌아와 교사로 일하다가 아내와 부모형제가 있는 용정으로 돌아오던 중 죽은 것이다. 해방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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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증명사진. 뒷면에 “1942년 4월 1일 도쿄에서”라고 적혀 있음[/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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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니혼(日本)대학전문부예술과 학생증(창씨명 三本義雄)[/caption]
1년 터울의 동년배인 두 시인은 생활권이 겹쳤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숭실학교, 서울연희전문 등을 거쳐 도쿄 릿교대학과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유학생활을 이어갔던 윤동주의 궤적과 뒤늦게 용정으로 이주해 도쿄로 향했던 심연수의 삶의 동선은 겹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났다. 두 시인이 만난 적은 없었지만, 용정에서 성장하고 있던 두 시인의 막내 동생들은 서로 친구로 지냈다. 그 동생들 덕분에 두 시인의 손때 묻은 유물들은 사후에나마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심연수가 남긴 자료 더미 속에 윤동주의 스크랩북이 남아 있다. 1938-39년 무렵에 신문에 발표된 문학이론, 비평론, 수필 등이 모여 있는 이 스크랩북은 윤동주가 직접 오려 붙인 것이다. 형들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두 시인의 막내 동생들은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윤광주는 형 윤동주의 스크랩북을 같은 학교에 다니던 문학친구 심해수에게 건네주었다. 심해수에게 건네진 스크랩북이 이후 심연수의 유고들과 함께 섞여 남게 된 것이다. 이 스크랩북은 윤동주가‘사실수리론’을 비롯해 당시 비평계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요절한 두 청년 시인들의 유고를 세상에 알린 것도 동생들이었다.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의 출판 경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도 간곡한 당부와 함께 맡긴 육필시집 원고와, 여기에 윤동주의 일본 유학 시절 원고를 더한 총 31편의 시가 연희전문의 동창 강처중의 주선으로 정지용의 발문을 달고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이 과정에서 당시 서울에 있던 동생 윤일주가 형의 동창들을 도와 유고집 출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윤동주의 유고시집이 출판된 직후인 1948년 12월에는 여동생 윤혜원이 용정에 남아 있던 육필원고와 노트3권, 스크랩철, 사진 등을 가지고 서울로 왔다. 그 덕분에 1955년 증보된 유고시집은 93편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윤동주가 불멸의 시인으로 부활하는 데에는 여러 동창들 뿐 아니라 동생들의 헌신이 있었다. 윤동주의 부활을 도운 사람이 여럿이었던 데 비해, 시인 심연수가 사후 56년 만에 시인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한 사람의 집념 덕분이었다. 심연수 시인의 동생 심호수. 형의 유고를 지키는 데 일생을 바친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2. 오지독에서 싹튼 시인의 부활
심호수는 1925년 1월 22일생으로 형 심연수보다 일곱 살 아래의 동생이다.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고향인 강릉 땅을 떠났다. 심호수는 열한 살 때 용정에 정착했고, 중학교를 마친 후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심연수의 유학경비조차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던 궁핍한 살림살이였다. 심연수와 용정집 사이를 오간 편지에는 구차한 살림을 알면서도 돈을 청하며 괴로워하는 심연수의 미안함과 돈을 보내지 못해 조바심하는 부모형제의 애달픔이 담겨 있다. 이런 와중에 심호수는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고학에 가까운 일본 유학을 끝마치고 심연수가 돌아왔다. 헌헌장부가 되어 돌아온 심연수는 결혼을 했고 존경받는 교사가 되었다. 행복한 미래에 대한 잠시의 희망은 해방 직전 만주의 어수선함 속에서 발생한 심연수의 돌연한 죽음으로 깨져버렸다. 그 가족들의 황망함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심호수는 아버지와 함께 형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다. 이후 심호수는 형이 남긴 유복자인 조카 심상룡을 보살폈다. 그가 보살핀 것이 조카만은 아니었다. 그는 형이 남긴 또 하나의 자식, 즉 시인의 유고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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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심호수가 보관해 온 심연수 시인의 자료 일부 이미지(출처: 강원도민일보, 자료소장: 심상만)[/caption]
심호수는 형이 남긴 원고와 자료들을 비료 포대나 시멘트포장지 등으로 꼭꼭 싸매어 큰 오지독 항아리에 넣고 땅 깊숙이 묻었다. 장마철에 눅눅해지면 꺼내어 말렸다가 다시 넣어 보관하는 일을 해마다 반복하며 반세기 넘게 자료를 지켜냈다. 역사적 격변이 거듭된 중국 땅 빈한한 농민이 감당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혁명을 위협하는 부르주아적 독아(毒牙)를 척결하자는 슬로건이 넘실대던 문화대혁명 시절은 특히나 위험한 순간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연변 조선인 사회에도 몰아쳤다. 심연수의 유고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일본 유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특무(밀정)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심호수는 문화대혁명 때 일본 유학 시절의 심연수 물건들을 내놓으라고 악착스럽게 시달리는 바람에 큰 고통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오지독 속의 심연수의 물건들이 발각되었다면 심호수의 목숨도 장담키 어려웠을 것이다. 심호수는 가족들조차도 어디 있는지 몰랐을 정도로 유고를 꽁꽁 숨겼다.
“누가 형님 유고를 침범할까봐 늘 그게 걱정이었어요. 행여 글씨라도 망가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살았지요. 나는 글은 잘 모르지만 형님 시를 보면서 힘을 얻었어요. 집사람이나 자식들로부터 ‘이제는 산사람이 살아야지’하는 하소연을 듣기까지 했지요.”주2)
심호수가 목숨을 걸고 지킨 유고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심연수의 유고는 열권으로 묶인 습작 시집을 비롯하여 소설, 비평문, 감상문, 1940년 한 해 동안의 일기와 심연수가 보내고 받았던 각종 편지와 엽서, 조선과 만주 일대를 경유한 수학 여행의 기록, 어린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의 각종 학습장과 읽었던 도서류 등 그 자료를 찍은 이미지만 8,000여 컷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만큼 다양한 장르의 방대한 육필원고와 내면과 생활상을 함께 볼 수 있는 생활 기록을 동시에 남긴 작가는 없었다.
심호수가 형의 유고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는 원고 상태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심연수가 펜으로 쓴 육필 시원고의 글씨는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잉크가 묻어날 것처럼 선명하다. 1999년 팔십을 눈앞에 둔 심호수는 형의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는 게 자기 삶의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 원고 몇 편을 베껴서 목단강출판사 등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단념하지 않고 60여 편을 베껴서 다시 연변사회과학원에 보냈다.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는 원고 검토를 거쳐 심호수가 가지고 있던 대량의 유고 진본을 확인한 후 ‘심연수문학연구소조’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문학예술연구소의 상무편집위원 김룡운이 친필원고를 분류·정리하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제1집 심련수문학편』
주3)이 빛을 보게 됐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 죽은 지 56년 만에 심연수가 시인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제 심연수의 문학을 살펴볼 차례다.
3. 타히티와 북간도
여러 해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폴 고갱 특별전시회를 관람한 적이 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순박한 원주민 여인들이 어우러진 원향으로서의 타히티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로부터 반 년 쯤 지나, 미국 아시아학회(AAS)에 참석했다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인상파 특별전에서 또다시 고갱을 만나게 되었다. 뉴욕의 고갱은 딴판이었다. 서울에서 본 것과 달리 뉴욕의 고갱 전시에서는 주술적이며 불가해한 느낌의 거칠고 야성적인 타히티가 느껴졌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서울의 전시는 평화롭고 안온한 원향적인 이미지의 타히티 그림 위주로 이루어졌다면, 뉴욕의 전시는 그보다 더 주술적이고 야성적인 타히티 그림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뉴욕에서 각기 다른 느낌의 고갱을 봤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건 윤동주와 심연수의 문학에서 떠오르는 북간도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학이 그린 북간도는 같은 곳이었지만 그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윤동주 문학에서 북간도는 어머니의 땅이자 완결된 사랑의 공동체였다. 윤동주 자신이 육필시집에 붙인 표제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곧 원향으로서의 북간도의 다른 이름이다. 윤동주에게는 파란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 빛나는 ‘별’이 어우러지는 북간도의 풍경이 곧 ‘시’였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라는 그의 결연함마저도 무언가 부드러움과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여 있다.
윤동주의 시에 비해 심연수의 작품은 다소 투박하고 남성적인 어조가 강하다. 그의 문학에서 북간도는 거칠고 야성적인 장소로 그려진다. 뒤늦게 알려진 만큼 심연수 문학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의 문학을 민족적, 저항적 관점에서 독해하며 그 가치를 고평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예술적 향기라는 면에서는 다소 떨어지나, 기록성 면에서는 귀중”
주4)하다며 심연수 문학의 희소성은 고평하면서도 문학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평가도 있다.
심연수의 시들은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이해할 여지가 다분하다. 또한, 문학적 완성도에서 부족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표현의 측면에서 다소 미숙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시에서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북간도의 거친 자연과, 그곳을 개척한 조선인 이주자의 슬픈 역사에 대한 연민, 현재의 가난에 대한 분노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향한 결의 등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민족주의적 저항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이 문제를 더 생각해 보자
눈보라
바람은 서북풍
해질 무렵 넓은 벌판에
싸르륵 몰려가는 눈가루
칼날보다 날카로운 이빨로
눈덮인 땅바닥을 갉아 간다.
막막한 설평선(雪平線)
눈물 어린 새파란 설기(雪氣)
추위를 뿜는 매서운 하늘에
조그마한 햇덩이가
얼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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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시 <눈보라>의 육필 원고[/caption]
심연수의 「눈보라」 전문이다. 해질 무렵 눈 덮인 넓은 벌판 위로 눈보라가 몰아친다. 얼마나 매서운지 “칼날보다 날카로운 이빨로” 땅바닥을 갉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때 시퍼런 눈발(雪氣) 가득한 ‘막막한 설평선’ 위에 ‘조그마한 햇덩이’가 보인다. 이 얼어 있는 작은 덩어리는 언젠가 이글이글 불타는 햇덩어리가 되어서 눈덮인 산하를 녹일 것이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거칠고 야성적인 북간도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가 잘 상징화 되어 있다.
「눈보라」의 ‘겨울’과 ‘해’라는 익숙한 대립적 심상은 심연수 문학을 민족적 수난과 저항의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유혹하는 측면이 있다. 어선에 실려 동해를 건너온 자기 가족의 체험을 그린 시 「만주」에 이르면 이런 독법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서글퍼 가엾던 부모 형제/헐벗고 주림을 참던 일/지금은 뼈아픈 눈물의 기록/잊지 못할 척사(拓史)의 혈흔(血痕)이었다”라며 ‘슬픈 유랑’의 역사에 대한 깊은 공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굳이 검열 등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 시가 그 이주의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각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또한, “拓史의 血痕이었다”라는 과거형으로 이루어진 표현에서는 개척 혹은 정복의 객체인 만주가 잠재되어 있고, 그 개척의 과정에 피를 뿌린 조선 이주자를 주인으로 간주하는 잠재적 인식이 함께 담겨 있다. 「해란강」, 「대지의 모색」, 「대지의 봄」 등에는 부모들의 고난의 개척의 과정과 함께 그곳에서 태어난 청년들의 미래를 향한 희망과 포부가 담겨 있다.
어렵사리 북간도에 정착한 가난한 조선 빈농가의 아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심연수가 1940년도 1년 동안 썼던 일기에서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하고자 하는 가난한 농가 출신 청년의 의지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생존경쟁이 날로 심해가는 이때에 절대로 낮잠을 철폐할 것”(6월 17일 일기)을 다짐하고, 6월 달력을 보며 “일년을 두고 할 일을 반이나 하였는가”(6월 19일 일기)라고 책망하는가 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는 구절을 적으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일기에서 읽히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적 주체의 자세라기보다는 개인적 노력으로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윤리적 태도를 지닌 청년의 자조(自助)의 의지이다. 이 말이 심연수에게 민족의식이 없었다거나 식민주의를 내면화했다고 오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입신과 성공에 대한 욕망은 성장기의 청년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동흥중학교 졸업을 기념해 만든 <기묵집>
주5)을 참조하자면, 이는 당시 북간도 조선 청년들에게도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들이다.
그들은 개인적 성공과 더불어 척박한 자신들의 고향(北鄕)을 풍요롭게 만들자고 다짐했다. 심연수의 경우에도 집안의 가난도 해결하면서 자신의 삶도 의미있게 일구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그에게 문학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윤리적인 성공의 길이었다. 북간도 청년들이 처한 척박한 자연 환경과 빈궁한 사회적 환경에 대한 극복 의지를 곧장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의지로 간주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여기’의 한국사회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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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기묵집>(1940) 표지[/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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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기묵집>의 서문 및 설문 문항[/caption]
4. 백년 동안의 유랑
윤동주의 시비는 동아시아 도처에 있다. 중국 명동촌의 생가, 서울의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육필 원고를 보관했던 광양 술도가 자리,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과 하숙집터, 소풍을 갔던 우지(宇治)시 강변, 그리고 옥사한 후쿠오카 감옥 등에 그의 시비가 서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자 했던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마음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때때로 내게는 이 기념비들이 윤동주를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기억 전쟁의 첨병처럼 보일 때가 있다.
윤동주는 어느 나라의 시인일까? 해답이 자명한 질문 같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복잡한 문제다. 그의 본적은 함경도 청진이고 북간도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살았을 때의 국적은 일본이었고, 죽은 뒤에 그가 나고 자란 공동체는 사회주의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라고 새겨진 연변 생가의 시비를 보는 심사도 복잡하지만, 이를 동북공정이라고 비판하며 ‘한국인’이라는 내셔널리티를 자명하게 여기는 인식도 불편하다.
어쩌면 윤동주는 현재의 국민국가의 내셔널리티로 귀속시킬 수 없는 “북간도의 시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심연수는 어떠한가? 태어난 고향인 강릉에 다녀온 감회를 적은 시와 산문도 남아 있지만, 아무래도 그 역시 북간도 정주자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에게도 북간도는 고향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고갱이 타히티 원주민을 보듯이, 바로 그 외부자의 위치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북간도의 두 시인과 문학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만주로 이주했던 많은 이들이 한반도로 귀환했다. 남북한으로 돌아온 그들은 주류로 진입하지 못한 주변인의 위치에 놓였다. 북한으로 돌아온 그들은 사회적 성분에서 북한 정주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취급을 받았다. 그들 많은 이들이 평양 등 중심부에서 밀려나 변방에 머무르다가 ‘고난의 행군’ 시절 탈북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사회에서 중국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대우 역시 북한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심호수도 2007년 귀국하여 4년 여간 한국에 거주하였지만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되돌아가 2015년 2월 15일 용정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인 심연수의 생애는 강릉에서 블라디보스톡, 용정, 도쿄 그리고 다시 만주로 이어지는 이동의 역사였다. 각각의 장소에서 남긴 시에서 심연수는 그리운 ‘고향’을 노래했다. 그의 시에서 반복되는 그리운 고향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강릉일까, 북간도의 용정일까? 그의 작품 「국경의 하룻밤」은 조선/북간도의 사이에서 디아스포라의 경계론적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시처럼 읽힌다. 마지막으로 심연수가 그 경계에서 뒤척이며 귀 기울였던 두만강의 물소리를 함께 들어보자.
두만강 네 아니 몇만 년 흘렀댔니
이 강을 건너던 이 울더냐 웃더냐 응
나는 건너면서 울음과 웃음 새었다
밤은 깊어 간다 그러나 깨어 있다
흐르는 물소리는 밤공기를 가볍게 치다
아 나는 왜 자지 않고 이 밤을 새우려 하나
(심연수, 「국경의 하룻밤」 전문)
<미주>주1) 심연수, 「빨래」(1940년 7월 24일 창작) 전문은 다음과 같다. “빨래를 생명으로 아는/조선의 엄마 누나야/아들 오빠 땀 젖은 옷/깨끗하게 빨아주소//그들의 마음 가운데/불의의 때가 묻거든/사정없는 빨래 방망이로/두드려 씻어 주소서//”주2) 박미현, 「[抗日 현장을 가다]옹기속 56년…시집형태 창작집 최초 확인」, 『강원도민일보』, 2001. 7. 12.
주3) 이 책은 제6부로 나눠 제1부 시편 174편, 제2부 기행시초편 64편, 제3부 소설수필편 단편소설 4편·수필6편·평론1편, 제4부 기행문편 1편, 제5부 편지편 26편, 제6부 일기편 1940년 1월1일∼1940년 12월 31일이 수록돼있다. 이어 부록으로 심연수가 베낀 姜瑛熙의 희곡‘희생’이 실렸다.
주4) 오오무라 마스오, 「심연수의 일본관」, 제7차 심연수 국제학술세미나(2007. 12. 4 프레스센터 세미나실)
주5) 동흥중학교 졸업 당시 심연수는 50여명의 졸업생들에게 4년여 동안 함께 생활한 기념이자, 향후 평생의 知己로 지내기를 염원하며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을 만들어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심연수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기묵집」은 1. 본명(童名) 및 본관, 2. 현명(지금 부르는 이름) 3. 별명, 4. 생년월일, 5. 출생지, 6. 현주소, 7. 探逢所(현 주소가 변하여서 거주지를 모를 때 찾을 곳) 8. 가업, 9. 목적, 10. 간단한 경력, 11. 숭배하는 명인, 12. 자기의 표어 及 信吟하는 금언 13. 취미, 오락, 14. 嫌嗜物(短文으로 써도 좋다) 등의 총 14개의 항목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동창생들의 답을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