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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물 열전③] 조위총, 의로운 충신인가? 아니면 반역자인가?_서희종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8.06 BoardLang.text_hits 3,891
웹진 '역사랑' 2021년 8월(통권 20호)

[고려 인물 열전] 

 

조위총, 의로운 충신인가? 아니면 반역자인가?


 

서희종(중세1분과)


 

때는 명종 4년(1174) 9월, 한 무신이“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전왕을 시해하고 장사지내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를 외쳤다. 이 말을 외친 사람은 바로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 ?~1176)이었다. 이 말을 시작으로 사서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고려사』에 입전될 정도로 당대 고려사회를 뒤흔들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외침으로 서경과 양계는 개경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려의 국경지대는 그야말로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무신집권자인 이의방과 정중부의 존립을 위태하게 만들었다. 대의를 표방한 조위총은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이고, 그의 행동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조위총(趙位寵, ?~1176), 그는 누구인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조위총의 행적은 의종 말에 병부상서로서 서경유수가 되었다는 점 외에 확인되는 바가 없다. 다만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던 중 반란군에 생포된 최균(崔均, ?~1174)이 조위총을 항오(行伍) 출신으로 언급하는 점을 통해 조위총이 항오, 즉 군졸에서부터 성장한 무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caption id="attachment_8952" align="aligncenter" width="566"]그림 1. 『고려사』 권100, 열전13, 최균. 조위총의 출신인 ‘항오’부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caption]

항오 출신인 조위총이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말에 병부상서로서 서경유수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의종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한미한 항오 출신으로 의종의 신임을 받아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까지 오른 조위총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기 4년 전인 의종 24년(1170)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는 의종 24년(1170) 9월, 보현원(普賢院)에서 이고(李高, ?~1171)·이의방(李義方, ?~1174)·정중부(鄭仲夫, 1106~1179)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왕의 측근들을 살해하며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곧바로 개경으로 들어가 문신 50여 명을 살해하고 궁궐을 장악한 후 의종을 폐위시켜 거제현(巨濟縣)으로 유배보내고, 태자는 진도(珍島)로 추방하였다. 이들은 의종의 동생인 익양후를 왕(明宗, 재위 1170~1197)으로 옹립하고 주요관직을 차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하지만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무신정변 직후 환관 왕광취(王光就, ?~1170)를 비롯한 환관 및 내시 10인이 이고, 이의방, 정중부를 토벌하거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명종 3년(1173) 8월에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 ?~1173)이 동계 화주(和州)에서 이의방과 정중부를 토벌하고 의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병하였고, 김보당은 장순석(張純錫, ?~1173)과 유인준(柳寅俊, ?~1173)을 거제로 유배 간 의종을 경주(慶州)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은 이의방의 대처로 1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 북쪽 연못가에서 시해되었다.

조위총은 서경에서 무신정변, 의종의 폐위와 시해, 김보당의 거병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특히 조위총은 김보당이 거병 1개월 만에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신정권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인지하였을 것이며, 이에 1년 동안 거병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 마침내 명종 4년(1174) 9월에 조위총은 이의방과 정중부가 의종을 시해하고 국왕의 예로 장사지내지 않은 점을 명분으로 하여 서경에서 양계 주진군을 동원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거병 그리고 양계 주진군의 동조

조위총은 서경에서 거병한 뒤, 동북양계 주진에 격문을 보내어 자신의 뜻에 동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듣건대 개경[上京]의 중방에서 ‘북계 여러 성이 모두 다 사나우니 토벌해야 한다.’고 의논하여 이미 군대를 크게 일으켰다고 하니 어찌 편안히 앉아서 스스로 주륙당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각자의 군사와 말을 규합하여 속히 서경에 이르라”


- 『高麗史』 권100, 열전13, 조위총.


이 격문을 전달받은 절령(岊嶺) 이북의 북계 40여 성과 동계 20여 성주1)의 도령(都領)들은 곧장 자신들의 휘하 주진군을 이끌고 조위총에게 가담하였다. 북계 주진 중 연주(延州)만이 조위총의 뜻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였다. 여기서 도령은 양계 주진의 재지세력이며 주진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말한다.

조위총이 작성한 격문의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위총의 격문은 양계지역의 주진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선동에 불과했다. 조위총은 김보당이 화주를 제외한 지역의 주진군을 동원하지 못해 정변을 성공시키지 못하였음을 인지하고 양계 주진군을 자신의 군사기반으로 포섭하여 반란을 성공시키고자 하였다.

양계 주진군의 도령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조위총의 격문에 반응하여 반란에 가담하였다.주2) 첫째, 양계 도령들은 조위총의 격문을 보고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하여 스스로 방어하려는 자위적 목적주3)에서 조위총에게 가담하였다.

둘째, 무신정변 이후 양계지역에 파견된 무신출신 지방관으로 인해 증폭된 양계지역의 불만이다. 본래 문신만이 지방관으로 파견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보당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무신들도 지방관으로 속속 파견될 수 있었다. 당시 많은 무신출신 지방관이 지방에서 횡포를 자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종 7년(1177) 4월 장군 홍중방(洪仲方, ?~1179)은 동북 양계 주진에는 무관을 임명하지 말자는 건의를 하는데, 이때가 조위총의 반란이 마무리된 시점인 것을 감안하면, 조위총의 반란과 무신출신의 지방관 파견이 일정한 관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양계지역이 중앙으로부터 번(蕃)으로 인식되어 차별받았다. 본래 고려에서 번(蕃)은 양계 내에 여진인을 거주하는 지역이나 기미주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양계지역이 번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인종(仁宗, 재위 1123~1146) 중⸱후반부터이며,주4) 이러한 인식은 점차 중앙에서 양계 재지세력을 차별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현덕수(玄德秀, ?~1215)가 이부낭중으로 임명되었으나 변성인이라는 이유로 병부낭중으로 옯겼다가 사재소경으로 전임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위총과 양계 도령은 각기 다른 조건에 처해있었지만, 중방의 집권무신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일한 목적 속에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개전. 조위총의 선전과 배후의 칼날

조위총은 명종 4년(1174) 9월 25일에 반란을 일으킨 직후 곧바로 개경으로 출병할 계획이었으나, 조위총과 개경 관군의 첫 교전은 11일이 지난 10월 5일 절령에서 이루어졌다. 반란을 일으킨 이후 11일 가량 흐른 후에 첫 교전이 발생한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가장 주요한 요인은 조위총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연주의 존재였다. 조위총의 입장에서는 배후에 있는 연주가 거병에 호응하지 않는 한, 배후에 적을 두고 전쟁을 수행하는 셈이었다. 연주의 회유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조위총은 연주도령 현담윤(玄覃胤, ?~?)⸱현덕수 부자에게 2차례에 걸쳐 거병에 가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현덕수는 조위총의 사신을 살해하면서 반란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8953" align="aligncenter" width="567"]지도 1. 조위총에게 호응한 양계 지역과 개전 초기의 전황(지도출처 : Google Earth)[/caption]

연주(延州)의 행동으로 얻어진 이 11일의 시간은 개경에서 진압군을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개경에서는 반란소식을 접한 뒤 3군을 편성하고 윤인첨(尹鱗瞻, 1110~1176)을 원수로 삼아 서경을 진압하게 하는 한편 최균에게는 동계 주진을 회유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조위총은 직접 절령을 방어하였고, 동계에 군대를 출병시켜 관군을 방어하게 하였으며, 안북도호도령 강우문(姜遇文) 등 34성의 도령들에게는 연주에 대한 회유 및 공격을 맡겼다. 그 결과 조위총은 절령에서 윤인첨의 3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동계 지역에서도 조위총의 반란군이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동계 주진들도 대거 조위총에게 호응하였다. 개경에서는 동계 일대에서 관군이 패전하자, 두경승을 급파하여 고산(孤山)과 의주(宜州)를 함락시키자 동계 일대의 여러 주진이 항복하였고, 그 길로 북계로 진입해 맹주(孟州), 덕주(德州), 무주(撫州)를 함락시켰다.

조위총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경 서쪽 근교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반란군과 내통의 여지가 있는 서경출신 관료를 모두 죽이고 출병하여 조위총에 맞섰다. 이에 조위총이 응전하였으나, 이의방의 기습으로 이미 기선은 제압되어 서경으로 회군하고 만다. 이의방은 기세를 몰아 조위총을 추격하여 대동강 일대에서 한 달동안 주둔하며 교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위총의 아들인 조경과 장군 우위선(禹爲善, ?~1174)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그러나 양군의 일진일퇴 속에 추위가 찾아왔고, 이에 이의방은 끝내 서경공략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하게 된다.

이처럼 개전초기 조위총은 절령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곧바로 개경을 공격하는 등 크게 선전했다. 특히 개경을 공격한 것은 자신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과 합치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조위총은 배후의 연주를 회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계 일대를 상실했다는 점은 앞으로의 향방에 큰 실책이자 전황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분의 약화와 지구전 돌입

명종 5년(1175)에 접어들면서 조위총은 전황이 지구전에 들어가고 있음을 짐작했다. 이미 명종 4년 11월에 윤인첨과 두경승을 필두로 편성된 새 관군이 동계를 거쳐 연주(連州)를 포위하고 있었다. 특히 연주(連州)는 서경을 기점으로 청천강 이북의 연주(延州)와 무주를 거쳐 운주(雲州)까지 연결되는 운중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교통상 요충지이기에주5) 관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함락시켜야 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종 5년 정월에 명종은 조위총에게 이의방이 주살되었으니 이제 그만 군사를 거두고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여기서 조위총은 자신이 대의로서 거병을 일으켰기에 군사를 거둘지 말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자 조위총은 곧 항복하겠다는 표문을 보냈으나, 그는 아직 정중부도 살아있다는 점과 의종의 국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항복을 철회했다.

[caption id="attachment_8954"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2. 『高麗史』 권100, 열전13, 조위총. 명종 5년 정월 이의방의 주살과 명종의 항복조서 부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caption]

그 후 2월에 조위총은 연주(延州)를 공격하였으나 현덕수의 저항에 패전하였다. 3월에는 윤인첨⸱두경승이 연주(連州)를 포위하였다. 이때 관군과의 교전에서 1,500여 명이 전사하고 250명이 포로로 잡혔다. 4월에는 조위총의 반란군은 망원(莽院)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아 700여 명이 전사하고 6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조위총이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전열을 미처 가다듬지 못한 5월에 의종이 국상이 전개되었다.

조위총이 이의방의 주살과 의종의 국상, 이 두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반란 목적의 일부를 달성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반란을 지속할 명분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위총은 여기서 반란을 멈추지 않았다. 정중부가 아직 생존해 있었고주6) 조위총 자신이 그 두 가지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위총의 위험한 선택과 자멸

명종 5년 정월부터 5월까지 거듭된 패전에서 조위총은 반란을 지속되었다. 그러나 명종 4년 11월부터 동왕 5년 6월까지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끈 관군이 포위했던 연주(連州)가 함락되자 점차 전세가 관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게다가 연주(連州)가 함락되자 북계의 여러 성이 대거 투항하였다. 윤인첨과 두경승은 곧장 서경을 포위하였다. 윤인첨은 서경에 대한 포위와 회유 작전을 병행하였고, 그 결과 조위총은 장기간 포위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 심지어 시체를 먹으면서까지 서경에서 항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포위가 장기간 지속되자 서경 내 반란세력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거 관군에 투항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위총은 명종 5년 9월에 절령병마사 강점(康漸, ?~?)과 교전하여 승리했지만, 함종현(咸從縣)의 요해처인 봉황두(鳳凰頭)가 함락되면서 약 3,0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특히 봉황두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조위총에게 붙어 있던 북계 주진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관군에 투항하기에 이른다.

조위총은 불리해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3차례에 걸쳐 금에 원군을 요청하고 북계 40여 성을 귀부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caption id="attachment_8955"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3. 『高麗史』 권100, 열전13, 조위총. 조위총이 3차례에 걸친 금에 사신파견 내용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caption]

조위총은 의종의 국상이 이루어진 직후에 금에 사신을 파견해 북계 40여성 에 대한 귀부 의사를 타진하고 그에 따른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사신 임무를 맡았던 의주도령 최경약(崔敬若, ?~1175)이 의주 관문에서 피살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1차 사신 파견이 실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윤인첨과 두경승이 포위했던 연주(連州)가 함락된 여파로 청천강 이북 북계 주진들이 대거 항복하였다. 이때 조위총은 점점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에 그는 김존심(金存心, ?~?)과 조규(趙規, ?~1175)를 금에 보내 의종이 폐위되고 시해된 일을 알리게 했다. 그러나 사행 도중 김존심이 변심하여 조규를 살해한 뒤 개경으로 도주하였다. 2차 사신 파견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위총은 격분하여 김존심의 처자를 살해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사신파견이 실패한 조위총은 약 3개월 간 서경을 포위한 윤인첨 및 두경승과 교착상태에 빠졌다. 명종 5년 9월에는 서경 일대의 방어 요충지인 봉황두에서 대패하여 3,000여명이 전사하는 뼈아픈 타격을 받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위총은 서언(徐彦, ?~?)을 다시 금에 파견했고, 이번에는 금 세종(世宗, 재위 1161~1189)에게 표문을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금 세종은 조위총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사신단을 고려로 압송하였다.

금 세종은 이미 조위총의 반란에 관한 사안과 북계 일대의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더해 금과 남송 간의 국교가 안정된 상황이었으며, 명종이 금으로부터 책봉받은 상황이었기에 금 입장에서는 고려와의 관계를 번복하기 어려웠다.주7) 즉, 금은 고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않음과 동시에 남송 및 고려와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자 조위총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다.

조위총의 대금 강화 시도가 실패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란에 가담했던 북계 주진의 이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조위총은 남은 세력을 수습하여 서경에서 항전하였으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조위총은 이미 이탈한 양계 주진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끝내 조위총은 서경에서 홀로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에 대해 항전하였다. 명종 6년(1176) 3월 조위총이 서경 밖에 출전하여 관군을 이겼으나 북계 주진은 호응하지 않았다. 이때 승전한 지 3개월 뒤인 6월, 서경을 포위한 관군이 대대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을, 두경승은 서경의 보통문을 격파하여 끝내 서경을 함락하였다. 조위총은 서경 안에서 결사 항전하지만 결국 사로잡혀 참수됨으로써 그가 벌인 2년간의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조위총, 그는 충신인가 반역자인가

고려를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조위총, 그는 과연 충신이었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반역자였을까? 필자는 조위총이 의(義)로 시작했으나, 역(逆)으로 끝난 인물이라 생각한다. 조위총은 처음에 충의로써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반란을 지속하다가 북계 40여 성을 금에 내속시키려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의 이러한 평가는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평가에 얽매인 것일 수도 있다. 『고려사』 열전에 조위총이 반역전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두 사서에서는 조위총의 격문과 반란명분을 특기(特記)하고 조위총의 반란군을 ‘서적(西賊)’이 아닌 ‘서병(西兵)’으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행위가 반역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두 사서의 찬자들이 조위총의 격문내용과 반란명분을 취사선택해서 실었을 여지를 남긴다. 그러므로 조위총에 대해서는 두 사서의 내용을 토대로 면밀한 평가가 필요하다.

조위총의 반란을 끝으로, 집권 무신을 부정하는 정치적 변란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조위총은 반란이 진압된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행위는 초기 무신집권자들의 위상과 정치적 특징을 평가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미주>

주1) 김용선 편저, 「崔甫淳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제5판)』,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351쪽.
주2) 서희종, 「고려 무신집권기 조위총(趙位寵) 반란의 성격과 그 의미」, 『사림』69, 2019, 131~137쪽.
주3) 최종석, 「고려전기 지역방어체계의 특징」, 『사림』40, 2011, 138쪽.
주4) 양계지역이 번으로 인식되는 것은 정언심묘지명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김용선 편저, 「井彦深墓誌銘」, 『(속)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6, 56쪽).
주5) 한정훈, 『고려시대 교통운수사 연구』, 혜안, 2013, 230쪽.
주6) 조위총은 정중부 외에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이 존재도 염두해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서희종, 앞의 논문, 2019, 143쪽, 각주 97).
주7) 서희종, 위의 논문, 2019, 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