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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120호) 시론] 제국의 시선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 램지어 사태가 보여주는 것_한혜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8.06 BoardLang.text_hits 12,031
웹진 '역사랑' 2021년 8월(통권 20호)

[『역사와 현실』(120호) 시론] 

 

제국의 시선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


: 램지어 사태가 보여주는 것


 

한혜인(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인정투쟁의 시작

산케이(産経)신문은 미국의 하버드대학 로스쿨 램지어 교수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성계약」 이라는 논문을 이례적으로 논문 내용까지 요약해 실으면서 “전문연구자의 사독(심사)를 거친 논문으로,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성노예=‘위안부’설을 부정한 학술논문”이라고 소개했다.주1) 성노예가 아니라는 주장이 공인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은 저자가 하버드대학 로스쿨 교수의 미국 학계의 심사를 거친 학술논문이라는 것은 공인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똑같은 이유로 한국은 격렬히 반응했다. 미국, 하버드, 미국학계는 공인의 중요 요소고, 우리는 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이런 상황을 관찰한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램지어가 하버드라는 브랜드를 악용한 것이라고 했다.주2)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비판하기 위해 열린 일본학자들의 학술행사 제목을 「이제 듣기도 지겹다!‘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설(說)」이라고 할 정도로, 사실 공력을 들여 비판할 정도로 새로울 것이 없다. 게다가 사실관계, 사료인용, 사료해석 등 학술논문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여러 전문가에 의해 지적될 정도로 완성적이지도 않았다.주3) 하버드대학 로스쿨 내 10개 단체에 이어,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의 학계와 시민단체들은 램지어 교수에게 항의 및 해당학회에 논문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해당 학술지(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는 위의 반론들을 받아들여 예정되었던 3월 발간을 미루고, 수정하여 다시 제출할 것을 램지어 교수에게 요구한 상태이다.주4) 램지어 교수가 수정제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의 그의 움직임을 보면 최종본이 인쇄되는 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램지어 교수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보다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글은 2019년 「위안부들과 교수들」이다. 이 글에서 보면 그가 일본군‘위안부’관련 글을 쓴 이유는 피해자 지원운동을 하는 측의 ‘폐쇄성’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램지어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 우익단체인 국제역사논전연구소(国際歴史論戦研究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논문을 내면서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폭력’적이었고, 전체주의적이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실’을 밝히기 위해 더욱 힘쓰겠다고 했다.주5) 앞으로도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는 예고다.

 

정체성 정치의 안쪽

일본군‘위안부’와의 전선은 공창제(매춘부), 성노예와 강제동원(연행)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램지어 교수도 계약과 게임이론을 들고 나온 것도 성노예와 강제동원의 사실을 부정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피해국가 중 이 전선은 한반도와의 관계에서만 생겨난다. 일본군‘위안부’를 성노예라고 하지 않으면 정말 역사부정일까? 성노예 용어를 지키기 위해 전선에서 싸우지만, 이용수씨 등 피해자 본인과 유족들은 성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주6) 그 이유로 한국정부의 공식 용어는 일본군‘위안부’이다. 따라서 누가, 무슨 의도로 성노예가 아니라고 하는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일본 우익이 역사 왜곡이라는 이유로 집요하게 공격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 정신대는 우리가 대중사회 속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던 용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신대는 프로파간다 용어이다. 이 용어를 법률용어로 만들어, 1944년에 여자근로정신대령을 발령하여 모집했다. 해방 후 조선에서는 프로파간다 용어로 사용해 왔던 것을 일본이 법률용어로 해석해서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안쪽에는 일본군‘위안부’는 법적 책임을 져야할 제도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깔려 있는 것이다. 새로 발견된 문옥주씨의 증언에서 보면 업자가 가져온 계약서가 입대서였다. “마쓰모토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용지와 인주를 내놓고 나를 손짓해 부르더군요. 그게 뭔데예, 나는 들마루에가에 다가서서 물어봤지요. 별거 아니여 읽어볼까? 본인은 황국신민의 의무와 천황폐하께 충성을 바치기 위해 결성된 근로정신대에 입대하나이다. 양면괘지에 펜글씨로 적혀 있도군요 나는 서슴지 않고 손도장을 눌렀지요.”주7)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를 정신대로 부르는 것은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위안부’라는 비극과 터부를 받아들이고 방법, 즉, 제국의 강제와 그걸 수용한 식민지민의 자발의 양가성, 해방 이후 답답한 한국 사회 속에서 소거시킨 성(性) 등이 더케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슬픈 단어다.

 

‘믿을 수 있는 책임(credible commitment)’의 조건

램지어 교수는 위안부 연구에서는 생경한 이론인 게임이론을 분석틀‘위안부’와 업주의 계약관계를 분석했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는 램지어 논문의 계약론의 문제점을 3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증거 사료로 계약서를 제시도 검토도 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여성이 계약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 친권을 가진 친족·업자·소개업자에 의한 계약, 이미 성매(매춘)하고 있는 경우는 포주가 교섭에 깊이 관여, 세 번째로 이와 같은 예창기 계약이나 ‘위안부’계약은 시민 사회의 통상의 계약이 아니고, 여성의 노예적 구속을 초래하는 범죄적인 인신매매 계약이라는 것을 무시했다는 점이다.주8) 요시미 교수의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문옥주는 황국신민의 의무와 천황폐하께 충성을 바치기 위해 결성된 근로정신대에 입대한다고 서슴지 않고 손도장을 눌렀다고 했다. 문옥주에게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책임’은 천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인‘위안부’를 끊임없이 예외적 존재로 만들어 갔다.

 

위안소는 군의 내무규정으로 관리되는 군시설

요시미 교수는 군위안소를 군직영, 군전용, 점령지 민간 매춘숙의 일시지정 등으로 나누고 군직영과 군전용을 관리하는 업자는 군에 의해 통제를 받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위안부를 고요계약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주보규정이 개정된 1937년 이후는 위의 어느시설이던지 각 부대의 내무규정에 따라 관리되기 때문에 군의 관여 여부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기존의 연구에서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든 목적으로, 성병예방, 전장지의 성폭력 방지,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을 든다. 이는 일본군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로,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전쟁비용 절감에 있다. 중일전쟁이 확산되어 현역병 이외에도 예비역, 후비병 등을 동원하였다. 병력 부족으로 전투 후, 교환되어야 할 군대를 비용의 절감을 목적으로 장기주둔을 시키면서 군대 내의 불만, 폭력 등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 「주보규정」의 전면개편이었다. 물론, 만주사변 이후 일본 육군은 서양의 군대보다 기술로나 체력적으로 열세이기도 하고, 또한 후방 병참 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군 조직을, 총력전 체제로 구상해 가면서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두었다. 1937년 중일전쟁의 장기화 기미가 보이자, 육군은 군대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현역병보다 예비역, 후비병 등이 많은 수가 동원될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기 풍기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인식했다.주9) 군기 풍기에 대한 대비를 전투에 대한 보상과 군의 본국 회전 등으로 하는 대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군대 내에 ‘위안’시설을 만드는 것으로 대체했다. 따라서 1937년 「야전주보개정」을 통해 야전주보로 ‘위안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했다.주10) 개정 제1조에서 주보로 ‘위안시설’을 두는 이유로 “적과 서로 전투태세에 임해 있는 동안 군의 위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부대별로 ‘위안시설’을 두어, 야전주보가 단순히 필요 물건, 물품 만을 주는 역할이 아니라, 적과 전투하기 위해 대진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군인들의 긴장, 공포 등을 누구러뜨릴 수 있는 심리관리 면을 고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지 뿐 아니라, 사변지에도 설치할 수 있도록 했고, 소괄장관은 군사령관, 사단장, 병참감 및 그에 준하는 병단장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야전주보규정」에서 정하지 않은 사안들에 관해서는 각 군대의 「내무규정」에 따르도록 했다.

야전주보의 운영은 원래 군 직영이었는데, 개정에서는 ‘폐해가 생길 염려가 있어 허가제로 하여’ 자영을 원칙으로 했다. 자영으로 하는 업자는 군에서 엄밀하게 선별하고, 그 업자에 대한 관리와 감독은 부대의 경리부장이 담당했다. 따라서 군대의 경리부장의 업무로는 1. 주보의 개설, 2. 위안소의 설치, 위안단의 초치, 연예회의 개최, 3. 휼병품의 보급과 분배, 4. 상인의 감시로, 위안소의 설치가 주보설치와 함께 경리장교가 해야할 정식 「작전급양업무」로 되었다.

위안부의 동원에 관련해서는 경리부장을 역임한 시카우치는 위안소를 설치한 후 “조달하는 여성의 내구도, 소모도” 등을 고려해 군인군속의 내무규정을 정했다고 증언했다.주11)

주보규정에서 규정하는 위안시설을 각 부대의 경리부장의 담당업무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동원되는 여성이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 얼마만큼 사용했는지, 사용할 수 있을지를 가늠해서 군인, 군속이 이용할 수 있는 규칙(위안소 규칙)을 정했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위안부’에 대한 고용, 안전 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8년 4월 16일 ‘군 이외에도 이용할 수 있는 주보 위안소의 문제’로 난징 총영사관에서 육해군 외무성 3성 관계자 회동을 통해 위안소를 둘러싼 업무분장을 했다.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주보 및 위안소에 관해서, 일반적 사항은 영사관이 관리하고, 헌병은 군인군속을 단속하지만, 헌병이 언제나 위안소를 점검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 그리고 그 중 일부를 특종위안소로 편입, 정리한다는 것으로 현재 있는 여러 종류의 위안소를 점차적으로 군이 경영하는 특종위안소로 해 간다는 의미다.주12) 이와 같이 영사관, 헌병 등 관련 기관의 업무분장 등 규정이 만들어져 가는 사이에 ‘위안부’의 상품성 즉 ‘내구도와 소모도’를 고려한 군인군속에 대한 단속(안전, 성병검사)은 정하고 있지만, ‘위안부’를 인간으로 취급하면서 그 고용과 안전을 위한 정책은 전혀 마련되고 있지 않았다.

 

‘위안부’의 동원 : 기존 제도와는 무관한 ‘주보품’으로서 취급되다.

야전주보규정 개정으로 군의 야전주보로 위안소가 설치되고, 이후 그 위안소에서 일하게 되는 ‘위안부’의 조건을 규정했다. 1938년 1월 19일 ‘상하이 파견군 내 육군 위안소에 있어서의 작부모집에 관한 건’에서 일본군은 위안부로서의 자격으로 나이는 “16세부터 30세까지, 전차금 500원부터 1000원까지, 취업 기간은 2년, 소개수수료는 전차금의 1할을 군부에서 지급”한다는 내용으로 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업자가 일본 내지 와 조선에서 모집하다가, 일본 내지의 형법위반(미성년 약취, 공창이 될 수 있는 연령 18세 이상)에 해당하고, 국제법(추업을 목적으로 하는 부녀자 도항 금지)도 위반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한 지방 경찰이 군에 질문을 하는 등, 상황을 보고했다.(와카야마 사건) 일본군은 국내외적으로 불법상태가 되는 것을 고려해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으로 “21세 이상 이미 매춘에 종사하고 있고, 본인의 승낙이 확인되는 사람”으로 ‘위안부’가 되는 자격을 정했다. 이 규정은 그러나 일본내지에만 적용되었다.

1944년 조선의 마이니치신문과 경성일보에서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려있는데, 여기에서의 연령은 17세-21세 여성, 18세-30세 여성으로 정하고 있었다. 신문기사에 내무성통첩에서 정한 21세 이상의 여성이라는 규정에 따르지 않고 광고를 낸다는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위의 내무성 통첩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1946년 아유타야 포로수용소의 위안부, 1946년의 유수명부의 위안부(명부에는 고용원으로 표기)의 연령 등을 비교해 보면 16세, 17세,18세의 여성이 가장 많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미성년 여성에 대한 취업을 금하는 내무성통첩이 발령되지 않았고, 원래 군이 구상한 16세 이상 31세 이하의 여성을 대상으로 동원을 실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군이 구상한 16세에서 31세 이하의 여성이라는 규정은 기존에 실시되는 식민지 공창제에서 규정하는 연령과도 합치되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에서 소위 합법적으로 운영되던 공창 가능연령은 18세 이상이었다. 조선에서 동원되는 여성들은 공창의 규정과도 관계없는 군의 구상(내구도와 소모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에 따른 젊은 여성을 동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지 타이완 역시 예외 없었다. 타이완에서는 14세 여성이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이 공문서 상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젊은 여성을 동원한 이유를 다음의 그래프를 보면 엿볼 수 있다. 1940년부터 1942년 2년에 걸친 홍콩 오문지역의 위안부 동원과 군의 동원 수를 보면, 초창기 동원된 ‘위안부’ 10명이 2년 내내 347명의 군인을 상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보면 ‘위안부’의 동원 그 자체도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다. 따라서 일본군은 위안부를 동원하는데 있어서, 내구력과 얼마만큼 오래 쓸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될 수 밖에 없고, 되도록 젊고 건강한, ‘소모되지 않은’ 사람으로 동원하는 것이 비용절감을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21세 이상 원래 공창이었던 일본인보다는 조선, 타이완인 등을 선호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위안부’의 이동 : 법역을 넘나들며 ‘기호’가 되다.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원한 ‘위안부’들은 일본제국의 범주에서 벗어나, 지역적으로 자신들이 보호될 수 있는 기존 법역을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본제국은 제국의 영역을 내지와 외지로 나누어, 칙령 이외에는 외지 즉, 식민지에 제국헌법을 통일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각기 지역의 제령을 통해 법체계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식민지민에게 통일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고, ‘호적법’으로 인민들을 통치했다. 따라서 민법 등에 대해 이법 지역 간의 통일성을 갖기 위해 ‘공통법(1918년)’을 제정하여 다스렸다. 이 공통법이 적용되는 지역은 일본본토, 사할린 등 내지와 타이완, 조선, 관동주에 해당한다. 이 지역의 이동에는 여권없이 ‘도항증’의 허가 등으로 이동을 하지만, 공통법에 의해 본인의 출신지의 이동지역에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출신지역의 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1943년 남양군도도 이 공통법의 적용지역으로 되지만, 남양군도 이외의 지역으로 이동할 경우에는 공통법이 효력을 잃어 ‘여권’을 필요로 한다.

일본군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전장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도항정책’을 수립하거나 통제하면서 위안부를 동원하였다. 공통법이 적용되는 지역에서는 민법 등이 출신지 법령에 따르게 되어 있어, 동원된 지역에서 사망 등의 사건이 일어날 경우, 조선인은 조선의 법령에 의해 지배된다. 공통법이 적용되지 않는 지역으로 동원될 경우, ‘여권’의 소지로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위안부’의 경우, 여권이 필요한 지역으로 동원될 때, 일본 당국은 위안부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다음의 사료는 일본 외무성에서 도항정책을 담당하는 아메리카국이 외무대신의 이름으로 타이완총독부 외사국장에게 보내는 ‘남방방면 점령지에 대한 위안부 도항 건」에서 “그와 같은 도항(위안부 도항)에 대해서는 여권을 발급하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에(불필요하기 때문에) 군의 증명서에 의한 군용선으로 도항하도록 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선 한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 지역에서는 일본인(조선인, 타이완인)으로서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외국인 취급법으로도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군이 정하는 위안소 범주에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태, 아무런 법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 법의 예외적 상태, 즉 기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안부’의 사망 : 버려지는 존재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본정부와 군은 위안소의 설치, 위안소의 관리, 군의 관리 등의 규정을 만들어 갔지만, 위안부를 위한 규정은 전혀 만들지 않았다. 위안부를 상대로 한 성병관리 조차 일본군의 내무규정으로 일본군의 건강관리이지 위안부의 건강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출신지를 벗어나, 사망 등 사고가 생겼을 경우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만들지 않았다. 문옥주는 부대에서 위안부가 사망했을 때, 본인이 술 한 잔 먹고 장작들 모아 휘발유 뿌려 태웠다고 했다.주13)

다음은 조선인 지원병 박용구의 자전적 소설이다. 박용구는 프롬 지역으로 동원되어 전쟁 수행 중, 사망자 처리를 하는 일을 했다. 그는 병사가 사망했을 경우, 헌병은 그 사망자가 조선인 병사라고 하더라도 「사망보고서」를 작성하고 유골을 처리하는데, “그러나 헌병은 위안부가 하나 없어졌다는 데 대해서 공병과 같이 복잡한 보고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위안부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물품으로써 장부에 오르는 존재이었기에..”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위안부’는 법적 존재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법과 제도의 ‘예외적 상태’에 놓여있는 기호로서의 존재였다.

 

다시 인정투쟁 : 우리는 왜 강제동원 피해를 주장하는가?

우선 용어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강제동원이라고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강제연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원이 시스템적 용어라면, 연행은 범죄에 대한 강압적 용어다. 강제연행과 강제동원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의 주체와 강제성의 형태, 범위가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일본이 부정하는 것과 한국이 주장하는 강제성은 서로 그 범주가 다르다. 일본은 완전한 범죄적 형태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의 강제동원은 시스템적 강제를 포함한 포괄적 강제를 말하고, 식민지 조선에서의 ‘위안부’의 피해와 가해를 결정하는데 필수적 조건이 된다.

즉,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시행 2004. 9. 6.] [법률 제7174호, 2004. 3. 5., 제정])에는 위안부의 피해를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중략) 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로 규정한다.주14)

또 우리 안의 가해를 청산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7937호, 2006.4.28.)에서는 친일행위로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로 정의되어 있다. 그래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위안소를 경영했던 사료는 남아있으나,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던 업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일본군‘위안부’의 피해와 가해에 있어서 강제동원의 문제는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필수요건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강제연행과 같은 범죄적 형태 뿐 아니라, 식민지민에게 일상적으로 있었던 그 식민지 제도를 거부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일본도 보지 않는 지점: 제도에서 무화된 존재

일본군‘위안소’는 육군성이 정하는 주보규정에 따라 설치되었고, 각 군대의 내무규정에 의해 관리되었다. 업자도 육군성이 정하는 주보규정에 따라 관리되었다. 각 부대의 사정에 따라,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체계를 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소의 형태를 군의 직영, 군의 관리, 군 이용 등으로 나누어 군의 관여에 차등이 있는 것처럼 설명했지만, 사실상 군의 직접경영형이든, 군의 관리형이든 군의 이용형이든 모두 육군성의 주보규정에 따른 방식이다. 군인, 군속들이 위안소를 이용하는 것도 각 부대의 ‘내무규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위안소’는 군의 시설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위안소’를 공창제 등 기존의 제도와 연관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군의 주보시설 중의 하나인 위안소에 동원되는 일본군‘위안부’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따라 법역을 넘나드는 존재였다. 법역을 넘나드는 가운데, 일본군‘위안부’는 법의 규제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되지 못했다. 일본군은 되도록 ‘위안부’를 비법적 상태에 놓이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존재로선 분명히 인간이었지만, 제도 속에서는 비인격적 존재인 ‘물품’에 지나지 않았다.

위안부의 피해는 성적학대, 신체에 대한 착취 뿐 아니라, 위안소 제도를 만들어 갔지만,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만들어 간 제도이기 때문에 그 제도에서 철저히 ‘예외적 존재’로 되어 간 비인격적 존재, 즉 물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심각한 인권침해가 존재한다

 

<미주>

주1) 「世界に広まる「慰安婦=性奴隷」説を否定 米ハーバード大J・マーク・ラムザイヤー教授が学術論文発表」 『産経新聞』 2021년 1월 28일
주2) 「램지어 ‘위안부’논문 진실성 결여...하버드 브랜드 악용한 것」 『동아일보』 2021년 4월 15일 기사 참조.
주3) Amy Stanley, Hannah Shepherd, Sayaka Chatani, David Ambaras, and Chelsea Szendi Schieder,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 : The Case for Retraction on Grounds of Academic Misconduct” 2021년 2월 24일 ; TESSA MORRIS-SUZUKI, “THE RECEPTION OF THE RAMSEYER ‘COMFORT WOMEN’ ARTICLE IN JAPAN : HISTORICAL AND POLITICAL BACKGROUND” 2021년 2월 ; 「もう聞き飽きた!「慰安婦は性奴隷ではない」説, ハーバード大学ラムザイヤー教授の歴史修正主義を批判する-Fight for Justice 緊急オンライン・セミナー-」 2021년 3월 14일(https://fightforjustice.info/?page_id=5190 참조)
주4) J. Mark Ramseyer, 2021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 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 65(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 abs/pii/S0144818820301848#! 참조)
주5) 「Video Message from John Mark Ramseyer, Professor of Japanese Legal Studies at Harvard Law School/ APRIL 24, 2021」 『なでしこアクション』, 2021년 6월23일(http://nadesiko-action.org/)
주6) 「“내가 왜 성노예냐”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무슨 이유?」 『뉴시스』 2020년 5월 31일
주7) 「가난벗자 입대 서류에 손도장」 『경상매일』1992년 12월 13일
주8) 吉見義明(中央大学名誉教授/日本軍「慰安婦」研究), 「ラムザイヤー氏「慰安婦」論の何が問題か」 Fight for Justice 緊急オンライン・セミナー
주9) ⻑野耕治, 植松孝司, ⽯丸安蔵, (研究ノート)日本軍の人的戦力整備について―昭和初期の予備役制度を中心として――(http://www.nids.mod.go.jp/ publication/kiyo/pdf/bulletin_j17_2_6.pdf)
주10) 「野戦 酒保規程改正に関 する件」 1937년 9월
주11) 櫻田武・鹿内信隆『いま明かす戦後秘史』上巻(サンケイ出版、一九八三年)四〇~四一頁, 재인용
주12) 일본군‘위안부’관련번역자료집(정책편), 「군 이외에도 이용할 수 있는 주보위안소의 문제」 『외무성 경찰사』, 94~95쪽
주13) 「문옥주 할머니」 『대구 MBC』 1993년 촬영
주14) 이 법은 이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약칭 : 강제동원조사법)[시행 2019. 1. 17.] [법률 제15796호, 2018. 10. 16. 일부개정]」으로 개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