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기획연재

[고려 인물 열전①]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을 통해 본 고려의 시작_오경석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6.05 BoardLang.text_hits 4,960
웹진 '역사랑' 2021년 6월(통권 18호)

[고려 인물 열전]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을 통해 본 고려의 시작


 

오경석(중세1분과)


 

고려 태조의 묘정(廟庭)에는 6명의 공신이 배향되었다.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앞장선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활약한 유금필, 지략으로 태조의 목숨을 구했던 최응이 바로 그들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인물은 신숭겸이다. 신숭겸과 관련된 춘천, 곡성, 대구 등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지가 조성되고, 문화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또 신숭겸을 단독 주제로 한 연구서가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학계의 관심 역시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후백제군에게 포위된 태조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충신으로서의 강한 인상 때문이 아닐까.

[caption id="attachment_8776" align="aligncenter" width="300"]그림 1. 황해평산 장절공 신숭겸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s://www.emuseum.go.kr/)[/caption]

그런데 태조에게는 신숭겸 못지않은 충성심을 보인 장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유금필이었다. 유금필에 대한 총애는 다른 장수가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활약과 태조에게 보인 충성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금필도 신숭겸만큼 주목받아야 하지 않을까.

유금필은 어떤 사람인가.

유금필이 태어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는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태조가 즉위한 시점에 홍유와 함께 청주지역의 반란을 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청주지역은 궁예(弓裔)가 904년에 철원을 도읍으로 삼을 때 그곳의 인호(人戶) 1천을 철원으로 옮겼을 정도로 전 정권과 관련이 깊었다. 또한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국호와 연호 반포 및 즉위 조서를 내린 후 바로 청주의 군인들을 사면하였는데, 이들은 궁예가 청주지역의 경제력과 그곳에 호걸이 많음을 경계하며 죽이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고려 초기에 청주지역은 임춘길, 진선·선장에 의해 두 번이나 반란에 연루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금필은 고려가 건국된 시점에 예의주시해야 하는 청주지역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태조 19년(935)에 유금필이 스스로 노쇠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고려가 건국된 918년에 그의 나이가 이미 청년이 지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금필이 태어나고 자랐을 신라 말에는 여러 지방세력이 중앙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난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후 후삼국이 정립되면서 대다수의 지방세력은 후고구려와 후백제에 복속되었다. 평주(平州) 사람인 유금필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평주가 속한 패강도(浿江道)의 10여 주현(州縣)이 904년에 궁예에게 항복할 때 궁예 휘하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평주는 원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 신라의 영풍군(永豐君)이었다가 고려 초기에 평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같은 책에 유씨(庾氏)는 해당 지역의 토성(土姓) 중 여섯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달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섯 번째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서술 순서가 중요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는 유씨가 해당 지역에서 일정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최상위층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숭겸과 유금필을 모두 소개하였는데, 이 중 신숭겸에 대해서는 고려 태조가 곡성 사람인 신숭겸에게 성(姓)을 하사하고 평주를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유금필은 성을 하사받았다거나 본관을 옮겼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유금필은 패강 지역에 살고 있다가 904년 무렵 궁예의 휘하로 들어갔고, 본인이 살던 지역이 고려 초기에 평주가 됨으로써 평주 사람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조에게 신씨 성을 하사받고 본관을 부여받은 신숭겸과 달리 유금필은 그러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건국 전부터 평주 지역에 연고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궁예정권에 출사한 것에는 이러한 연고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금필이 궁예정권 하에서 특별한 활약을 했음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능력을 입증할 만큼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가 건국된 후 그는 차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그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을까. 기존 연구에서는 이후 유금필의 활약상을 근거로 유금필이 고려 건국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추대하는 세력과 입장을 같이하였다고 보거나 적어도 왕건과 적대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유금필이 과연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먼저 유금필은 고려 건국에 직접 참여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에도 태조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조부터 성종까지의 배향공신들은 개국(開國)이라는 칭호를 띠고 있으며, 오직 최응과 유신성만 개국 칭호를 받지 못하였다. 태조 원년(918) 8월에 내린 조서에 따르면, 홍유 등 네 명의 장수가 1등 공신이고 견권·능식 등이 2등 공신이며 3등 공신 2,000여 인이었다. 그리고 경종 2년(977)에 개국공신에게 훈전(勳田)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이들을 개국공신으로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배향공신에게 붙여진 개국 칭호는 개국공신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주1)

그런데 ‘개국’ 칭호를 받은 배향공신 중에는 궁예정권에 출사한 이후 태조를 섬겼던 박술희, 태조의 사촌동생 왕식렴 등 고려 건국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경종실에 배향된 박양유(朴良柔)는 성종 9년(990)에 가서야 사료에 처음 등장하고, 마찬가지로 경종실에 배향된 최지몽(崔知夢)은 18세가 되는 태조 7년(924)에 처음 관직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고려 건국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들이 개국 칭호를 받은 이유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만, 태조가 정변을 결심하였다는 소리에 많은 사람이 달려왔고 궁문(宮門)에서 기다린 자가 10,000여 인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수의 사람이 정변에 참여하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정변에 참여한 사람 중 일부만 공신에 책봉된 이유는 지위의 고하에 따른 공로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유금필이 고려가 건국될 시점에 장수로서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정변에 직접 참여하였고, 그로 인하여 개국 칭호를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로 유금필이 고려가 건국된 직후 마군장군(馬軍將軍), 즉 기병을 이끄는 장수였음을 주목해보자. 추대 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은 모두 궁예 말년부터 기장(騎將)이었는데, 『고려사』 견금 열전에는 태조가 즉위한 후 청주 변란을 막기 위해 진주(鎭州)에 파견한 홍유와 유금필을 모두 마군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고려해보면 홍유와 유금필은 둘 다 기병 장수였을 것이며, 유금필은 홍유의 휘하에 있거나 적어도 같이 움직이기 쉽게 편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개국공신 중 홍유의 이름이 제일 앞에 기록된 것은 홍유가 기병 편제 내에서의 차지하는 위치가 높았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유금필은 홍유의 휘하 장수였거나 홍유보다 지위는 낮았지만 기병을 이끄는 장수 중 하나로서 고려 건국에 직접 참여하였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변을 주도할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유금필은 장수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하였다. 먼저 태조 3년(920) 오랑캐가 북계(北界)의 골암진을 계속 침략하자, 태조는 유금필을 그곳을 지킬 적임자로 여겼고 여러 장수가 그것에 동의하였다. 또 훗날의 일이지만 나주를 다시 수복하는 일을 논의할 때 홍유, 박술희가 용맹함을 자부하면서 자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공훤, 제궁이 유금필을 추천하자 이에 동의하며 유금필을 나주로 보냈다. 이러한 점은 태조가 전쟁 지휘관 인선에 있어서 해당 인물의 능력을 중요시하였고 신료들과 회의를 한 후에 적임자를 파견하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태조는 유금필이 건국 초 청주의 반란을 예방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또 기병 장수인 그가 기병 중심의 북쪽 오랑캐에 대적하기 용이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골암진 수비의 적임자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금필은 3년 뒤에 북번(北蕃)의 추장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고 이들이 취한 틈을 타서 위엄으로써 그들을 협박하여 복종시키고, 이를 여러 부(部)에 알려 오랑캐들을 고려에 귀부하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귀부한 오랑캐가 1,500명이고, 그들이 돌려보낸 고려 백성이 3,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태조는 이를 통해 유금필의 지장(智將)이자 덕장(德將)으로서 면모의 재발견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때 귀부한 북쪽 오랑캐들은 유금필 휘하에 배속되어 정예기병으로 거듭나고 후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때 얻은 태조의 신임과 군사력은 유금필이 이후 전공을 쌓는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유금필은 이러한 태조의 신임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맹장(猛將)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내었다. 그는 태조 8년(925)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서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임존군(任存郡)을 공격하여 3,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또한, 태조 11년(928)에는 삼년성(三年城) 공략에 실패한 태조가 청주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백제가 장수를 보내어 청주를 공격하자 유금필이 이를 패배시키고 3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태조 12년(929) 고창 전투에서는 선봉이 되어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승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8777" align="aligncenter" width="300"]그림 2. 유금필이 백제군을 격파한 청주 양성산성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caption]

이처럼 연이은 승전의 결과 고려군에서 차지하는 유금필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다. 태조 8년(925) 조물군 전투와 태조 12년(929)의 고창 전투는 이러한 유금필의 위상 변화를 잘 보여준다. 태조는 조물군 전투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고 후백제와 화친하려 하였는데, 군대를 이끌고 뒤늦게 참전한 유금필이 이를 반대하였다. 이에 태조는 연산진과 임존군을 격파한 공을 치하하며 화친 시도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비록 이후에 태조의 사촌동생 왕신과 견훤의 사위 진호를 인질로 교환하고 양국이 화친하였지만, 이를 통해 유금필의 발언이 군사회의에서 영향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 12년(929)에는 후백제가 고창군을 포위하자 태조는 여러 장수와 회의를 하였는데, 공훤과 홍유가 먼저 퇴로의 확보를 주장하자 유금필은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걱정한다면 고창군이 적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격을 주장하였다. 이에 태조는 유금필의 공격을 허락하였고 유금필은 고창 전투의 수훈을 세웠음을 인정받았다. 이는 군사회의에서 유금필의 발언이 가지는 영향력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평주의 지방세력이었던 유금필은 장수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며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활약하였고, 이를 통해 태조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최상위 품계인 대광(大匡)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승진은 개인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유금필과 같은 공신들을 국가에 계속해서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후대에도 이어질 수 있는 보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유금필은 왕실과의 혼인 및 공신 책봉과 그로 인한 후손들의 등용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먼저 유금필의 딸은 태조와 혼인하여 동양원부인이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평주는 연덕, 동양이라는 별호가 있었다고 하는데, ‘동양원부인이’라는 칭호를 통해 ‘동양’이라는 칭호가 국초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양원부인은 효목태자와 효은태자를 낳았는데, 태조의 29명의 후비 중에서 13명만 자식을 낳았고 그 중 신명왕태후, 정덕왕후, 동양원부인, 천안부원부인, 성무부인 5명만 2명 이상의 자식을 낳았다. 이 사실은 동양원부인이 태조가 총애하는 후비 중 한 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유금필의 딸은 언제 태조와 혼인하였을까. 그가 태조를 섬겨 마군장군이 되었으므로 건국 초기 1~5년 사이에 딸을 태조와 혼인시켰을까? 아니면 그가 연산진과 임존군을 격파한 공으로 태조 8년(925)경에 혼인하게 되었을까. 태조 14년(931)에 유금필은 참소를 당해 유배를 가게 된다. 아마도 유금필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시기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유금필은 해당 지역에 후백제군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를 모으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를 준비하였다. 이에 태조는 참소를 믿고 어진 이를 내쫓았다고 후회하고 유금필을 불러들여 위로하면서 보상이 후세까지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당시에 보상을 후손에게 전하는 방법으로는 유금필의 동생이나 아들에게 품계 또는 관직을 제수하는 것과 그의 딸을 후비로 들이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유금필의 딸이 후비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동양원부인의 아들인 효은태자가 광종대 동양군이라고 불리며 군소(群小)와 사귀면서 반역할 의도를 품었다가 광종에게 사사된 사실은 효은태자가 반역을 생각할 만큼의 세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금필의 후손이 유금필의 딸과 태조의 혼인으로 일정한 보상을 계속해서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유금필의 후손들은 유금필의 후손으로서의 혜택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었다. 현종 5년(1014)에는 태조 공신 자손 중 관직이 없는 자를 등용하는 조치가 처음 시행되었는데, 유금필의 후손들은 이 덕을 입었을 것이다. 문종대 유공의는 과오를 범하였으나 문종이 태조 배향공신의 후손은 죄가 있어도 등용하라고 한 것 때문에 도리어 관직을 받을 뻔 하였다. 비록 유공의의 관직 임명은 좌절되었지만, 그가 유금필의 후손으로서 음서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종대 이자연 등은 유중경의 어머니가 외조부 이공이 형의 딸과 혼인하여 낳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의 출사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신 유금필의 후예라는 것을 참작받아 조정에 출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유자우와 윤포 묘지명에 공신 유금필의 후손임을 밝힌 것은 유금필이 그들의 세계(世系)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caption id="attachment_8779" align="aligncenter" width="310"]그림 3. 유자우 묘지명, 윤포 묘지명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s://www.emuseum.go.kr/)[/caption]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유금필은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까지 지혜, 덕, 용맹을 두루 갖추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쟁 수행에서 능력을 입증한 끝에 신하로서 최고 지위까지 오르고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후세에도 그 은덕을 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일생은 신분에 의해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제약이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개인의 능력으로 국가의 최고 지위까지 오르는 것이 가능했던 신라말 고려초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때의 경험이 고려를 시작할 수 있게 하고, 500년 가까이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니었을까.

 

미주

1. 김보광, 「고려 성종·현종대 태조배향공신의 선정 과정과 의미」, 『사학연구』 113, 201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