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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⑧] 3월 21일 제주 신좌면 만세시위, 그 후 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4.06 BoardLang.text_hits 2,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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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4월(통권 16호) [낯선 삼일운동] 3월 21일 제주 신좌면 만세시위, 그 후정병욱(근대사분과) 제주 시내에서 섬을 동쪽으로 돌다 보면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읍이 조천(朝天)이다. 조천읍 입구 오른편에 ‘민족 자존의 고장’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자부심이 느껴진다. 조천, 즉 일제강점기 신좌면(新左面)에서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네 차례 연속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제주도가 속한 전라남도에서 4회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해남군 해남면과 이곳밖에 없었다. 전국 2,509면 중 832면(33.2%)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4회 이상 일어난 곳은 71개 면(2.8%)에 불과했다[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 이 중 상당수가 군청소재지(23개 면)이거나 대도시와 인접한 면(고양군 9개 면 등)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렇지 않은 조천면에서 네 차례 만세시위는 자랑할 만한 역사다. [caption id="attachment_8591" align="aligncenter" width="278"] ![]() ![]() 삼일운동 당시 제주도 경찰이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검사국에 송치한 자는 33명, 검사는 이 중 29명을 기소했고, 4명에겐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제주지청은 29명 중 23명에게 징역 1년에서 4개월을 선고했는데, 이 중 14명이 실형, 9명이 집행유예였다. 나머지 6명에겐 무죄를 선고했다. 실형을 받은 14명은 공소했으나 대구복심법원은 일부 감형했을 뿐 모두에게 실형을 판결했다. 33명 또는 29명이 전부 신좌면 만세 시위자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23명은 그렇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아래 <표>는 제주지청 검사국이 기소한 29명의 나이, 교육, 종교, 직업(23명)을 정리한 것이다. [실형] 김시범 김시은: 징역 1년 / 황진식 김장환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김연배 박두규 : 징역 8개월 /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김경희 백응선: 징역 6개월 [caption id="attachment_8594" align="aligncenter" width="960"] ![]() ‘조천 김씨’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집안으로서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전개하는 데 이바지했음은 틀림없다. 또 그 일족 다수가 이후 항일운동,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역에서 일족의 역할을 균형 있게 논하려면 19세기 말 봉건 지배세력의 일원으로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 데 앞장섰던 점[이영권, 300], 일제강점기 다수가 조천면장 직을 맡아 일제에 협력했던 점[제주도지편찬위원회, 95-96]도 같이 언급되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천 김씨는 조천 포구를 거점으로 육지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뒤 자식 교육을 통해 그 지위를 유지 또는 상승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전통 교육으로 유림의 일원이 되었고, 근대 교육으로 많은 엘리트가 배출되었으며 그 일부가 부일(附日) 또는 항일에 나섰다. 이런 교육 중시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당시 ‘머리는 조천’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거다. 삼일운동의 영향은 컸다. 조선총독부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가 1932년 작성한 <제주도의 치안상황>을 보면 “조천 함덕 신촌 세 지역민의 독립 시위운동”은 도내 “청소년의 뇌리에 뿌리 뽑을 수 없는 불온사상을 심어주는 출발”점이었다[9]. 비단 청소년만이 아니었다. 1919년 마흔이 된 김시숙(金時淑)은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궐기”하여 배우기 시작하였다. 숙부 김문주(고려공산당 국내부 위원이었던 김명식의 부친)의 조언이 있었다, 삼일운동을 보면서 의지를 불태웠다고 전한다. 곧 여자 교육에 매진하여 1921년경 ‘조천부인야학회’를 조직하여 1926년경까지 부인들을 인도했으며, 1924년경 ‘조천유아원’을 설립하였다. 1926년 4월 ‘조천부인회’ 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은 것으로 볼 때 그는 조천 여성계의 중심인물이었다. 1926년 6월 ‘조천여자청년회’는 ‘여자야학회’를 인수하고 그간 “열성”으로 이끌어왔던 김시숙의 공로를 표창했다. ‘조천여자청년회’ 교양부는 만세시위로 구속되었었던 이귀동이 맡았다. ![]() ![]() ![]() [caption id="attachment_8598" align="aligncenter" width="516"] ![]() [caption id="attachment_8599" align="aligncenter" width="406"] ![]() [caption id="attachment_8600" align="aligncenter" width="493"] ![]() *김시숙 묘지명 재래의 불합리한 도덕과 윤리는 특히 여자의 개성과 인권을 무시했다. 그 결과 약자는 거기에 순종하였으니 강자는 반역케 되었다. 반역자는 왈 탕녀, 순종자는 왈 열부(烈婦)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실(史實)에서는 순정의 애(愛)도 진정한 정조(貞操)도 발견할 수 없다. 남성이 그것이 없는 이상 여성에게만 그 존재가 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모순된 사회에 있어 진정한 열부라면 충실한 반역자 무리일 것이며 동시에 비참한 시대적 희생 계급이다. 이 계급의 일인인 김시숙 씨는 고종 17년 경진[1880년_인용자] 2월 24일 조천 벌문(閥門) 해김(海金) 종가 출생으로 미장준륭(眉長俊隆)하고 대인남자와 같은 개성의 소지자이다. 어찌 부권(夫權) 전제주의의 맹목적 현모양처주의에 긍종(肯從)할 수 있었으리오. 결국 결혼 생활은 실패하고 40세에 궐기하여 초학(初學)을 약수(略修)한 후 부인 여명(黎明) 및 유아 교육을 개척하고 도일(渡日)하여 공녀노동소조(工女勞動消組)의 창업과 수성 운동에 몰두하다가 시기가 불우인지 그 사업도 모두 소멸되고 자신도 54세 되던 계유[1933] 7월 15일 대판 적십자병원에서 주인 없는 송장을 이루고 말았다. 그래서 기구한 처지가 같은 여성들끼리 호상(護喪)부인회를 조직하여 반구(返柩)하고 황계산(黃鷄山)아래 누총(累塚)가운데 비석까지 세우게 되었다. 명왈銘曰 “철저한 시대적 희생자며 충실한 여명 운동가여! 님의 몸은 비록 구학(溝壑)의 진흙이 되었으나 님의 피와 땀은 광명의 천지에 만인의 생명으로 나타날 날이 있으리라." 한망후(韓亡後) 27년 병자[1936년] 7월 15일 세움. 고순흠 근지(謹識) [김찬흡, 142] 신좌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유죄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이후 교육운동, 사회운동에서 지역의 중견으로서 활동했다[송광배, 52~54]. 그중 김순탁의 활약이 눈에 띈다. 1916년 제주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신명사숙 교사, 1928년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위원장, 1929년 조천리향회 금주실행위원 및 노동야학 교사, 1930년경 신좌소비조합 상무이사 및 동아일보지부 기자 등을 역임했다[김창후, 221~223]. 1938년 병으로 타계하자 그의 친구 안세훈(이명 안요검, 해방 후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및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濟州地方檢察廳; 濟民日報 4·3 취재반(1994), 219])이 비에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당시는 봉건적 구문화 파괴와 시대적 신문화 건설운동이 일[었]다. 군은 분연히 역사적 발전 사명 다하여, 혹은 소학교에서 편(鞭)을 들어 교육자로서 활동하고, 혹은 가두에 출전(出戰)하여 신문화 건설자로서 분투하니 그 길고 긴 도정은 기구 험난의 극(極)이었으나, 단지 한 길로 파괴와 건설을 위한 희생적 역사는 무한한 과거에서 영구한 장래에 전할 유산이다.” [caption id="attachment_8601" align="aligncenter" width="539"] ![]() ![]() 이후는 아시다시피 제주도민이 내린 결론을 “전후 아시아에서 가장 잔인하고 지속적이며 철저한 반란진압 작전을 통해 뿌리 뽑는” 역사였다[Bruce Cumings, 349]. 그 시작이 삼일운동 기념식이었다는 점이 얄궂다. 1947년 제주에서 약 3만 명이 참여한 제28회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고 경찰이 발포하여 어린이와 부인 등 6명이 사망했다. 경찰을 포함하여 제주도 민관이 총파업을 단행하며 항의하자 이를 빌미로 미군정이 좌익 등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김시범은 1947년 4월 18일 제주지방검찰청에서 ‘삼일사건’ 연루자로 약식재판을 받고 벌금형에 처해 졌다. 좌익은 탄압에 대응해 조직을 강화했다. 김시범은 그해 7월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에 추대되었다[濟州新報]. 같은 달 국민학교를 졸업한 김동일은 조천중학원에 입학하고 남로당 산하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4.3’이 일어나고 11월 25일 김시범이 토벌대에 연행되어 함덕리 서우봉에서 총살당했다[이재홍]. 그보다 앞서 11월 1일, 29년 전 만세시위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었던 함덕리 구장 한백흥이 토벌대가 마을 청년들을 처형하려 하자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고 만류했다가 청년들과 함께 처형됐다[濟民日報 4·3 취재반(1997), 323; 한형진]. 이 무렵 16세 김동일은 산에 연락 갔다 내려오지 못하고 조천리 조직원들과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한라산 자락에서 겨울을 나고 1949년 4월경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이 체포되었던 여성동맹위원장은 총살된 뒤 목이 잘려 마을에 전시되었다. 김시범의 딸이다[김창후, 79~80; 濟民日報 4·3 취재반(1997), 424] 1949년 7월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김동일은 어린 나이 탓에 빨리 석방되어 그해 말 친척이 있던 진도로 가서 지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진도군당에 들어가 위원장 비서로 활동을 재개했다. 곧 다시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1951년 봄 지리산 자락 한 산골 마을에서 체포되었다. 이번엔 같이 체포된 동료의 부친 덕에 석방되었다. 1956년 재일동포와 결혼하여 1958년 자유를 찾아 밀항했지만, “냉장고 속의 고기”처럼 살면서 오십이 넘어서도 새벽 4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 1985년경부터 ‘4·3을 생각하는 모임’에 나가면서 비로소 속말을 나눌 수 있었다. 2008년 조국을 떠난 지 50년 만에 제주를 찾았고, 2017년 도쿄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caption id="attachment_8603" align="aligncenter" width="527"] ![]() 우리는 ‘4·3’이나 한국전쟁 피해자를 무구한 양민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피해자나 피동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통일된 자주 국가 건설의 능동적 주체였다. 현재의 후대 위주, 국가 중심적 기억 방식은 19세기 이래 밑으로부터 성장 발전을 거듭해 온 지역사회의 민주주의 경험과 역량을 소홀히 하는 것일 수 있다[지수걸]. 그 경험과 역량의 한 뿌리가 삼일운동이었다. 여러분이 보기에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중 어느 쪽이 더 삼일운동을 계승한 것 같습니까? <미주> 주) 책에 나오는 사례는 1921년 제주도 행원리에서 출생하여 1938~1942년 일본에서 일한 남성의 경험이지만 여성의 송금도 비슷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 1919.5.22. <騷擾事件報告 臨時報 제22>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4>> 大邱覆審法院刑事第一部 1919.5.29. <1919年形控제405호 判決(金時範 등 14인)> 朝鮮總督府法務 1920.1 「妄動事件處分表」 1924. 1.19 <金時淑女史의 敎育熱> <<朝鮮日報>> 4면 1926. 4.25 <지방단체집회, 朝天婦人會定總> <<時代日報>> 3면 1926. 5.20 <조선부녀야학 조흔교사를마저> <<東亞日報>> 3면 1926. 6. 9 <조선녀자쳥년 야학을 계속> <<東亞日報>> 3면 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1932.8 <濟州道ノ治安狀況> <<思想月報>> 2-5 1947.4. 20 <삼일사건 공판 21일 개정; 약식재판으로 이십구명이 출감!> <<濟州新報>> 2면 1947.7.18 <島民戰强化! 議長에 朴景勳氏推載> <<濟州新報>> 1면 濟州地方檢察廳 1958 <情報檢事會議提出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金寶鉉 1976 <<朝天誌>> Bruce Cumings, 1981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ume 1,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Fourth printing: Seoul: Yuksabipyungsa, 2002) 송광배 1984 <제주지방의 삼일운동과 그 후의 항일운동>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영미 1994 <미 군정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성립과 활동> <<韓國史論>> 32 濟民日報 4·3 취재반 1994 <<4·3은 말한다 1 : 해방의 환희와 좌절>> 전예원 제주도지편찬위원회 1996 <<濟州抗日獨立運動史>> 제주도 濟民日報 4·3 취재반 1997 <<<4·3은 말한다 4 :초토화작전>> 전예원 김찬흡 편저 2000 <<20世紀濟州人名事典>> 제주문화원 이영권 2005 <<새로 쓰는 제주사>> 휴머니스트 이재홍 2007.3.30. <4.3명예회복, 그것은 거짓입니다> <<제주의 소리>> http://www.jejusori.net 김창후 2008 <<자유를 찾아서: 金東日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 선인 지수걸 2010 <한국전쟁과 군(郡) 단위 지방정치 - 공주·영동·예산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27 후지나가 다케시 2011 <재일 방적 여공의 노동과 생활 – 오사카[大阪]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여성사Ⅱ>> 제주발전연구원 이지치 노리코 지음 안행순 옮김 2013 <<일본인학자가 본 제주인의 삶>>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한형진 2018.8.13. <항일했지만 4.3희생자 빨간 낙인…100년만에 독립유공자된 한백흥 선생> <<제주의 소리>> 이송순 2019 <농촌지역 3·1운동 확산과 공간적·형태별 특성> <<백년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박승자 2019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떠났지> 제주4·3연구소 편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 도서출판 각 임흥순 2019 <(영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