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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⑦] 4월 3일 수원군 장안·우정면 만세시위,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2.11 BoardLang.text_hits 3,861
 

웹진 '역사랑' 2021년 2월(통권 14호)

[낯선 삼일운동] 


4월 3일 수원군 장안·우정면 만세시위,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정병욱(근대사분과)


 

당시 둑을 쌓을 때는 사람이 한쪽 갯바닥 흙을 파서 지게로 져다 쌓았다. (…) 품값은 한 사람이 하루 동안 갯바닥을 판 평수로 그날 저녁에 재서 계산한 다음 일당으로 주었다. 평수대로 일당을 준 것은 수백 명이 일하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 일 잘 하는 사람은 하루에 다섯 평도 팠지만 못하는 사람은 서너 평을 파기도 했다. ‘잘 하는 사람끼리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어서’ 죽이 맞는 사람끼리 열이면 열, 다섯이면 다섯 ‘구미’(組)를 짜서 일했다. (…) 한백희 씨는 주로 음력 정월에서부터 삼월 사이 농사 시작하기 전에 ‘언 막는 일’을 다녔다고 한다. 언을 막은 후에도 “흙을 파다가 갯고랑을 막아서 땅을 판판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몇 해 여기에[호곡리_인용자]일을 다녔다.

송영만씨는 방죽만 쌓아 놓았지 그 안의 논은 작인들이 개간하였다, 이는 “돈을 덜 들이고 대강 해놓아도 사람들이 (경작하겠다고) 덤볐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개간한 논에 농사를 짓는 일은 여러모로 힘이 드는 일이어서 재수가 있는 사람은 소출을 보았으나 ‘잘 먹지 않는 논’에서 농사짓는 경우 “어려운 사람이 그걸 맡아서 하다가 자빠져서 인천, 서울로 떠난 사람이 많았다.” 갯논은 보통 “10년을 읅어야 짠기가 빠지는데 갯논 큰 걸 맡아서 하다가 갯물에 (벼) 죽이고 일 년 내내 매달려도 쌀 한 됫박도 못 얻는 사람들이 올해 잘 먹을까, 내년에 잘 먹을까 하면서 그걸 붙잡고 있다가 결단 난 사람들이 많았다.” (…) 작인들이 실제적으로 논을 개간한 셈이기 때문에 지주나 마름이 함부로 “몇 해 못 먹고 붙잡아 공들인 논”을 빼앗지는 못했다. (…) 소출이 적은 경우 소작료를 내지 않기도 했다. (…) 한백희 씨는 처음 개간한 논에 농사짓는 일은 “허황되게 모심어 놓고 잘 되기만 바라는 것”이라 하면서 그 어려움을 표현했다[이상 한신대학박물관, 269-270].

 

2004년경 지역문화연구소가 우정면 주곡리 한백희(1913년생)와 인터뷰한 기록이다. 위는 1930년대 같은 면 호곡리에서 방죽, 즉 둑을 쌓는 모습, 아래는 둑 안의 땅을 개간하는 모습. 보통 바닷가 간석지 개간은 이 두 가지가 결합한 사업이다. 장안면 우정면이 있는 조암반도는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개간이 이뤄진 지역이다. 많은 사람이 개간에 달려들었다가 떠나고 일부만 정착했다. 허황되다 하지만 덤벼들 수밖에 없는 삶이 있다.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장안·우정면에서 시위대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했고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때려죽였다. 이보다 앞서 3월 28일 같은 군 송산면 만세 시위대는 발포한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였고, 4월 1~2일 인근 안성군 양성면·원곡면에서 만세 시위대가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 등을 공격했다. 이 지역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일본 측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군경은 이 지역에 4월 2일부터 14일 사이에 특별 검거반을 투입하여 64개 마을에서 803명을 검거하고 276호를 태웠으며, 10인을 죽이고 19인을 다치게 했다. 이는 4월 15일 자행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학살은 제외한 수치이다.

장안·우정면 만세시위는 삼일운동을 대표하는 격렬한 시위였으며, 그간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특히 ‘폭력 시위’에 가치를 두고 삼일운동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의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례이다. 이는 ‘비폭력’ ‘평화’ 시위에 중점을 두고 삼일운동을 보려는 경향과 대비된다. 주지하다시피 만세시위 중에는 상당수가 ‘폭력 시위’였다. 조선총독부 군경 측 자료에 의하면 37.4%가 ‘폭행’ 시위, 62.6%가 ‘폭행 없는’ 시위였다.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는 주·객관적 조건과 현장에 좌우되는 것이지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바꿔 말하자면 ‘폭력’은 행위자의 주·객관적 조건과 그가 놓여 있는 현장으로 안내하는 좋은 ‘문(門)’이다.

우리에게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료가 갖는 한계, 기억과 연구의 편향에 대해 간단히 말해두는 것이 좋겠다. 주된 자료인 조선총독부의 경찰, 검사, 판사가 남긴 사건기록과 판결문은 시위가 일어난 지역과 규모에 비해 제한된 지역과 인물을 다뤘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26명(기소된 27명 중 무죄 판결을 받는 김현묵, 최장섭 2인 제외, 이후 추가로 체포 기소된 이봉구 포함)의 주소를 보면 우정면 주곡리 4명, 장안면 석포리 5명, 동 수촌리 15명, 동 사곡리와 사랑리 각 1명이었다. 장안면과 우정면이 총 25개리로 구성되었고 2천여명이 참여한 시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략하다. 장안면 면장 김현묵은 당시 쌍봉산에서 우정면 이화리와 한각리에서 내건 태극기를 보았다고 했는데, 사건기록이나 판결문에 이화리 사람은 전혀 나오지 않으며 한각리 사람 중에 기소된 사람은 없었다. 아울러 검거를 피해 도망한 사람들의 경우 정보가 적거나 없다. 수촌리 구장 백낙열과 소사 이원준, 우정면 화수리 김만호 등. 다뤄지는 범위가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자료의 내용도 혼란스럽다. 내란죄로 몰고 가기 위해 고문도 불사하며 피의자에게서 ‘최대치의 폭력 행위’을 뽑아내려는 경찰과 검사, 그로부터 자신과 친족, 이웃을 지켜내려는 피의자가 서로 부딪치고 있다. 판사 앞에서 피의자의 진술은 번복됐고 갈수록 모호해졌다. 삼일운동 수사 당시 동족부락에선 “늘 부락민의 범죄는 은폐하려는 습관”이 있어 꽤 애를 먹었단다[京畿道內務部社會課, 29]. 장안면 우정면도 그런 예이다. 석포리 개간 청부업자 이시쿠라石倉玉吉가 보기에도 “인민이 다 딴 마을 사람이 했다”며 서로 덮어씌웠다. 해방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삼일운동은 가문, 지역의 영광이었고 그에 따른 회고와 조사가 이뤄졌다. 또 천도교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영향력과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이뤄졌다. ‘격렬한 시위’를 강조하는 연구는 주로 피의자나 판결문이 인정하지 않았던 ‘최대치의 폭력’을 인용했다. 저마다의 진실을 감안하면, 모든 역사 연구가 그렇듯 사실을 온전히 복원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자료나 기존 기억과 연구를 검토하면서 발견한 ‘사각지대’를 말해보는 것, 그 사각지대를 시야에 넣고 전후 맥락 위에서 이 만세시위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지금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각지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농촌의 기층 민중, 즉 노동자, 머슴, 외지인들이다.

4월 2일 밤 쌍봉산 등에 봉화가 오르고, 3일 오전 우정면 주곡리 부근에서 북을 치며 출발한 시위대는 장안면사무소를 공격한 뒤 쌍봉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며 세를 과시했다. 산에서 내려와 우정면사무소를 공격한 시위대는 한각리 광장 근처에 이르러 두 진으로 나뉘어 오후 5시경 화수리주재소를 포위 공격했다. 시위대는 산에서 천여 명, 주재소에서 이천여 명으로 늘었다. 3일은 조암 장날도 아니었다. 시위대 이동 경로, 참가 인원과 그 격렬함으로 볼 때 시위가 계획되었으며, 최종 목표가 주재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동일하게 일본인 순사가 처단되었던 송산면 만세시위는 ‘보안법 위반, 소요 및 살인’ 죄로 다뤄졌던 반면 장안면 우정면 시위는 ‘내란죄’로 다뤄졌던 이유일 것이다. 송산면 시위에선 수원서에서 지원 나온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발포했다가 성난 시위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처단에 이르는 과정은 우발적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8451" align="aligncenter" width="392"] <그림1> 장안·우정면 만세시위 개략도(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920 <<1920撿刑第943刑事訴訟記錄: 金賢默 外 26名>>에 수록.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경성지방법원 형사사건 기록 28 http://library.history.go.kr/dhrs/dhrsXIFViewer.jsp?system=dlidb&id=KS0000000028.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西山九二郞이 1919년 7월 2일~6일에 행한 현장 검증조서에 첨부된 도면이다. 장안면사무소-쌍봉산-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에 이르는 길(빨간색 표시)이 ‘폭도가 통과한 길’로 표시되었다.[/caption]

[caption id="attachment_8452" align="aligncenter" width="391"] <그림2> 2019년 화성시가 조성한 장안·우정면 ‘삼일운동 만세길’ 안내지도[/caption]

계획적인 시위가 가능했던 조직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기존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우선 종교이다. 백낙렬 등의 천도교, 김교철 등의 기독교, 천주교, 유교...처음 기소된 27명의 종교는 ‘무종교’ 20명(74%), 개신교 7명이었고, 예심에 회부된 52명으로 확대해 보아도 ‘무종교’ 35명(67%), 개신교 9명, 천주교 5인, 천도교 3인이었다. 물론 종교를 숨겼을 수도 있으나주1) 전반적으로 종교와 그 조직이 시위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지 않다.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사 백낙렬이 구장을 맡았던 수촌리에서 14명이 기소되었는데 그중 7명이 기독교인으로 모두 구장의 연락을 받아 시위에 나갔다. 백낙렬은 천도교 간부보다는 구장으로서 역할 했다. 장안리의 천도교 전도사는 조교순은 시윗날 토지 판매대금을 받기 위해 집에 머물렀다. 천도교 조직이 가동되었다면 있기 어려운 일이다. 장안리 소사 박복룡은 검사 앞에서 조교순이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했으나 예심판사 앞에선 연락은 했으나 나가는 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복룡의 진술을 최대한 인정하더라도 조교순은 천도교 조직이 아니라 구장-소사 조직의 연락에 따라 나섰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김교철도 수촌리 이원준 소사의 연락을 받고 나갔다.

물론 종교가 이 지역 삼일운동과 무관하다 할 순 없다. 전통 시대를 떠받치던 유학, 유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가 퍼진 지역 사회의 분위기는 시위의 먼 배경으로 언급할만하다. 그보다 가까운 배경으로 염세 저항 운동은 어떨까? 이 지역을 포함한 남양군 일대는 유명한 자염 생산지역으로 1906, 7년경 염세 납부를 거부했으며, ‘염업회의소’와 같은 민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었다[이동근]. 물론 이 지역 염업은 겸업이거나 부업이고 주업은 농업이었다. 개간지 도조 거부 운동은 어떨까? 규장각 소장 개항 이후 근대정부기록물 중 현 화성지역 간척 관련 문서가 17건있는데, 이 중 10건이 우정면 관련이다. 우정면 소재 개간지를 대한제국이 공토화하자 우정면민이 사유지라며 반발했다. 내장원에 내야 할 도조를 미납하거나 거납(拒納)하였고 집도(執賭)하려는 마름을 폭행하는 등 ‘난동’도 부렸다[양선아 등 2018]. 이러한 저항의 경험도 만세시위의 중요한 배경이다.

만세시위의 조직력과 관련해서 또 주목된 것이 구장 조직이다. 3월 27일 장안면 구장회의에서 석포리 구장 차병한은 “수일 전 발안리에서 시위가 있었을 때 체포된 사람을 일본인 아이가 게다로 때리는 것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했다. 4월 3일 시위 때 몇몇 마을에선 구장이 소사를 시켜 주민을 ‘동원’했다. 시위에 ‘구장-소사’ 조직이 가동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안면 우정면의 모든 마을에서 구장 조직이 가동되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면 10개리 중 구장의 지시에 따라 소사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에게 ‘나와라, 나오지 않으면 때리겠다, 불 지르겠다’며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했던 이(里)는 석포리, 수촌리, 독정리, 장안리 4개리다. 금의리, 사랑리, 사곡리 3개리는 ‘구장-소사’ 조직이 움직이지 않았다. 면장 김현묵은 거주지인 금의리에서 “다른 면리에서 만세를 외치더라도 이 금의리만은 만세를 외치지 않기로 합의해 두었”다. 금의리 구장 이해진는 시위 날 점심 무렵 우정면 멱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머지 3개리는 자료에 그 형적이 보이지 않는다. 우정면 13개리 중 ‘구장-소사’ 조직이 가동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쌍봉산에서 보인 이화리와 한각리의 태극기로 보건대 우정면에서도 곳에 따라 마을 차원의 대응이 있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장안면 구장회의에서 석포리 구장 차병한의 시위 제의에 많은 구장이 동의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구장 모임을 시위 ‘추진위원회’로 보는 것[이정은]은 무리인 것 같다. 수촌리 구장 백낙렬이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했으며, 그 결과 수촌리에서 가장 많은 기소자(26명 중 15인)가 나왔다.

주민 ‘동원’을 들여다보면 구장 조직과 다른 조직이 눈에 띈다. 우정면 주곡리 구장 한규회는 시윗날 아침 차희식, 장제덕, 김흥식, 장소진이 마을에 와서 나오라 했으나 자신이 야단쳤다 했다. 이후 이들은 이웃 멱우리에 가서 선동했다. 차희식과 장소진은 석포리에서 출생해서 주곡리에 거주하는 자로 그리 부유하지 않은 농사꾼이었다. 차희식과 처는 그의 알리바이로 보리밭 김매기, 오줌통 메고 거름주기, 면장 집 벼 찧기를 언급했다. 장소진은 구장에게 시위에 나가야 되냐 물었더니 ‘그런 일은 농사꾼이 할 일이 아니다, 일이나 하고 있어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의자들이 말한 알리바이가 다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둘러대기에는 그들의 일상이 묻어 있다. 지주는 땔나무 선적을 감독했다든지, 한식이라 떼를 입혔다든지 농사꾼과 다른 알리바이를 댔다. 김흥식과 장제덕은 외지인(각각 수원군 음덕면, 같은 군 양감면)으로 주곡리에 거주했다. 김흥식은 나무하기, 소 사료 베기, 오줌통 메고 거름주기를 알리바이로 댔다. 장제덕은 그의 처 박씨에 따르면 그날 간척 공사지에 나간다고 했단다. 소작하면서 본격적인 농사철에 들어가기 전에 간석지 개간 노동으로 돈을 벌었던 것 같다. 그가 소작했던 것은 주곡리 문춘실의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다. 용인군 이동면 출생으로 외지인인 문춘실은 이곳에서 와서 개간 노동을 하며 소작을 했는데, 그 땅은 개간 청부업자 이시쿠라가 장소진, 장제덕에게서 뺏은 땅이었다. 위 4인의 출생지는 다르지만 생활 처지는 비슷했다. 이들은 모두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차희식 징역 15년, 장소진과 장제덕 징역 12년, 김흥식 징역 5년. 앞의 세 사람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되었다. ‘행동대장 차희식과 그의 그룹’이라 부를 만하다[박환]. 그런데 앞의 두 사람은 1968년에 국가유공자로 포상됐는데, 뒤의 두 사람은 2010년이 넘어서야 포상됐다. 이런 차이가 왜 생긴 걸까.

판결문을 보면 우정면 멱우리 선동 이후 차희식은 장안면사무소로 가서 시위대와 합류했는데, 장제덕, 장소진, 김흥식은 사라졌다가 우정면 사무소에서 다시 등장했다. 그 사이에 3인은 무엇을 했을까? 용인군 출신으로 장안면 사랑리에 거주하며 염전일을 했던 정서성은 살해 혐의로 징역 12년 형을 받았는데, 1965년 운동을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판결문에선 그는 화수리주재소에서 등장하지만, 회고에 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사실 여부는 검토가 필요하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의 회고에 ‘구장-소사’ 조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민 ‘동원’에 대해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기도 하고 동네에 들어가 집집을 찾아가서 우리와 함께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鄭庶松]. 장소진, 장제덕, 김흥식이 이런 선전 선동을 하며 지역 주민과 동료를 모았던 것이 아닐까? 지리적으로 보면 그 와중에 정서성이 합류했던 것 같다. 장안면사무소 앞에 약 200명이 모였는데, 우정면사무소 앞엔 약 1,500명으로 늘었다.

선동자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주곡리와 이웃한 호곡리에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몽둥이를 든 사내”가 선동했다. 당시 머리에 수건을 동여맸다는 것은 노동자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선 외지에서 온 개간 노동자를 의미했다. 많은 피의자, 증언자가 만세시위의 주역으로 석포리 개간 노동자들을 지목했다. 우정면장 최중환은 석포리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사에 고용된 인부” 10명쯤을 시위의 수모자로 꼽았다. 장안면장 김현묵도 화수리주재소 앞산에서 “20명 정도 곤봉을 들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자들과 마주쳤다. 모두 얼굴을 본 적 없는, 우정 장안 사람이 아니었다. 개간 사업자 나가노永野藤藏는 경성에서 온 인부가 29명인데, 소요 당일 12, 3인만 있었다고 진술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차병혁의 손자는 개간공사에 800여 명이 일했다고 들었으며, 그 사람들이 참석하여 시위 참여자가 많아졌다고 보았다[차진환].주2)

노동자와 함께 또 다른 주역으로 농촌 하층민이 언급됐다. 김현묵은 시위 때 “자신의 주변에 무덤 봉분을 만드는 극하층 놈들이나 나쁜 짓을 하다 태형 맞은 놈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가장 난폭했으나 자신은 하층 놈들과 교제가 없어서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방 전 마을은 불평등한 공간이었다. 반상, 즉 양반과 평민의 상하 구분이 뚜렷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우정면 운평리에는 “직계가 없는 외성들로 이 일대 씨족에서 부리고 의식주를 부담해주는 하인이 마을마다 한두 명 있었다.” 하인은 마을의 궂은일을 맡아 상여를 메고 봉분을 만들었다. 우정면 멱우리와 화수리 연산 송씨 중에는 집에서 내려오는 하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특별히 ‘씨종’이라 불렀다[양선아 등 2020]. 만세시위 후 화수리 송영빈 집의 고용인 김만호가 가족을 데리고 도망쳤다. 시위에 참가했다 붙잡혀 중형을 받은 이영쇠, 가와바타의 총에 맞아 숨진 이경백이 농가의 고인, 즉 머슴이었다.

시위대의 행동에서 마을 상층에 대한 반감이 드러났다. 금의리 구장 이해진이 시위대의 촉구에 따라 우정면으로 나설 때 시위대는 ‘두루마기나 갓을 쓰고 가면 찢어 버린다’ 했다. 양반 행세에 대한 반감이다. 면장 김현묵을 ‘간사지에 쳐넣고 밟아 죽여 버려라’는 누가 말했을까? 차병혁과 이영쇠, 어느 쪽의 가능성이 더 높았을까? 이는 석포리 일본인 개간사업에 대한 반대가 아니었다. 1918년 7월 장안면은 사곡리의 국유미간지 약 7정보를 대부 신청하여 개간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면은 노동력을 호마다 부역을 부과하여 조달했다. 그러면 집에서 주인이 나갈까 종이 나갈까? 결국 면 전체의 이득이고 그 열매는 다 같이 누리는 것이 아닐까. 꼭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시기 멱우리 김원묵이 우정면 면장을 맡을 때 ‘면답’ 개간을 빌미로 자기 소유의 논에 방조제 공사를 했다고 빈축을 샀다[한신대학교박물관, 260].

노동자는 물론이고 농촌 하층민 중에도 외지인이 많았는데, 이런 외지인도 적극 참여층으로 기억됐다. 차병혁의 손자는 만세시위 당시 외지인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떠돌아 와서 여기 들어와서 살면서 매시 적극적으로 참석한 사람이 있다구 했는데 그게 누군지 이름을 정확히 모르겠네. 여기 본토백이가 아니구 이사를 들어와서 사시다가 여기 잽혀 가서 저기해서 출옥해서 여기 와서 같이 살았어야 하는데 출옥해자 마자 다른 곳에 갔으니까.”[차진환] 김흥식, 이경백, 정서성이 외지인이고, 이영쇠도 외지인 취급을 받았다. 장제덕은 농사꾼이자 노동자이자 외지인이었다.

종합해보면 장안·우정면 만세시위의 주동 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구장과 같은 지역 유지 그룹으로 그 중심에 석포리 구장 차병한, 수촌리 구장 백낙렬, 차병혁이 있다. 다른 하나는 농촌의 하층민, 개간 노동자, 외지인과 같은 농촌의 기층 민중으로 그 중심에 차희식, 장제덕, 장소진 등이 있다. 전자가 구장-소사 조직을 통해 장안면 주민을 동원했다면 후자는 우정면과 장안면 일부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과 동료를 모았다. 두 그룹의 연결은 차희식과 차병한 사이에서 이뤄진 것 같다. <토지조사부>나 <임야조사부>를 봤을 때 차병혁, 백낙렬보다는 차병한이 차희식과 경제적 처지가 가깝다. 차희식이 사는 주곡리는 석포리와 가까워 다른 주곡리와 달리 석포리에 더 소속감을 가진 곳이었다[한신대학교박물관, 259]. 물론 당시 농촌에서 이렇게 ‘위와 아래’가 함께 만세시위를 하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었다. 장안·우정면의 특색이라면 기층 민중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이고, 이것이 시위의 방향을 결정지웠다.

두 주동세력이 ‘구장-소사’ 조직을 움직이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하더라도 마을 주민이 호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화수리주재소 순사보 박재옥은 두 면의 인민이 독립사상을 가지고 있다, 만세시위 이전에도 간간이 일본 정치, 즉 식민지배를 나쁘게 생각하고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인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주민의 바람을 바탕으로 만세시위 참가는 ‘대세’를 이루었다. 김현묵이 말했듯이 금의리처럼 만세를 부르지 않기로 하고 구장-소사 조직도 움직이지 않았던 곳에서도 ‘각 마을 주민이 만세를 외치므로 결국 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또 우정면 주곡리 구장 한규회의 처신을 통해서도 ‘대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예심 판사에게 4월 3일 차희식 등이 마을에 선동하러 왔을 때 반대하며 쫓아냈다고 했으나, 문춘실 처 이씨의 진술은 좀 달랐다. 전날 4월 2일 구장이 와서 ‘누가 나오라 하더라도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이미 주동세력의 모의를 알고 있었다!), 3일 시위대가 와서 ‘타지에서 온 사람도 나오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니 남편이 구장 집에 가서 물어봤다, 구장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길래 남편이 쌍봉산까지 갔다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주곡리 구장은 처음 시위에 반대했으나 대세가 시위로 기울자 참가하는 것이 신상에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시위참가가 대세였다는 차원에서 ‘동원’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피의자 대부분이 ‘나오지 않으면 죽이겠다, 불 지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나온 것으로 진술했다. 이런 모습은 전국의 만세시위, 특히 농촌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런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근세 일본 민중사를 연구한 고(故)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는 잇키(一揆)에서 보이는 ‘강제 동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참가 강제는 잇키가 그 지역의 ‘대세’가 되어, 지역 공동체적 결속 차원에서 참가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잇키에 참가했던 대다수 사람은 그 참가 책임을 첫째 강제된 사실에, 둘째 참가가 ‘대세’였다는 사실에, 셋째 촌락공동체에 돌릴 수 있었다. 따라서 참가 강제는 사람들이 쉽게 잇키에 참가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근대인의 기묘한 편견이다. 근세 민중의 능동성이나 수동성의 압도적 부분은 공동체적 규제와 관계의 매개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고, ‘강제’에 매개된다는 것은 저들의 능동성과 활동성의 구체적인 존재 형태일 것이다[安丸良夫, 221-222]. 하나 덧붙이자면 삼일운동 당시의 ‘협박’이 전통시대의 그것에 비해 좀 거칠어진 것 같기는 하다. 1862년 농민항쟁 때는 시위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마을에 벌전(罰錢)을 매기거나 집을 부수겠다는 정도였다[송찬섭]. 아마 지배자의 탄압 강도가 세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신문조서를 보면 만세시위 참가자들은 잘못하면 누구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옛날 인정(仁政)의 시대와 달리. 거친 ‘협박’은 각오를 다지는 의식일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참가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끼리 불을 지르거나 죽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협박’과 ‘동원’은 참가를 촉진하는 수단이었으며, 그것이 통했다는 점은 참가자의 수동성보다는 만세시위의 ‘대세’를 말해준다.

대세는 ‘폭력’의 강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시위대는 처음부터 일본인 순사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일부 피의자들은 경찰이나 검사 앞에서 인정했으나 판사 앞에선 부인했다. 송산면 만세시위와 달리 처음부터 주재소를 공격하고 일본인 순사를 혼내준다는 의도는 명확했던 것 같다. 시위 한 축이었던 차병한의 발언을 음미해보자. 석포리 구장 차병한의 처 최씨는 예심 판사에게 자기 남편은 당일 시위하러 나간 것이 아니라 제지하러 나갔다며, 돌아와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진술했다. “아무리 제지해도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자신들이 하는 말은 듣지 않았다.” 변명의 측면이 있긴 하지만 문맥 그대로 받아들인다며 자신들, 즉 구장 등 유지 그룹이 말리려 했으나 많은 인민이 듣지 않고 습격하여 죽였다는 의미다. 제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민이 격렬한 시위에 가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낙렬이 면사무소를 부술 것까지 있냐며 걱정했지만 차희식 등은 부수었다. 차병혁은 시위 10일 뒤 장안면 독정리 구장 최건환에게 이번 소요를 일으킨 자는 차희식이라 했다. 아마 차희식이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 같다.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행동은 다수의 뜻이다.’ 단순히 살인이 목적이었다면 석포리, 주곡리에서 곧장 화수리주재소로 가면 빠르다. 돌고 돌아 주재소에 이르렀던 것은 세를 모으기 위해서, 결국 응징이 다수의 뜻이라는 명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주동세력 중 기층 민중 그룹은 많은 사람의 호응에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응징이 ‘살인’까지 나아갔던 것은 화수리주재소 순사 탓도 크다. 우선 가와바타는 포위된 상황에서 발포해서 시위자 한 명을 죽였다. 최종 판결문에는 발포 뒤에 시위대 중 차희식 등이 살해 목적을 가지고 실행한 것으로 기술되었다. 김현묵도 “순사가 발포하지 않았으면 죽이지 않았을 텐데 발포했기 때문에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발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암튼 발포는 순사가 겪은 ‘공포’의 크기를 말해준다. 그는 왜 안성군 양성면주재소 순사처럼 발포 없이 도망치지 않았을까? 안성군 원곡·양성면 시위도 장안·우정면 시위 못지않게 격렬했지만 순사 처단이 없었던 것은 일본인 순사가 시위대를 자극하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같은 해 3월 31일 가와바타가 경성에 있던 형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보면 그는 야마토 민족 운운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송산면에서 죽은 노구치 순사를 기리며, 살해한 도배에게 복수하고 싶으나 자기가 있는 곳도 불온한 무리가 있어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이곳에서 폭민 몇백만이 쇄도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쳐 죽이고[(討斃) 최후를 마칠 테니 가족과 선조에게 치욕 주는 일은 없을 거라 했다[角田生]. 그래도 자기가 한 일들을 생각하면 불안했을 거다. 4월 2일 밤 봉화가 오르자 가와바타는 다음 날 오전 5시에 출발, 발안주재소로 가서 응원을 요청했으나 11시에 혼자 돌아왔다.

가와바타가 죽고 나서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행적을 보자. 순사보 오인영은 그가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취급, ‘도박’에 대한 심한 단속으로 주민의 원성을 샀다고 했다. 1919년 3월 11일 화수리주재소에 부임한 순사보 박재옥에 따르면 시위가 일어나기 전까지 화수리에서 도박하는 사람을 1, 2회 검거했다. 당시 헌병경찰이 즉결처분한 인원을 범죄별로 보면 단연 ‘도박’이 1위로 전체인원의 30~40%를 차지했다. 문제는 놀이와 상습 도박을 구분하지 않으며, 민족적 계급적 편견에 따라 조선인, 특히 빈곤층을 가혹하게 단속하고 처벌했다는 점이다[이종민]. 차희식은 1915년 도박죄로 징역 3개월의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또 장안면 면장 김현묵은 나무 심는 일로 석포리 사람을, 공동묘지 건으로 사랑리 사람을 감독 순사와 상의하여 수원으로 보내 고생하게 한 일이 있다고 했다. 김현묵은 부인했지만, 가와바타의 친구가 공동묘지 공사를 한 뒤 김현묵 등이 대금을 깎으려 하자 가와바타가 그의 안면을 때렸다는 얘기도 있다. 김현묵은 당시 34세로 가와바타보다 9살 많으며, 지역 유지이다. 그에게 이 정도라면 기층 민중에겐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1989년 일본 다큐멘터리에서 한 마을 주민은 가와바타가 위생검사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의 뺨을 때렸다고 회고했다[마쓰다 도시히코]. 따귀 때리기는 모욕을 줌으로써 때리는 사람에게 ‘지배자’라는 우월감을 주지만, 맞는 사람에겐 분노가 쌓이는 폭력이다.

전제적으로 삼일운동 당시(3월 1일~4월 24일) 면사무소와 같은 행정기관(29건)보다 헌병경찰기구(130건)에 대한 시위가 많았던 것[水野直樹]은 무엇보다 모욕적 일상 통제에 대한 항의이자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을 통해 저항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경찰헌병수는 거의 변함이 없는데 1919년, 1920년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즉결처분 사건수와 인원수가 줄어들었고, 1920년대 중반에 가서야 그것도 경찰 수를 5,000명쯤 늘린 후에 삼일운동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삼일운동이란 ‘망치’에 얻어맞아 1910년대 ‘무단통치’기에 구축된 경찰·헌병의 통치력, 일상적 민중 통제 장치가 찌그러진 것이다. 1919년 5월 황해도 수안군 직원이 소속 면민에게 ‘연초경작조합’(煙草耕作組合)을 설명하자 “쓸데없는 설명 그만둬라. 우리는 도박하기에 바쁜 사람이다.” 등 불온한 언사를 하는 자가 있었다[도장관보고철 5]. 삼일운동 이후 바뀐 분위기를 말해준다.

[caption id="attachment_8453" align="aligncenter" width="567"] <그림3> 1915~1925년 조선총독부 경찰(헌병)의 ‘범죄즉결’ 사건·인원수 추이(자료: 조선총독부편, <<조선총독부통계연보>> 해당연도판; 松田利彦 2009 <<日本の朝鮮植民地支配と警察-一九0五~一九四五年>> 校倉書房 24~25쪽.[/caption]

연구자들은 시위의 격렬성을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한 뒤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장안면 우정면 사람들은 ‘만세 후’를 살아내야 했다. ‘만세’로 하나가 되었던 시위 참가자들은 이후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른 길을 갔다. 군경이 마을로 들어와 불을 지르고 죽이며 붙잡는 판에 도망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마을 유지 중에선 수촌리 구장 백낙열이 소사 이원준과 함께 검거를 피해 사라졌다. 기층 민중에선 석포리 개간사업에 고용되었던 노동자들이 시위에 가담한 뒤 배를 타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수리 김만우도 가족을 데리고 도망쳤다. 도망에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수촌리 이봉구는 도망쳐 서울[경성]로 들어가 여관 고용인으로 살다가 1921년 1월 체포됐다.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의 죄로 징역 12년 형을 받았다. 시위에 앞장섰던 주곡리 차희식도 군대가 불 지른 뒤로는 한동안 낮에 산에 올라갔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피했다가 6월 말경 체포되었다. 장소진, 김흥식, 장제덕, 정서성도 비슷한 시기 체포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25명 중에서 마을 유지와 기층 민중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로 차병혁과 이영쇠의 만세 전후 삶을 보자.

차병혁은 석포리의 세족인 연안 차씨 차상문의 장남이다. 차상문은 1911년 <토지조사부>를 보면 석포리와 주곡리에만 논 2.1정보 밭 4.8정보를, 1918년 <임야조사부>를 27.7정보의 임야를 소유했다. 차병혁도 16정보의 임야를 소유했고, 5.5정보의 ‘국유임야’를 대부받았다. 유명한 자염(煮鹽) 생산지대인 이 지역에서 임야가 많다는 것은 땔나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음 을 의미한다. 차병혁의 처와 동생은 차병혁이 4월 3일 시위 날 주곡리 해변에 땔나무 선적을 보러 갔다고 했다. 나무는 누가 해오나? 신문조서에 피의자들이 당일 한 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나무하기’였다. 자가용도 있겠지만 판매용이 많았을 거다. 자신의 산이 아니라면? 품삯을 받거나 해야 할 노동의 일부였을 거다. 동생 차병억은 직업이 포목상으로 시위 당일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녁엔 청부업자 이시쿠라에게 시위와 순사 사망 사실을 알려주었다. 차상문 집에 개간 임시사무소가 있어서 가까운 사이였다. 이시쿠라는 4월 중순 수색하러 온 군경을 안내하며, 차병혁의 집에 벼가 200석가량 있는데 태우지 말라 부탁했다. 차병혁 스스로가 ‘자신은 마름을 하고 있어 항상 벼 등이 집에 많은데 그것을 태워버리면 큰일이라 난폭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의 집안이 우정면 멱우리의 대지주 송영만 또는 수원의 대지주 차유선·차준담의 마름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아마 이 집안은 마름을 기반으로 지주로, 상인으로 부를 확장해갔던 것 같다. 당시 농촌에서 마름은 지주 이상의 생활을 하는 자가 드물지 않으며, 다수가 “부락의 권위자이고 소농민의 지배자”였다[京畿道內務部社會課, 99-100]. 차병혁 집안의 위세를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 장안면 석포리와 우정면 주곡리 주민 67명이 연명 날인하여 경성복심법원에 보내는 1920년 11월 20일자 <민인탄원서民人歎寃書>다. ‘우매하고 폐병환자라 죄를 저질렀을리 없다’는 다소 모호한 내용이다. 서명자에 석포리 후임 구장 김현갑, 주곡리 구장 한규회 등 유지는 물론이고 징역 12년 형을 받은 장제덕의 형 장제호도 있었다. 시위 참여 여부로 갈팡질팡했던 외지인 문춘실도 서명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것이 효과가 있었을까, 암튼 차병혁은 ‘기도企圖’자이면서 징역 3년 형을 받았다. 차병혁의 투옥에도 차씨 집안의 위상엔 문제가 없었다. 1927년 차상문은 장안면 면협의회원 중 1명이었고, 1929년 12월엔 차병혁이 면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경 서울의 유영섭이 벌인 개간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버들저수지를 조성하는 공사가 시작되자, 그곳에 농사짓던 마을 주민이 드러눕고 싸우는 등 격렬한 반대 운동을 벌인 끝에, 대신 다른 땅을 분배받았다. 이때 운동을 주도했던 차씨들이 조암주재소에 많이 붙잡혀 갔다고 한다. 차씨 후손들은 자기 집안이 일제강점기에도 “말발이 셌던 사람들”이라는 예로 이 사건을 기억했다[한신대학박물관, 237; 차진환]. 1943년 <지세명기장>을 보면 석포리와 주곡리에 차병혁의 논과 밭이 10.4정보였다. 그의 동생 차병억과 차병필의 논밭을 합하면 13.3정보로 치상문 대에 비해 2배 증가했다. 그가 문중 대표로 소유한 땅은 제외한 수치이다. 이런 치부를 바탕으로 해방 이후에도 차씨 집안은 번성했던 것 같다. 1957년 <<경기도지>>에 장안면을 대표하는 집성촌 집안의 하나로 오른다. 1934년 <<朝鮮의 姓>>에 차씨는 해당 지역 동족부락 성씨로 기재되지 않았었다. 마침내 1962년 장안·우정면 만세시위 참가자 중에서 차병혁이 처음으로 포상됐다(독립장). 당시 참가 차씨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그가 이 만세시위를 ‘총지휘’한 것으로 적혀 있다.

[caption id="attachment_8454" align="aligncenter" width="567"] <그림4> 차병혁의 무죄를 주장하는 석포리 주곡리 주민들의 민인탄원서民人歎寃書(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경성지방법원 형사사건 기록 32
(http://library.history.go.kr/dhrs/dhrsXIFViewer.jsp?system=dlidb&id=KS0000000032)[/caption]

차병혁을 위시한 차씨 집안의 연대기를 훑다 보면 민족이나 국가의 틀로 담아낼 수 없는 면들이 보인다. 그들을 중심에 놓고 보면 ‘지배 권력과 다양한 관계’, 때론 활용하며 때론 저항하는 모습이 눈에 띄며, 이 지역을 잘 대표한다. 한편에는 개간지 도지 거부와 ‘난동’, 염세 납부 거부, 삼일운동, 저수지 반대 운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이른 토지·임야조사사업 실행과 산림보호조합 설치, 계속되는 개간사업과 산림사업, 총독부 산업시책에 적극 호응하는 면이 있다. 때론 활용하거나 때론 저항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서두에서 봤듯이 개간지 지주가 작인을 맘대로 할 수 없었듯이 지주도 지배 권력이 누구든 간에 맘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국가에 세금 내지 않는 땅이 없다지만, 이 땅은 그들이 만들어 낸 땅이다. 지배 권력을 상대화하는 힘은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영쇠는 사건기록 등에 1901년 석포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 지역 사람들은 외지인으로 기억했다[金善鎭, 99]. ‘가출옥 문서’에 딸린 ‘신상표’에는 어린 시절이 이렇게 쓰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 장태욱(張泰旭)이 맡아서 키움. 9세부터 11세까지 서당에 다녔고 이후 농가의 고용 및 노동을 함. 양호한 환경은 아님.” 1911년 <토지조사부>를 보면 주곡리, 석포리, 금의리에 이영쇠 이름으로 논밭이 0.8 정보가 있다. 적지 않은 땅인데......<민적부>를 보면 1916년 10월 석포리 104번지 장태욱의 호적에 얹혀서(符籍) 일가 창립, 즉 본인이 호주가 됐다. 장태욱이 숙부라지만 이영쇠 양친의 성과 다르다. 그에겐 손위인지 아래인지 누이도 있었다. 고아가 된 오누이를 데려다 키운 아저씨 정도가 아닐까. 이영쇠는 장태욱 집의 머슴(雇人)을 하면서 틈틈이 노동했던 것 같다. 누이는 언젠가, 1916년 경일까, 박계복(朴桂福)과 결혼했다. ‘신상표’에 이영쇠의 ‘주된 친족’으로 나오는 매부 박계복은 우정면 주곡리에 거주했으며 소작농으로 생활이 곤란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신용했다. 만세시위 후 이영쇠는 밭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헌병이 찾은 것이 아니라 구장이 헌병에게 인도했다. 차병한 대신 구장을 맡은 김현갑이 이영쇠를 인도하자 친족이랑 마을 사람이 ‘헌병이나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이쪽에서 인민을 잡아서 내어주는 법은 없다’며 항의했다. 김현갑은 ‘이영쇠가 주재소에 불을 지르지 않았느냐, 죄 있는 사람을 내어주는 것이 좋지, 마을 전체가 망하게 하는 것이 좋은가’라 했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 방화, 건조물손괴’의 죄로 이 만세시위 피고인 중에서 가장 긴 15년 징역형(미결구류 400일 본형에 산입)을 받았다. 1924년 칙령 제10호와 1927년 칙령 제11호 두 차례 감형에 의해 징역 11년 3개월 9일로 조정되었다. 형기 종료일은 1931년 2월 11일이었으나 그보다 2년 앞서 1929년 4월 24일 가출옥했다. 이영쇠는 처음 감옥에서 “장기 복역을 비관하여 괴로워하며 혹은 조용하거나 혹은 거칠었다. 작업을 게을리 하며 심사가 하루하루 고르지 못하였다. 공업용 주당(酒糖)을 훔쳐 먹다가 징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마음을 다잡아 목공 기술도 익혔고 품행도 좋아져 1928년, 29년에 각각 상표 1개를 받았다. ‘출옥 후 보호자’란에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경성구호회(京城救護會)라 쓰여 있다. “본 죄수의 집안은 일찍이 폐절(廢絶)됐고 누이와 매부가 있어도 농가 고용인으로 전전하여 생계가 곤란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오래 감옥에 있어 사회 실정에 어두워 간절히 ‘경성구호회’를 희망한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1932년 4월 함흥으로 본적을 옮겼다. 아마 ‘개발’ 붐이 일어나는 ‘북선’에 일자리가 많았을 거다. 이후 삶은 알 수 없다. 그는 장안·우정면 만세시위에서 최장기 징역형을 받은, 바꿔말하자면 가장 격렬한 시위자였지만 2020년에야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나고 차병혁이 포상받은 지 58년만이다. 이 만세시위로 처벌받은 사람 중에 가장 늦다. 그나마 훈장을 전해 받을 후손이 없는 ‘미전수자’이다.

장안·우정면 만세시위 참가자에 대한 포상을 보면 일정한 규칙이 있다. 유죄 판결을 받은 26명 중 20명이 20세기에 포상을 받았는데 사건기록으로 볼 때 정서성 1인을 제외하면 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다. 아마 정서성은 1965년 <<신동아>>에 실린 회고로 세상에 알려져 1968년 이른 시기에 포상됐을 가능성이 있다. 나머지 21세기에 포상된 6인 중 외지인이 3인(유수산, 장제덕, 김흥식)이고 만세시위 이후 이 지역을 떠난 자가 2인(이봉구, 이영쇠)이다. 포상은 사건이 일어난 지역 사람 위주로 주어졌다. 처벌받은 형량의 다과, 다시 말해 참가 정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한 사람만 더 얘기해볼까요? 장제덕, 정서성과 같이 외지인으로서 이 시위에 참가했으나 잘 기억되지 않는 인물이 있다. 혹시 이덕명(李德明)을 아시나요? 이경백(李敬伯)이라고도 합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그가 30세쯤이라니 1890년경 태어났을 거라 짐작할 뿐 정확히 어느 해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1919년 4월 3일 화수리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가 쏜 총알에 맞아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 날짜도 확정할 수 없다. 3, 4일 지나서 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시위 당일 죽었다는 소리도 있다. 또 그가 불구였다는 사람도, 반대로 몸이 성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삼일운동에 참가했던 희생자라면 그를 잘 기억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왜 이렇게 모호할까? 우선 이 시위를 수사한 검경이나 재판한 판사는 그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으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가와바타 순사가 발포 이후 시위 군중에게 참살되었기 때문에 수사의 초점은 시위 군중의 폭력, 즉 ‘살인’에 맞춰졌다. 6월 27일 검사가 보강 수사를 하는 과정에 증인 우영규의 입에서 이덕명의 사망이 처음 언급되었다. 아니 그사이 피의자나 증인이 얘기했는데도 기록되지 않았을 수 있으니 ‘처음 기록되었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이후에도 판사는 이덕명의 사망을 피의자들의 시위 참여 여부나 정도를 밝히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다. 예를 들면 “불구자도 참여했다면 성한 사람은 다 참여한 것이 아닌가”라 묻든지 피의자들의 허점을 찾기 위해 사체를 나른 시간, 나르면서 나눈 얘기를 교차 질문하는 식이다. 그의 죽음을 기록하면 할수록 순사 가와바타를 죽인 군중이 명분을 얻게 되고 그 폭력성은 희석되는 것이리라. 예심판사는 한 증인에게 “주재소 뒷쪽 창고에 방화하려는 것을 순사가 권총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가”라 질문을 했다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의 최종 판결문에도 이덕명의 사망은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피의자나 증인들의 말을 읽어보면 이덕명에 대한 정보가 명확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지역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거주했던 장안면 사곡리 구장 김찬규는 이경백에 대해 “그놈은 집도 없고 처자도 없는 사내” “거처가 정해진 곳이 없는 놈”이라며 총 맞은 그를 누가 어디로 운반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다 결국 판사에게 구장으로서 무책임하다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를 머슴으로 고용했던 김연성은 그의 이름이 이경백이 아니라 이덕명이며 “대략 30세쯤 사내로 작년 가을부터 우리 집에 있었다” “이전에도 우리 집에 두고 일을 시킨 일이 있다” 했다. 시위 당일 그는 사촌의 혼인 잔치가 있어 거기 가느라 이덕명이 나갔는지 몰랐다. 구장은 “나무하러 갔다가 군중에게 잡혀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해가 진 뒤 박순근과 박장경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시신 곁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시신을 김연성 집으로 지고 오지 않고 매장 허가도 없이 바로 공동묘지에 묻었다. 김연성은 두 사람이 “마을 안의 사람으로 못 본 체하고 버려둘 수 없으므로 가져다가 묻어주었다”, 박장경은 김연성이 시켰다, 박순근은 마을 노인들이 묻어주라 해서 그랬다고 했다. 시신 수습도 죄가 될까 봐 모두 한 발 뺐다. 고용주나 구장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의 이덕명에 관한 진술을 읽다 보면 그를 낮춰보는 ‘하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떤 사연으로 이 마을에 들어왔을까? 외지인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위에 앞장서다 총을 맞은 걸까? 시위대에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보고 힘이 났던 것일까? 뒤 시기 통계이지만 1930년 국세조사보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업자의 소분류 직업 중에서 머슴(作男, 作女)은 44만여 명으로 전체에서 3번째로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외부인으로서 머슴으로서 이덕명의 처지는 해방 이후에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사망자로서 그가 기억되곤 했지만 2002년에서야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도 훈장을 받을 후손이나 관련자가 없는 ‘미전수자’이다. 지역과 국가가 어찌하든 간에, 앞으로 나는 장안·우정면 만세시위를 이영쇠 이경백의 시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머슴’의 시위로 기억하고 얘기하겠다.

 

미주

주1) 수원경찰서가 4월 29일 사건을 검사국으로 송치하면서 작성한 <의견서>에 적힌 ‘피고’인 34명의 종교는 천도교/동학 24명, 개신교(기독교 신교, 감리파, 장로파) 8명, 천주교 2명이었고(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해당문건 ‘원문보기’ 참조), 뒤이어 진행된 검사의 <신문조서>에 피고인이 밝힌 종교를 보면 개신교 8명, 천주교 5명, 천도교 2인, 무종교 19명이었다. <의견서>에 주기(朱記)된 종교와 <신문조서>의 본인 진술 종교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주2) 서두에서 인용한 둑 쌓기는 한백희가 1930년대 호곡리 일대 개간하는 일을 직접 해본 경험에서 나온 얘기다. 1930년대 호곡리의 개간사업은 1930년에 송영찬 등이 허가를 받고 1932년에 송영만 등이 양도를 받아 1933년 준공인가를 받은 것 1건으로, 총 8만3,410평 규모의 사업이었다(답 6만4,147평, 제방 1,886평 등). 1919년 석포리에서 秋山硏亮이 개간하기 위해 총독부로부터 대부 받은 면적은 85.21정보, 즉 25만 5,630평으로 호곡리 개간보다 규모가 3배나 크다. 한백희씨는 둑 쌓기에 수백명이 일했다니 차진환이 전해 들은 “800여 명”이 크게 과장된 것 같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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