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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⑤] 검찰총장과 남로당원 : 이인·이철 형제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1.01.06 BoardLang.text_hits 4,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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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월(통권 13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검찰총장과 남로당원: 이인·이철 형제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남로당 아지트가 된 법무부 장관 집1950년 2월 23일 한밤중, 미군정에서 검찰총장을 역임하고 이승만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제헌의회 국회의원 이인(李仁, 1896~1979)의 집에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인의 큰아들 이옥(李玉, 1928~2001)을 체포했다. 같은 시각 이인의 동생 이철(李哲, 1917~1950)과 조카 이용도 각각 자택에서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주1) 체포영장에 적힌 혐의는 이른바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M·L연구부’에서 활동한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며칠 뒤 다른 가족들도 잇달아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 관계로 지난 2월 23일 경찰국에 구속한 이인 씨의 장남 이옥(23세)을 위시한 동가족인 이철(34세, 이인 씨의 동생, M·L연구책), 고옥남(30세, 이철의 처), 이용(22세, 생질), 이덕경(24세, 장녀), 이응숙(42세, 자姉) 등은 소위 남로당 M·L연구부 사건 혐의로 신진균(34세, 남로당중앙상임위원회 오르그·조직책)과 함께 7일 일건 서류 및 수많은 증거 서류와 같이 송청(送廳)되었다고 한다.주2) 당시의 신문 보도는 젊은 남성들에 이어서 다시 이인의 제수(弟嫂, 이철의 부인), 맏딸, 여동생 등 장관의 여성 가족들이 ‘M·L연구부 회원’으로 추가 검속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인의 가족들의 혐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투쟁을 연구하며 국내와 정치·경제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남로당원 교양 교재와 선전 재료를 제공하였던 것”주3)이었다. 이후 신문 기사는 이인의 동생 이철과 장남 이옥 두 사람만 구속 기소되고 나머지는 방면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주4) 이인은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그를 전후한 법조 프락치 사건 등이 발생해서 이인이 활동한 법조계와 국회에서 남로당 관련 공산주의자 색출의 광풍이 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국에 가족이 떼거리로 남로당 조직에 연루된 것은 치명적이었다. 어쩌면 가족들의 배신이 더욱 뼈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인은 1946년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사건 수사를 지휘하며 좌익 소탕을 주도한 검찰총장으로, 남로당과 구원(舊怨)을 가지고 있던 사이였다. M·L연구부 사건의 중심에는 이인의 동생 이철이 있었다. 이철은 이 조직의 실질적인 ‘연구책’이었다. 학생 시절부터 식민지 현실의 모순에 민감했던 이철은 해방 후 본격적으로 좌익 활동을 시작했다. M·L연구부는 남로당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이론 생산 부서였다. 젊은 인텔리 당원들이 이론 학습을 하며, 문건 집필에 필요한 자료 수집 정리 등을 담당하고 있던 이 조직에 이철은 자신의 혈족인 젊은 조카들과 누이를 끌어들인 것이다. 새로운 조선의 진로를 사회주의로 설정한 남로당 당원 이철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수사를 지휘해 공산당에 타격을 준 검찰총장 이인 형제는 순탄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인에게 좌익 활동을 하는 이철은 눈엣가시였다. 이인은 이철이 자신의 아들딸을 “붉게 물들인다”며 “우리 집안을 망치는 놈이다”라고 노발대발했다. 신문 기자들과 만나서는 “철 같은 놈은 잡아 죽일 수밖에 없다”주5)고 공공연히 극언하며 동생 이철과 의절하다시피 할 정도로 감정이 나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인이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등을 지내며 좌익 색출에 몰두하는 동안, 그의 아들딸은 삼촌인 이철에 ‘붉게 물들어’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 이인의 집은 남한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남로당 아지트였던 것이다. 당시 상황만 놓고 보자면 이인은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우익 보수 ‘꼰대’ 취급을 받은 셈이지만, 이인이야말로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이인은 평범을 넘어 ‘성스럽기조차 한’ 풍모를 보인 삶을 살았다. 우선 이인의 생애를 따라가보자. 독립투사가 된 ‘사상 사건’ 변호사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대구 사일동에서 이종영과 정복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이철이 망칠까 걱정했던 집안의 기원은 고려시대 주자학의 개척자였던 익재 이제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친 이종영은 헤이그 밀사 이준 열사와 교류하고, ‘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구한말의 애국지사였다. 이인은 어려서 성리학자였던 조부 이관준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여덟 살에 대구의 달동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했다. 1913년에는 도쿄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중학교에 입학했다. 출판사 교정 등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어렵게 유학 생활을 꾸린 것으로 전한다. 이듬해인 1914년 니혼대학(日本大學) 법과 야간부에 입학했으며, 이어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 2학년에 편입하여 법률을 전공했다. 1910년대 유학생인 이인은 김성수, 안재홍, 장덕수, 유억겸, 신석우, 최남선, 서춘, 홍성하, 신익희, 변희용, 이광수 등 동시대 도쿄 유학생들과 사귀며, 식민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자각했다. 1917년 귀국하여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에서 잠시 일하다가 그만두고, 3·1운동 때 숙부인 우재 이시영을 도와 삼남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3·1운동이 좌절된 후 다시 도쿄로 건너간 이인은 27세 되던 해인 1923년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다. 4,000명이 응시하여 70명이 합격한 시험에서 그는 유일한 조선인 합격자였다. 1923년 5월 경성에 변호사 사무실을 연 이인은 이후 독립지사들의 ‘사상(思想) 사건’을 주로 맡아 무료 변론에 나섰다. 그는 의열단 제1·2사건, 신의주민족투쟁 사건, 광주학생의거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안창호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송진우·안재홍·신일용 등의 필화 사건, 서울민중대회 사건, 칠산혁명당 사건, 원산노동쟁의 사건, 형평사(衡平社) 사건, 6·10만세운동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 사건, 대전신간회 사건, 이동수의 이완용 암살계획 사건, 사이토 총독 암살미수 사건 등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상 사건’에서 변론을 맡았다. 그가 변호한 사건만으로도 독립운동사를 엮을 수 있을 정도이다.주6) 변호사로서의 그의 역량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여럿 전한다. 1926년 6월 광주지법에서 열린 형평사 사건 공판 변론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백정을 천시하는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한 이 단체 회원 600여 명이 검거되었고, 그중 40여 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변호인 이인은 피고인들의 조서가 모두 같은 날짜로 작성되어 있고, 한 경찰관이 50장 정도 작성할 수 있는 분량을 넘겨 하루 850장까지 작성된 사실을 따져 전원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주7) 일본 검경의 입장에서는 이인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자 회원이었던 이인도 학회 비용 지원을 빌미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받으며 햇수로 4년 동안 미결수로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평생 보행이 부자유스러울 만큼 다리를 상했다. 곧이어 해방이 찾아왔고 그는 한국민주당의 총무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caption id="attachment_8380" align="aligncenter" width="546"]그림 1.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모임 ‘십일회’ 기념사진(1962년 10월 2일).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인. 사진 출처는 http://daemun.or.kr/?p=3559[/caption] 법률 전문성에 항일 경력이 더해져 그는 미군정에서 수석대법관과 검찰총장을 거쳐 1948년 정부 수립 때 초대 법무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이승만의 양녀’로 불린 상공부 장관 임영신 뇌물 수뢰 및 독직 사건 처리와 관련된 파동으로 사직한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4·19혁명 때에는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성명에 동참했으며, 박정희 시대에는 원로로서 야당 통합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어학회 사건의 공훈이 인정되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식민지 시기 이인은 지조를 지키며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지만, 해방 직후 그가 걸어간 정치적 행로는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식민지에서 “민족주의 사건이고 공산주의 사건이고를 구별하지 않”주8)고 변론을 맡았던 그는 미군정의 검찰총장이 된 후에는 남로당의 불법화와 탄압을 주도했다. 또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제2대 위원장을 맡아서 결과적으로 특위 활동을 무력화하는 데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우익 진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던 이인을 아주 곤란케 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동생인 사회주의자 이철이었다. 양심적 좌익 인텔리의 비극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이철의 됨됨이는 그의 친구였던 역사학자 김성칠의 기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철은 1937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동기이자 경성제국대학도 함께 다닌 김성칠의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주9)였다. 둘은 학병 거부로 투옥되는 고통도 함께 겪었다. 이철의 아내 고옥남은 김성칠의 아내 이남덕과 이화여전과 경성제대를 함께 다닌 ‘절친’이며,주10) 이철의 결혼도 김성칠이 중매하고 혼주(婚主)인 이인을 설득해 성사된 것이다. 이철은 김성칠이 남긴 일기 《역사 앞에서》에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자주, 또 길게 등장하는 인물이다. 해방 후 좌익에 가담한 이철과 학구(學究) 생활을 지속한 김성칠은 가는 길이 어긋나게 된다. 하지만 김성칠이 “정치광(政治狂) 노릇 그만하고 불문학 공부나 계속하려무나” 하면, 이철이 “네놈들처럼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야 어느 지경으로 가든 이를 남의 일처럼 좁은 연구실 창구멍으로 내다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주11)고 응수하는 식으로 둘은 막말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헤아리는 친구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5일자 일기에서 김성칠은 혜화동에 살던 이철을 찾아갔다가 “인민공화국에 가서 일 본다고 부재”한 그의 처소를 둘러보며 “그는 기어이 갈 길을 가고야 마는구나”라며 “불 아니 땐 그의 방처럼 세상이 한결 추워지는 것”주12) 같다고 쓸쓸한 감회를 남겼다. 이철이 걸어갈 앞으로의 세상에서 한기를 미리 예감한 김성칠의 느낌은 곧 현실이 된다. 친형인 이인이 앞장섰던 좌익 색출의 한파가 몰아치던 해방공간에서 이철은 어찌 살았을까? 이철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친구인 김성칠의 일기에서 해방 직후 ‘인민공화국에 가서 일을 본다’는 언급이 있고, 이어서 ‘좌익출판문화협회’에서 활동했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좌익출판문화협회’의 정확한 명칭은 ‘조선좌익서적출판협의회(이하 ‘좌협’)’로, 이철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좌협’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이 조직의 출발 및 면모, 그리고 이철이 했던 활동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새로 발견된 1945년 11월 2일자 《중앙신문》의 〈좌익서적출판협의회〉라는 1단짜리 기사는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으로 박해를 받던 좌익 서적의 출판을 동일한 계통으로 통제하여 ‘맑스’, ‘레닌’주의 이론을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하여 일전에 서울 모처에서 ‘동무사’, ‘해방사’ 등 좌익 서적 출판 관계자 대표가 모이어 협의한 결과, 조선좌익서적출판협의회를 창립하였는데, 본부 사무소는 서울 안국정(안국동) 행림서원 안에 두기로 하였으며”주13)라고 보도하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8381" align="aligncenter" width="554"]그림 2. 〈좌익서적출판협의회〉, 《중앙신문》 1945년 11월 2일자 기사[/caption] 좌협의 정확한 창립일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대략 1945년 10월 하순경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좌협의 소재지인 행림서원은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사무실의 하나로, 당시 조선공산당의 ‘공개된 연락 장소’였다. ‘좌익서적출판협의회 총판매소’로 소개된 ‘우리서원’의 광고에는 좌협이 간행한 《좌협월보》와 〈판매목록〉을 구비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아 좌협은 좌익 서적 발행 출판사들의 연합조직이었으며, 기관지도 발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족 당시 좌협의 조직과 임원을 보면, 의장 겸 기획부장 온락중, 번역부장 이철, 출판부장 김양수, 배포연락부장 이창훈, 도서부장 이상호이며, 기획부원으로 최성세, 최승우, 이철(번역부장), 김순룡 등 4명을 두고 있었다. 조직의 편제를 통해 공산주의 서적의 번역·집필·출판을 담당하는 다목적 출판단체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좌협은 별도로 등록된 출판사이기도 했으며, ‘좌협’ 명의로 번역 출판과 감수 등의 출판 활동도 수행했다.주14) 무엇보다 좌협은 좌익 서적 출판사들이 같은 서적을 중복 출판하는 것을 조정하고 출판에 앞서 원고 검토를 실시해 남로당의 노선에 부합하는가 여부를 판별하는 기능을 했다. 번역부장과 기획부원을 겸하고 있던 이철은 좌협의 핵심적인 실무책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철은 중복 출판을 조정하고, 번역을 주도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탄압으로 남로당이 지하조직화되고 좌협도 유야무야되면서 이철은 다른 활동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즈음 이철은 고옥남과 결혼하여 딸을 낳고 잠시 평온한 일상을 보냈지만, 앞서 언급한 M·L연구부 사건으로 1950년 봄 서대문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가족들은 《서울신문》에 이철의 탈당 성명서를 냈다. 이때 형 이인이 담당 검사에게 손을 써서 이철 본인이 성명을 시인하기만 하면 풀려날 판이었다. 그런데 검사실에 불려간 이철은 전후 사정을 듣고서는 서슴지 않고 “이 성명은 내 본의에 어긋난 것”이라고 부인해서 입회한 형 이인을 난처하게 만들었다.주15) 탈당 성명서를 부인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이철은 그해 6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풀려나와 서울시 인민위원회의 문화선전부에서 일했다. 그는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 탈환으로 인민군이 퇴각할 때, 월북하다가 사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주16) 김성칠은 임신한 고옥남이 “어린 딸을 업고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남편을 따라 몇백 리 길을 허둥지둥 따라가다 마침내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남편을 여의고 되돌아온”주17) 이철 가족의 비극적인 후일담을 전하고 있다. 전쟁과 가족 남북의 화해이인과 이철 형제의 갈등은 “시대의 장난이요 민족의 비극”주18)이라 할 만하다. 이인으로 말하자면, 해방 후 공산당에 대한 노골적 혐오를 드러내며 점차 강경한 우익 성향을 보였지만, 그 어렵던 일제강점기를 훼절하지 않고 올곧게 살아나온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사상 사건이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았고 보수도 없이 오히려 자기 비용을 써가며 정성껏 변론했다. 1979년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는 살던 집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철의 경우는 어떠한가.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불문학 전공으로 학구 생활을 하던 이철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현실 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야 어느 지경으로 가든, 이를 남의 일처럼 좁은 연구실 창구멍으로 내다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 말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젊은 양심을 지니었다면 어찌 뛰쳐나와서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배길 수 있을 것인가.”주19)라는 비판은 김성칠에게만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내면에 가했을 채찍이었을 것이다. 사상 사건을 무료 변론하고 조선어를 지키려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던 형과, 민족을 위한 올바른 길을 사회주의에서 찾은 양심적인 인텔리 청년이었던 동생. 분단과 전쟁은 이념이 다른 이들 형제를 화해할 수 없는 운명으로 나누어놓았다. 집안을 망칠 놈이라며 “철 같은 놈은 잡아 죽일 수밖에 없다”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형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담당 검사 오제도에게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을 것이다. 이철 역시 형의 육친애를 모르진 않았겠지만,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배신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인·이철 형제의 애증을 보면서,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염상구 형제가 떠올랐다. 이지적이고 투철한 사회주의자 형 염상진이 빨치산 활동 중에 전사하고 그 주검이 거리에 전시되었을 때, 우익 청년단장으로 갖은 악행을 일삼던 동생 염상구는 같은 편인 경찰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까지 증오했던 형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다. 이념에 의한 비극적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상처를 준 상대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방 공간의 이념적 갈등과 혼란, 전쟁의 비극은 이인·이철 형제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M·L연구부’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이인의 가족 중에는 큰 아들인 이옥도 있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는 이철만 형무소에 남고 이옥도 석방되었다.주20) 이인은 식민지 시기를 회고하면서 변론 사례로 받은 강원도 “삼뿌리를 달여 먹”주21)이며 아들 이옥을 애지중지 키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인은 아들이 수감되었을 때도 애달픈 부정(父情)으로 탈당 성명을 내도록 설득하고 석방을 위해 삼뿌리 못지않은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전향한 이옥은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내다가 1960년대 초반 홀연 아내와 어린 남매를 데리고 프랑스로 건너간다. 그는 프랑스에서 한국어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고대사-고구려 연구〉로 국가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에 정착해 파리7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Collége de France) 소속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유럽 한국학회를 창설하는 등 유럽에서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교육·문화 공로 훈장인 ‘팔므 아카데미크(Palmes académiques)’를 받았다.주22) M·L연구부 사건으로 수감된 뒤 석방, 한국전쟁에서의 생존, 프랑스로의 이민(유학) 등 이옥의 인생 역정은 부친 이인의 후광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옥에게 왜 회한이 없었겠는가. 그가 프랑스로 이주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어느 곳도 선택하지 않고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 것과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가 향한 곳은 그의 동지이자 삼촌인 이철이 전공했던 불문학의 나라였다. 어쩌면 그의 프랑스행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이자 삼촌과의 화해의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2001년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이옥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프랑스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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