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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③] 애국자와 반역자 : 평양 출신 안익조·안익태 형제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10.17 BoardLang.text_hits 6,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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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10월(통권 10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애국자와 반역자 : 평양 출신 안익조·안익태 형제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한 ‘부역’ 군인의 죽음1950년 11월 7일 ‘시외 모처’에서 ‘부역자’ 23명이 총살되었다.(주1) 군사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한지 일주일 만이었다. 그들 중에는 ‘정부를 믿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녹음방송을 틀어 놓고, 혼자서 도주한 대통령 말을 믿고 잔류했던 사람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 당국에 협력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이 죽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날 처형된 23명 중에는 의정부 방어부대 7사단에서 낙오한 헌병 중령 안익조(安益祚) 부부도 있었다. 당시 저널리즘이 보도한 안익조의 범죄 내용은 “六 ·二五 경 서울 시내에서 국군으로부터 이탈된 낙오자로서 7월 3일 경 괴뢰군 군사비밀조사위원회에 자진 출두 자수한 후 9월 27일 경에 이르는 동안 은닉하였던 국군의 무기, 기관탄총, 권총, 장총 각 1정 및 동(同) 실탄 3백발을 자진 제공하였고, 피고 집을 군사비밀조사위원회 사무실로 제공, 의정부 서울 간에 있어서의 국군의 전투 상황 및 그 지역에 집결된 부대상황을 동 위원회에 제공”(주2)한 것이었다. 그를 심판했던 전국계엄사령부 법무부장 김종만(소령)은 훗날, 안익조가 “부인과 함께 좌익 거물인 김원봉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부역을 한 혐의였으며, “본인은 완강히 부인했지만, 나중에 부인이 모두 자백”(주3)하여 부부가 함께 처형되었다고 기억했다. 그의 죄목은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서울이 점령된 후에 의정부의 부대 상황은 과연 어떤 가치를 갖는 걸까? 이전부터 김원봉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말일까? 죽인 자의 말만 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서울 수복과 함께 돌아온 이른바 도강파들은 서울에 남았던 ‘잔류자’를 모두 잠재적 부역자로 간주했다. 초기에는 재판 없이 죽이는 일도 흔했다. 이후 군사재판이라는 형식상의 절차가 생겼지만, 당시는 전시였다. 안익조 등의 사형선고를 전하는 기사 바로 옆에는 공교롭게도 부역자 수사에 대한 CIC대장 김창룡의 발언이 함께 실려 있다. “조사 중 고문 또는 불법집행이 없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창룡은 “우리의 수사는 과학적이며 민주적”(주4)이라고 답했다. 악명높은 김창룡의 입에서 나온 ‘과학적 민주적 수사’라는 답변은 많은 ‘부역’ 혐의가 실은 고문에 의한 자백이거나 과장되었다고 실토하는 것처럼 들린다. 어쩌면 김창룡은 전쟁 이전부터 안익조의 행보를 “빨갱이의 암약”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안익조는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해 제5관구경찰청 총무부과장, 경상북도 군위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1949년 6월 육군 헌병 소령으로 특별 임관 후 제3사단 헌병대장이 된다. 1949년 9월 그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남겼다. “……현하 남한에 있어서 열렬한 일부분의 공산당원을 제외하고는 해방 직후 혼란기에 부화뇌동하여 좌익 계열에 가담한 민중이어서 선량한 백성으로 돌아가게 되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에서 확고한 신분보장이 허용되지 않음은 유감한 일이다. 앞으로 당 헌병대에서는 귀순자 또는 전과를 개선한 자에 대하여는 충분한 신분보장을 하여 생업에 매진토록 추진하겠다. 그리고 좌익계열에 하등 관계없는 사람을 공산당 혹은 남로당이라고 모략중상하는 자에 대하여는 공산당 이상의 추상같은 엄벌을 가할 것이다.……”(주5) 안익조가 헌병대장으로 근무하던 제3사단은 대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1946년 식량 봉기가 시작된 대구와 그 인근은 상황이 끝난 후에도 많은 이들이 좌익 혐의로 고초를 겪던 곳이다. 또한, 당시는 제주도 4·3 진압 출동을 거부한 여수·순천 주둔 연대의 ‘반란’을 겪으며, 사회 전반에서 ‘레드 퍼지’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살벌한 시절에 안익조는 귀순자에게 신분보장을 약속하고, 무고한 자를 공산당(혹은 남로당)으로 모략하는 자를 엄벌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1948년 4월 7일자 영남일보는 군위경찰서장 안익조의 “물심양면의 지원”에 의해 ‘군위유치원’이 개원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주6) 대구 봉기 당시 군수와 경찰서장을 감금했던 불온한(?) 이력을 지닌 곳에 부임한 안익조는 유치원 설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등 당시의 위압적 경찰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혹시, 안익조는 숨겨진 좌익이었을까? 식민지 시대 그의 경력을 보면 그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그 이유를 해방 전 그의 삶을 통해 함께 알아보자. 레코드사 문예부장이 된 제국대학 의학사(醫學士)안익조는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의 형이다. 그는 1903년 평양 문무리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안덕훈(安德勳)과 김정옥(金貞玉) 사이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익태는 세 살 차이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안익조는 단지 안익태의 형으로만 기억되고 말기에는 아쉬운, 자기 드라마가 있는 식민지 조선 사회의 명사였다. 평양제일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청소년기부터 그의 이름은 식민지 저널리즘에 오르내렸다. 학창 시절 안익조는 유명한 야구선수였다. 동경유학 시절 그는 박석윤·박석기 형제 및 윤치영 등과 함께 ‘재동경조선기독청년야구단’에서 활약했다.(주7) 일본과 조선의 여러 팀들과 시합하며 이름을 날리던 유격수 안익조의 최전성기는 1922년 12월 8일에 용산 만철운동장에서 있었던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였다. 메이저리그 선발팀의 ‘오리엔트 투어’의 일환이었던 이 경기에서 조선대표팀은 23대 3으로 대패했는데, 3점 중 1점이 안익조가 올린 타점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8267" align="aligncenter" width="308"][그림 1] 『매일신보』 1922. 12. 9.[/caption][caption id="attachment_8268" align="aligncenter" width="453"][그림 2] 「조선군과 전미군의 야구대전의 광경」, 『매일신보』 12. 10. [/caption]청년 안익조가 야구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치(高知) 고등학교(1923-1926. 3)를 거쳐 192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의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했다. 수의학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도쿄제대를 졸업하자마자 4월에 다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933년 7월에 졸업했다. 수의학 전문의 농학사이자 폐결핵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학사인 안익조가 사회에 진출하며 취직한 첫 직장은 사람들을 놀래 켰다. 그의 첫 직업은 국제적 회사였던 콜럼비아레코드사 경성지점의 문예부장이었다. 콜럼비아레코드사는 당시 빅터, 포리돌, 시에론, 오케, 태평 등 조선에 있던 6개 레코드사 중에서도 가장 큰 회사였다. 영국인 지점장과 일본인 부(副)지점장이 있었지만, 안익조가 맡은 문예부는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조선 영업의 중추였다. 문예부장은 레코드사의 사활을 쥐고 있던 직책이다. 유성기음반사의 문예부는 예술가를 선별하여, 그들을 데리고 도쿄와 오사카에서 레코드판을 취입하여 히트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시 문예부장 안익조의 활동상을 살펴보자. (…중략…) 그의 첫 사업으로 소리와 연극을 몇판 넣어 놓았으나 그것은 팔릴지 안 팔릴지 아직은 모르는 것이고 다른 회사의 전례가 없는(?) 방식이 발표되었으니 왈 첫째는 전 조선에 열 군데에 노나서 시험장소를 배설하고 숨은 예술가를 구하여 시험을 보인다는 것이니, 1, 2, 3등을 뽑아서 그중 노래 잘하는 사람을 1등으로 정하고 그 1등을 한 사람은 그 회사에 전속으로 두는 것은 물론 일본 송죽(松竹)키네마에 입사를 시킨다는 특권의 특권을 내걸고 분주히 그 준비에 분망하고……(주8) 안익조는 조선에 처음으로 스타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10군데 지방에서 예선을 거쳐 레코드 취입을 할 수 있는 숨은 예술가들을 선발하여, 그 중에서 1등을 콜럼비아 레코드사 전속 겸 쇼치쿠(松竹)키네마에 입사시키는 행사를 마련했다. 요즘 SM, YG, JYP 등에서 오디션으로 선발한 가수를 포상하고 매니지먼트하는 방식의 원조인 셈이다. 아쉽게도 그가 실험한 이 시스템이 성공했는지, 또 어떤 스타를 발굴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 시절 그가 한 또 다른 중요한 기획으로 순회공연이 있었다.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의 후원으로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음악단이 조선 각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1934년 10월 5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는 안익조 인솔 아래 20여명의 단원이 제1코스인 북조선 순회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경했다고 전하고 있다.(주9) 이후 수재민을 위로하는 공연 기사 등도 확인되거니와, 이런 경험들은 식민지 말기의 ‘콜럼비아악극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던 안익조는 1937년 4월 경 갑자기 단둥에 있는 만주국군 안동지구 경비사령부 소속의 군의(軍醫) 소교(소령)로 임관하여, 1939년 11월까지 2년여 동안 복무했다. 군의관 퇴직 후의 안익조의 근황에 대해, 『삼천리』는 “安益祚氏의 轉向”이라는 제목으로 “前滿洲國軍醫少佐 安益祚씨가 콜럼비아악극단을 경영하기로 되어서 듣는 사람마다 이 180도의 전향에 눈을 크게 뜨게 된다”(주10)고 전하고 있다. 안익조의 입장에서는 ‘전향’이 아니라 본업인 연예계로의 복귀였다. 안익조는 콜럼비아악극단 설립에 관여한 후에 곧이어 1941년 “일반 연예에 대하여 기업적으로 도와가는” 회사로서 조선연예기업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에서는 가요와 무용, 연극을 공연하는 신흥악극단을 창단했다. 이 악극단은 약초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평양, 함흥, 청진, 진주, 대전 등에 있는 도호(東寶) 계열 극장에서 주로 공연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1943년 안익조는 조선연예기업사도 그만두고 경성에 ‘후생의원’을 개업했다가 해방을 맞았다.(주11) 애국과 부역 사이, 안익태 혹은 에키타이 안(あんえきたい, Ekitai Ahn)이제 최근 친일논란이 불거진 동생 안익태(安益泰)의 삶의 행로를 살펴보자.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보통학교와 숭실중학을 거쳐 도일, 사립 세이소쿠(正則) 중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도쿄 구니다치(國立) 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해 1930년 3월에 졸업했다. 전공은 첼로였다.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음악원,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 등을 거쳐 1937년 6월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후 아일랜드로 건너가 1938년 2월 더블린 방송교향악단 객원지휘자로 유럽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회고와 공식적인 전기에 따르면, 안익태는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하면서, 또 아일랜드에 건너가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바치려 결심했으며 유럽에서 그러한 마음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연구들에 의해서 1940년을 전후한 유럽 활동 시기에 안익태의 숨겨져 있던 면모가 하나 둘씩 밝혀졌다.(주12) 당시 유럽에서 그가 한 활동의 대부분은 히틀러의 독일 제국과 일본 제국의 우호와 협력을 증진하는 음악 프로그램들이었다. 이 시기 안익태의 대표작은 일왕 즉위식 때 연주되던 음악을 바탕으로 작곡한 <에텐라쿠(越天樂)>와 <만주국 축전곡> 등이었다. 이와 더불어 ‘황국 기원 2600년 기념’ 위촉곡인 유럽 작곡가의 일본 예찬 작품을 레퍼토리로 삼아 활동하였다. 일본과 독일의 친선을 위해 설립된 ‘日獨會’와 독일 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江原耕一)가 그의 후원자였다. 안익태 자신도 나치와 일본 인사들에게 협력하고 연주회를 적극 제안하며 자신을 지휘자로 쓰도록 청탁했다. [caption id="attachment_8269" align="aligncenter" width="616"][그림 3] 에키타이 안의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 연주회」(베를린 필하모니) 지휘 모습(1942년 9월 18일)[/caption]1942년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홀에서 있었던 안익태가 지휘한 공연 필름이 2006년 3월에 보도되면서 그의 친일 행위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정면의 대형 일장기를 배경으로 <에텐라쿠>,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하는 안익태의 모습이 담긴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 연주회’의 실황 필름을 시청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작사가로 알려진 윤치호의 친일 행적에 이어서 작곡자의 친일 행적까지 드러나면서, 애국가 교체론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활동의 사실 관계를 밝혀 비판하는 작업은 필요하고 더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선택을 했던 여러 환경에 대해서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서양 음악의 불모지인 식민지 출신의 재능 있는 음악가가 일본과 미국을 거쳐 유럽에 진출하는 행로는 ‘보편’을 향한 욕망 실현의 과정이었다. 안익태가 머물던 서구 고전음악의 심장 독일에서 식민지 조선인으로 음악적 성공을 거둘 기회를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조선을 위해 쓰겠다는 그의 결심은 1941년 12월을 전후한 무렵 본격적으로 음악적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에키타이 안은 일본인의 정체성을 내세우며 독일과 일본 유력자들의 모임 ‘일독회’를 발판 삼아 베를린, 빈, 하노버, 로마 등의 연주회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준 것은 애국가를 만든 조선 청년 안익태와, 음악적 성공을 위해 매진한 일본인 ‘에키타이 안’의 괴리이다. 우리는 이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안익태의 친일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애국가를 만들 때의 진정성은 그것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인으로 일본에서 유학하며, 또,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청년 안익태가 느꼈을 민족적 울분과 각성은 <코리아 환상곡>을 탄생시켰다. 애국가 선율을 만들 때의 고양된 민족애와, 아일랜드로 건너가면서 음악으로 조선에 기여하겠다고 했던 그의 결심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또한, 애국가는 안익태의 것만이 아니다. 노래는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불러온 공동체의 노래 애국가는 그 작곡자인 안익태의 친일 여부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공공재이다. 그의 유족도 그런 뜻에서 애국가 저작권을 포기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것은 애국가 교체론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에서 애국가로 표상되는 국민국가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주인공 부부가 월남 파병 지원을 두고 다투다가 한 노인의 눈총을 받고 애국가를 들으며 하강하는 태극기를 향해 가슴 위로 손을 얹는 신(scene)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한국 사회의 일상에서 작동한 애국(가)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애국가가 표상하는 국가(국민)로부터의 배제는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안익조는 동생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표상하는 대한민국에서 축출된 ‘비국민’으로 죽었던 셈이다. 애국자와 반역자가 함께 묻힐 곳안익조의 어머니와 다른 동생들은 모두 한국전쟁 전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북새통이었고 반역자로 처형되었기에 그의 가족들이 안익조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묻힌 곳 모르는 안익조의 최후에 비해서 안익태의 말년은 영예로왔다. 그는 1957년 이승만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0년대에는 서울국제음악제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1977년 7월 8일에 국립묘지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의 반역자인 안익조와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훈장을 서훈받은 애국자 안익태는 국가의 공적 기억의 영역에서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안과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그 경계를 배타적으로 구분했다. 앞서 언급한 당시 계엄군 법무부장 김종만 소령은 23명이 처형될 때, 그 중 누군가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자신을 밀어낸 ‘대한민국’을 붙잡으려는 안간힘이었을까? 안익조 등의 총살을 집행할 때 부디 ‘애국가’를 틀지는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의 공적 기억의 영역에서 함께 놓일 수 없는 형제는 최근 들어 기억의 활자 공간에 함께 묻히게 된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가-나-다 순서에 의거해서 안익조-안익태 형제가 나란히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면서 안익조는 ‘친북(부역)’에 ‘친일’이 더해져서 ‘민족 반역자’이자 ‘국가 반역자’라는 이중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그렇다면, 안익조는 용서받지 못할 ‘친일’과 ‘친북’ 반역자일까? [caption id="attachment_8271" align="aligncenter" width="319"][그림 5] 친일인명사전에 나란히 실려 있는 안익조-안익태 형제[/caption]안익조·안익태 형제의 삶과 죽음은 ‘친일’과 ‘친북’, ‘애국’과 ‘부역’에 대한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과 ‘친북’의 문제는 진보/보수라는 진영론적 갈등으로 전이된 측면이 있다. 좌절된 ‘친일’ 청산 문제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진보의 상징으로 도덕화했으며, 친일 세력의 후신으로 지목된 보수적 정치 세력은 냉전의 시기에 자신의 반대자에게 ‘친북(종북)’의 레테르를 붙였다. ‘친일인명사전’과 ‘친북인명사전’은 진영론적 대립을 상징한다. 1948년 남북한의 단정 수립은 그 중간에 존재한 민족국가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상상과 사상의 스펙트럼을 축소시켰다. 한국전쟁은 이 공간 자체를 제거했으며,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 사이에서, 목숨을 건 선택만 남게 된다. 한국의 역사에서 ‘친일’과 ‘친북’은 각각 민족과 국가라는 동일자를 내세우며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타자를 축출했다. 이 강퍅한 배제의 논리는 전쟁과 냉전의 시대에 남북한에서 신체적, 정치적 폭력으로 이어졌다. ‘친일’에 대한 단죄의 윤리에서 보면, 애국가는 교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안익태의 묘소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만 한다. 안익태는 음악계의 백선엽이기 때문이다. ‘친북’의 처단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애국가의 강요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국가 부정이자 북한에 대한 추종으로 낙인찍힌다. 이를테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애국가 강요 비판의 발언은 이후 ‘RO’사건으로 이어지면서, 한때 애국가와 국민의례는 사상 검증의 잣대로 기능하기도 했다. ‘친일’과 ‘친북’은 이처럼 누군가의 육체적, 정치적 생명을 빼앗는 주술로 작동했다. 안익조의 친일과 친북의 문제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자. 『친일인명사전』에는 그가 한 구체적 친일 행위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주국군 소교였다는 것이 등재의 유일한 근거이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만주국군에 들어가 근무한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하지만, 안익조의 그 시절을 사업에 낭패를 본 자가 택한 월급쟁이 의사의 생활로 본다면 지나치게 온정적인 것일까? 식민지 시기의 안익조는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장에서 만주국군 군의로, 군의에서 다시 콜럼비아악극단과 조선연예기업사 대표로, 연예기업사 대표에서 후생의원 개업으로 여러 차례 생업을 바꾸었다. 이 경력을 반추해 보면, 그의 본업은 연예 기획사였고, 그 사업이 곤경에 처했을 때 원래 전공인 의사의 자리로 돌아가는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안익조 스스로는 자신의 군의관 취직을 부역이 아니라 생계의 해결을 위한 임시적 방편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안익조의 부역 혐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안익조는 한국전쟁 직전에 “각 지방에서 여러 가지 피해를 입었다는 호소 등 일반여론도 참작하여 忠武士(정보원)란 職體가 있었는데 이를 해체하는 동시 신분증을 회수하고 있으니 금후 충무사라는 職御로 非行을 하는 자가 있다면 헌병대로 연락”(주13)해달라는 담화를 발표한다. 비판적 견해를 가진 사람을 공산당(남로당)으로 낙인찍는 자들에게 엄단하겠다고 경고하고, 가짜 헌병과 ‘정보원’들의 횡포를 금지하고자 했던 안익조의 양식은 김창룡 같은 이에겐 ‘친북’의 전형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안익조/안익태 형제의 생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친일’과 ‘친북’의 낙인찍기를 통해서 복잡한 인간의 삶과, 사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단순화해서 폭력적으로 단죄하는 사고에 익숙해져 버린 게 아닐까? 남과 북의 어느 곳에도 귀속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안익조의 안식의 자리는 어디여야 하는가? 안익태의 국립묘지 안장은 과연 그의 생애에 합당한 것인가? ‘친일’과 ‘친북’의 배타적 구별짓기를 넘어서 그들을 합당하게 평가하고, 안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기준과 자리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주1) 「안익조 등 사형, 어제 시외서 집행」, 『동아일보』, 1950. 11.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