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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북한에도 복권이 있(었)다_문미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8.31 BoardLang.text_hits 5,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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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9월(통권 9호) [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북한에도 복권이 있(었)다-한국전쟁기 북한 주민 일상의 단면: 조국보위복권의 발행문미라(현대사분과) 북한식 복권: 인민생활공채와 ‘체육추첨’2003년 12월 25일, 많은 북한 주민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TV 앞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의 관영방송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같은 해 5월 1일부터 발행한 북한식 복권 ‘인민생활공채’의 당첨번호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로또 번호 추첨일과 마찬가지로, 이날 북녘의 누군가는 주변의 부러움 속에서 1등 당첨의 행운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8168" align="aligncenter" width="597"]<그림 1> '조선중앙텔레비죤'의 인민생활공채 추첨 장면(출처: 통일부 블로그)[/caption] 2013년 평양을 여행한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 씨도 평양 시내에서 발견한 스포츠복권 판매소를 소개한 적이 있다. ‘체육추첨’이라는 간판을 단 부스에서는 승부 알아맞히기 등 남한의 스포츠토토와 유사한 형식의 복권을 판매하고 있었다. 『로동신문』 2018년 11월 11일자 기사에는 “국가망을 통해 관리할 수 있는 체육추첨 홈페이지를 개발 운영”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caption id="attachment_8169" align="aligncenter" width="550"]<그림 2> 평양 시내의 스포츠복권 판매소(출처: 오마이뉴스(인터넷판) 2014년 8월 24일)[/caption] [caption id="attachment_8170" align="aligncenter" width="550"]<그림 3> 북한 스포츠복권의 당첨 상품 목록(출처: 오마이뉴스(인터넷판) 2014년 8월 24일)[/caption] 신은미 씨는 사회주의 체 제인 북한에도 복권이 있다니 “믿지 못할 광경”이라며 놀라워했다. 과연 북한의 복권 판매는 최근에 나타난 새롭고 낯선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 북한 최초의 복권은 무려 69년 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이미 등장하였다. 조국보위후원회에서 발행한 조국보위복권이 그것이다. 전 사회의 군사화를 위하여: 조국보위후원회의 설립조국보위후원회는 전쟁 발발 약 1년 전인 1949년 7월 15일 만들어졌다. 조국보위후원회의 설립은 1949년부터 시작된 군사적 성격의 38선 충돌과 북한의 전쟁 준비 전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5월이 되자 38선 부근에서는 연대급 규모의 전투가 발발하기 시작했다. 5월 4일 개성 송악산전투, 6월 28일 시작된 호림부대의 지속적인 북한 침투, 8월 6~20일간 이어진 강원도 인제군 남면전투는 남북이 1949년 이미 전시상태에 돌입하였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이렇게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진짜’ 전쟁에 대비한 동원체제 확립이 절실해졌다. 민간인을 동원하고 군대와 사회의 접점을 형성함으로써 전 사회의 군사화를 달성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북한 지도부에게는 전쟁 준비에 특화된 새로운 기구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조직된 것이 전 사회적 대중동원단체인 조국보위후원회였다. 조국보위후원회의 탄생은 전쟁으로 가는 북한 사회의 단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8171" align="aligncenter" width="436"]<그림 4> 조국보위후원회 설립 관련 기사 (출처: 『로동신문』 1949년 7월 17일)[/caption] 그런데 북한에서 출판된 논저들은 하나같이, 조국보위후원회가 발족 한 달여 만인 1949년 8월 말 마을 단위까지 지부 조직을 완료하고 269만 1천여 명의 회원을 망라하는 초대형 단체로 발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연구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결성 배경·과정을 매우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선전과 달리 지방 단위에서의 조국보위후원회 조직은 순조롭게 추진되지 않았다. 38선 접경지역인 강원도 인제군 남면당에서는 조국보위후원회가 설립된 지 3개월 가까이 지난 10월에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반성하거나, 당 간부들이 조국보위후원회에 “이제껏 관심이 없었다”고 자백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성이 완료되었지만 서류상에만 존재할 뿐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심지어 전쟁 발발 이후에도 회원 확대사업이 계속되었으나 여전히 잘 진행되지 않는 지역이 적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거의 대부분의 민간인을 포괄하는 단체를 조직해야 했던 지방 간부들은 실제 회원 가입을 독려하기보다는 명부에 이름만 등록해놓는 등 면피용 대책을 마련하는 데 급급했다. 그럼에도 북한 지도부는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개선에 나선 것이 아니라, 사업 부실의 책임을 간부 개인의 결함 탓으로 돌렸다. 이 과정에서 조국보위후원회 사업 태만을 이유로 징계를 받는 지방 간부들이 속출했다. 북한 주민들이 조국보위후원회 가입에 소극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이미 너무 많은 사회단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체마다 책정된 회비는 경제적 부담이 되었고, 사회단체를 매개로 한 각종 노동력 동원도 생업이 있는 주민들에게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과중한 동원은 주민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했으나, 북한 지도부는 조국보위후원회 결성을 강행했다. 이는 이 단체를 통해 기존 사회단체가 하지 않았던 사업을 진행하고자 했음을 뜻한다. 조국보위후원회의 구체적인 과업은 강령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령에 따르면 조국보위후원회는 조선인민군 강화와 군에 대한 대중적·조직사업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조국보위후원회에서는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 군무자 및 그 가족에 대한 원호사업을 광범위하게 추진해 나갔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사훈련과 군사지식의 보급 또한 조국보위후원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caption id="attachment_8172" align="aligncenter" width="498"]<그림 5> 조국보위후원회 강령(출처: NARA, RG 242, SA 2009, Box 1, Item 85)[/caption] 이 가운데 1949년 10월 12일 시작된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은 조국보위후원회가 창설 초기부터 전쟁 발발 이후까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로동신문』은 연일 대대적으로 이 운동의 모금 현황을 보도했고, 조국보위후원회도 기관지에 기금 희사자들의 사진과 희사액을 싣는 등 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노동자들은 일요일을 이용해 ‘애국노동’을 하거나 시간 외 노동을 하여 생긴 수입을 헌납했고 농민들은 ‘여유미’를 내어놓았다. [caption id="attachment_8173" align="aligncenter" width="425"]<그림 6> 조국보위후원회 기관지 『조국보위를 위하여』 창간호 표지 (출처: NARA, RG 242, SA 2009, Box 1, Item 85)[/caption] 1950년 1월 현재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으로 모금된 금액은 3억여만 원이었다. 이와 별개로 5만여 가마니의 ‘애국미’도 모아졌다. 북한 주민들뿐만 아니라 재북 화교들도 기금을 희사하였고, 사할린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조국보위후원회 함경북도본부에 적지 않은 금액을 보내왔다.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북한은 이 운동이 주민들의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선전했고, 당국에서는 할당식과 공제방식의 헌납운동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주민들은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을 착취로 인식하였다. 이것이 식민지시기 ‘국방헌금’과 그 성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하는 한 조국보위후원회 초급단체 간부의 목소리는, ‘국방헌금’과 마찬가지로 헌납운동도 비자발적이고 강제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만연했음을 역으로 드러낸다. 한편 조국보위후원회는 군사지식의 보급에도 앞장섰다. 기관지 『조국보위를 위하여』는 매호마다 적지 않은 분량의 <군사과학지식>, <군사과학기술>이라는 고정 코너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서 다루는 군사지식은 제식훈련법에서부터 각종 무기나 비행기·탱크·함선의 구조, 항공 및 항해술, 실제 전투에서의 방위 판정법, 로켓의 이해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광범위한 것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8174" align="aligncenter" width="400"]<그림 7> 『조국보위를 위하여』 창간호 목차 (출처: NARA, RG 242, SA 2009, Box 1, Item 85)[/caption] 군사지식의 대중화를 위한 조국보위후원회의 노력은 지역·직장 단위에 군사지식 연구반을 설치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사훈련 임무도 조국보위후원회에 맡겨졌다. 주민들은 이를 통해 잡지와 연구반 학습으로 배운 군사지식을 활용하고, 실전에 필요한 군사기술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민간훈련에는 여성 자위대 대원들도 모두 참가해야 했고, 직장에서도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사격연습 등의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민간에서의 군사훈련 역시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하나의 노동력 동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국은 조국보위후원회가 주관하는 훈련에 소요되는 기금마저 민간에 전가했다. 몇몇 주민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을 말하면서 남녀가 밤낮으로 같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 조국보위후원회의 군사훈련을 비판하는 등 소극적인 저항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국보위후원회가 전개한 사업들은 기본적으로 민간의 인적·물적 동원을 기반으로 했다. 다소 과장하자면, 조국보위후원회의 존재 자체가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하는 씨앗과도 같았을 것이다. 북한은 이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정치교양사업을 강화하는 한편,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남한을 이 모든 시련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레토릭과 그에 의해 구축된 동원체제는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더욱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복권은 애국심을 싣고: 조국보위복권의 발행북한은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하였다. 전쟁 이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던 동원체제 덕분에 북한은 단기간 안에 비교적 완벽한 동원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전시체제 아래에서, 조국보위후원회는 전쟁 전 담당했던 역할의 일부를 다른 기관에 넘겨주고 달라진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역할을 재조정해 나갔다. 그것은 주로 민간인을 재조직해 군사훈련을 실시하거나 군사간부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처럼 군사적 기능 강화에 맞춰져 있었다. 정전을 앞둔 1953년 7월 시점에도 조국보위후원회는 ‘군사스포츠사업’의 보급과 확대라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였다. 조국보위후원회는 대중 속에 군사스포츠를 확산한다면, 청년들을 육체적으로 단련하면서 그들에게 조직성·규율성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조국보위후원회는 이렇게 정세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들의 역할을 고민하면서, 전쟁 수요에 맞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국보위복권의 발행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caption id="attachment_8175" align="aligncenter" width="566"]<그림 8> 조국보위복권(NARA, RG 242, 09/1953-01/1958, Item 299)[/caption] 북한은 1951년 6월 14일 내각결정 제297호 「조국보위복권 발행에 관하여」를 발표하고, 조국보위후원회를 사업 주체로 한 복권 발행을 결정하였다. 제1회 조국보위복권은 100원권으로 7월 중에 총액 5억 원을 발행할 예정이었다. 당첨금은 5만 원, 2만 원, 1만 원, 5천 원, 2천 원, 3백 원, 150원 등 7등급으로 구분되었다. 판매 대금 중 30%가 당첨금과 기타 경비로 지출되고, 나머지 70%는 비행기·탱크·함선 헌납기금으로 국고에 귀속될 예정이었다. 이미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조국보위복권을 발행한 이유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군비 확충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제력과 조선인민군은 애초에 약 한 달 이상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전쟁은 1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간사회에 기대 군사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조국보위복권의 발행을 추진한 것이다. 조국보위복권 발행이 공식화된 이후부터 전 사회에서 복권 구매자금 마련 열풍이 불었다. 『로동신문』은 <조국보위복권을 구매키 위한 인민들의 애국열의 고조>라는 꼭지를 만들고, 거의 매일 어떤 인물이 어떻게 자금을 마련하고 있는지 소개하였다. 북한 주민들은 증산경쟁, 저축, 시간 외 노동, 폐품 수거, 절약, 부업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금을 비축하며 복권 발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8176" align="aligncenter" width="372"]<그림 9> 조국보위복권 구매자금 마련을 독려하는 기사 (출처: 『로동신문』 1951년 8월 17일)[/caption] 그러나 7월부터 발행하기로 한 제1회 조국보위복권은 발매되지 않았고 10월 5일이 되어서야 복권 판매가 시작되었다. 이후 북한 사회는 비행기·탱크·함선기금 헌납운동과 복권 구매자금 마련 때보다 한층 더한 복권 구매 열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북한 전역에서는 복권 구매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복권 구매를 홍보하기 위해 매일 인민반별 좌담회가 열렸다. 『로동신문』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복권을 대량으로 구매한 사례를 생중계하다시피 했음은 물론이다. 조국보위복권은 발행 10일 만인 1951년 10월 15일 목표액 5억 원을 1억 원이나 초과한 6억 원어치가 판매되었다. 북한은 “공화국의 운명과 자기의 운명을 불가분리의 것으로 확신”하는 주민들의 애국심이 목표 초과 달성의 이유라고 선전했지만, 집중적인 홍보와 각종 궐기대회 등의 동원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임이 분명하다. 조국보위후원회는 10월 15일부로 조국보위복권 판매의 성공적인 완료를 선언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8177" align="aligncenter" width="368"]<그림 10> 직장에서 복권을 구매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 (출처: 『로동신문』 1951년 10월 8일)[/caption] 조국보위복권 추첨은 11월 25일 평양에서 공개추첨으로 진행되었다. 당첨번호는 신문과 라디오 등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당일 공개된 추첨장에는 세 대의 추첨기와 당첨번호 게시판이 마련되었다. 번호를 뽑은 것은 6명의 어린이들이었다. 당첨번호는 즉석에서 발표되어 게시판에 기록되었다. 이날 78차례에 걸친 추첨이 완료되었고, 당첨된 것은 5만 원 1매, 2만 원 2매, 1만 원 5매, 5천원 20매, 2천 원 50매였다. [caption id="attachment_8178" align="aligncenter" width="567"]<그림 11> 제1회 조국보위복권 추첨 장면(출처: 『로동신문』 1951년 11월 26일)[/caption] 1951년 12월 26일자 『로동신문』에는 1등 당첨자 중 첫 번째로 당첨금을 찾으러 온 림관오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의 맏아들은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림관오는 복권이 발매되자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자기 아들에게 한 알의 총알이라도 더 많이” 보내기 위하여 12장을 구매하였다. 당첨금 5만 원을 수령한 림관오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당첨금으로 축우를 사서 “전방에 있는 우리 인민군대에 더 많은 식량을 보내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조국보위복권 사업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조국보위후원회는 이 사업을 성공시킴으로써, 모든 사회단체가 동원체제에 결합하여 전쟁 전 자신의 고유 임무를 나눠야 했던 한국전쟁기에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방의 북한 주민들은 조국보위후원회에서 주도한 조국보위복권 사업으로, 전쟁 승리를 염원하는 자신의 애국심을 복권 구매라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증명하는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