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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⑤]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8.31 BoardLang.text_hits 4,168
 

웹진 '역사랑' 2020년 9월(통권 9호)

[낯선 삼일운동]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


 

정병욱(근대사분과)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에 대해서 지도부, 엘리트가 있고 그들의 지도에 따라 민중이 만세시위에 나섰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다. 분명 「선언서」에 “조선민족대표”라 쓰였다. 이들이 어떻게 대표가 되었나? 교단별로 논의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임(自任)이었다. ‘민족’이 선출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33인의 독립선언만 있었고 방방곡곡에서 그에 호응한 만세시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큰 조직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33인이 지도자로서 받게 되는 존경 또는 실망도 지금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다. 33인의 ‘자임’을 추인하여 명실상부한 ‘대표’로 만든 것은 나라 안팎의 만세시위였다. 33인은 만세시위 참여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참여자를 잘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호까지 만세 시위자를 탐구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옆에서 지도자 중에는 감사할 사람이 없냐 한다. 왜 없겠나, 많지. 다만 내가 아니어도 다른 연구자가 많이 다루니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없을 뿐이다. 그래도 한 명 꼽으라면? 음…마침 발견(?)한 사진 속 한 인물에 관해 얘기해 볼 수 있겠다. 긴 장마와 코로나에 지친 독자가 사진을 보면서 쉬어가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caption id="attachment_8179" align="aligncenter" width="647"]<그림 1> 영화 <항거>의 도입부, 유관순의 입감 장면(자료: 네이버 영화_항거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2360 예고편에서 캡처, 2020.08.19 검색)[/caption]

지난해 삼일운동 100주년 맞이하여 개봉한 영화 <항거>를 보면 만세시위 후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는 장면에서 유관순을 수감번호 ‘371’로 부른다. 아직도 ‘371’을 수감번호라 하나…아마 유명한 아래 사진에서 비롯된 잘못일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8180" align="aligncenter" width="391"]<그림 2> 1919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유관순 사진(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ia. 이하 수감 사진의 츨처는 동일함)[/caption]

오른쪽 정면 사진에 거꾸로 된 한자로 ‘三七一’이 적혀있다. 하긴 이 자료군이 1965년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부터 ‘371’은 수인번호로 오해됐다. 아래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치안국이 감식계에서 감식 관계 사진을 정리하다 발견했다며 ‘대한의 딸’ 유관순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371’을 수인번호로 소개했다.

[caption id="attachment_8181" align="aligncenter" width="245"]<그림 3> 1965년 유관순 수감 사진 발견을 전하는 신문 기사(자료: 1965.3.26 「유관순양 사진, 치안국에서 발견」 『동아일보』 3면) [/caption]

신문이나 온라인의 정보가 모두 사실은 아니다. 사실을 알고 싶으면 우선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아마 이 사진군을 가장 많이 들여다본 연구자는 이애숙과 박경목일 것이다. 두 전문가는 이 자료군에 거꾸로 찍힌 숫자를 ‘보존원판번호’로 보았다. 이를 직관할 수 있는 사진이 3월 1일 개성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붙잡힌 아래 어윤희 사진이다. 유관순 사진처럼 거꾸로 찍힌 숫자가 ‘三七○’인데, 아래 칸에 ‘보존원판(소) 제370번’이라 적혀있다. ‘보존원판’이란 카드에 부착된 사진을 인화하는 데 쓰인 원판을 의미하는 것 같다. 유관순의 ‘371’은 수인번호가 아니라 보존원판번호(이하 ‘보존번호’로 줄임)이다.

[caption id="attachment_8182" align="aligncenter" width="398"]<그림 4> 1919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어윤희 사진[/caption]

[caption id="attachment_8183" align="aligncenter" width="403"]<그림 5> 1919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박장록 사진[/caption]

그런데 기존의 보존번호 설명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이애숙은 보존번호 1번 박장록, 3월 27일 강원도 화천에서 만세시위를 권유하다가 붙잡힌 그의 사진(그림 5) 왼쪽(보는 쪽에선 오른쪽) 옷깃에 붙은 번호 ‘六一四’, 614도 보존번호로 보았다(⑲ 3~4쪽).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수인번호이다. 당시 규정을 보자.

조선감옥령시행규칙(朝鮮監獄令施行規則, 1912.3 總令34호)

제18조 입감자에게 번호를 부여하고 재감 중 그 번호표를 상의 옷깃(襟) 또는 흉부에 부착하게 한다……

제20조 전옥典獄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입감자를 촬영할 수 있다. 재감자에 대해서도 같다(⑦ 395쪽)

사진의 옷에 붙은 이름표는 사진만으로 인물을 식별할 수 있도록 임시로 붙인 것일 뿐, 감옥에서 수감자는 오로지 옷깃이나 가슴에 붙은 번호로 불렸다. 뒤 시기이지만 아래 김광섭의 수감 사진을 보면 제일 밑에 거꾸로 찍힌 ‘51833’은 카드 아래 칸에서 보듯이 보존번호이다. 보존번호 위의 이름표 아래에 쓰인 숫자 ‘2223’이 수인번호다. 그의 『나의 옥중기』를 보면 “여기서는 이름을 못 부른다…이 번호의 사회에서는 번호가 길면 끝의 것만 부른다. 나는 2223번, 그래서 23번이 나다. 내 이름이요, 내 전체다. 그 패를 왼쪽 가슴에 꼭 붙여야 한다.”(⑧ 25쪽) 이름과 함께 수인번호가 쓰인 것은 아직 죄수복과 수인번호표가 마련되지 않아 임시로 적은 것일 듯. 규정상 수인복에는 저렇게 이름이 붙을 수 없다. 암튼 ‘51833’과 같은 숫자가 수인번호가 아닌 것은 확실하며, 그의 옥중기에 나오는 설명은 규정과 일치한다.(주1)

[caption id="attachment_8184" align="aligncenter" width="422"]<그림 6> 1942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김광섭 사진[/caption]

또 의아한 점은 ‘순서’이다. 두 전문가는 자료군의 보존번호가 ‘중복되지 않고 순서대로 부여’됐다 한다(⑲ 5쪽; ⑳ 204쪽). ‘순서’는 어떤 순서를 말하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전체를 보면 대체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인지 몰라도 삼일운동에 초점을 맞춰보면 ‘순서’대로가 아닌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위의 박장록 사진은 보존번호가 ‘1’이다(중복이라 ‘×’ 표시된 또 다른 사진으로 봐도 보존번호는 ‘289’이다). 박장록은 3월 27일 만세시위를 권유하다 붙잡혀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경찰의 체포, 취조 그리고 송치 과정을 고려하면 그가 경성에 올라온 것은 아무리 빨라도 4월 1일보다 늦었을 거다. 그런데 어윤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진을 찍은 날짜는 <그림 4> 아래 칸에 ‘대정 8년’ 즉 1919년 4월 1일로 적혀있다. 그런데 보관번호는 ‘370’으로 박장록 사진의 그것보다 한참 늦다. 삼일운동 참여자의 사진에 관한 한 보존번호는 입감 순서나 촬영순서대로가 아닌 것 같다.

이 자료군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인 삼일운동 참여자 사진의 보존번호가 순서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이후 어느 시점에 번호가 다시 부여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삼일운동의 개별 시위나 사건이 다 같은 시점에 일어난 일로 보이는 후대 언젠가. 보존번호를 부여한 주체, 즉 이 자료군을 생산하고 관리한 기관은 어떤 곳일까. 이애숙은 경기도 경찰부로 보고 이 자료군을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로 명명했으며, 박경목은 서대문형무소로 보고 그 내용을 볼 때 ‘수형기록카드’가 더 적합한 명칭이라 한다.

삼일운동 참여자 사진의 보존번호가 순서대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주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쓸 때 해당 인물 사진이 있으면 보면서 쓰는 습관이 있다. 3월 3일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에 관해 쓰면서 고등법원 예심 기준 ‘피의자’ 71인을 검색해보니 59인의 수감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수감 사진을 출력해서 붙여놓고 글을 쓰다가 발견한 사실(한국, 아니 세계 최초 ㅎㅎ).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찍혔다!





[caption id="attachment_8187" align="aligncenter" width="523"]<그림 7>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수안면 만세시위자(위: 인물카드, 중간: 인물카드 정면 사진들의 합성, 아래: 측면 사진들의 합성. 아래 왼쪽부터 정익순, 나용일, 이종섭. 보존번호 674-676. 위 왼쪽부터 이윤식, 김응도, 보존번호 677~678)[/caption]

수안면 만세시위의 경우 사진은 5~6명씩 단체로 찍었다. <그림 7>의 아래 오른쪽 끝 이종섭 뒤로 촬영 대기자들 또는 이미 촬영을 마친 자들이 보인다. 각 인물 정면 사진 왼편 옷깃에 수인번호와 이름표, 오른편에 보존번호가 보인다. 보존번호는 아래 왼쪽부터 한자로 674~676, 위 왼쪽부터 677~678로 쓰였다. 사진원판 뒷면에 검정색 필기구로 써서 인화하면 사진처럼 거꾸로, 하얀색으로 나온다. 단체 사진의 경우 각각의 인물에 대해 보존번호가 차례대로 부여되었다. 그리고 보존번호가 이웃하는 사진일 경우 같은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수안면 만세시위 참여자 59인의 사진 조각을 맞춰보면 보존번호 674번에서 시작해서 816번에서 끝난다. 삼일운동 참여자 사진의 보존번호가 ‘순서’대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체로 같은 사건별로 모아서 부여되었다.

단체 사진이 뭐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작은 낱장으로 분해되어 얼굴만 보일 때보다 현장감이 더 있어서 그런지 사진 조각을 맞춘 그 날, 아니 맞춘 것을 본 날 왠지 그들에게 좀 더 다가선 느낌이었다. 수안면 만세시위 참여자, 그들은 함께 거기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은 3월 3일 어떻게 헌병분대에 세 번이나 갔던 것일까?

우리가 인물카드별로 사진을 봐와서 단체사진인지 몰랐지만, 당시 수감자들을 찍는다면 당연히 단체로 찍었을 것이다. 최인진에 의하면 20세기 초 한국에서 사람들의 초상이 찍힌 사진이 민중 통제에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비싼 비용 때문에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사진을 찍었다. 예를 들면 1906년 세무관리 선발 때 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단체사진을 촬영한 뒤 이를 증거 삼아 본인이 아닌 경우(대리시험)나 세금 징수 시 잘못이 있을 경우 죄를 묻겠다고 하자 많은 시험생이 촬영에 불참했다. 또 다른 예로 의병장들의 단체사진을 떠올릴 수 있다. 1908년 경 사진관 광고를 보면 ‘소본’ 사진 가격이 50전, ‘중본’ 1원으로 당시 순사 월급 20원과 비교하면 비쌌다(⑪ 154~157, 185쪽). 1919년 2월경 사진관 광고에 ‘출장촬영사진료’가 ‘소’판 80전, ‘중’판 1원 75전이었다(③) 감옥 당국이 행형비를 아끼기 위해 ‘태형’ 유지를 주장했던 시절이다(⑬ 204~205쪽) 경비 절약을 위해서는 단체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좋은 예가 있다. 아래는 1916년 일제가 황해도 수안군 남자의 체격 측정을 위해 찍은 유리건판 사진으로 크기는 ‘소’(약 12㎝+16.5㎝)이다. 실무자가 이를 참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사진과 유사한 구도로, 개인 식별에도 문제 없어 보인다.



[caption id="attachment_8189" align="aligncenter" width="572"]<그림 8> 1916년 황해수안 남자체격측정 사진(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https://www.museum.go.kr/dryplate/main.do) [/caption]

수안면 만세시위 참여자 59명의 사진 보존번호는 674번에서 시작하여 816번으로 끝난다. 보존번호가 800번대로 넘어가는 것은 그 사이에 누락된 자, 다른 사건 참여자들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건으로는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 시위,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시위(박경득) 등이 확인된다. 대체로 사건별로 보존번호가 연속된다. 대략 ‘내란죄’로 기소된 사건이라 이 사건 참여자가 일정 시점에 같이 촬영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박만갑(보존번호 700, 수정 680)처럼 ‘내란죄’와 관련 없는 자도 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첫째,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에서 수인번호는 수인복에 부착된, 보존번호는 사진원판 뒷면에 쓰인 번호이다. 뒤 시기에 ‘형사과’에서 찍은 사진에는 피의자의 옷에 보존번호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본 웹진 역사랑 2020년 8월호 정종현,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②) 오빠들이 떠난 자리: 임택재와 임순득 남매」를 보면 1934년 5월 9일 형사과에서 찍은 사진이 그렇다. 찍으면서 바로 보존번호를 부여할 수 있는 곳은 형사과였던 것 같다. 이름은 식별을 위해 임시로 옷에 붙인 것이다. 둘째 보존번호는 자료군 전체로 볼 때 ‘순서대로’ 부여된 것인지 몰라도 삼일운동 참여자 사진의 경우는 순서대로가 아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같은 사건별로 연속하여 부여되었다. 단체 사진이라면 한 사진의 여러 사람은 연속하는 보존번호가 부여되었다. ‘대체로’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919년 12월 2일 훈정동 대묘[종묘] 앞 시위에 참여했던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김효순(김순호), 이도신(이신도), 노순경의 사진 <그림 9>는 보존번호도 366, 367, 368로 연속하고 사진 아귀도 잘 맞아 같은 시점에 찍은 단체 사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의 369 임명애, 370 어윤희 371 유관순의 사진은 보존번호는 연속하지만 사진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더욱이 어윤희의 수감사진에 쓰인 대로라면 4월 1일에 찍었다는 건데, 그 시점에 그들이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후대에 보존번호를 부여하면서 여성 참여자 사진 일부를 모은 것 같다.

[caption id="attachment_8190" align="aligncenter" width="510"]<그림 9> 1919년 12월 2일 서울 훈정동 대묘 앞 만세시위 참여자 수감사진(오른쪽부터 김효순 이도신, 노순경, 보존번호 366~368)[/caption]

그래서 누구에게 감사한다고?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존번호 729번부터 733번까지 김기홍 등 5인의 수안군 만세시위 참여자 사진 뒤에는 734번 양전백을 시작으로 민족대표 33인 등 3월 초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참여자 및 기획자 사진이 나온다. 민족대표 등의 사진은 수안면 만세시위 참여자의 사진과 달리 벽돌 건물 앞에서 찍었다. 보존번호로 볼 때 3인마다 한 번씩 동일한 배수관이 나오니, 3명씩 단체로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해서 발견한 것이 아래 사진이다.





[caption id="attachment_8193" align="aligncenter" width="541"]<그림 10>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의 사진(위: 인물카드, 중간: 인물카드 정면 사진, 아래: 측면 사진. 보존번호 755~7 57. 사진을 카드에 붙이면서 가장자리를 많이 오려 수안면 만세시위자와 같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3인의 키를 감안하여 높이를 조정했다) [/caption]

1919년 또는 1920년 볕 좋은 어느 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이 수감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이 벽돌 건물 앞에 섰다. 30대, 40대, 50대가 함께 섰다. 삼일운동은 여러 세대의 같은 소망이 담긴 운동이었다.

1890년생 최남선,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다. 그는 당시 옥중에서 사무엘 스마일즈의 『자조론』 하권을 번역했다(④) 자기개발서의 원조 격인 책이다.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을 규정짓고 있는 책 두 권만 꼽으라면 프레드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1911)과 이 『자조론』(1859)일 거다. 전자는 집단의, 후자는 개인의 생산력 증대가 목적이다.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낯선 세계관이었다. 실력양성 차원에서 보급되었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세계관이다. 1918년 한용운이 펴낸 잡지 『유심』에 실린 그의 글, “세계는 힘 있는 이의 것이오”로 시작되는 「동정 받을 필요 있는 자 되지 말라」와 같이 보면(①) 삼일운동 전후 최남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1879년생 한용운. 옆의 모범생 모습의 최남선과 달리 그의 인상은 불온하기 그지없어 많은 상상을 자극한다. 사진을 보면서 뒤적이다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저 모습에는 ‘민족’ 분열의 역사가 아른거린다. 그는 1912년 ‘만주’ 여행 중에 일본이 파견한 정탐으로 오인되어 조선인 청년에게 총을 맞았다, 얼굴에. 그 이후로 평생 체머리를 앓아 ‘날만 추우면 고개가 휘휘 돌린다’ 했다(⑰ 179쪽). 체머리는 머리가 저절로 계속하여 흔들리는 병이다. 앞서 1905, 6년경 블라디보스톡에선 일진회원으로 오해되어 수장될 뻔했다. 당시 불교계 전반의 동향, 1910년 9월 병합이 되자마자 조선 총독에게 ‘승려 결혼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던 그의 행적을 고려하면 있을 법한 ‘오인’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테러를 겪고도 자신을 겨눈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삼일운동에 나섰다는 점이다. 단천의 최덕복이 떠오른다(낯선 삼일운동② 참조). 그가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의 서」에 “아아, 나라를 잃은 지 10년이 지나고 독립을 선언한 민족이 독립선언의 이유를 설명하게 되니 실로 침통함과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구절이 있다(②). 회한이 담겨있다. 최남선이 쓴 「선언서」와 함께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도 읽어보기 바란다. 전자가 대세론에 치우쳤다면 후자는 좀 더 주체적이다. 독립선언의 첫 번째 동기가 ‘조선민족의 실력’이고, 독립선언의 첫 번째 이유가 ‘민족 자존성’이다. 이해득실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보다 대등적, 평등적 세계관이 펼쳐진다.

1864년생 이승훈. 삼일운동 지도자 중에 감사할 사람 한 명만 꼽으라면 이 사람이다. 삼일운동이 한국 ‘근대민족’ 형성의 결정적 계기였다면 그 산파 중의 산파는 이승훈이었다. 1919년 2월 정치 운동에 소극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했다는 말,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 앉아 있을 수 있느냐.” 독립선언서에 기명할 순서를 두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떠들자 했다는 말, “이거는 죽는 순서야.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박해받던 천도교와 기독교, 이 대표적인 비주류 집단 간의 연대와 활약은 사회의 주변과 기층의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어 삼일운동에 나서게 했을 것이다. 기독교와 천도교가 따로 독립선언을 했다면 그렇게 반향이 컸을까? 그가 병합 이후 1910년 9월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카리스마는 종교보다는 그가 살아온 삶에서 우러나온 것일 거다. 그의 제자로 전기를 쓴 김기석의 다음 설명을 보면 이승훈의 민족주의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남강[이승훈]에게 처음에는 민족이란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이 없기를 원하였다. (…) 그런데 나라가 남에게 눌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차츰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양반과 천민이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⑭ 92쪽) 그는 출옥 직후 1922년 7월 말 동아일보에 「감옥에 대한 나의 주문」을 연재했다(⑤). 남은 수감자에게 조금이나 도움이 되고자 썼다는 글을 보면 돌이 많은 밥, 절미나 현미 죽의 문제, 비좁은 공간, 간수의 학대 등 깨알 같은 지적이 이어진다. 아마 이러한 경험적 실용적 접근이 운동의 통합을 이뤄내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1930년 그가 사망하자 정인보가 쓰고 오세창이 새긴 묘비문의 한 구절이다.

 

젊었을 때는 장사를 했으므로 체면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 정열이 솟구쳐 오르면 말씨가 격렬해지고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상스러워지고 왕왕 두서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별로 색다른 것이 없는 말도 공의 입을 통해 나오면 혹 이를 들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 세상 형편과 풍속이 점점 변하여 신풍조를 따르는 자들은 공이 말하는 바를 싫어했으나, 공은 분주히 다니며 쉬지 않고 뭇사람을 보호하고 돕고자 할 뿐 자신의 명성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방은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다(⑥).

 

추기: 대체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몇 번인가? 규정이나 다른 예에 따르면 <그림 2>의 왼쪽 옷깃에 부착된 번호가 수인번호일 것이다. 다만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시 유관순이 수감된 감방을 찾았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즉 석호필을 다룬 전기에 따르면 그가 본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1933’이었다(⑨ 97쪽). 이는 삼일운동 전문가 이정은이 쓰고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펴낸 유관순 전기에도 인용되었다(⑫ 407쪽).
주1) 이 자료군에는 이소가야 스에지(磯谷秀次) 사진도 있는데, 보존번호 외에 왼쪽 옷깃에 이름과 함께 ‘214’라 쓰였다. 그런데 그는 수기에 자신의 서대문형무소 수인번호를 “181”이라 썼다(⑩ 165쪽).

 

참고문헌

① 최남선 1918.9 「동정 받을 필요 있는 자 되지 말라」 『유심』1(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六堂全集編纂委員會 編 1973 『六堂 崔南善全集 10』 211~213쪽에 수록)

② 한용운 1919 「조선독립의 서」(한용운 1973 『한용운전집 1』 신구문화사, 346~360쪽에 수록)

③ 1919.2.1 「寫眞寫할 人은 見落지마으시오」 『매일신보』 1면

④ 1920.6.12. 「손병희등 사십칠인의 안부」 『동아일보』 3면

⑤ 李承薰 1922.07.25~26, 28~29 「監獄에 對한 予의 主文 (一)~(四)」 『동아일보』 3면

⑥ 정인보 1930 「남강선생 묘비」(남강문화재단 편 1988 『南岡 李承薰과 民族運動』 남강문화재단출판부, 645~650쪽에 수록. ⑭ 376-377쪽도 참조)

⑦ 朝鮮總督府 編 1938 『朝鮮法令輯覽』下卷, 帝國地方行政學會朝鮮本部

⑧ 金珖燮 1978 『나의 獄中記: 日記·手記·自傳的 에세이』 창작과 비평사

⑨ 이장락 1980 『한국땅에 묻히리라: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전기』 정음사

⑩ 이소가야 스에지 지음, 김계일 옮김 1988 『우리 청춘의 조선: 일제하 노동운동의 기록』 사계절

⑪ 최인진 2000 『韓國寫眞史 1631-1945』 눈빛

⑫ 이정은 2004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⑬ 염복규 2004 「1910년대 일제의 태형제도 시행과 운용」 『역사와 현실』 53

⑭ 김기석 2005[1964] 『南岡 李昇薰』 한국학술정보

⑮ 김영민 200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국립중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궁궐』 국립중앙박물관

⑯ 류시현 2009 『최남선 연구』 역사비평사

⑰ 고재석 2010 『한용운과 그의 시대』 역락

⑱ 이경민 2010 『제국의 렌즈』 산책자

⑲ 이애숙 2014.12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해제)」(국사편찬위찬위회_한국사데이터베이스_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자료소개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⑳ 박경목 2018.11 「일제강점기 수형기록카드 현황과 명칭」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