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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논문을 말한다
1948~1968년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 연구_김도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6.05 BoardLang.text_hits 3,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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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6월(통권 6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1948~1968년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 연구(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0.2) 김도민(현대사분과) 0. 왜 ‘냉전사’ ‘남북관계사’였을까2012년 석사논문으로 ‘1948~1950년 시기 주한미대사관’에 대해 썼다. 따라서 박사과정 초반 관심주제는 ‘한미관계사’였다. 그런데 2020년 2월 제출한 박사논문을 분류하자면 ‘냉전사’이자 ‘남북관계사’ 혹은 ‘남북한 통합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한국현대사 연구가 남한사와 북한사로 ‘분단’된 상황에서 남북한을 함께 본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시도일 수 있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저 머나먼 헝가리에서 유학하던 북한 대학생들 중 일부는 왜 1956년 헝가리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이때부터 북한이 몹시 궁금해졌다. 이어 헝가리혁명을 반공(反共)만이 아니라 약소민족의 저항, 즉 민족해방운동의 맥락에서 바라본 남한의 시선 또한 궁금해졌다. 자료를 보다보니, 1950년대 냉전의 한복판에서 남한과 북한은 세계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 영향을 미치려 했는데 이 또한 궁금했다. 나아가 1950,60년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민족해방운동은 왜 그토록 들끓었으며, 상당수 신생 독립국들은 왜 냉전의 어느 한편에 서지 않으려 했을까. 이런 물음들을 가진 채, 마침 2015년 설립된 한국냉전학회에서 내 연구를 소개하고 동시에 다양한 냉전사 연구들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정말 감사하게도 한역연 북한사연구반 일부 연구자들과 결합해서 함께 세미나를 하며 부족한 북한사 자료와 연구를 채울 수 있었다. 동시에 2000년 전후부터 국내외 여러 연구기관들이 냉전 시기 관련 자료를 인터넷으로 그것도 상당수 검색 가능한 형태로 제공해주는 현대사 관련 자료의 DB화 덕분에, 연구 대상 시기를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긴 20년으로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논문의 주제와 자료정리, 작성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지만, 냉전사 연구의 한국내 확산과 국내외 자료의 DB화 나아가 북한사 연구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 논문은 완성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1. 냉전의 최전선 한반도, 다시 ‘중립’을 마주하다한반도를 둘러싼 국제분쟁의 위기가 커지던 1855년 한반도에 처음으로 중립이 등장했다. 위기의 시대 주(駐)조선 독일부영사 부들러(H. Budler)는 조선왕조에 중립화를 권고했으며, 유학에서 돌아온 유길준은 조선 중립화를 담은 〈중립론(中立論)〉을 썼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1904년 1월 ‘전시중립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러일전쟁을 피해가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후 일제식민지, 1945년 조선해방과 이어진 미군과 소군의 한반도 분할점령, 1948년 남북분단 그리도 1950년 한국전쟁을 지나 약 반세기 만인 1950년대 중반, 한반도는 중립주의를 추구하는 ‘중립국’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중립국’들은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인 양극적 냉전의 한쪽 편에 서기를 거부하며 ‘반식민(反植民)·평화·중립’을 주창하는 이른바 ‘제3세력’이었다. 이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지구적 냉전(global cold-war)의 질서를 그려보면 아래 <그림1>과 같다. [caption id="attachment_8010" align="aligncenter" width="413"]<그림 1> 1950, 60년대 국제관계[/caption] 기존 연구들은 A축을 중심으로 먼저 진행됐다. A축의 시선에서 보면 지구적 냉전은 자본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소련·중국이 양극적으로 대립하는 ‘동서’의 문제였다. 반면 B축을 중심으로 보면 미국·소련·중국이라는 강대국들이 냉전의 ‘주변부’이던 약소국·약소민족을 어떻게 지배하느냐 하는 ‘남북’의 문제였다. 기존의 외교사·냉전사·한국현대사·북한사 연구들은 대체로 냉전의 ‘중심부’와 ‘중심부’ 그리고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런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냉전의 ‘주변부’와 ‘주변주’의 관계에서 냉전을 이해한다면 새로운 역사상이 드러나지 않을까? 남·북한과 대부분의 ‘중립국’들은 탈식민 신생 독립국이자, 약소민족(국가)로서 냉전의 ‘주변부’에 위치했다. 그런데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양극적인 냉전의 힘을 끌어안은 반면 ‘중립국’들은 냉전의 양극적 힘에서 벗어나려는 중립주의·비동맹을 추구했다. 즉 동일한 탈식민 신생 독립국이며 냉전의 ‘주변부’이지만 양극적 힘이 다르게 작동하는 ‘주변부’와 ‘주변부’의 관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이것들이 나의 기본적인 질문들이었다. 2. 새로운 만남과 경험 그리고 변화하는 외교와 담론냉전의 최전선이자 ‘주변부’이며 탈식민 신생 독립국 남·북한에게 또다른 ‘주변부’이자 신생 독립국 ‘중립국’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그에 따라 남북한의 외교와 담론은 변화했다. 박사논문은 일차적으로 그동안 파편적으로 다뤄진 냉전시기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정책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분기의 과정을 시계열적·종합적으로 정리했다. 자료를 정리할수록 냉전의 최전선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는 비슷한 시기에 ‘쌍생아적’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시기적으로 (비록 이유와 목적은 달랐지만) 남·북한 정부 모두 1957년 최초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중립국’을 방문했다. 1957년 북한은 주요 아시아·아프리카 비사회주의 국가들(인도·인도네시아·버마·이집트·이라크 등)과 무역협정을 맺거나 무역대표부를 양국에 설치했다. 반면 남한 정부는 1954년부터 밀려드는 중립과 평화에 대해 공산세력의 ‘중립공세’이자 ‘평화공세’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립과 평화를 주도하는 ‘중립국’들을 비판했다. 그러다가 남한 정부는 1957년 유엔총회에서 증대하는 중립국과 기권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립국’ 외교에 수동적으로 나섰다. 1960년대 들어 남·북한은 ‘중립국’을 둘러싸고 본격적인 외교경쟁을 펼쳤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 이룩한 경제발전의 자신감을 가지고 ‘정부’대표단을 파견하거나 초청하는 적극적인 ‘중립국’ 외교를 펼침으로써 그들과 외교관계 및 영사관계를 맺었다. 나아가 북한은 소련과 갈등 속에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를 외치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더욱 친밀한 대외관계를 맺어나갔다. 반면 남한에서 1960년 4·19 이후 수립된 과도정부·민주당정권·군사정부는 이승만정권의 대미(對美)일변도의 진영외교를 비판하면서 계속되는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 표결 위기의 대응 차원에서 적극적인 ‘중립국’ 외교를 표방했다. 남한 정부는 ‘중립국’ 외교를 펼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먼저 주도적으로 ‘중립국’과 관계를 맺은 북한을 상대해야 했다. 남한 정부는 ‘두 개의 한국’ 문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일관성있게 지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후발 주자로서 남한 정부는 만약 어느 ‘중립국’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고 하여 단교하는 순간 해당 지역 외교에서 북한에게 더욱 밀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한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중립국’에는 ‘두 개의 한국’ 원칙을 고수한 반면 영향력이 큰 중립국에서는 북한과 관계를 묵인하는 형태를 취했다. 1957년이 남·북한이 ‘중립국’과 처음 만난 시점이었다면, 1965년은 남·북한 모두에게 ‘중립국’ 외교의 분기점이 되었다. 1965년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개최의 무산은 양극적 냉전질서에서 탄생했던 반둥정신의 시효가 종료하고, 이제 다극적이고 국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냉전질서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시기 북한이 보기에 사회주의 진영은 분열했고 미국은 더 이상 소련 같은 강대국과 적대하기보다 약소국을 공격하는 이른바 “새로운 랭전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교조주의 및 수정주의라는 좌·우경 기회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작은 나라들과 자주적 연대를 추구했다. 또한 북한은 1965년 남한의 베트남파병과 한일협정에도 위기의식을 느끼며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전쟁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위기 돌파의 방법으로서 대국(大國)에 의존하기보다 작은 나라들과 자주적 연대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남한의 ‘중립국’ 외교도 1965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군사정부 및 제3공화국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중립국’ 외교는 1965년 베트남에 파병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남한은 베트남파병을 이유로 1965년 개최 예정이던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의 피초청국에서 제외됐을 뿐 아니라 프랑스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이유로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공동제안국에서 빠졌다. 남한 정부는 베트남파병이 낳은 ‘중립국’ 외교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1965년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한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연례자동상정 지양정책을 1968년 실행했다. 이는 남한 정부가 1960년대 미소의 접근과 다극화하는 냉전질서 속에서 더 이상 기존의 양극적 냉전문제로서 유엔에서 한국문제 표결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박정희정권은 새로운 냉전의 시대에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전방위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함으로써 다시 한번 새로운 ‘중립국’ 외교를 모색했다. 이처럼 남·북한 ‘중립국’ 외교는 공히 1960년대 중후반 ‘주체적’ ‘자주적’ 전환을 모색하고 추진했다. 자세한 외교정책의 시계열적 정리에서 발견하는 남북한의 (비)대칭성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논문을 쓰면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남북한 주요 인사들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아마 냉전이 아니었다면 한반도 사람들이 머나먼 중동과 아프리카, 심지어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국가 차원에서 방문하거나 그들을 한반도에 초청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60년 라틴아메리카 쿠바의 대표로서 체게바라는 북한을 방문했으며 1962년 아프리카 카메룬 사절단은 남한을 방문했다. 아마 당대 한반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남·북한 신문에 실린 다음의 사진들은 매우 생경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8011" align="aligncenter" width="552"]<그림 2> 쿠바 정부 경제대표단의 김일성 수상 방문(1960.12.2.) (왼쪽 5번째 체 게바라, 6번째 김일성, 출처: 《로동신문》 1960년 12월 3일, 1면)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8012" align="aligncenter" width="287"]<그림 3> 카메룬 사절단의 김포공항 도착 (출처: 《동아일보》 1962년 9월 22일 1면)[/caption] [caption id="attachment_8013" align="aligncenter" width="297"]<그림4> 카메룬 사절단의 청와대 방문 (출처; 《동아일보》 1962.9.24. 1면)[/caption] 이 사진들처럼, 1950,60년대 한반도에 살았던 외교행위의 주체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그들에게 느끼게 하려 했을까. 1960년대 남·북한 주요 인사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만났을 때 어떠한 인식을 가졌으며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를 밝힐수록 당대 담론의 지층들(반식민-냉전-경제발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북한 주요 인사들은 1950년대 중반 처음 방문한 아프리카에서 신생 ‘약소민족(弱小民族)’으로서 유사한 식민경험에서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데 1960년 전후 남·북한 외교행위 주체들은 다른 관점에서 이들을 규정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남한 인사들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경제발전을 원하며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외부 ‘원조’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남한 정부 관계자들은 아프리카의 식민경험 공감하기보다는 아프리카에서 발전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에 기반한 외교정책을 수립했다. 북한 지도부들도 1960년 전후 아프리카인들이 북한의 경제발전을 본받아 그들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음 사진처럼 1961년 9월 아프리카 말리 정부 친선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caption id="attachment_8014" align="aligncenter" width="460"]<그림 5> 아프리카 말리 정부 친선 대표단의 김일성 수상 방문 출처: 《로동신문》 1961년 9월 26일자[/caption] 북한 지도부는 말리 정부대표단에게 황해 제철소를 보여주었다. 이를 1961년 9월 26일자 《로동신문》 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는데, 자료를 읽으면서 시기는 다르지만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포항제철에서 쏟아지는 쇳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함께 떠올랐다. (…) 이곳에서 손님들은 1호 용광로와 나란히 솟은 2호 용광로를 이곳 로동자들이 불과 반년도 못 되는 기간에 건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로동 계급의 무궁무진한 창조력에 깊은 감명을 표시하면서 오래 동안 발길을 멈추고 용광로에서 쏟아져 내리는 붉은 쇠’물을 감명 깊게 바라 보았다.(…) 참관을 끝마치고 대표단 단장 마데이라 케이타는 벌써 조선은 자립적 민족 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구축한 나라로 되었다고 하면서 이 제철소 방문을 통하여 자기 조국의 빛나는 장래를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 인민의 완강한 노력과 불굴의 투지를 보았다고 말하였다.(…)(밑줄은 인용자) 남한과 북한은 모두 1960년 전후 아프리카인들을 만날 때 경제발전을 지렛대 삼아 외교를 전개했다. 그런데 원조 제공하겠다는 남한의 외교전략과 달리 북한은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경제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식민주의가 시도하는 ‘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립적인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북한 지도부는 자신들이 이미 그러한 자력갱생에 기반한 ‘진정한 독립’을 이룩했음을 자랑차게 아프리카인들에게 선전했다. 이처럼 1948년부터 1968년이라는 20년 동안에 걸친 남·북한의 외교정책과 담론의 변화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탈식민과 냉전, 분단 그리고 경제발전 등이 어떻게 상호교차하며 시기에 따라 무엇이 더 주도적이고 부차적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남·북한 통합적 분석을 통해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 경쟁에서 드러나는 남북관계의 ‘(비)대칭성’이 흥미로웠다. 3. 가칭 ‘한반도 냉전연구센터’를 만들어 본다면?논문을 쓰면서, 남한과 북한의 자료를 왔다갔다하다 보니 동일한 사건도 이렇게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여러 번 놀랐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라는 제3의 시선을 통해 더욱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논문 〈2장〉은 1955년 반둥회의를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했는지를 분석했다. 사실 초고는 남한과 북한에서 생산한 자료만으로 반둥회의를 정리했었다. 그런데 마지막 논문심사를 앞둔 시점에서 ‘운좋게도’ 반둥회의 주최국 인도네시아가 생산한 《반둥공보》라는 잡지를 인터넷 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좇기는 시간에도 〈2장〉을 거의 다시 썼다. 왜냐하면 남한과 북한만의 시선 혹은 기존의 미국과 소련 등 냉전의 진영에 기반한 반둥회의 서술이 아니라 반둥회의를 직접 주최한 인도네시아의 시각을 이해한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의 시선을 바라보니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시선을 확보하자 비로소 반둥회의가 추구했던 ‘하나로서의 반식민·평화·중립’이라는 개념이 파악됐으며 동시에 이 개념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시공간에서 ‘대칭적’으로 재해석·재규정된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처럼 냉전사 연구는 관련 국가들의 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다양한 주체의 시선을 서로 교차함으로써 좀더 ‘객관적’ 역사상을 그려내기 위해 냉전사 연구의 공간적 확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미국과 소련에 더해 중국이 적극적으로 최근 냉전사 연구에 참여하여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냉전의 ‘주변부’이던 남한과 북한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약소국가들의 시선은 부족한 형편이다. 예를 들어 한반도 차원을 넘어 실제 중립주의를 추구했던 ‘중립국’들은 한반도 분단과 전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의 주요 상대국이던 인도·인도네시아·이집트·알제리 등은 남·북한이 중립국을 둘러싸고 펼치는 ‘외교경쟁’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중립국’들이 상상하던 한반도와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 기존의 냉전의 강대국(미·소·중·영·프)에 편중된 자료에 더해 ‘중립국’들이 소장하고 있는 새로운 문서관 발굴·조사·수집·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냉전의 ‘주변부’의 시선을 확보하는 작업은 다국적 외교사료의 수집에만 머물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문화적 차원의 시선을 확보함으로써 냉전문화 혹은 냉전경험의 층위까지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냉전의 공간적·문화적 확장을 위해서는 학제적 협업과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가 더욱 진행되어야 한다. 이미 미국의 우드로윌슨센터는 중국, 동유럽, 소련 등의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고 제공하고 있다. 2001년 설립된 중국의 화둥사범대학 역사학과의 냉전국제사연구센터(冷戰國際史硏究中心)는 당안관 자료를 기반으로 세계 주목받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이로써 그동안 몰랐던 중국의 시선 자체가 새로운 냉전사 공간의 확장을 가능케 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양극적’ 대립이 한반도와 아시아·아프리카를 둘러싸고 강화되는 상황에서, 냉전의 적대적인 양극 대립을 넘어 중립을 지향했던 국가들과 우리들이 관계했던 역사를 ‘주변부’의 시선에서 발신한다면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냉전의 ‘주변부’이던 남한이 한반도의 냉전사 관련 연구를 세계에 내놓는다면 어떨까? 가칭 ‘한반도 냉전연구센터’를 만들어, 제3세계 자료와 한반도 자료를 수집·정리·번역·DB화 할 수 있다면 강대국의 시선에서 정리된 냉전기 역사상을 새롭게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