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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②] 단천 천도교인의 만세 시위, 어떤 결심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5.10 BoardLang.text_hits 4,921
[낯선 삼일운동] 

 

단천 천도교인의 만세 시위, 어떤 결심


 

정병욱(근대사분과)


 

ㄱ. 1919년 3월 함경남도 단천군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10일 파도면, 22일 북두일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 일본헌병의 발포로 최소 13명이 사망했다(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중에서).

ㄴ. 십여 년 전 1907,8년 같은 군에서 의병대가 “단발한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다가 모조리 무차별 타살하고 총살”했다. 그래서 당시의 “동학군들은 상투를 짜서 가발을 쓰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자 의병들은 “동리에 침입하여 상투를 하고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상투를 잡아 흔들어서 가발로 된 상투가 떨어지면 일진회원으로 몰아 죽였다.”(김용문 1981.2 「단천교구사 <2>」 <<신인간>> 385호, 51쪽)

그들은 왜 독립을 바라게 되었을까.

삼일운동을 연구할 때 보통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민족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독립’은 자명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수립된 지금이야 당연한 것 같지만, 당시 사람들이 꼭 ‘독립’을 바랄 이유가 있었을까. 동학농민전쟁 때 학살과 이후 박해,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부역, 그리고 위의 죽음을 생각해볼 때 동학교인(1906년부터 천도교인)에게 독립은 당위였을까. 뒤에서 보듯이 1910년 이전은 조선·대한제국의 지배층과 민중이 같은 배를 탄 정치공동체라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우선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어떻게 삼일운동으로 하나가 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다양한 민중의 다양한 독립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을 세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한국근현대사에서 삼일운동이 갖는 중요성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 또 이럴 때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도 구체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이나 ‘혁명’은 ‘독립’으로 표현된 민중의 바람을 잘 담았는가?

먼저 ‘십여 년 전’ 사건을 보자. 보통 ‘의병전쟁’ 하면 의병과 일본군경의 전투를 떠올린다. 가장 치열했던 1908년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1만1578명, 105명이었다.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 전쟁이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의병전쟁’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이 일본군경 이외의 사상자 수다. 같은 해 의병이 죽인 ‘관리 및 인민’이 543명, 그 중 72%인 389명이 한국 인민, 즉 민간 한국인이었다. 일본군경보다 3.7배 많다.

[caption id="attachment_7957" align="aligncenter" width="1088"]<표 > 1908년 ‘의병전쟁’ 사망자(단위: 명)[/caption]

당시 ‘성과’는 키우고 ‘피해’는 줄이려는 일본 측 통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많은 한국 인민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1908년 6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죽은 지방 일진회원이 9,260명이었다. 이는 같은 기간 일본군경에 의해 살육된 의병 9,991명에 육박하는 수치이다(<<朝鮮暴徒討伐誌>> 부표 2). 9,260명 중 함경남도가 5,270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신문 보도 내용은 지방 일진회원이 항의하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 위해 상경해서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한국일진회역사元韓國一進會歷史>>를 보면 1908년 8월 8일 일진회 본부가 추도식을 거행했는데, 성명이 낭독된 자는 966명이었다. 966명이라 해도 적은 수치는 아니다. 같은 기간 일본군경 전사자 62명의 16배이다. 그런데 당일 추도사에 ‘양민동포 누천의 생명이 장륙戕戮되었는데 그 중 가장 혹독한 화를 입은 것이 일진회원’이라 했다. 일진회원 외에도 살해된 한국 인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21-22쪽).

의병전쟁사에서 보통 이 사건은 일진회원 ‘처단’ 또는 ‘단죄’로 지칭된다. 의병이 일진회원을 죽인 것은 첫째, 일진회원이 일본군경의 의병 토벌에 협조했고 둘째, 지방에서 각종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단’은 의병의 활약상이고 그래서인지 위의 사망자수 중 가장 많은 수치 9,260명이 인용되곤 한다.

의병이 ‘처단’했던 지방 일진회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선 수가 적지 않았다. 하야시 유스케에 따르면 일진회는 존립기간(1904~1910년) 동안 10만인 내외의 회원 수를 유지하여 당시 어떤 단체에 비해서도 회원이 많았다. 상당수는 지방회원이었다. 구성원도 다양했다. 농민(초기에 참여한 동학계 진보회원들이 대부분 이에 해당한다), 무산자에서 부농, 상인, 지방 사족에 이르기까지. 1907년 이후 중류층 이상의 엽관 세력이 증가했다. 김종준이 적확하게 명명했듯이 그들은 ‘비기득권’층이었다. 지방에서 일진회원은 기득권 세력과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다투었다. 때로는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때로는 민중을 수탈하며. 뒤로 갈수록 후자의 경향이 강했다. 문유미의 표현대로 지역 사회를 뒤집어 놓았다(Subverting Local Society). 분단과 내전. 과연 외세가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먼저 외세를 이용한 것도 지배층이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조선 지배층의 차병借兵,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참혹했다. 이제 달라진 점은 일진회 지방회원에서 보듯이 기득권층에 맞서려는 층의 외연이 넓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들이 외세를 이용했다.

함경남도는 일진회가 셌던 지역이다. 일진회원들이 관찰사, 명천군수, 그리고 단천군수를 지냈으며, 따라서 회원의 작폐가 끊이지 않았다. 처단된 일진회원에 대한 일본군경의 보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다. 1904년 11월 진보회원 수는 9,240인(전체 11만 7735인의 8%)으로 평남, 전북, 평북 다음으로 많았다. 위의 사건이 있던 1907년, 1908년 천도교인은 각각 27,182인 26,318인(전체의 25%)으로 평안북도 다음으로 많았다. 천도교 측에선 일진회와 다르다고 주장하겠지만 의병이 보기에는 한 무리였다. 당시 함경도의 주요 의진이었던 차도선 부대의 경고문을 보자. “처음에는 동학으로 보국안민 운운하고, 러시아병사가 왔을 때는 도의원道義員이라 칭하고 러시아 병사의 통로를 앞뒤로 지휘했다. 이제 일본군이 오자 세를 쫓아 진보원進步員이라 칭하고 단발한 이후 자칭 일진회원이라 하여 지은 죄가 무수히 많다.”(<<韓國獨立運動史 1>> 665쪽) 천도교인과 일진회원은 외세에 기대어 호가호위하는 한통속이다. 당시 중앙의 천도교가 의병의 완고와 수구를 비판하며 의병무용론을 펼쳤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또 같은 시기 함경도에서 의병을 이끌었던 홍범도는 ‘반反동학’이 뚜렷하다. 그의 자서전 ‘일지’를 보면 의병으로 봉기하기 전 황해도 총령의 지소紙所에서 일하다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으며 동학 가입을 강요하자 주인 삼형제를 도끼로 찍어 죽이고 도망했다. 의병으로 봉기했던 1907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구월 십일일 치량동 동학쟁이 십일일 밤에 동학쟁이 회소會所에 달려들어 삼십여 명을 죽이고 회소를 불지르고......” 치량동은 함경남도 북청군 안평사의 칠량동七良洞이다(<<홍범도 장군>> 51,55쪽). 함경도 의병은 산포수山砲手들로 구성되어 다른 의병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력이 셌다.

1910년경 태어나 1942년부터 단천군 천도교 교구장(종리원장)을 맡았던 김용문은 앞의 인용문(ㄴ)에 이어서 말한다. “그러한 무법천지 속에서 동학군의 희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 그 중에서 살아남은 분이 최덕복崔德福, 동명옥이다. 동명옥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부락에 의병들이 달려들어 수색할 때 이 어른도 많은 동학군과 함께 붙잡혀 장작으로 무작정 두드려 맞고 실신한 것을 또한 발로 돌로 때려서 돌무덤을 만들어 놓고 가 버렸는데 그 날 밤 동학군들이 몰래 그 돌담을 헤치고 구출해주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51-52쪽)

그로부터 십여 년 뒤 1919년 3월 8일(주1) 단천군 천도교구장 염원형(60세, 농업)은 이원군 천도교 교구장 김병준에게서 ‘독립운동’을 개시하라는 통보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교부받았다. 그는 안성교(37세, 대서업) 최덕복(38세, 약종상) 등을 불러 3월 10일 기도일에 맞춰 운동하기로 모의하고 교인들에게 알렸으며, 최석곤(35세, 농업) 설운룡(35세, 천도교회서기)에게 선언서를 200매 등사시켰다. 예정대로 3월 10일 오전 11시 교구당에 모인 천도교인들은 ‘구 한국기’를 앞세우고 출발하여 단천시장에 이르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불온연설’을 하였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에 헌병대는 해산을 명하였으나 듣지 않자 발포하였다. 이상이 새로 발굴된 자료 이시카와(石川) 검사의 <<(1919년) 보안법사건保安法事件>>에 나오는 3월 10일 단천군 파도면 만세시위의 대강이다(69-74쪽). 나이와 직업은 판결문에 따랐다.

[caption id="attachment_7958" align="aligncenter" width="1095"]<그림 > 함경남도 단천군 만세시위 장소, 최덕복 거주지, 단천군농회의 잠견蠶繭반출 현장 사진. 자료(지도와 사진): 端川郡 1930.8 <<郡勢一斑>>[/caption]

헌병의 발포로 인한 사망한 자가 일본군경의 초기 보고에는 약 10명으로 나오나 최종 6명으로 집계되었다. 위의 검사 자료나 판결문을 보면 시위 주도자가 시위대에 ‘헌병이 해산을 명령하여도 따르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런 진술에는 구타의 냄새가 진동한다. 천도교 중앙의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식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음식점으로 변경했을 정도로 조심했다. 중앙에서 서북지역 천도교지도자들에게 내린 시위 지침은 “만약 경찰서원, 군청원 등이 제지한다면 반항하지 말라”였다. 관북지역만 다를 이유가 있을까. 단천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던 김병준이 주도한 3월 10일 함경남도 이원군 서면 시위에도 헌병의 해산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지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지침은 단천군의 10일 파도면 시위와 22일 북두일면 시위에 나오며 두 시위의 공통점은 헌병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북두일면에선 7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최종 집계되었는데, 판결문을 보면 공소사실에 이런 지침 외에도 시위대가 헌병들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점이 포함되었으나, 이에 대한 판사의 판단은 증거 불충분. 파도면에서 설운룡과 최석곤도 그렇게 지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시위 지침 ‘불복종’은 헌병이 발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의자로부터 짜낸 ‘진술’로 의심된다. 김용문이 기억하는 파도면 만세시위 사망자 10명은 다음과 같다.

염석하廉錫河 염석한廉錫漢 박홍선朴弘善 이종환李鍾煥(이상 新滿面) 이영호李永浩 원준희元俊喜(이상 何多面) 서봉화徐鳳化(福貴面) 김상갑金尙甲(利中面) 황희율黃熙律 황희종黃熙種(이상 北斗日面)(주2)

‘불복종’의 지침이 아니더라도 당당한 시위였다. 안성교는 상고취지서에서 시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가급적 관사에 접근하지 않고 단천 읍내 시가지에서 천도교인과 보통사람 모두 600여명이 맨손 맨주먹으로 길거리에 똑바로 서서 ‘조선민국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단천분대에서 분대장 이하 헌병이 불쑥 나와 보병총을 난사하며 해산을 명했다. 안성교와 같이 ‘맨손 맨주먹으로 똑바로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을 최덕복에게 ‘십여 년 전’일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에게 ‘독립’은 자신이나 동료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던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만든다는 결심이었을지 모른다. ‘만세’는 그것이 일본인의 지배하에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 낫다는 외침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자주 결심을 증명해보라 요구한다. 만세시위가 일어난 지 2년이 훌쩍 지나고 최덕복이 출옥한 지 1년이 지난(주3) 1921년 11월 그의 집으로 김도빈, 차병학이 찾아온다. 그의 주소는 만세시위 때 이중면 덕주리였으나 이제 같은 면 하전리로 바뀌었다. 이전보다 산 쪽으로 들어갔다. 직업도 약종상에서 농업으로 바뀌었다. 위 두 사람은 간도에서 조직된 광복단원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려 찾아온 것이다. 최덕복은 광복단 입단 권유를 받고 찬동 한 뒤 단원에게 자신의 자택을 활동 근거지로 제공하였고, 경찰관을 내탐하여 정보를 건넸으며, 면내 자산가의 재력을 조사하여 자금모집의 편의를 봐주었다. 본인도 같은 지역의 여러 사람을 입단시키고 자금을 모집했다. 이상은 조선총독부가 보기에 ‘1919년 제령7호’ 위반, 즉 ‘정치에 관한 범죄’였다. 이외에도 차병학이 염창성이란 자를 잘못 죽이자[誤殺] 같이 매장하여 ‘묘지화장장매장및화장취체규칙’ 위반, 게다가 누범으로 형이 가중되어 최덕복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방화와 살해 위협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판사는 그가 자수하려는 사람을 만류한 것으로 볼 때 변명은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caption id="attachment_7959" align="aligncenter" width="410"]<사진 > 1928년 단천 천도교 교구당 모습. 천도교 단천소년연맹 창립대회 기념사진이다. 교구당은 1922년 세워졌다. 해방 직후 8월 16일 이곳에서 단천 보안단이 조직되었다. 자료: 김용문 1981.5 「단천교구사 <3>」 <<新人間>> 388호, 64쪽.[/caption]

최덕복은 첫 번째 출옥 후 1921년 천도교 의결기관인 의정회議政會의 단천 의정원으로 선출되었다. 두 번째 출옥 후 1930년 단천군 농민사 이사장, 1931년 단천군 종리원장(교구장)을 역임했다. 최덕복 외에도 단천군 파도면 삼일운동의 주역이었던 설운룡, 최석곤도 지역 천도교의 핵심 인사로 활약하며 종리원장을 지냈다. 최덕복은 지역사회에서도 신망을 얻었던 것 같다. 1928년 이민里民대회의 사회를 보았다. 마을주민은 잠견蠶繭대금 저축이 필요하지 않다, 그 저금을 찾아 사육시설을 짓자고 건의하기 위해 대표를 뽑아 단청군청에 보냈다. 1930년대 후반이면 삼일운동 때 단천교구가 독립운동 소식과 지침을 전했던 이웃 갑산군, 풍산군에서 천도교인들이 조국광복회에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벌인다는 산 소식이 전해졌을 거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육십이 넘어 해방을 맞이한 최덕복은 한 번 더 유치장 신세를 졌다. 김용문은 단천교구 ‘최고원로’인 그가 1946년 1월 단천보안대에 연행되어 60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유는 남한방송 청취. 그런데 나이 때문인가, 그가 남으로 내려왔다는 흔적은 없다. 반공적 시각일 수밖에 없는 이북지역 지지地誌나 실향민의 회고에 늘 나오는 반공투사나 희생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주1) 김용문은 일관되게 단천에 독립선언서가 도착한 것이 3월 3일이라 말했다. 石川檢事 자료의 ‘최봉천 외 24명 건’을 보면 3월 5일 단천군 天道敎師 서봉화가 최봉천에게 갑산 방면에 독립운동의 취지를 전하고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하도록 했다(58쪽). 이로 볼 때 단천군 천도교구에 독립운동의 취지와 지침이 전달된 것은 3월 5일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주2) 김용문 1981.2 「단천교구사 <2>」 <<新人間>> 385호, 56쪽. 10일 시위에 북두일면 거주자가 참여했는지는 의문이다. 파도면(헌병주재소)과 북두일면(대신리 헌병주재소)은 직선거리로 60km가 넘는다. 아마 뒤의 2인은 북두일면 시위에서 사망한 천도교인 것 같다. 늦게나마 제대로 된 삼일운동 사망자 명단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3) 최덕복은 만세시위로 1심(1919.5.23.)에서 징역 3년 6개월, 2심(1919.8.14.)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상고(1919.10.16.)는 기각되었다. 1920년 ‘왕세자’ 이은의 결혼에 따른 특사로 형기가 반감되어(칙령 120호 1920.1.28.) 1920년 10월 15일경 출옥하였을 것이다. 같이 상고심까지 간 염원형은 최종 징역 3년에 처해졌는데 형기가 반감되어 1921년 4월 15일 출옥했다. 1921.5.29. 「廉元亨氏出獄還鄕」 <<東亞日報>>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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