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기획연재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중국 연변대학 김성호 님②> 집체 참관과 답사로 조선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_홍종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5.02 BoardLang.text_hits 2,847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중국 연변대학 김성호 님②> 집체 참관과 답사로 조선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홍종욱(근대사분과)



한역연 웹진 <역사랑> 창간 기획으로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를 연재한다. 면담자 홍종욱은 연구과제 ‘북한 역사학의 성립과 전개’의 일환으로 재일 조선인 및 중국 조선족 역사학자에 대한 구술 조사를 벌였다. 구술은 북한 역사학에 초점을 맞추지만, 동아시아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삶과 학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 2018S1A5A8026779)

 

구술자: 김성호(金成鎬, 연변대학 교수)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김인수(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

면담일: 2018.9.8. / 면담장소: 연변대학 김성호 교수 연구실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 정리: 홍종욱

 

[caption id="attachment_7951" align="aligncenter" width="499"]<사진1> 을밀대에서 중국인 평양 연수단.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구술자, 두 번째가 리해산, 뒷줄 가운데가 장문천. [/caption]

 

한 달에 태환권 50원을 받다


면담자: 유학 비용은 역시 나라에서 지원을 받으신 거죠?

구술자: 네,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국가협의에 근거해서 조선유학생이 중국에 오면 중국에서 일체 경비를 책임지고, 우리가 조선에 가면 조선에서 일체를 책임지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땐 국가에서 외국유학을 상당히 중시할 때죠. 그때 저의 월급이 62원인지 64원인지 할 땐데, 매개 사람에게 복장비용으로 800원씩 줬어요. 외국 나갈 때 좋은 옷들을 사 입고 물질 준비를 잘해서 가라는 것이지요. 당시 800원이면 거액이지요. 1년 수입을 초과하거든요.

면담자: 북한에서도 꽤 좋은 대우를 받으셨다고 했죠?

구술자: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1년간의 연수기간에 저희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훌륭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기숙사, 식사, 그리고 전용차로 단체유람이나 유적답사 등 모든 것이 무료였습니다. 그 때 조선에서 사용하는 돈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조선인민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조선화폐, 다른 두 가지는 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파란돈 과 빨간 돈이었습니다. 빨간 돈은 미국 달러와 대등한 것으로 쏘련이나 기타 나라에서 온 분들에게 지급된다고 하던데, 중국에서 온 우리에게는 파란 돈이 지급됩디다.

면담자: 중국에도 예전에 있었던 태환권이군요,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구술자: 그렇죠. 우리에겐 소비 돈으로 한 달에 파란 돈 50원씩 줍디다. 그거 가지고는 외국인 상점에서 담배, 사탕가루 등 상품들을 맘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면담자: 북한 돈 50원이요.

구술자: 조선 돈이 아니고 파란 돈, 중국에서 말하는 태환권입니다. 외국인들이 지정된 외국인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그런 돈이지요. 외국인 전용상점에는 외국제 상품들이 많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그런 돈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디다. 언젠가 한번은 제가 평양의 일반 상점에서 파란 돈을 내놓으니 판매원이 받지 않습디다. 우린 일반 생활에서 모두 무료이니, 그 돈이면 아주 충분한 것이지요. 사탕, 담배나 술을 사고, 혹시 조선 분들이 부탁하는 게 있잖아요. 잘 아는 분들이 사탕가루 사 달라 뭐 사 달라 하는 거 해결해주지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종합대학에서 외국인 전문상점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드믄드믄 집체로 차를 타고 가서 구매하는 것이 좀 불편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귀국할 때 파란 돈, 조선 돈 모두 1000여 원이 남았는데, 기숙사 청소하는 분한테 주고 왔습니다. 파란 돈은 일반상점에서 마음대로 내놓고 물건을 못 살 겁니다.

면담자: 중국 정부에서도 생활비를 받았다고 하셨죠?

구술자: 국가파견으로 간 저희들의 국내 노임은 그냥 그대로 발급되었고, 또 국가에서 별도로 우리 매개인에게 한 달에 50달러씩 주었어요. 그리고 조선 측에서 우리 연수생들의 기본생활 일체를 보장해주고 또 소비 돈으로 태환권인 파란 돈은 지급하는 것이라고 합디다. 특수 관계인 중조 두 나라 상호협의에 의한 국가 대 국가의 특수한 편리와 호혜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국가에서 주는 달러는 구경도 못하였고 오직 연수증명서만을 가지고 북경에 와서 그만한 가격의 물건을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수가 끝나고 귀국할 때,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조선에 1년간 있었다는 연수증명서에 도장을 찍어줍디다. 그걸 가지고 국가교육부에 가서 유관 수속을 마친 후 교육부의 전문상점에 가라고 합디다. 근처의 조그마한 상점인데, 주로 외국제 상품들이 진열돼 있습디다. 거기서 이 테레비를 사겠다, 저 냉장고를 사겠다 하면 그대로 결산하지요. 모두 600달러 정도인데, 큰 물건들을 구매하고 나머지 돈은 운송비, 그리고 면도칼과 단추까지 주어 결산을 딱 맞추었습니다. 저도 증명서 한 장을 들고 가서 일본제 채색테레비 하나와 냉장고 하나를 구매하였습니다. 교육부 상점에서 각 자의 거주지까지 발송해 주었는데, 그것이 그때 우리 동네에서 처음인 일본제 채색테레비와 냉장고였습니다.

 

매일 닭 한 마리씩, 식사는 부부장급 대우


면담자: 숙소는 어떠셨나요?

구술자: 기숙사 위치와 환경조건 등은 아주 좋았습니다. 우리 외국인 기숙사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원에서 큰길 하나만을 사이에 둔 아주 가까운 근처에 있었습니다. 4층집으로 기억되는데 지금도 계속 외국인 기숙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제가 그곳에 다시 가서 그때 1년간 생활하던 기숙방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연수 당시 이 기숙사에는 우리들 외에도 쏘련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온 유학생과 연수생들이 주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1, 2년전부터 와 있던 외국인 연수생과 연구생들도 있었습니다. 기숙사 1층에는 식당, 이발소, 위생소, 관리인실 등에 전문적으로 우리들을 위해 봉사하는 조선 분들이 있었고 2, 3, 4층에는 외국 연수생들과 유학생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매개 사람마다 면적이 한 20평방미터 되는 단독방들이 차려졌고 각 방에는 침대하나, 책상과 걸상 등이 있었습니다. 복도 중간에 휴게실로 큰 공간이 있었고 큰 테레비가 비치되어 있어 식사 후에는 모여앉아 한참씩 테레비를 청취하거나 한담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기판을 놓아둔 휴식실도 있었습니다. 기숙사 내에서 식사와 위생소, 이발소 사용 등도 모두 무료였습니다. 개인생활에서 신경 써야 할 문제나 불편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면담자: 식사는 어떠셨어요?

구술자: 식사는 1층의 집체식당에서 하는데 식료나 봉사태도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당시 조선관리부문 한분의 말씀이, 우리들의 식사표준이 대략 조선의 부부장급 대우라고 합디다. 그러니까 한국말로 하면 차관급 대우겠지요. 아침이면 우유 한 컵, 이밥에 소고기 국, 점심에는 이밥, 고기국, 그리고 구운닭 한마리씩 줬어요. 매일 점심 조그만 통닭을 한 마리씩. 저녁이면 소고기, 돼지고기가 있었고, 또 사과 두 개, 맥주 두 병. 대우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조선 관리부문에서 아주 빈틈없이 섬세하게 우리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보살폈어요. 특히는 조선 측에서 저희 매개인들의 생일상까지 따로 풍성히 차려주곤 하였습니다. 저는 동지달 생일날도 잊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 갑자기 불려 갔다가 놀랍고도 기쁘게 생일상을 받았습니다. 진정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면담자: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과 교류가 있었나요?

구술자: 주로 중국에서 같이 온 분들과 교류하고 다른 외국인들과는 별로 교류가 없었습니다. 자기 공부가 급하니 별로 개인적인 시간여유도 없었습니다. 우리 중국 유학생들은 주로 3층에 있었는데, 같은 층에 있은 한 쏘련 유학생이 조선말을 괜찮게 구사했습니다. 이 분이 아주 재미있는 분인데, 어느 날 밤중에 이 친구가 갑자기 복도에서 큰 소리로 모두 빨리 휴게실에 나오라는 것이에요. 모두들 휴게실에 가보니 그가 쏘련 술 몇 병을 들고 와서 하는 말이, 금방 전보를 받았는데 쏘련에 있는 부인이 딸을 순산했다, 모두 같이 축하의 술을 마시자는 것입니다. 그때 저도 그의 강권에 못 이겨 처음으로 쏘련 술을 두어 잔 마셔 보았습니다. 동남아에서 온 분들은 2층에 주숙했는데, 우리와의 접촉은 기본상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 한족 분들이 든 방에는 그들이 조선말을 잘 배우라고 같은 학과의 조선 연구생 한 명씩을 같은 방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한방에 중조 두 나라의 두 사람이 함께 거주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배치된 조선연구생들을 동숙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길림성 집안출신의 한 연수생과 함께 있는 조선의 한 박사연구생이 저의 독방에 자주 놀러 다녔습니다. 그는 나이가 저보다 몇 살 위인데 어린 딸이 둘이라고 합디다. 원래 군대에서 대대정치위원으로 복무하다가 추천을 받아 종합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분이었어요. 밤중에 복도 한켠에 있는 공용화장실에 갔다가도 저의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속옷차림 그대로 찾아오곤 했어요. 한방 건너편에 있었으니깐. 그 분이 맥주를 무척 좋아했어요. 난 그때도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어떤 때에는 저에게 차려진 맥주병들을 숙소에 가져다 놓기도 했습니다.

면담자: 그 분한테는 맥주가 안 나오니까요.

구술자: 예. 훌쩍 들어와서 맥주를 찾아요. 제가 외국인상점에서 사탕, 낙화생, 마른명태 같은 것들을 사다 놓으면 그걸로 안주삼아 맥주를 잘 마셨어요. 쭉 마시고 나서는 인젠 잠을 잘 잘수 있겠다 하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에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날 오후 5시경에 이 분이 깨끗한 새 옷들을 갈아입고 매우 흥분된 모습으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 분은 붉게 상기된 얼굴에 떨리는 목소리로 “김 선생, 저의 이 새 옷들을 잘 보십시오. 오늘 우리 어버이 수령님께서 저희들 모두에게 이렇게 좋은 새 옷들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전국의 모든 학생과 연구생들에게 통일적으로 골고루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나라가 세상 그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너무 흥분해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면담자: 동남아에서 오신 분들은 주로 뭘 배우러 오셨나요.

구술자: 주로 언어를 배우러 온 것 같습디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모르겠어요, 각 학과에서 책임지니까.

 

중국 대사관 지도를 따르다


구술자: 우리 생활을 중국대사관에서 많이 관심하고 지도했어요. 중국대사관의 문화처 분들이죠. 그 때 우리 연수생들과 유학생들은 거기서 당 지부도 건립했어요. 그러니까 종합대학 중국유학생 당 지부, 뭐 연수단 당 지부 등.

면담자: 열일곱 분이 다 당원이셨나요?

구술자: 기본적으로 다 당원들이지요. 저의 기억에 길림대학에서 간 박××이 당원이 아닐 거예요. 그는 조선족인데 우리 팀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어요.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 지부 활동에서 정치학습과 토론, 기율검사 등 외에도 나이가 많은 연수생 몇 명이 비교적 우수한 유학생 몇 명을 중점적으로 책임지고 배양하였는데 그중 일부는 거기에서 입당도 하였습니다. 지금 서울주재 중국총영사관에서 일하는 한 젊은 여성도 그때 평양에서 입당한 유학생입니다.

면담자: 그 분은 대사관 직원이었나요?

구술자: 아니, 유학생이죠. 고등학교에서 특히 우수한 졸업생들이 선발되어 조선의 각 대학들에서 언어, 예술, 무용 등 여러 가지 전공들을 공부하는 유학생중의 우수한 한명이지요. 그들은 먼저 조선말과 글을 배우게 됩니다.

면담자: 열일곱 명으로 같이 가신 분은 아니고 이미 거기 와서 있던 분이군요.

구술자: 예, 1년 전이나 2년 전에 온 유학생들이 보다 많았고 연구생과 연수생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팀 모두는 대학교원, 연구기관의 연구원과 간부들이었지요. 때문에 어떤 분들은 중국유학생들을 보살피고 지도하는 지도원 직책도 맡아 수고가 꽤 많았습니다.

면담자: 그렇군요.

구술자: 우리는 종합대학이나 인민대학습당, 혹은 책방 같은 곳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 기본상에서 개별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측에서 기율적으로 유학생이나 연수생들의 개별적인 사회활동을 삼가하라고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대사관 측에서도 사회상의 조선 분들과 마음대로 교류하지 말라고 많이 강조했습니다. 절대 무조건적으로 조선쪽의 요구대로 하라, 조선 측 유관규정의 합리성 여하에 관계없이 그 분들의 요구는 무조건 준수하라는 것이지요. 상당히 엄하게 요구했습니다. 당 지부 활동도 있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1주일이나 반달에 한 번씩 모아서 당원회의를 하고 국내에서 온 정치문건들도 학습, 토론하고, 그런 다음 연수생 당 지부 서기가 대사관에 가서 회보도 하고 국내에서의 소식통보와 정치 학습 자료도 받아오고. 당시 우리의 당 지부 서기는 저와 동갑인 길림대학의 장 선생, 1년전부터 와 있던 경제학 전공의 박사연구생으로서 후에는 길림대학 동북아연구원 부원장으로 있다가 지난해에 불행히 사망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였는데, 우리 조선말을 꽤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면담자: 그러셨군요.

구술자: 우리가 평양에 있을 때, 리붕(李鵬) 부총리가 조선을 방문했지요. 중국대표단이 평양방문 왔을 때 대사관에서 우리 연수생들과 대사관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단장인 리붕 부총리가 원고 없이 연설을 합디다. 지금 국내의 발전상황이 어떻게 잘되고 있다는 형세보고,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희망사항 등이었습니다. 대사관 회의실에서 진행된 그 회의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분은 매우 조용하게 말씀하셨는데, 중조 두 나라는 선혈로 맺어진 “동지와 형제” 관계의 심원한 친선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중조 친선 관계 발전을 특히 중요시해야 한다, 조선은 사회예절을 특히 강조하는데 담배피우는 것도 포함해서 조선의 모든 풍속습관과 사회예절들을 존중하고 따르라, 말 한마디라도 중조 친선 관계 발전에 불리하게 손상주어서는 절대 안 된다, 조선의 영수숭배 같은 특수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절대 존중해주어야 한다, 조선의 사회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낙후한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온 것은 낙후한 것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며 우리보다 선진적이고 우수한 모든 것을 배우러 온 것이다, 특히 조선의 보편적으로 높은 국민문화 소질, 엄격한 규율과 정연한 사회질서, 보다 깨끗한 환경위생 등 얼마나 배울게 많은가, 유학이나 연수하러 온 목적은 바로 대방(상대방-면담자)의 우점을 배우기 위한 것이니 우리보다 훌륭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발견하고 허심히 배우며 지도 선생님을 존중하고 자기의 전업공부에서 참답게 노력하라는 등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자상하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다원일체(多元一体)인 중화문화의 포용력, 다민족 대국의 한 영도자의 정치적 안목과 풍모를 새삼스레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보고회의가 끝난 후, 그 분은 대사관건물 정문 앞에서 우리와 함께 집체기념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면담자: 좋은 말씀이네요.

구술자: 우리 팀보다 먼저 온 중국 연수생중에 좀 이상한 한 분이 있었는데, 우리와 별로 접촉하지 않았어요. 저와는 단 한번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적이 있어요. 당시 대사관에서는 저희들에게 조선에 있는 화교들과도 사사로이 접촉하지 말라, 자칫하면 조선 측의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특히 강조하여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분은 화교들과 빈번하게 내왕하면서 조선우표를 구입한다고 합디다. 조선우표를 구입하여 무엇을 하는가라고 좀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후에 들으니 뭐 장차 좋은 돈벌이가 된다고 합디다. 듣건대 그분은 그 일로 하여 대사관 문화부문 책임자의 비평교육을 받았다고 합디다.

면담자: 재미있네요.

구술자: 평양주재 중국대사관문화처에서 우리들을 매우 관심하고 지도하였습니다. 예하면, 춘절이나 김일성 주석의 생일, 2월 16일 김정일 영도자의 생일날에는 대사관에서 우리에게 술, 맥주, 안주 등을 보내옵니다. 조선 측에서 조직하는 연회에서 보다 즐겁게 지내며 친선우의관계를 더한층 굳게 하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조직하는 춘절 만회의 경우, 간단한 오락경기들도 있었고 우승자에게 풍성한 상품들을 발급하였는데, 보다 값 높은 좋은 상품, 예하면 옷감 같은 것은 될수록 조선 측의 식당 복무원, 청소부들에게 돌리었습니다. 이 상품들도 대사관측이 제공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듣건대 그믐날 밤중에 우리가 기숙사 뜰에서 매우 요란하게 터친 폭죽들도 대사관에서 제공한 것이라고 합디다.

대사관은 우리들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는데, 저는 도서관에서 대출한 역사책들의 일부를 대사관에서 가지고 가서 무료로 복사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상품이 적고 질이 좀 못하니까, 중국대사관의 운송차가 1주일에 한두 번씩 중국 단동(丹東)에 직접 가서 생활 소비품들을 구입해오곤 하였습니다. 대사관의 유관인원이 우리들에게 구매할 상품들을 자세히 적어라, 그리고 중국 돈을 계산해서 주면 곧바로 구입해줍니다. 저희들 기숙사와 대사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무더운 여름의 어떤 때에는 저녁 식사 후에 대사관 수영장에 가서 무척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전쟁 때 중국지원군들이 파놓은 아주 큰 노천 수영장이었습니다.

면담자: 대사관을 편하게 다니셨군요.

구술자: 예. 당시 우리들의 중국과 편지 내왕은 조선의 국제우편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중국 국내의 우편규정대로 집주소를 쓴 편지들을 대사관에 모아두면, 대사관의 통신원이 국내에 가서 부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오는 편지도 북경의 외교부와 평양의 대사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통신원을 신사(信使)라고 불렀는데, 약 보름에 한 번씩 편지가 통했습니다. 그러니깐 어떤 때에는 한 번에 오는 편지가 다섯 통, 열 통 씩 되지요. 신사가 오게 되는 날이면 아침부터 모두가 뒤숭숭해하며 그 무슨 잔칫날 같은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집체 참관과 답사로 역사 유적을 둘러보다


면담자: 평양 말고 다른 곳도 좀 둘러보실 기회가 있었나요?

구술자: 평양 외의 여러 지방들도 적지 않게 다녔습니다. 집체참관이나 유람이 꽤 많았습니다. 때때로 조직되었는데 평양의 만경대 고향집, 소년궁전, 역사박물관, 전쟁승리기념관 등 많은 곳, 그리고 외지의 연풍호, 금강산, 묘향산, 개성 판문점 같은 곳에 갈 때는 집체로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외국인 기숙사의 모두가 함께 가고 어떤 때에는 중국에서 온 연수생과 유학생들만, 어떤 때에는 중국 연수생들만 집체로 가곤 하였습니다. 판문점에 집체 참관을 갈 때 쏘련 사람들은 빼 놓습디다. 쏘련 연수생 한분이 떠듬거리는 조선말로 들려준 데 따르면, 1년 전에 쏘련 유학생 한 명이 바로 군사분계선에서 사진 찍을 때 의도적으로 두어 발 슬쩍 뒤로 물러나 분계선을 넘어 한국 쪽으로 도망쳤고 이에 따라 남북 경비병들 사이에 충돌사건까지 발생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합디다. 조선 분들에게 조용하게 물어보니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간단히 확인해 줍디다. 하여간 아주 좋은 기회를 만나 조선의 많은 곳들을 기쁘게 잘 돌아보았습니다.

면담자: 역사 유적도 둘러보셨습니까?

구술자: 집체로 묘향산에 갔을 때 보현사 옛터에 갔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묘향산에 모두 다섯 번 갔댔는데, 개별답사 때는 서산대사가 계시던 석굴집까지 두 번 가 보았습니다. 면적 5평방미터 좌우의 작은 석굴인데, 처음 갔을 때 보니 그 안에 김일성 주석의 초상을 모셔놨습디다. 제가 어망간에 안내원에게 이건 정말로 너무 격이 맞지 않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면담자: 그 안에까지 안 걸어도 될 텐데, 좀 그러네요.

구술자: 서산대사가 어느 때 분인가, 이곳은 아주 오랜 역사 유적인데,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수령님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외사기율 상 일반적으로 이와 유사한 일에 봉착해도 우리 신분에서는 속으로만 알고 문제는 바로 지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날은 신변에 배동인원이 단 세 사람뿐이고 조용한 답사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만 속말을 터치고 말았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저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례일 수 있지만, 중국 조선족으로 고국역사를 공부하러 온 신분에서 구김 없이 제기하니 유관상급에 제출해주기 바란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몇 달 후 다시 가보게 되었는데, 그 석굴 안에 초상이 없었습니다. 배동한 지도원의 말에 따르면, 김 선생의 건의를 상급에서 인차 받아 들였다고 합디다. 여하튼 집체 참관과 유람을 꽤 많이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될수록 조선을 많이 보고 폭넓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면담자: 좋은 일을 하셨네요.

구술자: 조선에서 우리에게 대우가 상당히 높았는데, 한 보름 지나면 휴식시킨다고 토요일 날 같은 때는 모두를 버스에 앉혀가지고 참관이나 유람을 떠나지요. 기숙사 식당에서 소고기 생회 같은 것을 준비해서 유람지에 가서는 불고기를 해서 먹었지요. 그리고 맥주도 많이 가지고 가서 즐겁게 휴식시키곤 했습니다. 그런 즐거운 유람이나 참관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저의 일생에서 그 1년간은 정말로 즐거운 나날들이였지요.

면담자: 개별적으로도 다니셨나요?

구술자: 개별적인 역사답사도 적지 않게 했습니다.

면담자: 혼자 가시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누구랑 가셨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종합대학에서 차를 내주고 지도 선생님이나 외사지도원들이 같이 동행하지요. 예를 들어 동명왕릉 간다하면 고대사 선생님이 같이 대동하고, 개성에 간다 하면 또 다른 선생님이 데리고 가고. 동명왕릉은 먼저 집체로 간 적이 있지만, 개별적인 역사 답사로 다시 갈 때는 조선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신 손영종 선생님이 저를 데리고 가서 현장에서 직접 가르쳐주었습니다. 하긴 제가 주로 근현대사 공부를 하면서 고대사 특히는 고고학 지식이 많이 부족하여 손 선생님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해주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실로 매우 죄송한 일이었지요. 손 선생님은 이미 10년 전에 81세로 사망하셨고 그 분의 아들이신 손수호 교수가 지금 조선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평양시내에 있는 유적지들은 김길신 선생님이 저를 많이 데리고 다녔습니다. 김 선생님이 일제통치시기의 잔혹한 착취, 조선 인민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강의하실 때, 당시 백성들이 기근에 백토라는 것까지 먹었다고 합디다. 그 백토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문의하니 지금도 평양시 한곳에 있다고 합디다. 학교의 전용차를 불러 김 선생님과 함께 그곳에 간 후, 저는 역사체험의 하나로 그 백토를 몇 모금 먹어보았는데 위가 금방 무거워나면서 저녁밥도 먹지 못했으며 이튿날에 흰 변을 시원하게 본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개별적인 역사답사로 묘향산에 다시 갈 때에도 김길신 교수님과 함께 갔댔죠. 지도교수님, 묘향산 해설원, 그리고 인민군 정찰중대장 등 네 명이 3일간 함께 다녔습니다. 정찰중대장 그분은 30대 초반에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였는데, 우리 넷의 점심, 10여 병 되는 맥주까지 전부 혼자 짊어지고 가파른 오르막 산길도 평지처럼 씽씽 걸었어요. 그분의 말이, 산속에 혹시 간첩들이 잠복해 있을 수도 있고 산길이 매우 험한데, 저의 절대적 안전을 보호하고 답사를 잘 도와주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합디다. 모든 짐은 우리가 못 들게 하고 혼자서 들고 다녔는데, 그분의 수고가 많았어요. 그때 우리 역사답사비용은 예하면 상점에서 맥주 열병 가져온다 하면 자그마한 종이장에 종합대학 역사답사, 외국연수생 답사를 기록, 그리고 지도교수와 저의 서명, 날짜 등을 기록하면 결산이 끝나는 것 같습디다.

면담자: 사회주의 식이군요.

구술자: 묘향산의 3개 골짜기를 하루에 하나씩 돌아보고 단군굴, 서산대사 석굴 등을 전부 답사하고 천도봉에도 올라갔댔습니다. 길이 전혀 없어 외국인 답사가 허용되지 않는 천도봉이라고 합디다. 김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조선반도에게 유일하게 이곳 천도봉에서만 동해바다와 서해바다 모두를 볼 수 있다고 합디다.

면담자: 괜히 그러는 거 아닐까요? 정말 보일까요?

구술자: 김 교수님 말로는 제가 동족의 외국학자로서 역사답사의 특수신분이어서 천도봉에 오른 제1호 외국인이라고 합디다. 천도봉의 2, 3평방미터도 되지 않는 정상에 서서 제가 망원경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양쪽 바다를 끝내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망원경은 바로 정찰중대장이 가져온 좋은 군용품이었습니다. 그때 먼 하늘에 구름이 약간 낀 탓인지, 나의 눈이 부실한 탓인지, 여하튼 바다는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망원경으로 묘향산 깊은 산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하나의 멋진 건물과 그 앞에 정갈하게 보이는 작은 호수, 그리고 다른 방향의 희천시는 잘 굽어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 멋진 건물은 무엇인가 물으니, 동행한 분들은 모두 웃으면서 자신들도 잘 모른다고 합디다. 후에 들으니 그 별장이 바로 김일성 주석의 묘향산별장이라고 합디다.

면담자: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

구술자: 저희 팀에서 개별 답사를 제가 제일 많이 다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의 연구원이고 역사학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 개별적인 역사 답사를 다닐 때 호텔에서의 식사만은 저 혼자 해야 되거든요. 지도 선생님, 대개는 정무원에서 왔다고 하는 독일제나 일본제 승용차의 운전수, 혹은 외사지도원 등은 다른 곳에서 따로 식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차려진 것이 이밥, 고기국, 김치, 고추장 등 일반반찬 외에도 통닭 한 마리, 큰 물고기 한 마리, 달걀 네 개 등 너무 많고 풍성합니다. 모두 함께 와서 홀로 좋은 대접을 받으니 실로 미안한 일이였습니다. 하물며 그들은 전부 저를 위해서 온 분들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원래 위가 좋지 못하고 항상 좀 적게 먹다나니 그것을 3분지 1도 못 먹거든요. 그래서 제가 적어도 지도 선생님과는 함께 식사하면 좋겠다고 제출하니 그건 규정상 아니 된다고 합디다. 두 번째 때는 제가 혼자 식사하자니 밥맛이 전혀 없다고 좀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때부터 지도 선생님과 함께 식사하게 되었지요. 김 선생님은 웃으면서 저에게 “김 선생 덕에 요즈음 생일날 같이 잘 먹고 지낸다”고 합디다.

면담자: 규율이 엄하군요.

구술자: 예, 규율이 상당히 엄하지요. 하지만 구체적인 문제들에서 영활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디다. 조선에서 유명한 역사 유적지 안악 무덤, 듣건대 그곳은 평상시 못 들어가게 규정되어 있다고 합디다. 매년 5월 중순하고 9월, 땅 밑과 땅 위의 온도와 습도가 거의 비슷할 때, 격차가 크게 없을 때만이 문을 연다고 합디다. 하지만 8월 달인데 종합대학 외사부문 책임자가 저에게, 김 선생은 중국동포 학자이고 우리 민족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니 8월이지만 안악 무덤을 견학시켜 주겠다고 합디다. 행운으로 그곳에 가게 되었는데, 먼저 작은 집 안에 들어 간 후 바닥에 설치된 큰 문을 열고 지하도에 들어섭디다. 몇 걸음 내려가니 문이 꽉 닫혀 있었습니다. 안내원이 그 문을 열고 전등을 켠 후 우리가 따라 들어서니 인차 그 문을 닫아놓아요. 또 몇 걸음 걸으니 또 문이 막혀 있어요. 이렇게 지하도 문을 세 개 지나서야 무덤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공기 유통을 가능한 정도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이지요. 이런 엄격하고 완벽한 관리조치의 덕분이겠지요, 무덤안의 유적유물들과 벽화들은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견학시간을 공제하고 사진도 못 찍게 하는데, 이것은 유적유물들을 잘 보존하기 위한 엄격하고도 지당한 조치들이지요.

면담자: 일본에 있을 때 도쿄대학에서 한국 고고학 하는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선생님이 안악 고분 다녀와서 관리를 잘 한다고 칭찬하는 걸 들은 기억이 납니다.

구술자: 이런 걸 보면 역사유적유물 보존에서 확실하게 노력하거든요. 제가 특히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조선의 사회경제력이 좀 약한 편이지만, 민족 역사에 대한 고도의 중시, 그리고 유적유물에 대한 보호관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면담자: 박물관 같은 곳은 어떤가요?

구술자: 조선에 가서 고대사로부터 근대 3·1운동까지 체계적으로 통사수업을 받으면서, 평양과 개성, 함흥 등 지방 도시들에서 역사유적지는 물론,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 등을 꽤 많이 답사, 참관하였지요. 제가 근현대사 전공이니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을 여러 번 참관하였습니다. 대여섯 번 넘게 갔댔는데, 어떤 때는 조선 국내 견학단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외국인들을 전문 대상으로 한 설명과 비교하여 그 내용들이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조선민족이 반일독립투쟁에서의 민족자주성, 특히는 김일성 장군님의 빛나는 항일혁명투쟁역사가 돌출하게 많이 선전합디다.

면담자: 박물관 해설원이 하는 얘기 말씀이시군요.

구술자: 우리 연수생 모두가 이걸 안 달고 다니다나니 외국인이라는 것이 쉽게 알려집니다.

면담자: 북한 사람들 다는 뱃지요.

구술자: 예, 박물관 인원에게 두어 번 발견 되었댔는데, 우리에겐 종합대학의 중국 유학생이라는 증명서를 별도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내원이, 여기에 외국인들이 이렇게 끼어들면 안 된다고 하면, 제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전공수요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인차 흔쾌히 허락해줍디다.

 

협동농장 관리자와 농촌을 논하다


구술자: 그때 우리 단체적인 사회활동 중 다른 하나는 공장이거나 과학기술관 같은 곳들도 참관, 학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우리 모두가 1986년 봄에 태감협동농장이라는 곳에 벼모내기 노동하러 간 일입니다. 듣기에 태감협동농장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중국 북경 교외에 있는 홍성인민공사와 자매결연을 맺은 유명한 농장이어서 해마다 중국유학생들이 이 농장에 와서 벼모내기를 도와준다고 합디다. 아마 지금도 그렇게 할 겁니다. 대사관 분들도 나오고, 벼모내기 마감에 상징적으로 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처음으로 조선 농촌에 일하러 간다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버스에 술, 맥주, 소고기 생회무침, 불고기 등을 푸짐하게 싣고 갔습니다. 벼묘를 기르던 작은 면적의 모상판에 마감으로 벼모내기를 하였는데, 반나절이 못되어 일이 전부 끝났습니다. 자매결연 농장에서의 극히 상징적인 지원노동이지요. 나머지 반나절은 그곳 농장원들과의 즐거운 야외연회와 휴식이었습니다. 논밭머리에 있는 깨끗한 소나무 숲 속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저희들이 가져온 음식과 그곳에서 준비한 막걸리, 여러 가지 음식들이 풍성했습니다. 서로 가까운 여러 곳들에 10명 정도씩 둘러앉아 음식과 술을 들면서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면담자: 교류와 친목이군요.

구술자: 예, 뜻 깊은 교류활동이죠. 그런데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일부 사람들은 저수지에 고기 낚으러 가고 일부는 잔디밭에 누워 휴식할 때, 농장 간부 한분이 저를 찾아 따로 청하는 것이었어요. 50세 후반의 중등 키에 매우 건강해 보이는 분, 그분의 검붉은 얼굴색과 투박한 두 손을 얼핏 보아도 걸찬 농사꾼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오전의 모내기에서 선생의 일솜씨를 보니 농촌 출신인 것 같은데, 따로 가서 술 한 잔 하면서 농사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자는 것입니다. 맥주 몇 병을 들고 가까운 소나무 밑에 가서 마주앉게 되었지요. 참 재미있고 감상 깊게 말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자아소개로 일찍 연변 농촌에서 생산대, 대대, 공사 3급의 농촌공작을 하여 본 경력들을 간단히 말한 후, 오전에 보니 논밭에 사람들이 많으나 진짜 농사꾼은 적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웃으면서, 왜서 그렇게 보게 됐는가고 묻습디다. 제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밟고 다녀서 논둑들이 모두 심하게 내려앉았고 꽂아놓은 벼모들이 너무 고르지 않고 거칠다고 하니까, 그분은 웃으면서 제대로 보았다, 사실 시내에서 많은 중학생들이 근 반 달간 농업지원을 와서 모내기를 하였다, 본지의 농장원들도 일을 참답게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중국농촌에서도 개혁개방 전에 농사일들을 대개 그렇게 했다, 자기 집 앞의 개인터전은 김을 한 벌 매여도 풀이 없지만 집체 밭은 김을 세 번 매여도 잡초가 무성했다, 농가담당제를 실시한 후 개개인의 생산욕구가 분발하여 농업 산량이 배로 높아지고 농촌 노동력이 남아돌아 도시건설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고 말하니, 그 분은 지금 이곳 농장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눈치 보기만 하면서 “벼룩이 뛸 사이라도 놀려고 한다.” 자기도 중국 홍성인민공사에 네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중국 농촌처럼 하면 여기 농장 노동력 절반이라도 농사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면담자: 그 분은 간부이신 거죠?

구술자: 태감협동농장 책임자지요. 단 둘이 마주앉아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다나니 그만 그렇게 말하게 된 겁니다. 그날 이 분의 매우 진솔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으면서, 저는 조선 농촌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어떤 개혁변화가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7952" align="aligncenter" width="567"]<사진2> 면담자와 구술자(2018년 9월) [/caption]

구술자: 제가 언뜩언뜩 떠오르는 회억들을 간단히 더듬어가면서 두서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하긴 사전 준비도 없이 이렇게 짧은 두어 시간 내에 30여 년 전 조선연수 1년간의 생활과 감상체득 등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정연하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한담으로 한 가벼운 이야기로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간단하고 가벼운 상황소개나 일부 견문에 관한 이야기들만 하고 조선역사에 관한 학술문제 같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말하여 그 모든 것을 전부 회고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면 한권의 두터운 책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년간의 평양 연수생활은 저의 생애에서 극히 귀중하고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두서없이 한 이야기들을 가벼운 한담 그대로 이해해 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