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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중국 연변대학 김성호 님①> 김일성종합대학과 인민대학습당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다_홍종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3.22 BoardLang.text_hits 25,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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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중국 연변대학 김성호 님①> 김일성종합대학과 인민대학습당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다홍종욱(근대사분과)
구술자: 김성호(金成鎬, 연변대학 교수)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김인수(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 면담일: 2018.9.8. / 면담장소: 연변대학 김성호 교수 연구실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 정리: 홍종욱 [caption id="attachment_7889" align="aligncenter" width="481"][사진1 ] 평양 유학 시절 대성산 혁명열사릉에서 [/caption] 중국정부 파견 평양연수단에 선발되다면담자: 평양에 가서 공부하신 것부터 좀 여쭙겠습니다. 몇 년 몇 월부터 몇 년 몇 월까지 계셨던 거죠? 구술자: 85년 8월부터 86년 8월까지 1년간입니다. 면담자: 그때 연변대학 전임교원이셨던 건가요? 구술자: 네. 1977년 8월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 역사계를 졸업하고 연변 도문시 석현종이공장 자제중학교에서 1년간 역사교원을 하다가, 1978년 8월 왕청현 백초구향정부에 조동되여 1년간 지방간부로 공작, 1979년 연변대학에서 처음으로 모집하는 석사연구생(대학원생-면담자)으로 들어왔습니다. 3년간 석사학위공부 끝내고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 역사연구실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조선문제연구소 규모가 커서 사람이 많을 때는 2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조선역사, 경제, 철학 등 몇 개의 연구실이 있었댔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중국의 연구학계에 상당한 규모의 조선문제연구소가 길림성 사회과학원과 연변대학 두 곳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중국의 대학교들에 조선학, 한국학 연구소들이 매우 많이 있지만, 대개는 이름만 있고 전직인원은 한둘씩 밖에 없는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저는 연구소 역사연구실에서 조리연구원으로 있다가 조선연수가 있다고 하여 조선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 공부하려 가게 되었습니다. 면담자: 연변대학에 오신 건 언제죠? 구술자: 79년도 9월달입니다. 82년도 석사연구생 졸업한 다음에 연변대 조선문제연구소 역사연구실에 남아 있다가, 조선역사와 조선학은 적어도 한번쯤은 반드시 본국 현장에서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고 조선연수를 신청한 거죠. 면담자: 평양유학생 선발은 어떻게 하는가요? 그냥 추천인가요? 구술자: 그거는 어떻게 됐냐 하면 국가에서 매년 조선유학이나 연수생을 산동성에 몇 명, 북경에 몇 명, 이런 식으로 연변에도 해당 명액을 나누어 주거든요. 저희 연변대학에 2명의 명액이 하달되여 학교영도에서 역사학과와 조선문학과에서 가면 좋겠다고 결정하고 학과에서 선출한 것이지요. 우선 본인이 신청해야 되고. 그래 조직심사를 다 거쳐서. 그때는 심사가 엄격하고 복잡할 때입니다. 뭐 계급성분, 가정출신, 주요하게는 본인의 품성과 학문태도 등이 어떤가, 이런 거 다 심사 거쳐서 결정되거든요. 면담자: 평양유학은 계속 있던 제도인가요? 구술자: 그전 50년대부터 중국유학생들이 조선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저의 석사학위 지도 선생님은 58년도인가 조선유학을 다녀왔지요. 이곳 연변대학에서 제가 석사 공부할 때 지도교수인 김광수 교수. 그러니까 그분은 연변대 역사계 졸업하고 50년대 말에 이미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거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전부터 이렇게 종종 다녔습니다.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국가협의에 근거해서 서로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우리가 갈 때도 중국이 개혁개방을 금방 시작해서 외국유학 가기가 상당히 쉽지 않을 때이고 유학생도 매우 적을 때입니다. 그해 조선에 연수 가는 우리 팀은 모두 17명이였습니다. 면담자: 중국전역에서 열일곱 명이군요. 조선으로 나가는 거니까 조선족이 몇 분 계셨겠네요. 구술자: 약 절반 넘게 조선족이고, 나머지는 한족 등 기타 민족들이였는데 그분들은 모두 조선말과 글을 대개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모두 조선학과 관계된 각 대학교 학과의 교원들이나 학술연구기관의 연구인원, 그리고 방송국과 외사부문 등 정부기관의 간부들이였습니다. 모두 재직 중에 있는 교원이나 연구원, 간부들로 구성되어, 나이 어리고 보다 단순한 유학생이 아닌 연수인원들이었습니다. 구술자: 저희 연변대학에 둘이, 그러니까 역사에서 제가 가고, 조문학부에서 리해산 교수가 가게 되었는데, 이 분은 십여 년 전에 이미 사망하셨는데, 지금 생존했으면 80대 후반입니다. 면담자: 많이 선배셨군요. 구술자: 그분은 그때 이미 부교수였는데, 중국의 역사명작 <<홍루몽>>을 조선말로 번역, 출판한 분이지요. 면담자: 《홍루몽》을 번역하신 분이군요. 구술자: 네, 연변대학에서 그분하고 제가 가게 되었고,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에서 4명, 중앙 조선말방송국에서 둘, 길림성 사회과학원 조선문제연구소에서 2명, 조선관련 외사(外事)계통에서 2명, 요녕성 사회과학원정보연구소에서 한명, 길림대학, 북경 경제대학 등 기타 대학들에서 각기 한 명 등 모두 17명이었습니다. 길림성 사회과학원의 장영, 상제생, 요녕성 사회과학원의 홍정철, 중앙 조선말방송국에서 온 장문천 등은 연세가 비교적 많은 분들인데, 장문천 선생은 일찍 중국의 후야오방(胡耀邦)총서기가 조선을 방문할 때 수행기자로 따라가서 김일성주석을 직접 만나 뵌 적이 있는 분인데, 김 주석이 사석담화에서 매우 유창한 한어(漢語)로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은 분이거든요. 하여튼 모두 열일곱 명이 북경에 모였댔습니다. 철저한 유학생 사전교육구술자: 그땐 중국이 개혁개방초기여서 외국에 가는 유학생이 지금처럼 많지 않을 때이니까 국가에서 상당히 중시했는데, 그해 7월에 교육부에서 북경에 학습반을 조직해 가지고 국가파견 유학생들과 연수생들에게 사전교육을 했댔습니다. 미국에 가는 사람, 일본에 가는 사람 등 꽤 많이 모였는데, 외국에 유학하면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된다, 특히는 국가존엄을 어떻게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건강을 지키고 전업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등 이런 걸 교육합디다. 그때 부유한 국가들에 간 유학생 중 개별적인 사람은 전업공부를 잘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면서 돈벌이에 열중하는 현상도 일부 있었다고 합디다. 그때 인상이 특히 깊은 건, 미국에 간 한 유학생이 국가에서 유학공부에 제공한 달러를 절약하느라고 병들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좀 더 절약하느라고 식량도 애완견 식품상점에서 사고. 그땐 이메일이나 그런 게 없으니까 편지로 서로 통하는데, 나중에 그의 뜻밖의 사망원인 조사에서 그 부인이 보낸 편지를 보니까 돈 절약에 대해 그렇게 심하게 요구했다고 합디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지금 비교적 낙후하고 가난한데, 외국유학에서 여러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들, 자기의 인간적 존엄과 조국의 존엄을 잘 지켜야 하며 국가의 큰 신임과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전업공부를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것 등이 주요한 내용들이지요. 면담자: 시대적 분위기랄까, 나라의 지원을 받고 외국에 공부하러 가는 사명감이랄까, 그런 게 느껴지는군요. 구술자: 네. 그렇지요. 전체 유학생들의 대회교육과 토론이 며칠간 있은 다음, 미국에 가는 유학생, 일본에 가는 유학생 등 각 나라별 분조로 나뉘어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조선에 가는 우리 열일곱은 따로 모아 1주일간 학습하였습니다. 전체교육보다 분조별 교육이 더욱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여러 가지 특성, 예하면 풍속습관,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등, 이런 것들을 교육부 간부들이 나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이미 유학 갔다 온 선배들이 몇 명 와서 자기의 유학경험들을 재미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만리장성 등 북경의 역사유적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중남해(中南海)에 들어가 모택동 주석의 서재, 침실과 화장실까지 돌아보았습니다. 당시 특히 인상이 깊은 것은 모주석의 큰 서재에 중국의 고서들이 매우 많았고 침실이 너무나도 소박했으며 그분의 낡은 잠옷에 천으로 기운 자리가 여러 곳인 것이 매우 놀라왔습니다. 면담자: 조선 그러니까 북한에 가서 주의할 점 같은 건 무슨 이야기가 주로 있었나요? 구술자: 조선 유학 갔다 온 사람, 교육부 사람 총체적으로 말하는 게, 조선은 분단국가로서 정치 경각성이 높고 경제가 좀 약한 편이지만 민족 자존심이 특히 강한 나라다, 국가 영수를 특별히 숭배하는 나라이다 등이지요. 중국에서 그때 이미 모 주석 개인숭배 같은 것이 많이 사라질 때거든요, 모 주석 동상까지 막 철거하고. 그런 정황에서 조선은 개인숭배, 영수숭배가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가 이 특수성을 이해하고 절대 존중해주어야 된다, 절대로 불손한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예를 들면 영수 초상을 가리킬 때 중국 사람들은 대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조선에서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된다, 중조 두 나라는 혈맹관계인데 우리는 그 친선관계를 특히 중요시해야 하며 그것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들끼리나 중국대사관에서는 너희가 어떻게 말해도 괜찮지만, 조선 동지들을 절대로 존중하고 그들의 감정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말라, 연수를 가거나 유학가거나 간에 신분은 어쨌건 중국 사람이니까, 너의 한사람 말이 아니라 중국사람 말이 되니 특히 주의하라, 조선이 우리보다 나라가 작고 국력이 약하며 경제발전도 조금 차이가 있으니 대국주의적 언행을 특히 삼가하라, 조선의 모든 우점을 참답게 배우고 전업지식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등, 주로 이런 내용들이지요. 한마디로 간략하면, 중조친선을 특히 소중히 여기고 언행을 조심하며 유학생이나 연구생이나 모두 조선의 우점들을 허심하게 잘 배워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면담자: 생활수준 차이가 많았나요? 구술자: 그때 각 나라 분조별로 학습하는데, 우리 분조에서 교육부 간부 말이 총체적으로 조선이 지금 경제적으로 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격차가 크게 없을 때거든요. 당시 제가 놀랍게 들은 것은, 조선의 상품질량이 좋지 않으니 세수비누, 빨래비누, 편지지, 봉투, 만년필 잉크 등 일용품까지 될수록 모두 다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담배도 좋지 않다고 하여 저는 종이에 말아 피우는 좋은 초담배를 10킬로그람이나 사서 제일 큰 트렁크 하나에 채워 넣어 가지고 갔댔습니다. 어떤 분들은 권련을 20보루, 30보루 이상 가지고 갔지만, 선물까지 주고 나니까 2, 3개월만에 담배가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마감에는 저의 초담배가 공동용으로 오랫동안 피웠습니다. 한 유학생 선배는 바퀴벌레약까지 가지고 가라고 하여 가지고 갔댔는데, 숙소에 바퀴벌레가 없어 귀국할 때 조선분들에게 남겨두고 왔댔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내용의 집중교육들을 반 달간 받은 후 우리 일행 17명은 연수생 신분으로 1년간 조선유학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에게 한국사강의를 듣다면담자: 평양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계신건가요? 구술자: 네. 저희 17명 모두가 종합대학에서 연수하게 되었는데, 제가 들어간 건 역사학부고, 리해산 선생은 조문계니까 조문학부에 가고. 내 전공은 조선 근현대사이니, 강의는 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들을 배치합디다. 조선고대사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 통사식으로 강의를 받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어떤 때는 2, 3시간, 어떤 때는 반나절씩, 1대 1로 마주앉아 강의를 받았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교수가 저에게 참고서적 목록들을 제시해주었습니다. 나머지 많은 시간은 교수가 제기한 참고서적들을 읽고 다음 강의시간에 교수님을 만나 자신의 이해와 의혹되는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함께 토론하곤 하였습니다. 면담자: 일대일 수업이군요. 구술자: 저에게 강의를 제일 많이 한 분은 종합대학 역사학부 강좌장 김길신 교수님이었습니다. 10여 년 전에 이미 사망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분에게 원래 간염이 있다는 것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고 제가 귀국 후에도 평양행 인편에 간염약을 두어 번 보낸 적이 있지만 그 분이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습니다. 아마 60대 초반에 사망됐을 것입니다. 1990년 전후시기에 김 선생님이 저희 연변대학 국제학술회의에 한번 오셨을 때 저의 집에 모시고 저녁 식사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 분은 조선유학에서 저에게 학술교육과 상호교류가 제일 많았고 가장 인상 깊은 훌륭한 교수님으로서 정녕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유학 당시, 그 분은 저에게 일대일 수업을 하다가 간혹 "수업시간이 너무 길어 매우 피곤하고 오늘 날씨도 좋은데 같이 산보하면서 토론하자"고 하시면서 함께 밖으로 나와 종합대학의 정갈한 정원과 나무숲 길을 함께 걸으면서 학술문제를 토론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연수는 주로 일대일 수업과 토론, 역사답사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1년 동안 공개된 학술회의에 참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면담자: 강의내용이나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강의자체는 공개된 책 내용 그대로 할 수밖에 없죠. 조선역사체계 전부를 강의 받으면서 여러 가지 배운 게 많지만, 솔직히 말하면 강의내용은 기본상에서 제가 중국에서 이미 공부했던 조선역사교과서와 거의 같았어요. 면담자: 85년이면 《조선전사》 나온 직후네요. 80년 전후해서 33권인가 《조선전사》가 나왔으니까요. 구술자: 별로 특수하게 다른 게 없었어요. 주로 김길신 선생님이 강의를 많이 했는데, 후에 뭐 관계가 가까우니까 스스럼없이 말씀하시는데, 지금 조선학계의 시각은 대개 이렇게 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조금 어떻다는 그런 식이지요. 후에 제가 한국에서 5년간 박사학위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 돌이켜보고 대체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전체 조선반도 역사서술에서 총체적인 학술연구 체계 수립에서는 북측 역사학계가 보다 우세이고, 역사 각 시기, 각 부분의 분산적이고 개체적이며 또한 구체적인 문제 연구들에서는 남측 역사학계가 보다 심도가 깊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도 남북간 서로 다른 사회체계 현실이 역사학 연구에 끼친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면담자: 그렇군요, 혹시 김석형 선생님은 뵈신 적 없나요? 구술자: 못 만나 뵀습니다. 면담자: 그때는 김대(金大)에 안계셨나요? 구술자: 사회과학원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면담자: 그러니까 80년대 계실 때는 사회과학원에 가실 일은 없으셨나 보네요. 구술자: 당시 사회과학원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마음대로 못 다녔습니다. 평양 시내 구경과 백화상점 같은 곳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지만, 학술기관 방문이나 강의담당 교수들의 가정방문 같은 것은 반드시 종합대학 외사부문의 비준이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종합대학 역사학부 사무실에도 두 번밖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면담자: 역사학부면 학부생도 있고, 연구생이라고 하는 대학원생들도 있겠군요. 구술자: 연구생들도 있다고 합디다. 저는 역사학부 학부생과 연구생들의 학술활동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조직적으로 기본상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강의담당 교수님들과 일대일로 만나 수업을 받고 함께 토론하고 간혹 함께 역사유적을 답사 다니곤 하였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은 자기 숙소나 도서관에서 홀로 자기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지요. 면담자: 아, 그렇군요. 구술자: 당시 역사학부 학부장은 최영식 교수님인데, 제가 한번은 그 분을 찾아 홀로 사무실에 간 적이 있어요. 면담자: 역사학부 사무실이요? 구술자: 예. 종합대학에서 제일 높고 큰 청사가 있잖아요. 그 위층에 무슨 이야기하러 찾아 올라갔는데, 그 분이 놀라면서 “아, 선생님, 이렇게 마음대로 찾아다니면 안 됩니다.”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역사학부 사무실을 모두 두 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두 번 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마음대로 찾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면담자: 그럼 주로 기숙사에 계시고 강의실 가시고. 구술자: 그러니까 우리의 주요한 활동범위가 기숙사에 있었고, 1주일에 두 번, 세 번씩 학부내의 규정된 교실에서 강의담당 교수님과 일대일로 마주앉아 수업을 받고 함께 토론하고 나머지 시간은 숙소에서 책을 보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는 것이지요. [caption id="attachment_7890" align="aligncenter" width="539"][사진2 ] 왼쪽부터 최영식(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장), 구술자, 김길신(동 강좌장) [/caption]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뵌 박시형 선생구술자: 종합대학 도서관부터 먼저 찾았거든요. 박시형 선생님도 우연히 만났던 거죠. 면담자: 도서관에서 우연히요? 구술자: 그렇죠, 그분은 그때 종합대학도서관 3층이던가, 거기에 아담한 연구실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몇 번 찾아뵙고 간단히 말을 나눈 적이 있었어요. 한번은 그분이 나에게 자기의 저서 두 권을 낡은 신문지에 감싸서 줍디다. 제가 가방을 가지고 왔으니 책을 별도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그 분의 말씀이, 이 책의 종이가 너무 좋지 않아서 외국인에게 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렇게 책을 감싸서 드리는데 남이 보면 좋지 않다, 혼자 조용히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 분의 인자하신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긴 당시 조선의 일반적인 편지지도 잉크가 피어날 정도로 질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면담자: 박시형 선생님하고는 공부이야기도 좀 나누셨습니까? 구술자: 네. 그분하고 몇 번 만나서 간단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역사문제도 담론하였는데, 그 분의 연구 분야는 주로 고대사이고 저의 공부분야는 근현대사이기 때문에 긴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속으로부터 그 분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박 선생님께서 여기(연변-면담자) 학술회의에 오셨을 때 제가 그 분을 모시고 동경성 발해유적지, 집안 고구려유적지, 그리고 심양까지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진정 인자하시고 박식하시고 마음속으로 진정 존경스러운 학자분이였습니다. 면담자: 종합대학 도서관은 어떻습니까. 구술자: 도서관은 매우 크고 훌륭한데, 공개된 책들이 그리 많지 않아요. 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제가 그때가지 읽지 못한 전업 책, 저에게 반드시 필요한 전업서적 목록들을 단 반나절에 다 찾아 기록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도서관 안내원에게 “조선의 제일 큰 대학인데 왜서 책이 이렇게까지 적은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어요. 저는 길림대학이나 연변대학 도서관들에 장서가 어느 정도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의 대략적인 인상으로 말하면 저희 연변대학 도서관보다도 장서가 적은 것 같았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전쟁 때 많은 책들이 분실됐다, 조선의 근대 신문도 완전한 것이 단 한부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도서관 저켠의 한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조용히 들려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저도 도서관에서 여러 번 만나 책을 대출받은 적이 있는데, 매우 인자하시고 봉사태도가 그렇게도 친절하고 자상한 분이였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그 할머니의 집은 원래 농촌에 있었답니다. 일제통치시대부터 그 할머니의 부친은 당시의 신문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두 모아뒀다고 합니다. 전쟁 때 평양 등 도시들이 폭격 받으면서 국가 문화기관들에 보관되었던 도서들이 거의 다 분실되고 말았는데, 유독 농촌에 있은 그 할머니 집에 보관된 신문들이 전부 그대로 있었대요. 전쟁이 끝난 후 이집에서 이 신문들을 전부 국가에 기증하였답니다. 김일성주석이 이 소식을 듣고 문화유산을 이렇게 잘 보존한 것은 대단한 공로다, 반드시 우대해줘야 한다, 그래서 특혜로 농촌에 있는 그 딸을 종합대학 도서관에 데려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면담자: 취직을 시켜준 거군요. 구술자: 예. 종합대학에. 이렇게 해방 전 신문들, 전쟁 전 신문들이 종합대학에 단 한부라도 완전하게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가 길림대학에서 못 보고 연변대학에서 못 찾은 유관자료가 종합대학도서관에서 별로 찾지 못했습니다. 책이 확실히 적었습니다. 실망이 적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에서 연세 많은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대학생으로 역사공부를 하다가 조선전쟁에 참가, 전쟁 후 문화부문에서 일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말이 자기도 역사공부를 즐기는데, 역사자료가 매우 적다, 연구하기 정말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면담자: 일본어 자료 같은 것도 좀 있었나요? 구술자: 역사학부 학생에게 공개된 학과열람실에 일어책이, 85년도 9월달에 내가 본건 일본어 책이 네 권밖에 없었어요. 면담자: 네 권이 혹시 무슨 책인지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다 일본 측에서 김일성장군의 항일투쟁사를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김길신 교수님께 이곳에 공개된 자료 상황이 매우 실망스럽다, 일본이 35년간 조선을 독점식민지로 통치하였는데, 이렇게 빈약한 자료상황에서 학술연구는 어떻게 하는가라고 문의하니까, 김 선생님 말씀이 이건 학생용으로 간단히 개방한 것이고 교수들 내부 그러니까 교원 참고자료들은 따로 보존되어 있다, 여하튼 종합대학엔 역사자료가 비교적 적으니깐 종합대학 교수들도 인민대학습당에 가서 역사자료와 참고서적들을 읽는다, 내가 그곳에 있는 유관 역사자료 목록들을 대략 적어주겠으니 인민대학습당에 가서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85년 말부터 주로 인민대학습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대단한 곳이고 장서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인민대학습당에서 일본자료를 접하다구술자: 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제가 중국에서 못 찾아본 얼마 안 되는 책들을 대략 읽은 후부터 인민대학습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종합대학 기숙사에서 지하철 몇 정거장 타면 되는 거리였습니다. 우리는 외국인 연수증서가 있으니까 무료로 지하철을 탈 수 있었습니다. 제가 평양에서의 1년 연수기간 실제로 역사책과 자료들을 많이 접한 곳이 바로 인민대학습당입니다. 면담자: 김일성광장에 있는 거죠? 구술자: 예, 평양에서 유명한 대표적 건물입니다. 민족특색이 짙고 아주 멋있게 지은 건물입니다. 제가 다니던 인민대학습당의 유네스코 도서실은 3층으로서 김일성광장 주석단 뒤편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매우 크고 깨끗하며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한두 명의 안내원이 있고 어떤 때는 제 혼자 거기서 책을 보거든요. 환한 대낮에도 60여개의 전등이 켜져 있어 매우 미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전등을 켜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러 번 건의하였지만, 안내원들은 외국의 학자분들인데 반드시 전등을 켜 드려야 한다고 합디다. 그곳의 환경조건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서실에 도서목록기록이 없고 우리는 장서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의하는 교수님들에게 자료목록들을 받아 안내원에게 주면 책을 가져다 주지요. 거기서 책을 보게 하는데, 제가 매일이다시피 찾아다니니 얼마 후에는 일반적인 책은 빌려가서 숙소에서 읽으라고 합디다. 한번에 5, 6권씩 빌려 며칠간 기숙사에서 읽은 적도 있습니다. 인민대학당 장서실에 들어간 본적은 없어도, 그곳엔 역사자료가 매우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제출하는 자료목록들은 대개 종합대학 역사학부의 강의담당 교수님들이 알려준 것들인데, 교수님들은 우리 종합대학에는 역사자료가 적은데 어느 어느 책은 대학습당에 있다고 하면서 도서목록들을 적어주거든요. 어떤 때는 도서실 안내원에게 도서목록을 제출하면, 이 도서를 찾는 사람들이 매우 적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종합대학 강의담당 교수님들이 알려준 것이라고 말하면, 두말없이 가져다주곤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도서목록을 똑똑히 알지 못하고 수요되는 책의 상관 내용들을 대략 이야기하면 안내원들이 상관된 책들을 찾아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들의 봉사태도는 매우 친절하고 책임감이 아주 강했습니다. 매우 많이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진정 고마운 마음에 제가 그분들에게 녹태를 선물로 드렸댔습니다. 녹태라는 게 잉태된 사슴새끼를 어떻게 고아가지고 만든 거라고 하던데, 특히 여성들의 냉병에 좋다고 합디다. 듣기로는 조선여성들이 냉병이 보다 많다고 합디다. 추운 겨울에도 치마를 입고 비닐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니 몸이 냉하다고 합디다. 그 녹태가 성냥갑보다 조금 더 큰데, 당시 중국에서의 시가가 5원씩 했어요. 우리 연수생 일부는 그걸 얼마간 가져갔거든요. 면담자: 녹태를 재료원에게 선물하셨군요. 구술자: 네. 재료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인차 꼭꼭 가져다주어 실로 고마웠습니다. 녹태 선물이 상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평양시의 구역마다 책방이 많았는데, 여기 말로 하면 서점이죠. 책방에 책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서구매에서 하나의 특점은 바로 자기가 사서 본 책들을 서점에 다시 판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돌아온 낡은 책들 중에 간혹 필요한 전업서적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규모가 비교적 큰 네 개 책방에 자주 다녔는데, 조용할 때 봉사원에게 녹태를 선물로 드리면서 특별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연수생이라는 신분을 밝히고 책방에 너무 자주는 찾아올 수 없으니 구매된 낡은 책들, 특히는 역사와 철학, 정치 등 방면의 책들을 따로 보관해 둘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후 보름에 한번이나 한 달에 한 번씩 그 책방을 찾아가면 제가 요구했던 책들을 따로 보관했다가 꺼내주는 것이지요. 정말로 고맙지요. 조선 책이 매우 싸고, 또 비싸도 우리는 당시 조선돈은 많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여러모로 애써 노력한 결과, 귀국할 때 조선 책을 10여 상자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면담자: 그러셨군요. 인민대학습당에서 보신 자료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지요. 구술자: 인민대학습당에서 읽은 재료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처음으로 접하고 놀랐던 게 『조선 산업지』 같은 책들이지요. 일본사람들이 1909년도 바로 “일한합병” 1년 전에 벌써 조선반도를 그처럼 자세하게 조사하고 『조선 산업지』라는 책을 출판한 것을 보고 진정 놀랐어요. 면담자: 아무래도 식민통치를 하려면 조사를 해야 됐겠죠. 구술자: 그들이 심지어는 어느 마을에 과수 몇 그루, 닭 몇 마리까지 적어 놓은 거 보니까, 그 정도까지 조사하고 정리한 것을 보면, 일본사람들의 일 처리가 그렇게까지 깐깐하고 섬세한 데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언젠가 저희 박사생반에 용정시의 책임간부 한명이 있었는데, 제가 일제의 조선식민통치 특성을 강의하면서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어요. 지금 용정시에 속한 여러 진장, 향장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시험을 한번 치러보라. 자기들이 각기 영도하는 진과 향(한국으로 말하면 면에 해당함)의 토지면적, 산림면적, 인구구성, 경제수입 등을 구체적인 숫자로 대답하게 해보라, 책임감이 없고 마음속에 구체적인 숫자가 없이 정치원론만을 크게 떠들면서 쉽게 일하는 간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일제침략사의 죄행은 반드시 청산해야 하겠지만 일본사람들의 치밀한 일 자세, 극히 분명한 숫자 개념만은 반드시 따라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중국에서 보지 못한 많은 새로운 역사자료들을 대학습당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면담자: 여러 가지 자료를 보셨겠지만 역시 조선에 남아 있는 거니까,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조사 자료라든가 이런 걸 많이 보셨겠네요. 구술자: 그렇죠. 그건 다 인민대학습당에 있었어요. 우리 연수팀에서 제가 대학습당에 제일 많이 다녔어요. 그곳 도서실 얘기로는 선생 혼자 본 책 목록이 나머지 열여섯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긴 적지 않은 책들은 제가 자기 필요에 따라 목록과 서언, 결론들만을 간단히 보고 되돌려 주기도 했으니깐. 여하튼 될수록 많은 책들을 보려고 노력하였댔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재료도 거기서 본 겁니다. 챈텐샤광(千田夏光, 센다가코)이 쓴 책도 그곳에서 읽었습니다. 이에 기초하여 1987년 제가 중국에서 제일 처음 공개문장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폭로, 비판하였댔습니다. 「피눈물의 력사공소 — 종군위안부 — 일본황군의 추악상과 백의녀성들의 피눈물」이라는 제목으로 7편의 문장, 8만여 자가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의 『은하수(银河)』 잡지에 연재되었는데, 당시 상당한 사회반응을 일으켰댔습니다. 이 글은 나중에 책과 신문들에 3번 재출판 되었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