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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④] 기록으로 남지 못한 사람들 ‘재북일본인’_김태윤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3.19 BoardLang.text_hits 25,201
[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기록으로 남지 못한 사람들 ‘재북일본인’


 

김태윤(현대사분과) 


 

해방과 귀환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는 해방의 기쁨이 만연했다. 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소식을 듣고도 기뻐할 수 없는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일제시기 조선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던 ‘재조일본인’이었다.

“좌우간 이제야 달라졌으니까. 지배민족이 됐으니까. 우린 지배하는 사람들이 됐고 지배하는 사람들이 돼 삐렸으니까.”

위의 인용구는 해방 직후 북한지역 일본인들의 상황을 서술한 비전향 장기수 김석형의 구술이다. 인용구에 나온 단어처럼 재조일본인들은 한순간에 ‘지배자’에서 ‘피지배자’가 되었고, 그들의 본국인 일본으로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지역에 잔류했던 일본인들의 귀환과정은 주로 ‘탈출’이나 ‘고난’으로 표현된다. 물론 대부분의 재조일본인들의 귀환과정은 힘들었지만, 남한에 잔류했던 일본인들이 계획아래 순차적으로 송환된 반면 북한에 잔류한 일본인들은 ‘억류’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귀환과정은 순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caption id="attachment_7881" align="aligncenter" width="296"]어선으로 귀환하는 일본인들(1945년 10월)[/caption]

일본인들의 본국에서의 삶은 귀환과정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히기아게샤(引揚者)’로 불리며 본토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거나 식량문제를 가중시키는 집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생활의 터전이었던 조선에서는 침략자로서 평가받았고, 본국에 돌아가서는 민폐집단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물론 일부 기득권을 가진 인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히기아게샤(引揚者)’들이 본토인 일본에서 힘든 삶은 살았던 것은 공통적이지만, 북한지역에서 귀환한 일본인들의 경우 상황은 더욱 좋지 못했다.

 

재북일본인들이 남긴 기록 『朝鮮終戰の記錄』


재북일본인들의 귀환과정이 재남일본인들보다 어려웠다는 점은 남한에서 잔류했던 일본인들보다 재북일본인들의 기록의 양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재북일본인들의 기록이 적은 이유는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먼저 재북일본인들이 생활했던 북한지역의 경우 관찬사료나 당시 기관지 등에서는 일본인들을 ‘청산’의 대상으로만 서술였고, 어떤 심판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귀환과정이나 적산처리문제, 생활문제 등은 모두 ‘과거청산’이라는 명분아래 지워진 역사가 되었다. 두 번째로는 북한에서 귀환한 일본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한에서 귀환한 일본인들의 경우에는 북한에서 귀환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데올로기적 의심으로부터 늘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테크노크라트집단의 경우 이 의심의 정도가 더욱 심했는데, 그 이유는 북한에서 받았던 ‘우대’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게 된다. ‘청산’과 ‘우대’는 엄연히 상호반대되는 표현이며 공존할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산의 대상과 우대의 대상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록이 없다시피 한 재북일본인 그룹도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인양사업의 결과로 그들의 회고를 조금씩 남길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리타요시오(森田芳夫)의 『朝鮮終戰の記錄』(조선종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caption id="attachment_7882" align="aligncenter" width="182"]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東京: 巖南堂書店. 1965).[/caption]

모리타요시오는 해방 이후 1946년 3월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경성일본인세화회에서, 귀환 직후에는 재외동포원호회 규슈지부, 조선인 영등포세화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49년에는 후생성 하부기관이었던 인양원호청 총무과, 1950년에는 외무성 조사과에서 귀환일본인 조사를 담당했다. 그는 귀환과 원호사업관련 일을 하면서 평생동안 한·일간 귀환자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자료로 생산했는데, 1947년부터 3년간 한반도에서 돌아온 일본인들을 상대로 구술 채록을 진행하였다. 이 자료집에는 남한과 북한지역 일본인들이 잔류하던 시기의 생활과 귀환과정이 담겨 있으며,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 잔류했던 일본인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

다만, 이들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면 해방 이후 약 2-3년의 기간동안 받은 ‘피해’의 기록이 상당하다. 북한과 소련에 의해 물질적·정신적·신체적 피해가 실제로 존재하긴 했지만, 이들의 구술과 회고가 이렇게 ‘피해자’처럼 서술된 이유에는 앞서 언급했던 본국으로의 귀환 이후 일본사회에서 받았던 차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본의 국민이기도 했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해’를 했던 집단이었다. 일본인들의 해방 직후 기록을 읽을 때, 이들의 기억 속에 맹목적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사실을 주지한 채 접근해야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청산’의 대상이면서 ‘우대’의 대상이 되었을까? 『朝鮮終戰の記錄』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다수의 ‘악질전직범죄자’와 소수의 ‘일본인기술자’


해방 직후 ‘일제청산’은 남북을 막론하고 국가건설 최대의 과제였으며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안이었다. 북의 김일성 또한 여러 연설에서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의 경제성장의 핵심은 중공업이었고, 북한지역 각 중공업 공장들의 기계와 설비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즉,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려면 일본인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고, 당시 북한은 극심한 기술자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의 기술자라도 더 확보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북한 행정부는 재북일본인 기술자를 활용하기 위한 정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일제청산이라는 국가과제도 해결해야했다.

위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재북일본인들은 ‘청산’의 대상이자 ‘활용’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때 활용의 대상이 된 집단은 철저하게 ‘기술자들’이었다. 해방 직후 남겨져서 활용된 일본인들은 더 이상 수용소에 갇혀 굶고 병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본인이 일한 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본인이 노력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술자가 아닌 나머지 재북일본인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북한에서의 귀환과정을 ‘고난기’나 ‘탈출’로 표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기술자로 북한에서 우대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당시 북한 행정부가 기술자와 그렇지 않은 일본인들을 얼마나 차별적으로 대우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북일본인들의 당시 회고는 피해자적 서술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감정이 섞여있는 당시 생활상을 비교하기 보다는 그나마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법적테두리안에서 비교해보도록 하자.

우선 해방 직후 기술자를 제외한 많은 재북일본인들은 <악질전직죄>라는 죄목으로 여러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악질전직죄>가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악질전직죄>로 재판을 받았던 일본인들의 당시 반응 대체로 아래와 같았다.

“나의 죄명은 처음 "반역"으로 나타났다.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무엇 때문에 반역입니까?"라고 항의하자, "반동"로 바꾸어 "전직죄"라고 하는 기묘한 죄목으로 검찰에 넘기고고 담당관이 위에 "악질"의 두 글자를 붙였다. 사법관과 경찰관, 교도관은 모두 "악질 전직"이란다. 아무런 처벌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없던 나는 어떤 기소를 하는지 관심을 갖고 기다리다 나의 학력에서 이력서전부를 다 쓰지 않았다 "오른쪽 재직 중, 조선인 사상가, 혁명가를 엄벌한 것"이라고 한 데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증거를 제시" 하라고 하면 증거는 대지 않고 판사가 증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여 손댈 수가 없다. “전직죄"라는 정치범은 모두 이런 종류였다.

이처럼 일본인에게 가해진 “전직죄”는 정확한 기소의 이유도 없었고 마땅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시기 기관에서 근무한 일본인들이면 그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전직죄로 처벌하였고, 이것은 일본기업, 은행 등에서 일한 일본인들에게 광범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재판의 형태는 “죄에서 기인한 처벌”을 내리기 위한 재판이라기보다는 “처벌을 위한 처벌”이었고, 일본인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보복성 처벌을 당했다”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악질전직죄>자체가 기존 법규에 없는 죄목이 붙여진 것이 많았고 재판은 북한 전반에서 보면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지역적으로도 황해도에서는 일본인을 1946년 봄까지 거의 석방했지만 평안도에서는 소련군에서 체포하지 않았던 사람 또는 소련군 측에서 이미 무혐의로 석방한 사람들 중 특히 일제시기 사상범들 체포와 관련이 있는 직종의 일본인들을 북한 측에서 다시 체포했다. 이에 부당함을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는데,

“죄는 처음에는 "정치범"이었다가 나중에는 일제시기 관리로서 정당한 직무를 수행한 일까지 범죄로 치부했다. 일본인들이 간혹 내가 왜 잡혀왔는지 알 수 없다라고 물으면 북한의 재판관들은 "우리도 과거 공산주의의 이상과 그 명령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일본의 재판에서는 죄인으로서 긴 형기를 받았다. 그 이유는 우리도 모른 채였다."라고 답하였다.“

위처럼 주장하는 일본인에게 북한에서는 ”우리도 과거에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실만으로 체포되었으니 너희도 체포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부당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악질전직죄>에 대한 판결은 인민재판소 뿐만 아니라 군중재판에서도 이루어졌다. 주로 해방 직후 지역마다 자체적으로 조직된 무장조직들이 진행하는 재판이었는데, 이들은 어떠한 사법적 권리도 없는 자체적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따라서 법규에 따라 재판을 받는 인민재판소의 재판과는 달리 어떠한 규정에도 의하지 않고, 심한 경우 “사형”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군중재판은 “즉결심판”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군중재판에 회부된 일본인들은 거의 모든 경우가 사망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사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동안 북한에서 해방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생활을 유지하며 북한의 국가건설에 영향을 준 일본인들이 바로 기술자그룹이었다. 고급기술수준을 보유하고 있던 이들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조선인 기술자들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일하면 귀환하는 그 순간까지 북한에서 우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경제·생활적으로만 우대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사법적인 면에서도 이전에 살펴봤던 재북일본인들과는 상이한 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재판에 회부되었던 일본인들이 어떻게 석방되었는지 몇 개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선 서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을 지낸 이마이 세지로(今井瀬次郎)는 1945년 9월 6일 “평양시내에 고압의 전류를 흘려 시내를 불태우려했다.”는 혐의로 형사사건에 입건되었는데, 1946년 3월 소련군에 의해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여느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4월 1일 다시 북한 측으로부터 체포를 방해 감옥에 갇혔는데, 감금 이후에 어떠한 재판도 없이 풀려나게 되었다. 이마이 세지로가 풀려난 이유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감옥에서 <북조선산업개발책>을 집필한 뒤에 석방된 것이었다.

다음으로 조선무연탄회사사장이었던 가토 이소이타루(加藤五十造)의 경우에도 해방 직후 1945년 9월 21일 영문도 모른 채 대동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유는 경성에 있던 조선무연탄회사가 8.15이후에 일본에 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10월 27일 무혐의로 풀려났다. 한 달만에 풀려난 셈이었다. 그가 풀려나기 4일 전인 10월 23일, 임시인민위원회 산하에 석탄관리국이 생기면서 관리국장이었던 정익현(鄭益鉉, 전 강원도의 흑연 광산 경영자)이 탄광 경영에 일본인 기술자의 협력이 필요함을 느끼고 가토를 석탄산업에 기술자로 초빙하였고, 석탄국에서 일하게 되자 27일 석방이 된 것이었다.

확실히 앞서 <악질전직죄>로 재판을 받았던 일본인들의 사례와는 큰 차이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일본인들이 “왜 체포되었는지 몰랐다”면, 일본인기술자들의 경우 “왜 갑자기 풀려났는지 모르겠다”라는 증언이 더 많았다. 일본인들의 회고 자체가 피해중심적인 서술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법적 테두리에서 혜택을 받은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는 없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북한에 잔류하는 기간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우대를 받았다. 일본인기술자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들을 공장근처에 따로 마련하였으며, 학생들의 학비는 물론 기술자들의 부모들의 간식비까지 챙겨주었다. 놀라운 것은 김일성이 직접 2백만 엔에 달하는 돈을 재무국에서 차출하여 일본인기술자 자녀들의 학비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방 직후의 사회상은 국가건설기 북한의 모습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일제청산을 강조한 북한은 기술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는 <악질전직죄>라는 명목으로 처벌하여, 일제청산의 사례로써 활용하였다. 반면 국가의 산업발전에 필요했던 기술자들의 경우에는 ‘우대’하며 북한에 자발적으로 잔류할 수 있게 하였다. ‘청산’과 ‘우대’가 공존했던 북한의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해방 직후 북한에 잔류했던 일본인들의 귀환과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종 남한의 친일파청산과 관련한 언급들을 보면 남한에 비해 북한의 친일파청산은 완벽에 가까웠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에서의 일제청산은 국가건설에 필요한 요소는 제외한 채로 진행되었다.

요컨대, 북한의 국가건설과정은 단순히 소련의 주도나 김일성의 리더쉽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여러사건들이 모여 한 시대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요소들이 북한을 건설하는 기초가 되었다. 재북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고향인 일본과 생활의 터전이었던 북한에서 존재만 있을 뿐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피해’와 ‘고난’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