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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김철앙 님②> 최한기 연구와 북한 역사학계의 복고주의 비판_홍종욱 작성자 홍종욱 BoardLang.text_date 2020.03.02 BoardLang.text_hits 4,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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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김철앙 님②> 최한기 연구와 북한 역사학계의 복고주의 비판홍종욱(근대사분과)
구술자: 김철앙(金哲央, 전 조선대학교 교수)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면담일: 2019.2.13. / 면담장소: 도쿄 하치오지(八王子)시 커피숍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 정리: 홍종욱 <『인정(人政)』 발견과 최한기 연구>면담자: 선생님의 최한기(崔漢綺) 연구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처음 최한기 연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무언가요? 구술자: 조선대학교에 오고 나서 조선 사상사에서 이름 높은 사람을 모색했는데, 우연히 발견한 게 최한기가 지은 『인정(人政)』이라는 책입니다. 그것이 한국에도 없고 북한에도 없고 일본에만 있었습니다. 도요분코(東洋文庫)에서 우연히 찾았습니다. 열 권쯤 있었습니다. 그때 누구도 몰랐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7819" align="aligncenter" width="276"]『人政』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caption] 면담자: 도요분코, 동양문고라면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선생님이 계시던 곳이죠? 구술자: 예. 맞습니다. 다가와 선생님이 때때로 오셨습니다. 일본에 여러 문헌이 확실히 북쪽보다 그러니까 공화국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한기에 관해서도 내가 말하기 시작하니까 북쪽 사람이 놀라서, 여기 왔을 때 많이 복사해서 갔죠. 공화국에는 그러한 문헌이 거의 없습니다. 면담자: 평양보다는 아무래도 서울에 많이 있죠. 구술자: 서울보다 일본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많이 수탈해서 왔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도쿄에 있는 도요분코에 조선에 관한 문헌 많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인정』을 발견해서 여러 가지 최한기 소개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최한기는 그리 아는 사람 없었고, 『인정』을 소개한 것도 제가 첫 번째입니다. 면담자: 그게 언제쯤이죠? 구술자: 60년대 초입니다.
<실학파와 개화파의 가교, 최한기>면담자: 최한기 연구를 하실 때 역시 실학의 근대성이라든가 그런 거에 주목하신 거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일본 역사학계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북이나 남에서 나온 연구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하는 게 있을까요? 구술자: 일본의 문헌은 여기 조선사연구회 가면 읽을 수 있었죠. 그러나 사상사에 대해서 그리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인정』이라는 책을 보면 다른 실학과 상당히 다릅니다. 거기에 상당히 많이 풍부한 것이 있으니까 기뻐하고 또 놀랐죠. 한국 사람들도 최한기를 잘 몰랐습니다. 내가 발표한 후에 충격을 받고 직접 도요분코에 와서 보고 복사를 했죠. 오는 사람마다 복사해서 가지고 간 겁니다. 열 권, 열두 권 있습니다. 자료 풍부합니다. 면담자: 최한기의 어떤 점에 주목하셨는지요? 구술자: 내가 처음으로 최한기에 대해 실학파와 개화파를 가교한, 그러니까 다리를 만든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실학파와 개화파의 가교자라고 평가한 거죠. 면담자: 이북에서는 역사학자 김광진에 대해, 개화파 사상이 실학파 사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신 분이라고 높이 평가하던데, 비슷한 문제의식인 거 같습니다. 구술자: 예, 그렇죠. 그런 주장들이 뭐 자연 발생적으로 나온 거죠. 먼저 논문 쓴 사람이 첫 번째 사람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동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죠. 면담자: 그렇죠, 강재언 선생님도 갑신정변이라든가 이런 게 괜히 나온 게 아니고 실학파부터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구술자: 강재언 선생도 내가 우연히 『인정』이라는 책을 발견해 말하기 전에는 구체적인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죠. 상당히 큰 책입니다. 도요분코에서 그게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해서 조금씩 최한기에 대한 문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역사학계의 복고주의 비판>면담자: 제가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만, 가지무라 히데키 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여러분들이 가지무라를 기리면서 쓰신 글을 모아 책으로 내지 않았습니까. 그 글에서 선생님께서 가지무라 님과의 추억을 말씀하시면서, 1960년대 말에 내부적으로 복고주의 비판이 강했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金哲央, 「良き同伴者」, 『梶村秀樹著作集·別卷 回想と遺文』, 明石書店, 1990, 149쪽). 그 언저리의 사정에 대해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구술자: 너무 지난 시기 철학사를 하기보다 현재 조선의 철학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우리 총련 내부에 그런 이상이라고 할까, 그런 분위기가 있었죠. 말하자면 새로운, 후에 주체사상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수령님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는 거였죠. 면담자: 그런 경향은 조선에서 시작된 거겠죠. 구술자: 뭐, 그랬죠. 면담자: 제가 공부하면서 보니까 북한 내부에서도 67년, 68년쯤인가요, 김일성 주석 중심으로 사상이 단일화되고 하면서, 아직도 『목민심서』 같은 걸 보는 사람이 있다는 비판도 나오더라고요. 구술자: 아, 그랬습니다. 면담자: 그런 복고주의 비판이 강해지면 최한기 공부하는 것도 조금 어려워지는 거 아닌가요? 구술자: 그렇죠.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아주 강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난 시기 사람보다 현재 공화국의 사상을 선전 보급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는 것이니까요. 그런 것은 다른 사람 하라, 나는 사상사 하고 싶다 했죠. 면담자: 직접적으로 연구를 금지하거나 그러지는 않았군요. 구술자: 아니니까, 정책에 민감한 사람들은 해라, 나는 사상사를 좋아하니까 사상사를 하겠다, 뭐 이런 거였죠. 최한기는 아직도 많이 연구할 분야가 남아 있습니다. 더 알려져야 하고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면담자: 네,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연구 덕분에 지금은 예컨대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실학을 계승해서 근대적인 학문을 한 인물로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조선사연구회, 일본조선연구소, 국제고려학회>
면담자: 1984∼85년에 계몽적인 성격의 책을 많이 내셨는데요. 어떤 취지에서 하신 작업이신지요. 구술자: 네 그것은, 청소년 잡지가 있습니다. 『新しい世代』 아타라시이 세다이, 그러니까 새로운 세대라고. 면담자: 총련계에서 내는 잡지인가요? 구술자: 예. 동포 계몽하는 잡지가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입니다. 그때 내가 사상사나 조선 인물에 관해 연재했죠. 그걸 묶어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7820" align="aligncenter" width="273"]金哲央, 『朝鮮名士物語 : 歴史を彩った人物たち』, 朝鮮青年社, 1984.[/caption] 면담자: 그렇군요. 그런 작업 하시고 할 때 여기 조선사연구회에는 가끔 나가시고 그랬나요? 구술자: 네 그렇습니다. 가끔. 면담자: 제가 듣기로는 재일조선인 연구자들이 처음에는 잘 나오시다가 나중에는 조금 뜸해지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구술자: 그거야 뭐 몇 년 하니까, 새로운 맛이 없고 타성적으로 하니까, 뭐 안 나가도 다 알 수 있다 해서, 안 나가는 사람 많았습니다. 새로운 사상을 하기보다 지난 시기 걸 답습하면서 연구하는 그런 경향이 조금씩 생겨났다고 본 거죠. 면담자: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이야기는 좀 들어보셨습니까? 구술자: 그건 제 생각에는 가지무라 죽은 후에 새로운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지무라 있을 때는 그런 말을 잘 못 들었습니다. 자기도 안 했고 둘레 사람들도 안 했고. 나중에 가지무라 사상사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그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면담자: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일본조선연구소에는 관여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관지인 『조선연구』에 보면 선생님도 글을 실으셨던데요(「実学思想の歩みー田制改革を中心にー」, 『朝鮮研究』 66, 1967.10). 구술자: 가끔 가서 인사는 했지만 뭐 그리 깊은 관계는 없었습니다. 예컨대 와타나베 마나부도 거기 있었죠. 그러나 그 사람들도 그리 연구 성과나 그런 건 없었지요. 아마, 공화국을 알자라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리 참신한 논문은 내지 않았죠. 처음에는 몇 번 냈지만, 기간이 조금 길어지고 마지막에는 유야무야 되어서 결국 해산했죠. 면담자: 나중에는 현대코리아인가요, 이름도 바뀌고 조금 성격이 많이 변했죠. 선생님 국제고려학회는 어떠신지요, 90년이죠? 오사카에서 북한 분도 오셔서 크게 학회를 한 게? 구술자: 네, 물론 갔습니다. 면담자: 역사 하시는 분 가운데는 북에서 김석형 님이 오셨는데, 예컨대 철학이나 사상사 하시는 분들도 많이 오셨나요? 구술자: 글쎄요,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역사 하시는 분이 많이 왔죠. 사상사 하는 사람보다 역사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주체철학과 황장엽>면담자: 1992년도에 주체 철학에 관한 책을 쓰셨는데, 조선에서도 책이 많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새롭게 쓰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구술자: 공화국과는 문체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일본에 살아온 사람들의 문체, 일본화된 동포들의 문체가 있죠. 그런 걸 내가 개수해서 썼죠. 북쪽은 좀 교과서적이고 관념적인데 그런 것도 쉬운 말로 좀 풀어서 썼죠. 김일성 수상의 논문도 많이 번역했습니다. 면담자: 그러시군요. 여기서 주체 철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셨으니, 북쪽의 황장엽이라는 분과도 조금 관계가 있으셨겠습니다. 구술자: 그렇습니다. 면담자: 만나신 적은 있으신가요? 구술자: 몇 번 일본에 왔을 때 만났습니다. 마지막에도 여기 도쿄에서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울로 도망쳤지요. 마지막에 서울에 가기 직전에 도쿄에서 만난 거죠. 면담자: 그렇군요. 그때 황장엽은 공무로 온 건가요? 구술자: 네 공화국 대표로서, 사회과학자 대표로서 왔죠. 우리한테 몇 번 강의도 하고. 59년인가 60년에 처음 온 거 같습니다. 60년도 하나의 고비죠. 그 직전 또는 직후에 몇 번 왔습니다. 황장엽이 오면 반드시 나도 같이 참여했습니다. 올 때마다 참가했습니다. 면담자: 아무래도 선생님 위치가 여기서 철학이나 사상사를 가르치시니까. 구술자: 그 마지막 때도 기억이 납니다. 상당히 고민 있었겠죠. 일본에 있을 때도 상당히 동요했습니다. 우리 앞에서 강의하는데 뭐 지리멸렬입니다. <한국 방문, 한국 미술 연구>면담자: 한국에도 오신 적이 있죠? 구술자: 나는 한국에 몇 번 가지 못했습니다. 세 번인가 네 번. 면담자: 제가 보니까 2002년에 국제고려학회 때 한 번 오신 것 같던데요. 구술자: 그때도 갔죠. 처음 간 건 1990년대 말입니다. 면담자: 조선대학교 정년 퇴임하시고죠? 구술자: 네 그렇습니다. 거기 있는 동안은 좀 그렇죠, 여러 가지로. 면담자: 2003년에 서울 오셨을 때는 최한기에 대해 발표를 하신 거죠? 한국의 잡지에 실린 글을 저도 봤습니다.
면담자: 가장 최근에는 조선 미술에 관한 책을 내셨습니다. 미술에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으셨어요? 구술자: 아마 중학교 시절부터입니다. 면담자: 직접 그리기도 하세요? 구술자: 그리진 않았습니다. 보기만 했습니다. 면담자: 은퇴하고 취미를 살리셔서 책을 내셨군요. 구술자: 예. 일본에 사는 동포 속에서 그림을 좋아해서 그리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면담자: 아, 그러네요. 노래하는 분은 많은데 화가는 잘 없네요. 구술자: 화가는 거의 없습니다. 매우 적습니다. 우리 성격이 노래는 좋아하는데 그림은 좀. [caption id="attachment_7821" align="aligncenter" width="300"]金哲央, 『朝鮮民族の美100点』, スペース伽耶, 2017.[/caption] 면담자: 오늘은 고맙습니다. 또 여쭙고 싶은 거 있으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구술자: 예,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조경달도 같이 만나도 좋고, 강덕상도 같이 해도 좋고, 여럿이 있으면 더 이야기가 활발하겠죠. 면담자: 네, 그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