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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②] 북한에 온 고려인, 끝없이 추방당하는 삶_조수룡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1.31 BoardLang.text_hits 27,740
 

[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북한에 온 고려인, 끝없이 추방당하는 삶


 

조수룡(현대사분과)


 

조선에서 소련으로, 다시 조선으로


연해주에 조선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 함북 경원에 살던 60여 명이 이주하면서부터라고 한다. 150여 년에 걸친 고려인(주1) 디아스포라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인들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또는 일제 식민 통치의 압제를 피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1927년 연해주 거주 고려인의 수는 약 17만 명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들은 스탈린의 대숙청이 진행되던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1949년까지 이어진 소수 민족 강제 이주 정책의 일환이면서, 또한 이들이 일본의 첩보 활동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소련 정부는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의 거의 전부를 화물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시켰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 등으로 숨졌다. 1937년과 38년에만 약 4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행정적 분류 명칭은 ‘행정적 추방인(administratively exiled)’이었다.

‘대조국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소련군은 그곳의 조선인들과 함께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곳의 조선인들은 국가 건설은커녕 행정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일제 부역자들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일부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구역 당ㆍ공산주의청년동맹ㆍ콜호즈(집단농장)ㆍ기업체ㆍ교육기관ㆍ군 등에서 일하며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 1945년부터 49년까지 약 500명의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 하에서 민족적 억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민이었다. 북한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이들은 자신이 ‘파견’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귀향’한다고 생각했을까?

[caption id="attachment_7737" align="aligncenter" width="471"]강제 이주 (출처:고려인독립운동 기념비건립 국민추진위원회)[/caption]


“조선을 돕는 국제주의적 의무”


북한에 파견된 고려인들은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련에서 포시에트 구역 공산청년동맹(콤소몰) 비서로 일한 바 있는 허가이는 1946년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의 규약과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와 부위원장에까지 오른 조선로동당의 산파였다. 사마르칸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기석복은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의 주필로 일하며 선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찬가지로 타슈겐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유성훈은 내각 간부학교 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옴스크의 고리키사범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조기천은 1947년 서사시 「백두산」을 발표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이 되었다. 소련 중앙은행 산하 재정대학을 졸업하고 동 은행 포시에트 지부장을 지낸 김찬은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일하면서 1947년 화폐개혁을 주도했다. 로스토프의 운수대학에서 철도운수를 전공한 박의완은 1948년 초대 내각의 교통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근무한 리동화는 조선인민군 군의국장을 맡아 한국전쟁 시기 야전병원에서 동분서주하였다. 한국전쟁 때 북측 대표로 휴전회담에 참석한 남일 또한 잘 알려진 파북 고려인 중 한 사람이다.

이들 고려인은 북한의 각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동현의 연구에 따르면 1948년 9월 철수를 앞둔 소련군은 고위급 고려인 23명에게 잔류 의사를 물었다. 이들 중 3명만이 조건 없는 잔류 의사를 표시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조건부 잔류 내지 소련으로의 귀환 의사를 밝혔다. 무엇보다 이들은 북한에서도 소련 국적을 그대로 보유하였다. 북한 정부는 각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고려인의 국적 전환을 지속적으로 종용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끝내 응하지 않고 소련 국적을 고수했다. 1955년 말 소련 대사관에서 고려인의 국적 전환 의사를 물었을 때 당시 인민경제대학 학장 유성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과 소련 정부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 있는 조선을 돕는 국제주의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상투적 화법이든 진심이든 간에, 그는 소련이 자신의 조국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7738" align="aligncenter" width="248"]조기천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7739" align="aligncenter" width="247"]허가이[/caption]

 

[caption id="attachment_7740" align="aligncenter" width="244"]남일[/caption]

[caption id="attachment_7741" align="aligncenter" width="241"]박의완[/caption]

 

“두 개의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조선로동당과 북한 정부는 고려인의 국적을 전환하고 정착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들을 같은 동포로서 품어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 이민 2세인 고려인들은 한국어에 서툰 경우가 많았다. 북한 출신의 토착 간부들 사이에서 이들의 서툰 한국어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음차한 이들의 이름도 놀림거리가 되었다. 예컨대 허가이(許哥而)는 러시아어 이름 ‘헤가이(Хегай)’를, 박의완(朴義玩)은 ‘이반(Иван)’을 음차한 것이다. 북한 최대의 정치적 위기가 있었던 1956년에 열린 한 회의에서 김창만은 “박의완은 이반 아니냐”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1955년 국제여행사 사장으로 일하던 고려인 리철준에 따르면 토착 조선인들의 배타적 정서는 고려인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토착 조선인들은 중국 출신들이 건방지고 소상인적 근성이 있다고, 남한 출신들은 패거리를 짓고 음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멸시했다고 한다.

물론 토착 조선인과 고려인의 불화가 토착민의 배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고려인들은 주로 자신들끼리만 어울렸으며, 평양에는 자연스럽게 고려인 거주구역이 조성되었다. 고려인의 자녀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소련 외무성이 평양에 설립한 소련학교에서 러시아어로 교육받았다. 그들은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내서 “망가지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토착 조선인들은 고려인들이 북한에 온 이상 조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고려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북한에 정착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폐허 위에 재건 중인 북한과 사회주의 세계의 최선진국인 소련 사이에서 이들의 선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려인과 다른 출신 간부 사이의 불화가 표면화된 것은 1955년부터이다. 그 해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소련파’로 불린 고려인 작가와 간부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김일성은 같은 달 유명한 ‘주체’ 연설을 통해(주2) 이들을 ‘반당행위자’로 몰았다. 이들의 문학ㆍ예술 분야 및 사상 사업이 소련의 것만 추종하고 이른바 ‘주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반소련파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이것은 1955년 중반부터 준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4월테제’로 상징되는 김일성의 급진적 사회주의 이행 노선에 소련공산당이 제동을 걸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 추진한 탈소련화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동안 누적된 고려인 출신 간부들에 대한 반감과 결합하여, 전 당 차원의 ‘반소련파운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비판의 표적이 된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등 고려인 출신 고위 간부들 대다수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제기된 ‘개인숭배 비판’의 여파로 반소련계운동은 일단락되었지만 국적 전환 문제 등을 둘러싼 고려인에 대한 압박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같은 해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중앙위원 후보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김재욱ㆍ장철ㆍ리동화가 이중국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선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용건은 이들이 “두 개의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라면서 축출해야 한다고 비난하였다. 날로 가중되는 국적 전환 압력과 반소련파 정서에 직면한 많은 고려인들은 소련으로의 귀환을 선택했다. 하지만 북한 정치사의 가장 중대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1956년 8월전원회의사건과 이후 전개된 ‘반종파투쟁’의 격랑 속에서, 적지 않은 고려인들은 소련에 돌아가지 못하고 숙청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유가족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행방불명된 파북 고려인의 수는 47명에 이른다.

[caption id="attachment_7742" align="aligncenter" width="249"]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북한 前 문화선전성 부상 정상진(정률) (출처:조선일보)[/caption]

[caption id="attachment_7743" align="aligncenter" width="252"]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북한 前 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박영빈[/caption]

 

디아스포라, 끝없는 추방


빈곤과 압제를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의 자손들은 그날부터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조선에서 연해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또 그중 일부는 북한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정주의 삶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으로의 전환이었다. 이주는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디아스포라, 즉 ‘흩뿌려진’ 사람들이었다.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소련 당국에게 일본의 간첩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방인에게 가해지는 익숙한 의심과 편견의 시선이다. 강제 이주된 중앙아시아에서, 이들은 현지인들보다 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강제 이주의 기억을 스스로 소거하고 ‘대조국전쟁’과 국제주의적 ‘민족 융합’에 복무하였다.

북한에 파견된 고려인들 또한 의심과 편견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북한 주류 사회는 이들을 ‘사대주의자’ 또는 ‘소련의 앞잡이’로 의심하였다. 서툰 한국어와 유창한 러시아어, 생소한 이름, 러시아식 습속 등은 토착 조선인이 자신과 이들을 구별 짓게 하는 매개였다. 북한에서 그들은 조선인도 소련인도 아닌 말 그대로 ‘경계인’이었다. ‘어느 쪽이 나의 모국(родина)인가?’ “어느 쪽이 나의 조국(отечество)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남은 한쪽으로부터는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는, 끝없이 추방당하는 삶이었다. 아마도 첫 이주를 선택한 그날부터 그들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 운명 지워졌을 것이다.

파북 50년이 다 된 1990년대 들어 파북 고려인들의 증언이 남한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김일성을 비난하고 북한 체제를 부인하지 않았다면 남한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영주귀국 또는 취업비자 형태로 온 고려인들을 남한 사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고려인들의 끝없이 추방당하는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1) 고려인들은 자신들을 흔히 ‘고려사람(Корё­сарам)’으로 부른다. ‘고려인’은 비교적 근래인 1980년대에 생긴 표현이다. 이전까지는 고려인들도 자신을 ‘조선인’으로 불렀다. 이 글에서는 이들을 한반도에 거주한 ‘조선인’ 등과 구별하기 위해 고려인으로 부르겠다. 

주2) 김일성, 「사상사업에 있어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1955.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