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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김철앙 님①> 제일고등학교, 나고야대학에서 배우고 조선대학교에 부임하다_홍종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1.30 BoardLang.text_hits 20,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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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김철앙 님①> 제일고등학교, 나고야대학에서 배우고 조선대학교에 부임하다홍종욱(근대사분과)
구술자: 김철앙(金哲央, 전 조선대학교 교수)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면담일: 2019.2.13. / 면담장소: 도쿄 하치오지(八王子)시 커피숍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 정리: 홍종욱 <도요하시 병기보급창에서 근로동원>면담자: 제가 관심이 있는 주제는 북한의 역사학입니다. 특히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북한 역사학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최근 연구 주제입니다. 제가 북한에 갈 수 있으면 좋은데 그게 좀 어려우니까, 북한 학계와 교류를 해온 일본이나 중국의 특히 자이니치(在日)나 조선족 원로 선생님들 만나 뵙고 평양 가서 유학하신 얘기도 듣고 그러고 있습니다. 구술자: 최근에는 좀 노력하면 갈 수 있습니다. 면담자: 10년 정도 가기가 좀 어려웠는데요, 네 이제 될 것도 같습니다. (※인터뷰는 남북 관계가 급진전을 보이던 2019년 2월에 실시되었다. - 홍) 그래서 선생님 해 오신 활동 중에 특히 북한 즉 조선 학계와 교류하신 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구술자: 그게 별 거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 분들이 북쪽과 교류를 많이 하셨죠. 면담자: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우시겠지만 여기 조선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신 얘기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선생님 여기서 나고 자라신 얘기부터 좀 여쭙겠습니다. 1929년에 나고야(名古屋)가 있는 아이치(愛知)현에서 태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이치현 어디시죠? 구술자: 도요하시(豊橋)에서 쭉 자랐습니다. 중학교도 도요하시 중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했습니다. 면담자: 도요하시에는 조선인이 많았나요? 구술자: 네. 도요하시에 7년 동안 큰 비행장 만드는 공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이 많이 모였죠. 면담자: 오사카는 제주 분들이 많고 교토는 경상북도 분들이 많은데, 도요하시는 어느 쪽 분들이 많았나요? 구술자: 도요하시도 경상남북도가 많았습니다. 제일 많은 적에는 70프로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면담자: 조선인 학교가 따로 있었나요? 구술자: 아닙니다. 없었어요. 나는 일본 소학교 나왔습니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일본학교. 나는 민족학교 다닌 바가 없습니다. 그 땐 없었지요. 면담자: 그러시군요. 선생님 중학교 다니실 때가 한창 태평양전쟁 때네요. 구술자: 그렇습니다. 태평양전쟁 마친 것이 내가 4학년 때, 중학교 4학년 때 패전됐습니다. 면담자: 그럼 공부도 많이 못하셨겠네요. 구술자: 그러니까 중학교에 5년간 있었지만 똑똑히 공부한 건 1년뿐입니다. 2학년 때 반, 그리고 3학년부터는 근로동원을 주로 나갔습니다. 도요하시에 병기보급창(兵器補給廠)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전선에 보내는 니즈쿠리(荷造り, 짐싸기 - 홍)를 했습니다. 그러나 종전 직전에는 거의 뭐 창고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면담자: 보낼 게 없었군요. 구술자: 주문 받아봤자 보낼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나와서, 점심 먹고 다 도망갔죠, 하하하. 육군 관계니까 점심은 나오니까, 종전 직전에는 점심 먹기 위해서 통근 했죠. 종전 직전에는 집에 식량 없으니까 거기서 점심 먹고 밤에 식사 못했죠. 면담자: 그 때 중학교를 졸업하면 병역을 가야 했죠? 징병을? 구술자: 네, 패전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 1년 있으면 징병 가야했습니다. 졸업할 때는 열아홉 살이니까. 패전 직전과 직후는 모든 곳에서 많이 고생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많이 고생했죠. 일본 전국에 식량 없으니까. 텃밭을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면담자: 아, 영양실조인가요. 구술자: 그렇습니다. 다들 그랬죠. 패전할 만한 상태였죠. 일본 전국이. <도쿄 제일고등학교와 유학동>
면담자: 2017년에 내신 『조선 민족의 미, 100점』 저자 소개를 보니 나고야대학에서 공부하신 걸로 나오는데요, 입학하신 게 몇 년인 거죠? 구술자: 입학한 게 50년입니다. 입학하고 수개월 해서 조선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환경이 상당히 어려워졌죠. 그 때 일본에 있는 조선 사람은 거의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면담자: 그렇군요. 그 때 주위에서 친구들이나 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이 조선 사람이라는 거는 다 알았나요? 구술자: 처음부터 본명을 썼습니다. 조선 사람, 김철앙이라고. 중학교 때부터 그랬죠. 우리 아버지가 좀 민족주의가 있었어요. 면담자: 고생을 좀 하셨겠네요. 구술자: 아니요, 다름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본명 쓰는 것이 오히려 잘 통합니다. 일본 사람으로 취급하다가, 너는 실제로 조선 사람인가 하면 대우가 달라지죠. 면담자: 그 때는 신제 대학인거죠? 구술자: 아닙니다. 구제 마지막입니다. 면담자: 그러면 구제 고등학교를 나오셨군요. 구술자: 고등학교는 제일고등학교. 도쿄 고마바(駒場)에 있는. 면담자: 아 그렇군요. 일고 시험은 어디 가서 치는 거죠? 구술자: 도쿄에서. 도요하시에서는 기차 도저히 타지 못 합니다. 나고야에서 나오는 야행이 있습니다. 도요하시에 정차는 합니다만 타지는 못 합니다. 벌써 만원이지요. 바깥에, 위에는 탈 수 있지만 안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면담자: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구술자: 그러니까 나는 도요하시에서 한 시간 걸려 나고야 가서, 거기서 몇 시간 기다려서 시발(始發)을 타서 갔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만원입니다. 도중에는 타지 못합니다. 일본 교통 상태가 그랬습니다. 면담자: 46년, 47년 그럴 때군요. 구술자: 그렇죠. 그 때 동포들이 야매 장사로서 농촌에 가서 쌀이라든지 사서 오는데, 타지 못합니다. 그 때 뭐 하는가 하면 유리창 깨요. 거기서 던지고, 만원 기차에 막 타고, 그런 식으로 야매 장사 많이 했습니다, 조선사람 그러니까 많이 미움을 받았죠. 일본은 그래도 기차는 시간대로 움직이죠. 도중에서 만원이 되어 못타지만, 시발은 시발대로 움직이죠. 면담자: 공부를 아주 잘하셨겠네요. 중학교 때. 구술자: 아니 뭐 최우등보다 좀 떨어진 정도, 나는 그리 공부 안 했습니다. 면담자: 도쿄로 가셨을 때 공부 잘 한다고 아버님이 기뻐하셨겠습니다. 구술자: 아마 그랬겠죠. 처음에는 아이치현 안에서도 대학 많이 있지 않느냐 말씀 있었는데, 제일고등학교 들어가니까, 주변에서 다들 가라고 해서 그렇게 됐죠. 면담자: 나고야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나요? 구술자: 고등학교 있습니다. 제8고등학교. 면담자: 그런데도 도쿄로 가신 거군요. 그럼 그 유명한 고마바료(駒場寮)(학생 기숙사 - 홍)에 계셨습니까? 구술자: 그렇습니다. 지저분했죠. 청소 안 하니까 낭하(廊下)에 3분지 2가 쓰레기. 면담자: 선생님 일고 입학하신 연도가? 구술자: 해방 후 47년에 입학, 50년 졸업. 그래서 50년에 나고야대학에 왔습니다. 면담자: 일고 들어갈 때 과를 어떻게 나누나요. 분이치(文一), 분니(文二) 뭐 이런 식인가요. 구술자: 그 때는 나누지 않고, 문과, 이과 그렇게 했죠. 면담자: 동기생이 몇 명 쯤 됐습니까? 구술자: 동창이 700명 있었죠. 문과는 200명에서 300명 사이. 면담자: 조선인이 또 있었나요? 구술자: 많이 있죠. 면담자: 몇 명 정도 있었습니까? 구술자: 그 때 재일본조선인 유학생동맹이라고 있었습니다. 유학동이죠. 재학생 전부 해서 고마바료에도 수십 명 있었습니다. 면담자: 그렇게 많았습니까? 선배들 합쳐서죠? 3년이니까, 한 학년에는 한 열 명? 구술자: 열 명에서 이십 명쯤. 면담자: 많았네요. <나고야대학의 유물론 연구와 한국전쟁>면담자: 그런데 제일고등학교 그러니까 일고 나오면 도쿄대학 가는 거 아닙니까. 공부 안하신 건가요, 하하. 나고야대학은 유명한 게 공대 아닌가요? 전쟁 때 인기가 좋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구술자: 네, 해방 후에 대학에 인문과가 생겼습니다. 상당히 좋았습니다. 면담자: 그래서 일고를 졸업하고 50년에 나고야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들어가셨군요. 구술자: 그 때 나고야대학에 유물론 연구자가 많이 집결돼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취직 못 하거나 했던 분들이 새로 대학에 많이 왔죠. 면담자: 그런 분위기를 대표하는 선생님은 누구셨습니까? 이름이 기억나시는 분이 있나요? 구술자: 마시타 신이치(真下信一)라고 계셨습니다. 그 때 젊은 사람 조교수도 유물론자가 많았습니다. 면담자: 학부 시절이 한국전쟁과 겹치시네요. 조선전쟁 동안에는 뭐 활동 같은 건 안 하셨나요? 구술자: 그 때는 뭐 일본 경찰의 통제가 심해서 그리 활동 못 했습니다. 면담자: 49년에 조선인연맹 그러니까 조련이 해산되고 조선전쟁 때면 민전과 조국방위대 시절이네요. 한참 전에 금병동 선생님, 강재언 선생님한테 조국방위대 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배가 비슷하신 건가요? 구술자: 제가 2∼3년 아래입니다. 그 분들이 많이 싸우고 우리는 그리 활동 못했습니다. 화염병 준비는 했지만 던지지 못했습니다. 감시가 심했습니다. 나 보기에는 화염병 던져봤자 탄압의 계기만 됐지, 아무런 효과 없습니다. 면담자: 본과는 3년이죠? 그러니까 50년 4월 입학, 53년 3월 졸업. 구술자: 네, 3년. 그리고 대학원에 7년간 있었죠. 적을 두고 그리 공부는 안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일본 고등학교 교원 했습니다. 면담자: 고등학교 선생님은 어디서 하셨어요? 구술자: 나고야에 있는 사립학교에서 했습니다. 면담자: 대학원은 7년을 다니셨으면 60년까지 다니셨겠네요. 대학원에서는 주로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주로 헤겔을 했습니다. 조선사상사는 졸업한 뒤에 조선대학교 그러니까 조대(朝大) 와서 처음 했습니다. <조선대학교 부임과 결혼>면담자: 아까 말씀드린 약력을 보니 61년에 조대로 가셨다고 나오네요. 구술자: 네, 그렇죠. 그 가운데는 사회과학자 협회에 있었습니다. 재일조선인 사회과학자 협회, 거기에 1년 간 있었습니다. 면담자: 여기는 월급을 줍니까? 구술자: 거의 안 나오죠. 그러니까 활동으로서. 면담자: 기관지 같은 게 있지 않나요? 구술자: 내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면담자: 그러셨군요. 선생님 가실 때 조대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50년대에 생겼지만 실질적으로 대학 같은 틀을 갖추는 건, 고다이라(小平)로 이사를 가고 나서인 60년, 61년 무렵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구술자: 바로 그렇습니다. 그 때 비밀로 어떤 큰 회사를 설립한다고 해서 조선대학교 새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60년에 입학할 때 고다이라 새로운 교사로 안내를 해서 다 데리고 갔죠. 모두 놀라면서 기뻐했죠. 면담자: 건물이 크죠. 저도 몇 번 가본 적 있습니다. 학원제라고 하죠, 대학 축제할 때 한 15년 전에 처음 가봤습니다. 그 건물이 일본 건축가들이 주는 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모던하고 그러니까. 구술자: 그렇습니다. 그 때는 모두 기쁘고 놀라서 춤추고 했습니다. 면담자: 실례지만 선생님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구술자: 조대 간 직후에 61년인가 62년에 했죠. 면담자: 그 때부터 여기 하치오지에서 쭉 사신 겁니까? 구술자: 처음 몇 년은 구니타치(國立)에서 하숙 생활을 했습니다. 몇 년 하다가 부모의 원조 받고 하치오지에 땅을 산 거에요. 값이 구니타치의 반쯤 됐습니다. 거기에 땅 사고 집을 지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7744" align="aligncenter" width="408"]조선대학교 전경 (출처: 웹진 《月刊イオ》에서 https://www.io-web.net/2013/12/%E6%9C%9D%E9%AE%AE%E5%A4%A7%E5%AD%A6%E6%A0%A1/)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7745" align="aligncenter" width="296"] 조선대학교 (출처: 2012년 11월 10일 홍종욱 촬영)[/caption] <조선대학교 역사학부와 재일조선인 역사학자>면담자: 조대가 지금은 문학역사학부로 합쳐졌던데, 선생님 계실 때는 문학부랑 역사학부가 따로 있었죠? 구술자: 그렇습니다. 묶은 것이 오히려 행정적으로 좋다 해서 묶게 됐죠. 면담자: 1961년 선생님 조대 처음 들어가셨을 때에 역사학부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박경식 선생님 계셨나요? 구술자: 박경식, 이진희, 그리고 상당히 많았습니다. 5∼6명 있었지요. 면담자: 박경식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구술자: 네, 박경식 선생 조선대에 있을 때 같이 사업했습니다. 같은 방에서. 면담자: 박경식 선생님이 조선대학을 그만두신 게 67년인가요? 더 일찍 그만두셨나요? 구술자: 67년인가? 사모님이 병에 걸려서 아이도 돌봐야 한다 해서 조금씩 조선대에 나오는 것이 어려워져 자연히 그만뒀죠. 면담자: 강재언 선생님이랑 교류가 좀 있으셨습니까? 강 선생님은 조선 근대 사상사를 하셨으니까 선생님 공부하신 거랑 방향이 좀 비슷할 수도 있는데요. 구술자: 예. 그 분의 연구를 아마 다 읽고 많이 참고했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면담자: 만나신 적 있으신가요? 구술자: 도쿄에서 연구 대회랑 있을 때는 만났지요. 그 분은 간사이(關西) 오사카에 계셨으니까. 면담자: 연구 대회라면 어떤 조직이죠? 구술자: 재일본조선인 사회과학자 협회입니다. 도쿄 분과가 있고 오사카 분과가 있고, 자주 1년에 한두 번 통일 대회 했습니다. 조금씩 거리가 생기더라구요. 자연히 생기는. 그래 그 분 그만두고 그 후엔 만나지 못했죠. 우리 내부도 상당히 활력이라 할까 그게 없어져서, 제대로 해산 선언도 없이 해산했지요. 조금씩 조직으로서의 위력이랄까, 매력이랄까, 그런 게 없어졌죠. 면담자: 네, 그렇군요. 그게 언제쯤이죠? 구술자: 60년대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때는 한국에 가면 우리 조직에 얼굴 내기가 좀 어려웠죠. 면담자: 아마 70년대 초인가요? 강재언, 이회성, 이런 분들이 한국에 갔다 와서, 약간 좀 변명 같은 그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쪽을 규탄하는 그런 쪽이셨겠습니다. 구술자: 아니, 규탄 안 했습니다. 그저 거리가 생겼죠. 거리가 생기면서 양 쪽이 조금씩 기운이 없어졌죠. 양쪽이. 그런 시대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평양 방문과 귀국선을 통한 지도>면담자: 선생님, 조선이나 평양에 가신 적은 있으시겠죠? 구술자: 난 그리 안 갔습니다만, 주로 내가 간 것은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편찬 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몇 번 갔습니다. 면담자: 그러니까 일본 조선학교 고등부에서 쓰는 교과서군요. 그게 몇 년도쯤이십니까? 구술자: 61년인가 62년에 처음 가고. 그 뒤로 띄엄띄엄 3~4년에 한 번 씩, 네 번쯤 갔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리 못 간 셈이죠. 그리 갈 필요도 없었고. 면담자: 이거 말고는 따로 유학하거나 그러신 적은 없는 거네요? 구술자: 나는 안 갔습니다. 그 땐 나이가 뭐 다 들어서. 면담자: 선생님 경력을 보니까, 조선의 교수 직함을 받으셨던데, 그거는 절차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슨 심사 같은 게 있겠죠? 구술자: 그러니까 아마 우선 오래 했다는 거, 일본의 민족교육 기관에서 오래 했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조대 관계 사람들이 많이 받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이러이런 사람에게 달라 해서 요청하면 그 쪽에선 경력 보고 좋다, 내겠다, 그런 식으로 했지요. 그러니 결정하는 것은 총련 측은 아니죠. 면담자: 여기서 추천을 하면은 조선에서 승인을 하는 거군요. 그게 언제쯤이십니까? 교수 직함을 받은 게? 구술자: 60년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저도 조선대학 교원으로 받았기 때문에, 지방 고등학교 교원들은 그리 받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상당히 연구를 축적한 사람은 조대 오라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충했습니다. 면담자: 조대 교원들은 평양으로 유학을 많이 가지 않습니까? 구술자: 몇 사람 갔죠, 젊은 사람들. 반년이나 1년 가서 그 쪽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도 바깥에 가는 연한이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돌아올 때 허가가 최대 3년인가 해서 그거 넘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1년, 또는 반년 그 쪽에서 학습 받고 돌아오는, 그런 거는 조대에서 했죠. 면담자: 그밖에 북한 학계와 교류나 영향은 어떤 식이었나요? 구술자: 귀국선이 다닐 때는 거기에 편승해서 북쪽의 사회과학원이라든지 조선로동당 간부가 많이 왔죠. 그래서 일본에 있는 청년 간부라든지 조선 교원이랑 다 부르고 담화하고, 이거 이런 방향에서 하면 좋겠다, 그런 방향제시라든가 많이 있었죠. 그러니까 귀국선이 동포 귀국한 것뿐만이 아니라 북쪽에서 반드시 사상 관련 간부가 오셨습니다. 와서 3일이나 있으니까. 면담자: 자주 가셨습니까? 구술자: 갔습니다. 100번 이상 갔죠. 올 때마다 갔죠. 면담자: 100번 이상. 한 10년간? 구술자: 네, 그 때 많이 갔죠. 특히 총련에서 열 명쯤을 그룹 지어 청년반을 만들었습니다. 청년반에서 갔습니다. 면담자: 주로 어떤 분들이 오셨습니까. 정치적인 간부들인가요? 학자들은 안 왔나요? 구술자: 간혹 학자도 몇 번 왔습니다만 지금 이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 유명한 사람도 아니지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