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우(근대사분과) 지구촌 곳곳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와 그로 인한 재난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는 경제성장의 신화 속에 자본주의 문명을 구가해온 인류의 행위에 따른 대가임이 틀림없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최근 한국에서도 ‘수십 년만의 ○○’, ‘기상관측 이래 △△’라는 식의 보도를 이따금 접할 때가 있다. 작년의 경우 76년만의 폭염과 가뭄이 있었다. 정부의 무능과 한 기업병원의 오만함이 동반되어 수많은 희생자와 비용을 치르게 한 메르스 사태 직후였다. 2015년의 76년 전이면 1939년이다. 그렇다. 그 해는 식민지 시기 가장 지독했던 대가뭄이 지나간 해였다. 이 해를 길잡이 삼아 일제시기 신문자료를 훑다 보면 ‘미증유의 대홍수’, ‘전고미문(前古未聞)의 한해’라는 식의 각종 재해 관련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글은 그 시기 자연재해에 대한 통치권력과 사회의 동향을 추적해보려는 것이다. [사진1]제방 위의 피난민(『慶尚南道水害誌』, 1934) 재해대책의 ‘식민지성’예로부터 동아시아에는 유교의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에서 보듯 재해의 책임을 군주의 통치와 연결하고, 그 대책 마련을 공적 집단이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다양한 재해대책이 시행되었다. 일제 식민권력 역시 식민지배 목적의 달성과 통치 안정을 위해 여러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일제는 조선의 산업구조 특성상, 본국으로의 안정적인 식량 조달을 위해서 홍수와 가뭄, 흉작 등으로 인한 농업부문의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고, 곤경에 빠진 이재민의 피해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통치성도 증명해야 했다. 곧 재해는 식민지 인민과 통치권력이 조우하는 장이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의 대책사업은 자연재해마다 나름의 특성이 있어 각기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크게 이재민 구조 및 재해복구 차원의 응급구제사업, 재해예방대책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응급구제로서 이재민 구조사업은 재해지역 주민에게 곡식이나 현물을 직접 지급하는 것이다. 피해가 큰 지역에는 조세나 각종 공과금을 감면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노약자나 환자 등 생계유지가 곤란한 극빈자에게 직접 식량을 급여하거나 종곡과 양식자금을 대부했다. 식민 당국은 풍수해로 파괴된 가옥이나 선박의 수리비용을 지원했고, 환자 치료와 전염병 예방을 위한 의료 구호도 진행했다. 학교 수업료 감면, 결식아동 급식, 학용품 급여가 이뤄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재해 시설 복구와 연관된 생업부조사업은 이재민 중 자금력이 없는 자에 대하여 자활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토지개량사업과 도로 및 하천 수리 등의 토목사업, 철로 복구 등에 이재민을 동원하고 여기서 이재민이 획득한 공사 임금으로 구제의 취지를 살리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생업부조 차원에서 식민권력은 가마니 짜기, 죽세공품 만들기 등 부업을 장려했고, 관청에서 그 판로를 원조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이재민의 소득을 올린다는 계획이었다. 재해예방대책의 중심은 치산치수사업이었다. 여기엔 토사붕괴를 막기 위한 사방사업과 조림사업, 하천 개수 등 토목사업이 포함되었다. 이 사업들은 생업부조 공사와 같은 맥락에서 이재민에 임금을 부여하려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단, 기존 시설에 대한 사후 복구가 아닌 ‘예방’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밖에 가뭄대책으로 토지개량사업, 벼 품종개량이라든가 보리 등 대용작물 장려 등 농업기술 부문 사업도 진행되었다. 또한 1930년대 들어서는 풍수해 예방과 재해 대처 기구로서 수방단(水防團)이 설치되었고, 각 지방단체에서 비황(備荒)저축창고를 설립한다든가 재해기금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사진2] 1939년 총독부의 한해대책을 선전하는 신문지면(『매일신보』 1939.8.10. 2면). 맨 오른쪽 기사 글머리에서 노임 살포와 식량 공급 등을 계획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이렇게만 말하면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들이 선의의 통치자로 보일지 모른다. 물론 권력이 의도한 바를 따져보면 ‘선의’는 아니었다. 우선 일제는 응급구제사업을 천황이 베푸는 ‘시혜’로 선전했다. 응급구제사업 중 이재민 구조사업의 자금은 국고와 지방비에서 조달되었지만, 임시은사금, 은사이재구조기금, 천황 등 일본 황실에 의한 하사금, 그리고 민간에서 모금된 의연금에서도 마련되었다. 임시은사금과 은사이재구조기금, 하사금 등은 ‘은사(恩賜)’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천황으로부터의 ‘시혜’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둘째, 그런데도 식민권력은 이러한 직접 현금과 물품을 제공하는 구제사업 부문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했다. 노동능력이 없거나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노약자나 여성, 병약자 등에만 직접 현품을 배급하고, 그 외에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재해를 극복하라는 논리였다. 노동에 대한 강조는 식민지민에게 ‘근로관’을 주입시키는 교화와 통제의 의도가 있었다. 총독부 관료들은 ‘구제라고 말하면 게으른 백성을 양성할 염려가 있어 폐해가 생긴다’는 명분으로 자력갱생을 외쳤다. 이들의 의식에는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조선에서의 정체·낙후성을 이미지화하려는 ‘조선인 나태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교의의 실현이기도 했다. 셋째, 식민권력은 재해복구사업을 통해 이재민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며 구제 명분을 찾고, 이재민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면서 산업개발에 활용하는 등 ‘일석이조’를 노렸다. 이는 식민지 개발과 재해대책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해토목공사나 개간사업은 일제의 조선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 자본가들(주로 일본자본)은 토목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이윤을 추구해갔다. 자본은 이윤만 남기면 되었기에 이재민의 현실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대가이자 구제 명분으로 지급될 매우 빈약한 임금마저도 제때 이재민 손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곧 당시 재해대책에는 통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이익 추구 성격이 다분했던 것이다. ‘전통’의 경로의존성이러한 재해대책의 ‘식민지성’과 함께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이 있다. 전통시대 이래로 시행된 재해대책이 이 시기에 미친 영향력이다. 전통과 식민지는 얼핏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식민권력이 추진한 각종 재해대책사업은 왕조국가가 행한 진휼·황정(荒政)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통적 방식을 변용한 모습을 보인다. 식민지에서의 재해대책은 재해실태 조사, 현물·금품의 배급, 종곡 대부, 대용작 장려, 조세 감면, 창고(조선시기에는 의창·사창, 일제하에서는 비황창고 등)의 설치, 의료 구호, 예방대책으로서 토목공사 시행 등 많은 부문이 왕조국가 조선에서의 그것과 중복된다. 사실 이재민의 처지를 개선하거나 회복시킨다는 차원에서 전통과 근대는 합치될 바가 많았던 것이다. ‘전통’은 현상적인 유사성에만 그치지 않고, 성격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첫째, 국왕의 ‘은혜’를 강조했던 흐름이 두 시기 모두 등장한다. 식민지라는 사실을 잠시 내려놓으면 천황의 이재민에 대한 ‘시혜’, 다시 말해 국왕의 은혜, 시혜를 강조하는 흐름은 조선시기 내탕금을 이재민에게 분급하는 과정에서 이미 연출된 것이다. 대한제국기에도 구휼기관 혜민원(惠民院)은 진휼과 함께 ‘은혜로운’ 고종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홍보 기능도 담당했다. 둘째, 정부가 직접 구제하는 대상을 제한하고 노동을 통한 자활을 강조했던 모습은 조선시기에도 찾을 수 있다. 일제시기 직접 구조할 대상을 지칭했던 상투어인 ‘환과고독(鰥寡孤獨)’은 『맹자』에 등장하는 유래 깊은 표현이다. 물론 전통시대에 유교의 왕도정치가 표방된 것에 비해 식민지 시기 노동윤리의 강조는 식민통치의 합리화, 자본주의사회에 걸맞은 노동자로의 탈바꿈 의도가 강했던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표현의 유사성과 그 변용에 주목하고 싶다. 셋째, 지배권력이 토목공사에 이재민을 동원해 구제 및 재해복구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시도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구휼을 겸해 굶주리는 백성을 제언 수축과 같은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일들이 있었고, 이러한 방식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권력도 통치를 위해서는 식민화 이전의 전통적 요소들을 간과할 수 없었고, 또 이를 접합해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일종의 경로의존성이 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전통은 근대를 낳은 씨앗이었고, 근대는 ‘전통’을 창출하거나 변용해갔다. 가까워지기도 했던 식민권력과 이재민식민권력이 실행한 재해대책의 이면에는 이재민 내지 조선사회의 동의와 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재해 때 이재민 등 지역주민들이 구휼금품 분배를 반긴 것은 물론이며, 식민 당국에 대하여 피해지역에 공사를 일으켜 이재민 구제책으로 삼을 것을 요구·진정하였다. 이런 기사는 약간의 인내심만 갖는다면 당시 신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록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건설업자의 착취와 저임금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재민 입장에서 임금 취득 기회 자체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식민권력은 친척과 지주, 지역공동체의 이재민 구제를 권장하는 등 조선 재래의 ‘관습’을 선전하고, 사회로부터 걷힌 의연금을 직접구제 부문의 비용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물론 직접구조의 최소화 방침의 이면이자 통치 부담을 민에 전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부자들이 도덕성을 갖추고, 그들이 빈민구제와 자선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심리도 한편에 존재했다. 부자들이 도덕성을 갖추고, 빈민구제와 자선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사회는 빈민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부자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궁민(窮民)에게 그 부의 일부를 희사하는 것”이라 했다(『동아일보』, 1932.6.13). 실제로 지주나 부호가 기부와 자선에 동참했을 때, 이는 지역에서 칭송거리가 되고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칭송의 이면에는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비난의 화살을 받을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1923년 강원 홍천 주민들은 주사인 부호 이용균과 도평의원 이두용을 “사회사업이나 친척 구조에 냉정한 고로” ‘개 주사(主事)와 도야지 평의원(評議員)’으로 부르기도 했다(『개벽』 42, 1923.12). ‘인보상조’ 또는 ‘관습’의 활용 및 그 필요성은 식민권력뿐만 아니라 조선사회에서도 함께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를 기부와 자선에 대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심리는 조선사회 일반에 존재하였고, 실제 자선과 기부, 의연활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일종의 기부문화, 자선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선·기부문화와 동포사회로의 상상풍수해와 한해 등 재해에 대응하여 조선 각지에서는 활발한 기부, 의연활동이 벌어졌다. 참가자는 계층과 연령, 성별에서 뚜렷한 구별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지역 자산가나 유력자뿐만 아니라 소작농민과 빈민층, 장애인, 고학생, 기생 등도 참여했다. 심지어 재해지역의 이재민이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재해 때 각 언론에서 집계·보도한 의연금 모금 명단을 보면 수백 원 이상의 거금을 기탁한 인물도 더러 있었지만, 1원 이하의 현금이나 쌀 한 말 내외의 물품을 기부한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은 곧 조선사회에서 일종의 기부·자선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청년회나 지역유지, 신문지국 등이 주축이 되어 구제회나 자선회를 설립해 의연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모금 독려를 위해 호별 방문이나 여러 선전활동, 연설회라든가 활동극회, 자선음악회 등도 활용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 유지나 자선단체가 자체적으로 진행하기도, 한편으로는 군·면 등 지방관청과 연계되면서 이뤄지기도 하였다. 재해 규모가 클 경우에는 이재지역을 넘어선 다른 지역에서 별도의 구제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인 모금 및 구제활동이 전개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진3] 1934년 삼남수재 의연금품 모금 명단의 하나(『동아일보』 1934.9.23. 조간5면). 각지에서 접수된 빽빽하게 적힌 인명과 금품명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부·자선문화는 근대적인 현상이었다. 조선시기의 교통과 통신 문제 등으로 인한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으며 전국적으로 ‘회’가 결성된 점, 신분과 계층을 불문한 기부가 행해진 점에서 그러하다. 보기로 1934년 조선 남부 대수해 당시 동아일보 대구지국의 의연금 모금을 위한 수해사진회를 본 11살의 보통학교 4학년 학생은 86전을 기부하며 인터뷰하기를, 동아일보를 보고 각지에 물난리가 많이 난 것을 보고 놀랐는데, 공회당에서 수해사진을 구경하니 불쌍하고 눈물이 났다고 한다(『동아일보』 1934.8.2). 소년은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타지 소식을 접하고 공회당에서 사진회를 보며 동정심에 기부했다. 기부·자선의 전국화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미디어의 힘을 배경으로 했던 것이다. 이 문화는 재해 때마다 ‘형제애’나 ‘동포애’ 등 민족담론이나 ‘인류애’ 등의 담론으로 유포되었고, 실질적인 이재와 구제의 경험을 통해 확대되었다. 또 이는 각 개인의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했다. 보기로 경성부 도화동과 시흥군 잠실(지금 연구회가 있는 도화동과 오늘날의 잠실) 주민들은 을축년(1925년) 대홍수 당시 조선 각지로부터 많은 동정을 받았다. 이러한 체험은 1934년 대홍수 때 삼남재민을 위해 하나로 협력하여 의연금을 모금하는 동력이 되었다(『동아일보』1934.8.9).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경험을 통해 도화동 주민과 잠실주민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상상하고, ‘동포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A Paradise Built in Hell)에서 대재난의 한복판에 오히려 기존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뛰어넘어 인류애를 자극하는 호혜성이 꽃피운다는 점을 논증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각 개인은 이재민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공감하고, 이재민과 자신들의 운명을 연결시키는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공공성’을 실현하고 대안을 마련하려 하나…구제·자선 행위는 어찌 보면 식민권력이 표방한 ‘직접 구제의 최소화’, ‘인보상조의 권장’과 결합하는 체제 내적인 논리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이재민과 지역민들은 식민권력의 한계를 느끼고 식민지라는 제한된 틀 속에서 식민권력의 한계에 일정한 ‘대안’을 마련해가는 과정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 점에서 ‘대안적 공공성(alternative publicness)’, 대항문화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재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인 ‘공공성’을 실현해간 사례는 여럿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에 두드러진다. 일례로 1922년 황해도에서 발생한 수해에 대응해 경성 인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황해도수재구제회는 수해구제금 모금활동을 펼치고, 생명손실자와 가옥유실도궤자, 가옥파손자 등을 구제의 표준으로 삼고, 구제 지역을 선정하는 등 응급구제에 주력했다(『동아일보』 1922.9.9). 식민권력을 대신해 구제의 표준과 구역을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모습에서 ‘대안적 공공성’의 성격을 띤다. 1924년 조직된 조선기근구제회는 식민당국이 아닌 조선인 사회에서 조선의 가뭄상황을 조사하고, 여러 단체를 망라해 대책을 강구해갔다. 구제회는 집행위원을 선정하고 여러 방안을 정해 실행하는 한편, 당국에 대해서는 이재민에 대한 자금융통, 구제공사, 이재민에 대한 최저한도의 생활 보장 등을 요구했다(『조선일보』 1924.8.24.; 1924.9.29.; 1924.10.13 등). 총독부는 1924년 연말에 가서야 재해예산을 확보하고 대책 방안을 제시했는데, 그 이전부터 구제회는 당국에 압박을 가하고 식민권력이 대처하지 못하는 사안에 빈틈을 메우면서 ‘대안적’ 활동을 펼쳤다. 대안적 성격은 상황에 따라 대항문화로 전화할 수 있었다. 당국이 재해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인민들이 느끼고, 사회 일반의 성원이 커져 민족 감정을 불러일으킬 경우에는 권력에 대한 대항의 의미를 갖게 마련이었다. 식민당국은 그 점을 우려하고 통제하려 했다. 1924~25년 조선기근구제회 활동에 대해 경찰측은 강연회 중지, 연설회 불허 등 방해공작을 펼쳤다. 1930년에는 신간회도 가담해 조직된 전조선수해구제회가 기부활동 허가원을 제출했으나 당국이 거절했다. 그러면서 모금운동을 관변단체인 조선사회사업협회를 통해 통제하려 했다. 양상이 ‘불온’하고 민족성이 발현될 여지가 발생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식민권력은 기부·자선활동을 제약하고 때로는 조직을 해산시키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재해에 대한 조선사회 내부에서의 자율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식민권력의 통제 과정과 맞물려 조선사회의 자선·기부문화도 점차 위축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도 기부 자선활동이 줄곧 이어졌지만, 대항문화로서의 구제·자선운동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점은 식민지 체제 아래 ‘대안적 공공성’의 한계를 말해준다. 피지배민의 집합행동이 민족성을 띠며 ‘정치’화할 때 지배권력이 이를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공공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재해문제 해결이라는 공익을 둘러싼 경쟁에서 물리력을 동반한 식민권력에 조선사회는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시 총동원체제기와 같이 조선사회에 대한 억압이 강해질수록 식민권력이 식민지 인민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어려워졌다. 오늘날처럼 역시나 주권, 일반 대중 개개인의 자율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