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창, 우두법 그리고 사회: 메르스의 가까운 과거박윤재(근대사분과) 호환마마의 공포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 비디오테이프를 틀면 항상 처음 등장하는 경고가 있었다. "불법 비디오의 폐해는 호환마마보다 심합니다." 호환은 호랑이의 공격, 마마는 두창(천연두)을 말한다. 호환마마를 합쳐 두창을 말한다는 해석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두창이 예전 공포의 대상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뜬금이 없는 경고이기도 했다. 1960년대 생인 내게 두창은 생소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거리를 걷다보면 얼굴이 얽은, 흔히 곰보라고 말하던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 모습이 두창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한국에서 마지막 두창 환자가 발견된 때는 1960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나아가 1977년 소말리라에서 발생한 환자를 마지막으로 두창은 공식적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 인류가 치명률 20-30퍼센트에 달하는 두창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방접종에 있었다. 18세기 말 영국의 의사 제너에 의해 발견된 우두법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인류를 두창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한국에는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고, 지석영은 그 수용과 체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두법은 18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인 시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1890년이 되어서는 그 범위가 전국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이 실시한 거의 모든 정책을 부정한 조선총독부도 우두사업만은 평가하였다. “종두에 대해서는 한국정부도 비교적 일찍부터 주의를 기울였다”는 평가였다. [그림1] 한성종두사에서 두묘를 채취하는 모습 두창의 소멸은 의료의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두가 의료기술이라고 할 때 우두의 발견, 접종의 확산, 나아가 강제접종이 두창의 소멸을 낳았기 때문이다. 방역에서 의료의 역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우두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료가 시행되는 공간이자 매개체로서 사회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의료는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시행될 수밖에 없고, 그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시행한 우두정책 그리고 실패는 의료와 사회, 사회와 의료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의 예이다. 조선을 식민 지배하면서 총독부가 의료분야 중 가장 우선시한 정책은 우두였다. “우리나라 위생행정 중 가장 급무는 종두의 보급”이었다. 병합 이전 조선정부의 노력을 평가하기는 했지만 총독부가 파악하기에 그 노력은 미흡했다. 과거에 인구 차이가 없던 조선과 일본이 식민 지배 초기 1천 3백만과 5천만이라는 3배의 차이를 보인 이유도 우두법 시행 유무에 있었다. 일본이 19세기 중반부터 우두를 전면적으로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아니었다. 강제접종과 낙관된 미래 총독부는 강제 접종을 실질적으로 시행하였다. 조선정부도 종두규칙을 통해 강제적인 접종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두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의료인이나 종두인허원이 접종비를 받았던 까닭에 강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강제 접종을 실시해나갔다. 총독부에 따르면, 무엇보다 먼저 조선인의 위생사상이 유치했기 때문에 강제접종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의 사정은 “강제력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보급을 기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경찰이 지휘하는 강제 접종이 시작되었다. 총독부는 접종 횟수도 늘렸다. 조선정부는 종두규칙을 통해 생후 70일부터 만 1세 사이에 한 번 우두를 접종받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우두를 두 번 접종받도록 변경하였다. 조선인들 사이에 더욱 강력하게 우두를 보급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총독부는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시행하면서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이미 보호국시기부터 강제 접종의 결과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1910년 보호국시기 경찰 활동을 정리한 보고서는 “경찰서에서 강제종두를 시행하되 일본의사로 하게 함으로써 성적이 특히 현저”해졌다고 평가하였다. 강제접종의 효과는 수치상으로도 나타났다. 1910년 병합에 즈음하여 대대적으로 우두를 실시한 결과 접종 인원이 122만 명을 넘어섰다. 총 인구에 대비하면 약 10%를 점하는 숫자였다. 대한제국이 우두를 시행할 당시 매년 전국적으로 몇 만 명 정도가 접종을 받았음을 고려할 때 수십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우두 시행이 확대되면서 실제로 두창은 감소하고 있었다. 1913년 발생한 226명 환자의 대부분은 중국과 인접한 국경지방에서 발생하였고, 기타 각 도에서는 1-8명 정도가 발생하는 정도였다. 매년 위생난에 ‘두창’을 별도로 게재했던 '조선총독부시정연보'도 1913년판부터 그 구분을 없애 버렸다. 두창의 위험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반증이었다. 1913년 총독부는 “두창은 거의 절멸에 가까이 갔다”고 평가하였다. 성급한 기대와 조선종두령 그러나 총독부의 기대는 성급했다. 1919년에는 2,140명 환자, 700명의 사망자, 다음 해에는 11,532명의 환자, 3,6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1915-7년 사이에 발생한 50명이 채 안 되는 환자, 10명이 안 되는 사망자 수에 비하면 놀라운 숫자였다. 이 숫자 역시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통계 작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두창 환자의 급증 원인을 삼일운동에서 찾았다.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경찰이 진압에 동원되었고, 그 결과 경찰의 다른 업무였던 위생활동에 참여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조선인들도 경찰의 위생업무에 협조하지 않았다. 삼일운동은 식민 지배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이었고, 그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도하는 우두접종에 협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1919-20년은 총독부의 설명처럼 삼일운동에 따른 결과, 즉 방역에 동원할 경찰 인력의 부족, 방역체계의 이완 등에서 두창 유행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삼일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은 뒤인 1922년, 1923년에도 각각 3천 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하였고, 1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연속된 두창의 대량 발생은 총독부를 긴장시켰다.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다. 총독부는 1923년 조선종두령을 반포하였다. 조선종두령의 핵심은 종래 2번에 걸쳐 맞도록 되어 있던 우두 접종 횟수를 3번으로 늘린데 있었다. 제1기는 생후 1년 이내, 제2기는 6세, 제3기는 12세였다. 나아가 접종 연령의 제한을 없앴다. “정기 종두를 받지 않거나 종두를 받은 증거가 불명확한 자에 대해서는 연령에 관계없이 종두를 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두 가지 내용 모두 일본 본국의 종두법과 달랐다. 일본의 우두 접종 횟수는 2회였고, 성인은 접종 대상이 아니었다. [그림2] 종두기계 세트(케이스, 침 2개, 혈액받침) 조선종두령이 반포된 다음 해인 1924년 두창 환자 수는 439명이었다. 전년도 3,722명에 비해 거의 9배 가까이 감소된 숫자였다. 하지만 1915-17년 사이의 50명 미만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총독부 보고서는 1910년대와 같은 성급한 낙관보다는 조심스러운 견해를 내놓았다. 1923-4년 사이 “상당한 환자가 발생하여 병독을 절멸시키는데” 이르지 못했지만, 절멸을 위해 “계속하여 방역을 진행 중에 있다”는 보고였다. 총독부의 절제된 평가는 현명한 것이었다. 1930년을 넘으면서 두창 환자 수는 다시 1천 명을 넘어섰다. 1932년 다시 두창이 유행하는 상황을 맞이하여 총독부 위생과장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진실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 우두라는 '완벽한' 예방법을 가지고도 두창을 절멸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탄식이었다. 두창 유행은 끊이지 않아 1940년 환자 3,265명, 1941년에는 4,720명이 발생하였다. 총독부의 통계가 확인되는 마지막 해인 1942년 두창 환자 수는 1,600명이었다. 식민지 말기까지 두창은 조선에서 절멸되지 않았다. 좀 더 기대를 낮춘다 해도, 적어도 1910년대 수준으로도 격감되지 않았다. 열악한 위생사상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두창이 격감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병한 이유를 조선인의 유치한 위생사상에서 찾았다. 총독부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두창을 평생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질병으로 생각하여 어떤 예방법도 강구하지 않고 있었다. 위생사상이 유치한 까닭에 두창을 예방할 수 있는 우두를 맞지 않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설령 우두를 접종했더라도 곧 그 자리를 소금으로 문질러 씻어 내는 사람도 있었다. 미종두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두창이 발생할 경우 전염의 속도나 규모는 빠르며 넓었고, 방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두창 발병의 원인을 저열한 위생사상에서만 찾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였다. 총독부 스스로 인정했듯이 조선인들의 위생사상은 점차 개선되고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초반부터 우두 접종을 자원하는 조선인이 증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총독부에 의해 내려지고 있었다. “일찍이 종두를 기피하던 일부 조선인도 관헌의 계발에 의해 나아가 그것을 희망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는 평가였다. 우두의 효과를 인식한 조선인들은 위생 담당자에게 인력 충원을 요구했다. “예방종두기술원 다수를 채용하야 시급히 종두 시행하기를 갈망”하였다. 접종이 공지되면 접종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어 시술소가 대혼잡을 이루기도 했다. 다른 이유들 따라서 두창 지속의 원인을 다른 데서도 찾을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민적(民籍)의 불완전함이었다. 각 개인의 신상을 파악한 민적(民籍)이 완벽하지 않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종두자와 두창 감염 여부에 관한 조사 정리가 부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적이 정리되지 않음에 따라 종두자의 명부 정리에도 결점이 생겼다. 가장 중요한 접종 대상자인 신생아의 출생 신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출생신고서를 본적지에만 제출하고 부읍면에는 제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소위 무적자(無籍者)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주소를 이동하고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음에 따라 거주등록부에 등재되지 않는 사람들도 다수 발생하였다. 민적부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접종 대상자의 협력이 필요했다. 한 언론의 지적처럼 “민간의 협력이 없이 그 신속한 주효(奏效)를 바라기 극히 곤란”했다. 하지만 우두 접종을 꺼리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다. 미숙한 우두 기술, 우두 효과에 대한 불신, 불완전한 격리 시설 등이었다. 한국 우두법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지석영은 1908년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비판했다. 피접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 종두인허원이라 칭하며 강제로 우두를 접종하고자 할 때 누가 즐거이 접종을 받겠느냐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은 우두법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설명과 설득이 필요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인들과 함께 우두를 불신하게 된 원인들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논의가 공개되지는 않았다. [그림3] 지석영 두창과 메르스가 주는 교훈 작년 한국은 메르스라는 낯선 바이러스의 공포를 느꼈다. 의료기술에서 선진국 수준임을 자랑하던 한국이 어떻게 메르스의 공격에 그렇게 무력했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WHO는 메르스 확산 요인으로 한국의 관습적인 ‘닥터쇼핑’을 예로 들었다. 진료를 위해 여러 병원을 찾는, 특히 대형병원을 찾는 한국의 독특한 의료문화를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외에도 다른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의료의 측면에서는 감염 관리 부실로 이어진 저수가의 1차 의료 현실, 다인 입원과 비전문가 간병으로 이루어진 병실 현황, 미흡한 역학 조사, 감염 예방과 진료 공간의 부족 등이다. 사회의 측면에서 원인은 소위 컨트롤 타워의 부재, 불투명한 정보 공유 등이 있었다. 당시 메르스 괴담이 무성했던 점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환자와 국민이 이해하고 협조할 수 있는 방역체계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 의료기술은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음성과 양성을 넘나든 관계로 마지막 환자로 남게된 소위 메르스 80번 환자의 비극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 발전만으로 방역이 완벽해질 수 없음을 식민지시기 두창, 21세기 메르스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방역과 의료에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는 이유이다. * 이 글 중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에 대한 부분은 2012년 {醫史學} 21권 3호에 실린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을 이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