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5 - 서울의 골목 안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 수업 중에 『與猶堂全書』 일부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어느 글에선가 “里가 귀한 이름이고 洞은 천한 이름인데, 지금은 풍속이 어그러져 사람들이 서울 地名을 모두 洞으로 쓴다”고 비판한 대목을 보고 무척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기야 ○○리로 불리던 곳도 서울로 편입되면 곧바로 ○○동이 되던 것을 보고 들으면서 자랐으니, 청량리니 왕십리니 하는 동네 이름에서 바로 촌스러움을 연상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茶山은 왜 里가 귀한 이름이고 洞이 천한 이름인지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았다. 나 혼자 洞이란 洞窟과 연관된 표현이어서 그랬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천하의 석학 茶山이 말한 것이니 의문을 남긴 채로 믿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잊었다. 내가 茶山의 이 말을 다시 떠올린 것은 上海를 두번째 찾았을 때였다.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으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청사를 찾기 마련이다. 내가 처음 임정 청사를 본 것은 1991년의 일이었다. 그 건물이 아직 민가로 쓰이고 있던 때였으니 임정의 흔적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내 관심을 끈 것은 임정과 관련된 사적이 아니라 상해 시민들의 생활모습이었다. 그래서 그저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데 열중했을 뿐, 주변 거리 모습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 다시 옛 임정 청사를 찾았을 때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당장 임정 청사는 더 이상 민가가 아니었다. 그 곳은 벌써 하나의 작은 ‘한국식’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적들은 대개가 모형에 불과했다. 본시 모형들로 가득찬 박물관에는 관심이 없는 터라 보는둥 마는둥 하고 일행을 남겨 둔 채 먼저 나와서는 골목 안쪽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골목이 막다른 골목이었다. 주변에 비슷한 집들만 몇 채 늘어서 있을 뿐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고는 빠져 나가는 다른 길이 없었다.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의 里門. 普慶里 이문 사진을 스캔하지 못해 비슷한 걸로 올렸다. 부산 차이나타운의 이문도 같은 모습이다. 한바퀴 빙 둘러 본 후에 다시 입구쪽으로 나와 보니 골목 입구에는 ‘고부간에 사이 좋게 지내자’ 따위의 문구가 쓰인 ‘상해 시민 10대 생활수칙’이라는 안내판 - 10가지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회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유교적 생활규범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 이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2층으로 된 樓門이 덩그렇게 서 있었다. 10여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문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만들어진 지 10년은 훨씬 넘어 보였다. 과거에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일 뿐, 문은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던 것임이 분명했다. 문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골목 앞 큰 길을 가로질러 건너편에서 살펴 보았다. 2층 누문 처마밑에‘普慶里’석 자가 뚜렷이 보였다. 그 때 갑자기 茶山이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바로‘里’다. 왜 里(마을 리)자가 땅 위에 그린 상형문자라는 생각을 미쳐 못했을까. 큰 길에서 ㄱ자로 갈라지는 작은 골목길, 골목길 좌우에 늘어선 필지들, 그리고 갈라지는 골목길 입구에 가로 선 문. 그걸 순차로 그려보니 바로 里자가 되었다. 생각은 꼬리를 이었다. 일본 문자 町(쵸오 또는 마치) 역시 위치만 다를 뿐 큰 길과 갈래길, 그 사이의 필지를 그린 것일테고, 面도 큰 길과 갈래길, 갈래길 끝에 형성된 마을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里란 인위적으로 정연하게 구획된 가로와 필지로 구성된 도시내 거주공간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어야 맞다. 茶山이 洞은 천하고 里는 귀하다 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오늘날 서울 시내 옛 도심 지역의 가로망은 整然함과는 거리가 멀다. 당장 종로 뒷길 - 피맛길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고기집들이 즐비한데, 굳이‘피맛’길이라고 해 놓았으니 길 이름의 내력을 모르는 이 도시의 젊은이들이 오해하기에 그만이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피맛길이라는 이름의 내력을 아는지 물어 보았더니 한 녀석이 “김두한패가 활동한 길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넉살좋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 만 해도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한 번 잘 못 들어서면 길 찾아 나오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노폭도 좁아 보통 120cm 내외이고, 가장 좁은 곳은 90cm밖에 되질 않는다. 지게 진 사람은 지나다니기도 어려웠던 길이다. 피맛길, 피맛골로 표기된 안내판. 영어 표기를 같이 보면 영락없는 ‘피맛’ 길이요 ‘피맛’ 골이다. 더구나 안내판조차 없으니 그나마 역사를 조금 안다는 이도 이 길 에서 ‘장군의 아들’이 본 ‘피맛’을 연상할 밖에. 종로구 대사동에는 효종대 훈련대장을 지낸 李浣의 집터가 남아 있다. 李浣이 살던 집 그대로는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에 개축된 모습으로나마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집주인이 보존하고 싶어 보존한 것이 아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너무 좁아 포크레인은 물론이요 지게차조차 들어갈 수 없어서 다시 지을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가두시위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을 피해 도망간답시고 골목으로 뛰어 들었다가 출구를 못찾아 - 출구가 없어서 - 그냥 엮여 나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남아 있던 조선시대 골목의 자취는 무질서하고 어지럽다. 골목길에 관한 한 정연한 區劃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도 길이 이 모양이었을까. 그랬다면 애당초 里라는 말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茶山이 잘못 말했다. 풍속이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길이 어그러진 것이다. 길이 어그러졌기에 里는 사라지고 洞만 남았다. 서울은 어쨌든 인위적으로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도시를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길 닦는 일이다. 길은 人馬의 통행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도시를 구획하는 기준이니 한 때 서울시내 곳곳에 내걸렸던 “도시는 선이다” - 이 표어처럼 전혀 추상수준이 다른 두 범주를 무매개적으로 병렬하는 단순성이 박정희 시대의 문화수준이었다. 이 구절 뒤에 이어진 것은 “차선을 지키자”였다 - 라는 표어는 도시의 본질적 특성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 초에 한양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부터 이 순서가 어그러졌다. 서울 도심부 주택가의 필지 구조(복원). 골목길 끝에는 예외엾이 대형 필지가 자리잡고 있고, 그 좌우에 수많은 소형 필지가 늘어서 있다. 골목길 끝에는 고루거각이, 골목 양편에는 작은 집이 어울려 있는 모습이 쉽게 연상될 것이다. 새 왕조는 전국의 민정을 징발하여 도성 건설 공사를 추진하였지만, 길 닦는 일은 大路와 일부 中路에서 그쳤다. 왕조 정부는 길도 다 닦기 전에 급급히 개경에 살던 고관대작들을 이주시키면서 택지를 나누어 주었다. 나머지 길 닦는 일은 택지를 차지한 관료들 몫이었다. 그들은 먼저 집을 짓고, 집에서 큰 길까지만 길을 내었다. 그래도 이 때 닦은 길은 바르고 곧았을 것이다. 한양으로 환도한 직후인 태종 7년, 한성부는 “閭里의 각 길이 본래 平直하였다” - 이를 수평 수직으로 해석하여 조선 초기 서울의 도로망이 격자형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지만, 그냥 평탄하고 곧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 고 하였다. 하기야 일부러 길을 구불구불하게 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새로 난 小路 좌우에 작은 집들이 들어서면서 발생했다. 길을 따라 가지런히 짓지 않고 길을 침범하거나 심지어는 막아 가면서 지었다. 새 왕조가 周禮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적 理想을 구현하고자 했던 도시 공간은 바로 어그러져 버렸다. 가급적 집터를 넓히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도로망과 택지의 어그러짐에는 세속화한 지리도참설의 책임이 컸다고 생각한다. 지리도참설은 도읍의 위치, 궁궐과 종묘 사직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에서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학문적․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고심막측’한 논쟁과는 별도로 대중의 일상세계는 세속화․단순화된 ‘지식’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나무아미타불’만 입에 달고 살면 成佛할 수 있다는 원효의 가르침처럼, 도선의 지리도참설은 건물과 대문의 坐向에 대한 맹신적 태도를 낳았다. 처음의 골목길이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획일적 坐向은 고려왕조 이래 수백년간 익숙해 있던 풍수적 주택관과는 큰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길이 구획해 놓은 필지 위에 그대로 집을 짓기 보다는 방향을 틀어가면서 때로는 길 안쪽에, 때로는 길을 침범해 가면서 집을 지었을 것이고, 그것이 미로같은 小路網을 만들어 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조 정부가 길 모양을 원상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종 때에는 동왕 8년의 대화재를 계기로 防火墻 설치와 공동우물 굴착을 추진하였고, 세조 때에는 골목마다 里門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다수 주민을 내쫓고 주택을 철거하는 ‘폭거’를 감행하면서까지 도시를 재정비하고자 했다. 里門 설치는 일차적으로 치안대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里門 안은 막다른 골목이었으며, 里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행정적으로 파악하는 최소 단위의 집단이었다. 이 무렵 한성부의 행정편제는 部-坊-里('契’가 아니다)였다. 洞이라는 지명과 里라는 행정단위명이 함께 쓰였다. 그런데 茶山이 살던 무렵에는 里가 사라져 버렸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서울은 한차례 더 파괴되었고, 里門은 그 전에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더불어 행정구역 명칭으로서의 里도 사라졌으며, 坊役 부과 단위인 契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인적.공간적 파악단위를 통일하려 했던 조선 초기의 국가적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자연적 공간을 지칭하는 洞과 인적 파악 단위인 契만 남았다. 그 契조차 조선 말기가 되면 유명무실해졌다. 給價募立이 일반화되면서 役이 業으로 바뀌어 갔고, 契도 주소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대한제국기부터 주소지 표현에서 契 보다는 洞이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 주거지인 개천 이북 지대는 모두 洞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里든 洞이든 골목 안의 택지 구성은 기본적으로 같았다. 고관대작이 사는 큰 집이 막다른 집이 되고 그 앞으로 난 골목길 좌우에 작은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꼴을 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결코 가로지를 수 없는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을 터이지만 그래도 이웃이었다. 불이 나도, 염병이 돌아도, 도둑이 들어도 같이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상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골목끝 고루거각에 사는 부자 나리가 같은 골목 안에서 굶주리는 이웃에 慈善을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 보다는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대의식이었다. 서울의 골목(1926). 창의문 안쪽 효자동 부근이다. 문으로 난 큰 길에서 꺾어진 골목 안은 하나의 작은 도시 공동체였다. 일제 강점기의 시구개수사업으로 특히 서울 남부 일대의 골목 구조는 많이 바뀌었지만, 1980년대까지도 강북 도심지구에는 큰 필지와 작은 필지가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었다. 성북동이 그랬고 필동이 그랬다. 300평 이상 되는 저택들이 즐비한 부자 동네 바로 옆에는 마치 공식처럼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론 공간구조 자체가 도시 내부의 계급적 적대감을 증폭시키거나 완화해 주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몰인정한 이웃’이라는 평가를 즐기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살기 위해 계급적 이익을 일부 유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 강남 공화국 주민들은 이 적대감의 완충지대를 폐기하지 못해 안달이다. 재건축 단지에 의무적으로 임대 아파트를 지으라고 하면, ‘따로 떨어져 사는 게 가난한 놈들에게도 좋다’는 둥 되지도 않는 핑계거리를 늘어놓으며 ‘강남 공화국’의 문을 더 굳건히 걸어 잠그려고 야단이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자신들 주위에 쌓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그를 나누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가난한 이웃은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리는 배타적 장벽은 결국은 그들을 향한 증오와 질시의 장벽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장벽 안에서 안전하면 얼마나 안전할 것이며 행복하면 또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얼마전 작고하신 전우익 선생의 말씀이다. ※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족을 단다. 나는 전우익 선생과는 아무런 혈연적 관계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