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22 - 파리국(玻璃局) 근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한답시고 공중파 방송 3사의 대하사극 프로그램이 온통 고구려 이야기 일색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본래 사극을 잘 안 보지만 - 사극은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전문가적 오만 때문이 아니라 치사한 회피 심리 탓이다. 당장 옆에 앉아 함께 TV를 보는 가족들조차 내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 보고는, 모른다고 하면 “당신(또는 아빠) 역사학자 맞아?”하는 눈빛으로 쳐다 본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몇마디 수작이 오고 간 다음에는 으레 역사학자 대접해 준답시고 사극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 일쑤다. 내가 사극을 잘 안 보는 것은 다만 이런 귀찮고 성가신 일들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다른 사람에게까지 보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불가피하게 사극 장면이 돌아가는 TV 앞에 앉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럴 때만 공교롭게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TV 사극이 다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꼭 ‘아무리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절대로 말이 될 수 없는’ 장면들이 눈에 띄곤 한다. <사진 1> 1900년대 서울의 주택가. 같은 한옥이라도 서울의 ‘도시형’ 한옥은 한정된 대지(垈地)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ㄷ자형이나 ㅁ자형으로 만들어졌다. 좁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으로 빙 둘러 건물을 앉혔으니 채광에 곤란을 겪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런 주거 형태가 사람들의 건강에 보탬이 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에도 부득이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방송 중인 TV 앞에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고역을 치렀는데, 등장인물들의 복색이 화려 찬란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 예전에 사극의 복식 고증을 담당하는 의상학 전문가로부터 이 일의 고충에 대해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대본상으로나 PD의 연출 방식에서나 별 차이가 없어야 마땅한 두 인물이 시청자들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경우, 상대적으로 ‘찬 밥’이 된 캐릭터를 맡은 연기자가 복식이라도 좀 눈에 띄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차피 100%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한 만큼 60%나 30%나 거기에서 거기라는 심정으로 그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 보니 시청자들 처지에서는 복식에 관한 한 ‘대하역사드라마’를 보는 것인지 ‘첨단 SF드라마’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시청자들이 그런 장면에 익숙해진 나머지 삼국 시대가 조선 시대보다 훨씬 풍요로웠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도대체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게 된다 해도, 그건 복식 고증자의 책임만은 아니다 - 건물 창마다 정교하게 붙어 있는 ‘창호지’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직업적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사진 2> 1888년 경복궁 건청궁 경내에 완공된 관문각(觀文閣). 건축 양식으로 보나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보나 분명 유리창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A.D. 105년이고 고고학적으로는 그보다 약간 앞서지만 어쨌든 이 드라마가 설정하고 있는 ‘주몽 시대’까지는 창호지로 쓸만큼 일반화되지 못했다. 글씨는 죽간(竹簡)에 쓰면서도 창호는 종이로 덮는 ‘희한한 시대’가 눈 앞에 연출되고 있었으니 한숨을 내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물론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창호지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인의 3대 발명품 수위에 있는 종이는 단지 기록 문화의 발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생명 연장에도, 나아가 도시화의 규모와 정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사진 3> 국립 영빈관이었던 대관정(大觀亭). 1897년. 유리창을 사용한 건물은 외부의 빛과 시선을 차단, 통제하기 위한 부속 장치로 커튼을 필요로 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시(또는 서울)는 없는 게 없이 풍족한 공간이고 농촌(또는 시골)은 여러가지가 부족한 빈곤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물질의 총량에 대해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물질에 관한 한, 도시는 오히려 상대적 절대적인 결핍 상태에 놓여 있다. 도시에는 언제나 맑은 물, 신선한 먹거리, 깨끗한 공기, 따뜻한 햇빛, 넓은 뜨락 등이 부족했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그 부족이 극단화되었다. 쥐나 개같은 동물도 좁은 공간에 여러 마리를 몰아 넣으면 동종(同種)에 대한 공격성이 강화되어 자기들끼리 물어 뜯고 뜯기다가 죽는 일이 생긴다. 만약 이 공간이 볕이 들지 않고 바람마저 통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라면, 한 개체(個體)의 사소한 감염이 전체를 폐사(斃死)로 이끌 수도 있다. 앞에서 중세 도시의 크기를 규정한 여러 요인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이 가치 없는 - 마르크스의 ‘가치론’적 의미에서 - 요소들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생산력적, 기술적 토대를 만들지 못했던 것도 도시 확장을 제약한 중요 배경이었다. 중세와 근대 초입에 페스트와 콜레라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습격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도시에서 벗어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진 4> 1898년에 완공된 명동성당 본당과 주교관. 명동성당은 창호를 유리로 했을 뿐 아니라 내부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할 만큼 유리의 활용도를 높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창(窓)을 안에서 밖을 내다 보기 위한 시설 - 그 탓에 ‘마음의 창(窓)’이란 시어(詩語)도 나오고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라는 신문 광고 문구도 생겨났다 -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건축물의 통풍과 채광을 조절하는 기능이 더 우선이다. 닥나무 섬유질을 성글게 엮은 창호지는 찬바람과 뜨거운 햇살은 막되 제한적인 통풍과 채광은 허용하는 매우 우수한 차단재였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동아시아 도시들이 유럽 도시들보다 더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종이를 붙인 창과 문 - 한옥은 거실이든 침실이든 방문에도 모두 창호지를 붙였다 - 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옛 유럽의 도시 건물들에서는 햇빛과 공기가 결합되어 존재했다. 햇빛을 보기 위해서는 찬바람을 맞을 각오를 해야 했고,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는 햇빛도 차단해야 했다. 커튼이나 나무판자로 막은 창은 모두를 막거나 모두를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진 5> 1896년 러시아 교관 지휘하의 시위대와 병영. 건물 좌측의 유리창이 확연하다. 산업혁명 직후 유럽 도시들에서 인구가 갑작스럽게 늘어남에 따라 건물의 고층화 - 당시의 기준에서 - 를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들 건물은 거실도 침실도 작업장도 모두가 밀폐되고 어두운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겨울철,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햇빛을 포기해야 하는 ‘역설의 공간’은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갉아 먹었다. 습기와 냉기, 악취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하게 찌든 얼굴이 이 시대 도시 노동자의 얼굴이었으니, 전통적인 도시 부르주아들은 이동의 불편을 무릅쓰고 교외로 나가는 길을 택했다. 이 문제를 크게 완화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유리창’이었다. 나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초거대 도시에 밀집해 살면서도 전염병’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된 데에는 파스퇴르나 코흐보다도 유리창의 은덕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햇빛은 강력한 살균력을 가지고 있고, 인체가 일부 비타민을 합성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한다. 유리창은 햇빛의 이 기능을 거의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차갑거나 더러운 외기를 차단하면서 통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원재료 자체가 모래인 만큼, 석재나 콘크리트와 탄성이 거의 같아 온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잘 균열되지 않는 우수한 건축자재이기도 하다. 창호지는 커튼이나 판자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유리보다는 ‘성능이 떨어지는’ 차단재였다. 지금도 한옥과 창호지의 우수성을 찬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유리창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서울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 6> 보신각 처마 밑의 유리 가스등. 1900년. 유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생산해 왔다. 신라 고분에서도 유리로 만든 ‘구슬’은 흔히 출토된다. 조선시대에도 유리세공을 업으로 하는 장인(匠人)들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경국대전 사전(事典)에는 유리장(琉璃匠)에 관한 조항이 없다. 유물 중에도 유리 제품이 드문 것으로 보아 유리장인이 있었다 해도 가내 공업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1883년, 의외다 싶을 정도로 느닷없이 파리국(玻璃局)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관서(官署)가 통리아문 산하에 만들어졌다. 파리(玻璃)란 파리국 - 페르시아의 한역(漢譯) - 을 뜻하기도 하고 파리국에서 만든 유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 무렵 ‘국(局)’이라는 명칭을 쓴 관서(官署)들은 중국의 초상국(招商局)처럼 대개 관독상판형(官督商辦型) - 정부 관리가 감독하고 상인(商人)들이 운영하는 형식 - 기업이나 제조장들이었다. 신문을 발간한 박문국(博文局), 보부상을 집합시킨 혜상공국(惠商公局), 담배를 가공하던 연화연무국(蓮花烟務局), 떡 제조장이던 두병국(豆餠局), 사진촬영을 하던 촬영국(撮影局), 돈 찍어내던 전환국(典圜局), 조운(漕運)을 전담한 전운국(轉運局) 등. <사진 7> 1900년의 경성우편국. 이 무렵부터 서울 도심부 곳곳에 석조 건축물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건물에는 빠짐없이 유리창이 사용되었다. 1880년대 초반 조선 정부의 신문물 도입 정책은 일견 어수선해 보일 수도 있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어려운 재정 형편에서나마 조선보다 앞서 서양 문물을 수용했던 중국과 일본의 경험을 나름대로 곱씹은 흔적이 엿보인다. 생사(生絲) 수출을 위한 잠상공사(蠶桑公司)나 광산 개발을 위한 광무국(礦務局), 조운 개혁을 위한 전운국(轉運局) 등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갓 조우(遭遇)한 나라에서 대외 수지(收支)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또 연무국(烟務局)이나 양춘국(釀春局)은 담배와 술 - 1907년 통감부 간섭 하에서 주세, 연초세, 가옥세의 신삼세(新三稅)가 제정된 이래, 담배는 최근까지도 전매품이었고, 술 역시 내내 물품 값에서 세금의 비중이 가장 큰 기호품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 - 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해 보려는 의도에 따라 만든 것이었다. ‘백해무익’한 술과 담배에 중과세(重課稅)하는 것은 근대 국가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식 같은 것인데, 조선 정부 역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이 점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요컨대 1880년대 초반 시점에서 조선 정부는 이미 조선 산업 경제의 장기적 변화 방향에 대해 흐릿하나마 나름대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이들 국(局)이나 공사(公司)는 모두가 색다르고 선구적인데, 오랫동안 도시사에 관심을 가져 온 내게는 그 중에서도 파리국(玻璃局)이 가장 특징적이다. <사진 8> 1903년 정동의 미국공사관. 프랑스, 러시아, 영국, 일본 등이 다투어 웅장한 석조 공관을 짓는 동안에도 미국은 한옥 공관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종이 창호는 아무래도 불편했던지 창호는 모두 유리창으로 바꾸어 놓았다. 파리국(玻璃局)은 한강변 모래밭에 설치한 탓에 삼호파리국(三湖玻璃局) - 삼호(三湖)는 동호, 한강, 서강의 삼강(三江)을 말지만, 대개는 오강(五江)이나 팔강(八江)처럼 한강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 이라고도 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용산 파리국이라는 용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한강대교 북단 주변이었던 듯 하다. 나는 어릴 적에 한강변 종점 동네에 살았는데, ‘국군의 날’에 한강 백사장에서 벌이는 에어쇼를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제 강점기에도 한강대교 주변은 특별히 모래가 많고 좋은 곳이었다. 서울 인근에 유리 제조장을 만들 생각이라면, 이 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광나루 모래도 좋기는 했으나 도심과 너무 떨어져 있었다. 유리는 잘 깨지는 물건이다. 소달구지 위에서 깨지는 유리 갯수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소비지와 생산지가 가까운 편이 좋았다. <사진 9> 1905년에 창설된 적십자병원. 병원은 살균을 위해서도 특히 채광이 중요했다. 그러나 제중원이나 광제원 창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 모래를 재료로 하여 판유리를 대량으로 생산하면 좋으리라는 생각은 외아문 협판이던 묄렌도르프 - 일명 목참판(穆參判) - 의 머리에서 나왔다. 산 설고 물 선 타지(他地)에 나가면 먹고 자는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마련이지만, 음식과 주거는 이질감을 느끼는 대상과 조건이 다르다. 음식에서는 주로 문화권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주거에서는 도농간(都農間)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서울 사람이라도 농촌에 가서는 음식에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흡사 옛날로 돌아간 듯한 주거 공간 - 최근 20여년 사이에 우리나라 농촌의 주거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요즈음에는 농촌에 가서 며칠씩 배설을 참아 내는 극기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아이는 없다 - 은 여러 모로 사람을 당황케 한다. 때로 당혹감 보다는 ‘포근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느낌을 곧이 곧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촌스럽다’거나 ‘덜 떨어졌다’는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사진 10> 1970년대 정릉의 문화주택군. 1970년대까지도 유리는 흥청망청 소비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유리창의 크기를 건물 전면으로 확대할 수 있는 부자(富者)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주택이지만 유리창 크기는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이 땅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묄렌도르프 역시 모든 것이 낯설었을 터인데, 불편은 감수할 수 있어도 위험은 참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묄렌도르프 이래 서울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하나 같이 조선인의 주거 문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불평과 투정을 늘어 놓았다. ‘자기 나라에서는 실내에 들어갈 때 모자는 벗고 신발은 신은 채 들어가는데, 조선인은 거꾸로 신발을 벗고 모자는 쓴 채로 들어간다’느니, ‘조선 사람이 극구 권해 준 아랫목에 앉았다가 엉덩이 살이 바베큐 요리가 되는 줄 알았다’느니 하는 말들이었는데, 이는 애교로 넘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는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생기는 일이지, 자기 집에서야 종이 장판 위에 다시 양탄자를 깔든지, 부엌 아궁이를 없애고 벽난로를 만들든지 남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정작 그들이 크게 곤란을 겪은 것은 불투명하면서도 일방적인 사생활 침해에 속수무책인 조선 가옥의 창(窓) - 창호지는 손가락에 살짝 침을 묻혀 누르면 소리 없이 구멍이 뚫린다. 그 구멍으로 실내를 엿보는 것은 종이 창호가 출현한 이래 지속된 ‘조선의 관습’이었다. 하물며 신혼방도 엿보는데 서양귀신이 자는 방을 엿보는 것쯤이야 도의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직사광선을 모조리 차단해 버림으로써 햇살에 대한 유럽인들의 선천적 갈증을 철저히 무시하는 조선 가옥의 창(窓)이었다. 조선 정부가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한 집은 지금의 종로구청 부근, 옛 사복시(司僕寺) 옆의 규모 있는 기와집이었는데, 당시 도심부 기와집이 모두 그랬던 것 처럼 채광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집이었다. 당장 집 구조야 바꿀 수 없겠지만, 창이라도 몽땅 유리로 갈아치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게다. <사진 11> 1968년에 완공된 명동 유네스코 회관. 커튼월 공법으로 지음으로써, 유리를 창문용 자재가 아니라 외장재로 사용한 이 땅 최초의 건물이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천거로 Joseph Rosenbaum(독일어로 장미나무) - 조선 이름으로는 나생보(羅生寶) - 이라는 고상한 독일식 이름을 가진 미국인이 관영 유리 제조공장의 관리 책임자 자격으로 입국했다. 그 직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삼호(三湖)에 파리국(玻璃局)을 설치하고 그를 기사(技師)로 임명했다. 그는 도성과 용산 일대를 둘러보고 유리 제조가 사업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일시 귀국해서는 수천 달러의 자금을 모아 - 이는 아마 그의 과장일 것이다. 도박판에서 잃은 사람의 돈을 모두 합하면 판돈의 몇 배가 되고, 사업하다 망한 사람의 자산규모는 거의 재벌급에 달해 있었기 마련이다 - 1884년 재입국했다. 그러나 그는 곧 유리보다는 다른 쪽이 더 사업성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당시까지 서울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설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유리창 고객이라야 기껏 외국 공관이나 선교사들에 불과했다. ‘수천 달러’의 대자본가에게 유리창 시장은 너무 좁았다. 그는 판유리 제조 기술을 배우겠다는 조선 정부의 희망을 묵살하고 사업 목표를 ‘성냥 제조’로 변경했다. 불씨 꺼뜨리는 것만으로도 소박 사유에 해당하는 나라, 옆집에 불씨 얻으러 다니는 아낙네를 대놓고 손가락질하는 나라였으니 성냥의 수요는 무궁무진해 보였다. 개항 직후 자기황(自起熿) - 성냥 - 은 석유와 더불어 조선 내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된 신물품 중 하나였다. <사진 12> 1980년대 이후 초대형 건물을 온통 유리로 덮는 것은 일종의 트랜드가 되었다. 동 틀 무렵이나 석양 무렵에 보석처럼 빛나는 이들 건물에서 판 옵티콘의 음침한 그림자를 보는 사람은 극소수 별종들 뿐일 것이다. 로젠바움의 성냥 공장 건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배신의 끝이 달콤할 수만은 없는 법인가 보다 - 나는 이 말을 결코 믿지 않는다. 다만 자식 교육에는 때로 이런 거짓말도 필요하다 -. 그는 애초 유리 공장으로 예정했던 부지 인근에 성냥 공장을 지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1885년 여름의 홍수로 쌓아 놓은 자재가 모두 유실되어 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예전에 조선 정부가 부여해 준 “파리국 기사” 자격 뿐이었고, 남은 길은 그걸 빌미로 ‘밀린 임금’을 받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길 뿐이었다. 어쨌거나 장미나무의 뒷 얘기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없다. 문제는 다시 판유리다. 188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건축물이 변하는 모양새로 보아서나 해관의 수입품 물목으로 보아서나 국내에서 판유리가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장미나무가 용산에 뿌린 씨앗을 거둔 조선 사람이 따로 있었거나 일본인이 새로 사업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13> 아직까지는 서울의 대표적 랜드마크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63빌딩. 역시 온통 유리로 뒤덮여 있다. 파리국(玻璃局)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으나 아마도 유리는 남았을 것이다. 더불어 파리국이 있던 용산은 대한제국 시대에 들어와 공업 지대로 변해 갔다. 전환국(典圜局), 군부 총기제조소와 피복제조소, 궁내부 정미소 등이 용산에 착착 둥지를 틀었고, 그 일대 사람들에게 ‘공장 노동’이라는 새로운 규율을 가르쳤다. 서울에서 최초의 여성 공장 노동자가 출현한 것도 궁내부 정미소에서였다. 일제 강점기 이 일대에 대규모 철도 공작창이 들어선 것도 먼저 이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880년대 중반부터 창호에 유리를 붙인 건물이 서울 공간에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복궁 경내에 양관(洋館)인 관문각(觀文閣)이 준공된 것은 1888년이었는데 그 이후로 서울에 새로 지어진 외국 공관과 종교시설에는 물론 한옥을 개조한 공관이나 병영에도 유리창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종로 길가에서 높이 내걸려 희끄무레하게 밤을 밝힌 가스등에도, 종로 한복판을 기세 좋게 내달린 전차 창문에도, 방 벽 한복판에 내걸린 사진 액자틀에도, 판유리는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종이 창호도 나름대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지만, 끝내 유리창의 매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양옥(洋屋) - 판자집은 물론이고 시멘트 벽돌집도 양옥으로 치지 않았다. 1970년대 초까지, 양옥(洋屋)은 붉은 벽돌집에 국한되었고, 변두리에서는 그 수도 많지 않았다 - 에서나 모든 창호를 유리창으로 하고 모든 방문을 나무 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서민 주택에서는 창호든 문짝이든 종이로 덮어 씌운 것이 한 둘은 있게 마련이었다. 유리창은 채광에 더 없이 좋았고 창문을 닫고도 밖을 내다 볼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비싼 데다가 잘 깨지기도 했다. 지금 40대 남성 중에서 어린 시절 유리창 깬 죄로 야단 맞은 일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말썽꾸러기를 즐겨 주인공으로 삼는 어린이용 명랑 만화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 유리창 깨는 장면이었다. 그 때에는 유리창 깨는 일이 가장 큰 사고이면서 가장 빈발하는 사고였다. 그러나 지금, 초거대 도시 서울의 초대형 건물들은 아낌 없이 판유리를 소비하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조차 통유리로 할 수 없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는 외벽 전체를 유리로 도배한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더구나 그 유리들은 들여다 보고 내다 보는 쌍방향의 시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창호지 시절과는 정반대로 안에서는 내다 볼 수 있되 밖에서는 들여다 볼 수 없는 유리들, 빛조차 반사해 버리는 유리들이 도시를 지배하는 건조물들을 감싸고 있다. 유리로 둘러싸인 초고층 건물들은 도시 전체를 상대로 하는 판옵티콘(Pan Opticon) - 보통 일망(一望) 감시장치 정도로 번역한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으로서,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