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24 - 시계탑(01) 전우용(근대2분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운 노래는 ‘학교종이 땡땡땡’으로 시작하는 ‘학교종’이었다. 그 무렵 이 노래는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미리 배워 두는 것이어서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무슨 ‘꼬마용 국민가요’쯤 되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최근까지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우는 첫 번째 노래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내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한 다른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무슨 곰 세마리니 악어떼니 하는 가족주의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인 노래가 아니면 뽀뽀뽀나 텔레토비같은 유아용 방송곡을 먼저 배우고 바로 만화영화 주제가로 넘어 간다. 노래 부문에도 조기교육의 열풍이 불어닥쳐 ‘초등 1학년용 노래’는 그냥 건너 뛰게 된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는 이제 ‘학교종’이 더 이상 현실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데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당장 나부터도 ‘학교종’ 소리를 듣고 등교한 기억은 없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鍾)’ - 한자어의 종(鍾)이나 영어의 bell이나 그게 그거지만 한국인들의 일상 언어에서 bell은 아무래도 가볍고 경망스러운 소리를 내는 전기식 기계 장치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그래서 수업종은 학교종과 달리 ‘따르릉’으로 표현된다 - 소리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일 10여번 이상을 지겹게 들어왔지만, 등교를 알리는 학교종 소리는 아예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용 초등교육기관은 ‘보통학교’로, 일본인용은 ‘소학교’로 불렀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에 따라 이 두 학교를 모두 심상소학교로 개칭한 것은 1938년이었고, 1941년에는 다시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그 군국주의적 이름을 우리는 해방 후에도 참으로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 에는 아예 종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진 1) 일제강점기의 서당. 학동들이 어떤 시계에 맟추어 서당에 모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분명 대략적인 시간은 정해져 있었겠지만, 이 아이들은 아마도 지각(遲刻)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재작년(2005년) 초에 신문지면을 통해 이 노래를 작사 작곡했던 김메리가 100살 넘게 살다가 미국에서 작고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가 군정청의 요청으로 이 노래를 지었던 해방 직후만 해도 ‘시간 관념’을 갖고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윤석중이 1940년에 발표한 동시 “넉점 반”의 앞 구절은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였다. 이 동시는 넉점 반이라는 시간을 알아낸 아이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한참 놀다가 집에 들어가 ‘엄마 시방 넉점 반이래’라고 때늦은 보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무렵 여염집의 시간생활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시간에 대한 궁금증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기는 했지만, 방 벽에 시계를 걸어 두고 있는 집은 무척 드물었으니 그를 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또 어렵사리 물어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간 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숫자와 화살표 모양 바늘 사이의 상관관계를 배울 수 있는 아이도 많지 않았다. 사진 2) 1886년 배재학당 신축공사. 1890년경 배재학당의 시간표는 서양시간으로 15분 단위까지 표시했다. 15분은 조선시대의 1각(刻)에 해당하는 것인데, 일제 강점기는 물론 최근까지도 영화관의 영화 상영시간표는 15분을 유의미한 구분단위로 하여 짜여졌다. 다만 이 15분 단위가 서양에서 유래한 것인지, 조선시대 이래의 관행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교육열이 부쩍 높아진 1920년대부터는 보통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그 시험 문제란 것이 한쪽 귀 없는 사람 얼굴을 그려 놓고는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든가, 한 쪽에는 사과 다섯 개, 다른 쪽에는 네 개를 그려 놓고 어느 쪽 사과가 많으냐고 묻는 정도였다. 시계 보는 법은 저학년을 넘은 뒤에야 배우는 ‘고급 단원’이었다. 아이들 뿐 아니라 대체로 근대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 부모들에게도 ‘시간 지키기’는 쉽지 않은 규율이었다. ‘학교종’은 그런 사람들, 시계를 본 적도 없고 볼 줄도 모르는 학생과 부모들에게 등교시간을 가급적 정확히 알리기 위한 기계장치였다. 해방 직후 ‘학교종’ 노래가 음악 교과서 제일 앞 장에 수록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아울러 이로써 아이들은 ‘시간 지키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근대적 사고와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은 즐겁고 경쾌하게 ‘학교종’ 노래를 부르고 학교종 소리에 맞춰 등교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생동안 시간의 지배를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근대를 ‘변화가 일상화된 시대’로 볼 때, 사람들의 ‘시간관념’과 ‘시간을 분할하여 의식하는 정도’는 근대적 변화의 속도와 대략 일치해 왔다. 조선시대 아이들은 ‘동서남북’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시간을 알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법을 먼저 체득한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가 배가 고프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분유를 주고 시간에 맞추어 재우며 또 시간에 맞추어 깨우려고 애쓴다. 일어나는 시간, 이 닦는 시간, 화장실에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다 정해져 있으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은 시간별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그렇게 어느 사이엔가 시간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의 일상적 행위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심지어 매일같이 ‘학교종’이 울리던 해방 직후만 해도, 시간의 힘이 이토록 세지는 않았다. 옛 사람들에게 시간은 초나 분 단위로까지 세분하여 인식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창(東窓)이 밝아 오거나” “노고지리가 우지질 때” 일어나면 되었고, 지칠 때까지 - 생체 리듬에 따라 - 또는 해 질 때까지 - 천체 리듬에 따라 - 일하면 그만이었다. 언제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기계적 리듬 - 그런 기계 자체가 없었지만 - 은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시간이란 사람이 인지하는 천체의 운행속도, Tempo - Time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다 - 그 자체였다. 천체는 복합적인 원운동을 하는 실체이니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주기를 가지고 반복된다. 지구의 공전 주기[해]와 자전 주기[날], 달의 공전 주기[달]가 수학적으로 딱 떨어지는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천체의 순환에서 일정한 법칙성을 찾고 그를 이해하려 들었다. 특히 농경(農耕)이 시작된 이후로는 파종, 제초, 수확 등의 시점을 알려주는 농사력(農事曆)을 만들고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더불어 대략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자연재해도 가급적 정확히 예측해야 했다. 자연현상이 반복되는 주기를 이해하고 그를 일정한 단위로 구분짓는 것, 그 구분선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날들에 인간의 특정한 행위 - 축제, 노동, 휴식, 금기 등등 - 를 대응시키는 일 등은 이미 신석시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진 3) 미쓰코시백화점 신관 개점 광고. 좌측 하단에 오전 9시 개점, 오후 9시 반 폐점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개폐점 시간을 명기하는 상업시설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의 명기(明記)’는 근대성을 표상하는 구실을 했다. 그런데 천체 운행의 법칙성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멀리 떨어진 여러 장소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들을 한 곳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대 국가들의 거대한 수도(首都)는 물리적 구조물일 뿐 아니라 지적(知的) 구조물 - 천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 이기도 했다. 더불어 ‘집중할 수 있는 힘’이 곧 권력이 되었으니 고대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등지에서 천문학과 함께 신격화된 초월적 권력이 출현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천체의 운행에 관한 ‘비밀의 열쇠’를 손에 넣은 권력은 그것으로써 하늘 = 신(神)과 자신 사이의 혈연적 관계를 입증하고자 했으며, 그런 시도는 예외 없이 성공을 거두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청동기 시대 언저리에서 보편화된 하늘에 신(神)이 있다는 믿음, 또는 하늘은 신의 영역이라는 믿음과 맞물려 하늘의 움직임을 알고 그에 따라 인간이 대처해야 할 방도를 알려 주는 자는 곧 신(神)이거나 신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한 해의 날수를 정하고 길고 짧은 달을 정하는 권리는 신(神)을 대행하는 자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된 권리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은 하늘 그 자체였고, 그 주기적 흐름은 하늘의 뜻이었다. 그러나 천자(天子)든 신의 아들이든, 그는 하늘 또는 신의 대리자였을 뿐 결코 ‘신(神), 그 자신’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며 복종한 대상은 따로 있었고, 그 대상이 주재하는 ‘자연적 시간’은 그 대리인이 관리하는 ‘인위적 시간’과는 어쨌든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부단히 개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권력의 개입 없이도 자연의 주기적 변화 법칙을 터득하고 그에 맞추어 자신의 생애주기와 일상(日常)을 조직해 왔다. 자연이 사실상 물리적 환경의 모든 것이었던 농촌에서, 사람들은 낮과 밤, 또는 그 각각을 몇 개의 큰 조각으로 나누는 이상의 시간 분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짔으며, 배 고프면 밥을 먹었고 피곤하거나 일에 싫증이 나면 쉬었다. 하루를 수백개의 분(分)이나 수만개의 초(秒), 또는 100개의 각(刻)으로 나누는 따위의 일은 본질적으로 농촌의 자연적 삶과는 무관했다. 권력은 한 해, 한 달의 날수를 정하는 것 뿐 아니라 하루를 다시 수십, 수백개의 조각으로 나누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렇게 분할된 조각들에 일상적 삶을 맞추어야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 탓에 낮과 밤을 각각 몇 개의 조각으로 분할하여 표시하는 기계인 시계는 권력과 하늘 = 신(神) 사이의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 주임무였고, 그 분할된 시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달리 선택해야 할 문제였다. 이 기계를 발전시키고자 한 지적(知的) 노력의 결실이 근대(近代)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점을 별도로 한다면, 서력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기계의 발명은 한갓 권력자의 진귀한 장식품 목록을 늘리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다만 권력자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공간적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 혹은 권력자의 의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공간적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다소간 이 기계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숱한 기술자들의 창의적 지혜와 땀의 소산인 정밀한 천문관측기구들은 권력이 요구하는 캘린더와 시계를 만들기 위한 중간재에 지나지 않았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캘린더와 시계는 각 문명권에서 하나의 독립된 세계, 또는 천하(天下)를 구획하는 기준이었고, 그 독립된 천하의 주인은 이 기계를 통해 하늘 = 신(神)을 대신하여 시간을 지배하는 권리를 표현했다. 그런만큼 이들 기계는 그 자체로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범인(凡人)은 이 신성한 기계를 만들거나 소유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땅바닥에 막대기를 꽂거나 양초나 향을 태우는 등의 소박한 시간 측정까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로 표시되는 시간은 ‘조각난 시간’으로서 신성(神性)의 극히 일부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사진 4) 1935년 미쓰코시 백화점의 내부. 오늘날의 백화점 건물들은 고객을 가급적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내부에 시계도 걸지 않고 창도 크게 내지 않지만 - 이는 오늘날 상업용 건물 인테리어의 우선적 고려사항이다 - , 당시에는 ‘고객이 머무는 시간’ 보다는 공간 내부의 ‘근대적 권위’가 더 가치 있게 취급되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의 벽걸이 시계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걸린 공간 내부의 권위를 격상(格上)시키는 구실을 했다. 시간을 분할하여 측정하는 기계, 장치와는 별도로 시간을 알리는 기계에도 신성성이 담겨 있었다.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종(鍾)은 시간을 알리는 기계 장치로서 - 악기로서가 아니라 - 세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종(鍾)은 다른 어떤 소리보다 멀리 퍼지고 또 길게 울리는 금속성 공명음을 내는 악기일 뿐 아니라 그 표면에 신성한 상징성을 담은 글씨나 문양 등을 자유롭게 새길 수 있는 악기이기도 하다. 콰지모도가 노틀담 성당 종탑에서 울려 대던 종도, 어린아이가 엄마 찾는 울음 소리를 내던 에밀레종도 - 이른바 한국적 정서의 꽃이라고들 하는 ‘한(恨)’ 중에서도 가장 질기고 망극한 것이 자식 잃은 어미의 한이다. 옛 남도(南道)에서는 무당 일이 시어미에서 며느리로 전승되었다고 하는데, 그 신내림 절차 중에는 며느리가 낳은 자식을 ‘희생시키는’ 행위도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어린 자식을 바침으로써 신(神)과 소통(疏通)하는 길을 넓힐 수 있다는 믿음은 보편적이었던 듯 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치고자 했던 희생도 다름 아닌 그 아들 이삭이었다. 에밀레종 설화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든 아니든, 그 종에 짙은 한(恨)이 서려 있다는 믿음은 종 자체의 신성성을 한껏 드높이는 결과를 낳았으니 다 알다시피 이 종의 공식 명칭은 ‘성덕대왕 신종(神鍾)’이다 - 모두 신의 뜻을 소리로 전하는 성물(聖物)이요 신물(神物)이었다. 영어 clock의 어원은 중세 라틴어 cllocca인데, 이 말의 뜻도 다름 아닌 ‘종(鍾)’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