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통신사와 카부끼

BoardLang.text_date 2007.12.18 작성자 하원호

통신사와 카부끼


하원호(근대사 1분과)


1969년 12월 일본의 국립극장에서 상연되었던 [칸진칸몽테쿠다노하지마리(漢人韓文手管始)]는 일본의 전통 연극인 카부끼였다. 속칭 [당인살해(唐人殺害)]라고 불린 이 연극은 1764년(영조 40년) 일본에 간 통신사(通信使)일행이 막부(幕府)가 있던 에도에서 공식적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 오사까에 도착했을 때 일어난 사건에서 테마를 가져온 것이었다.

오사까에서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기만 하면 되는 통신사 일정의 마지막 단계라서 정사(正使) 이하 일행은 느긋한 마음으로 오사까의 관리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있었다. 바로 이때 영빈관 북어당(北御堂)의 종려(棕 )라는 방에서 통신사의 일원인 최천종(崔天悰)이라는 인물이 살해되었다. 창으로 목을 찔려 죽어 있었다. 이 해 4월 7일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최천종은 도훈도(都訓導)로서 나졸들의 지휘를 담당하는, 통신사 일행 중에서도 무시못할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외교사절의 일원이 살해당한 이 사건은 당연히 국제적 문제로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오사까만이 아니라 일본전역이 떠들썩했다. 양국간의 풍속 때문에 통신사일행과 막부의 관리간에 가끔 말다툼은 있었지만 살인사건은 처음이라서 이 지역 치안 관리들이 수사에 착수하는 한편, 막부에서도 검찰관계자를 급히 파견했다.

목격자도 없고, 요즘처럼 지문감식을 하는 과학적 수사력도 없던 시기여서 한동안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지역의 한 하급 통역관, 스즈끼 덴조오(鈴木傳藏)라는 관리가 사건 당일부터 행방불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시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스즈끼는 탄바(丹波)방면으로 도주하던 도중, 이께다(池田)라는 곳의 한 여인숙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5월 3일에 처형되었다.

당시 통신사의 정사였던 조암이 남긴 {해사일기(海 日記)}에 의하면 스즈끼의 진술로는 거울을 잃어버린 최천종이 그를 의심해서 채찍으로 때렸고 그 원한 때문에 죽였다고 한다. 공식적 사건의 진상은 이 정도로 결말이 났는데 일본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설이 남아있다. 그 두 사람이 한 여자를 둘러싼 치정관계였다느니, 심지어 조선인삼을 밀수입한것에 얽힌 배당관계로 인해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보는 기록도 있다.

당시 일본의 매스컴 역할을 하던 가부끼의 관계자가 이 흥미로운 사건을 놓칠 리 없었고, 이미 이 사건 발생하기 이전 상연하던 연극에 이 사건을 가미해서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가부끼가 정식으로 공연된 것은 사건 발생이후 3년만인 1767년이었다.

제목은 [세와료리 스즈끼보오쵸오(世話料理 丁)]이다.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당인(唐人; 당시 일본인은 외국인을 모두 이렇게 불렀다)을 접대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 관리가 요리집 접대부에게 빠져 노닥거리다가 국가의 중요한 보물을 분실한다. 그것이 당인들의 간계(奸計)라는 것을 알아차린 쯔즈끼 덴시찌(續傳七; 이름의 음을 약간 바꿔 놓았다)가 보물을 되찾으려다가 당인을 살해하고 잘못해서 한 사람의 관리까지 죽여버린다. 살해된 관리의 아들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덴시찌가 숨어있는 절에 뛰어들지만 중들의 애원 때문에 일단 놓아 주었다가 끝내는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보물 분실이나 원수를 갚는 이야기는 카부끼의 정석대로이지만 제목에 '스쯔끼'라는 이름을 넣어 은연 중 그 사건을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국제적 대사건을 연극의 대상으로 삼는데 심기가 불편해진 막부쪽의 방해로 이틀만에 상연이 금지되었고, 개작해서 다시 상연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아 1789년 초연된 것이 이 글의 머리에서 언급한 연극이었다. 이 연극은 앞의 것보다 많이 변형되어 막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이 살해되는 것으로 만들고, 일본인 간의 치정과 권력투쟁을 그린 전형적 가부끼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도 이 연극이 일본의 극장에서 공연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전통연극인 가부끼가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에서 대본만도 여러 종류인 이 연극이 공연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두어해 전인가 일본에서 통신사가 온 적이 있다. 그 전해 동경에서 열렸던 [한국문화통신사]에 대한 답방형식을 갖춘 [일본문화통신사]의 일환으로 공예전 등과 함께 일본연극도 상연되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전통적 카부끼를 공연해야 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결정되었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는 예루살렘판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카부끼판이 있는데 그 공연은 예루살렘판이었다.

요즘도 [일본통신사]가 오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의 통신사는 조선에서 가는 사절을 가리키는 것이었지 일본에서 오는 사신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사신은 [왜사(倭使)]라고만 불렀다. 조선의 통신사는 막부시대 일본에서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통로였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목에 설치된 숙소에는 그 지방의 문인, 화가, 의사, 승려 등 당시 일본의 일급문화인들이 달려가서 자작한 한시(漢詩)의 평을 청하거나 서화에 휘호를 부탁하기도 하고, 또 필담을 통해 유학에 대한 해석이나 중국과조선의 사정과 역사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항상 장터처럼 붐볐다. 현재도 일본에 많이 남아있는 통신사의 글씨나 그림은 이들이 얻어 가보로 물려내려온 것이었다. 따라서 통신사란 이름은 당시 일본에서는 바로 선진문화 그 자체였고 쇄국을 하던 일본으로서는 통신사를 통해서만 세계의 움직임과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네델란드 같은 서양과도 통교를 했지만 나가사키의 조그만 섬에서 무역만 할 뿐 문화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이같은 통신사가 지금에 와서는 [일본통신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까지 되었으니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 근대이후 국가간의 관계란 게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없고 상호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만큼 저쪽이 통신사라고 자칭하는데 대해 구태여 트집잡는 것은 곤란하지만, 통신사의 역사성이나 일제시대이후 일본의 문화적 침략을 생각한다면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하기야 3살짜리 꼬마도 오후 6시면 어김없이 빠져드는 TV의 일본제 수입만화에서부터 깡패까지도 일본야쿠자의 지도를 받는,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 일본문화가 생활화된 요즈음 이같은 넉두리는 세상 돌아가는 줄 모르는 샌님의 하릴없는 걱정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