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이름 찾기

BoardLang.text_date 2007.12.18 작성자 하원호

이름 찾기


하원호(근대사 1분과)


조선시대 양반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4개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나면 먼저 아명을 가지게 된다. 아명은 신분의 존귀과는 관계없이 흔히 쇠똥이, 개똥이 식의 천한 이름으로 불렀다. 고종의 어릴 때 아명도 개똥이었다. 유아사망율이 높아 자식농사는 반타작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10명 낳아 5명만 살아 남아도 다행이던 것이 먼 이야기도 아닌 한 두 세대 전이다. 그래서 자식이 귀한 집안이 아니면 구태여 공들여 이름을 지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천한 이름일수록 귀신이 쳐다보지 않아 오래 산다는 생각도 있었다.

유아기를 지나면 본이름이 주어지는데 대체로 성년이 되어 짓기 때문에 관명(冠名)이라고 불렀다. 집안 어른들은 본이름을 부르지만 성년이 되어 사회적 활동을 하게 되면 벗이나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자(字)가 있다. 자는 주로 집안 어른이나 스승과 같은 윗사람이 지어주었다. 또 하나의 이름은 호(號)다. 호는 스스로 짓는 자호(自號)도 있고, 친구나 다른 사람들이 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이름과는 달리 호는 거주지역을 이동하거나, 학문적 성취도에 따라 자칭 타칭으로 바꾸기도 했다. 자와 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동일 인물이 여러 사람이 되어 버린다. 조선시대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것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그래서 얼마전에는 유명인물들의 자와 호를 정리한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양반 중에서도 세도를 떨치던 인물이나 국가적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죽어서 정부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순신의 충무공이나, 민영환의 충정공 같은 또다른 이름이 바로 이 시호다.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근원은 주술적 사고에서다. 고대인들은 이름이 한 사람을 표징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좌우하는 주술을 가진 것으로 보고 이름을 저주하거나 훼손하면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본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인류학적 해석이고 우리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도 이름을 이토록 많이 양산하여 부르는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만든 나라는 세계에서도 드물다. 그것은 형식주의가 극도에 달했던 조선 주자학의 영향이다.

조상의 이름을 부를 때 이름 그대로 김동아(東亞)라고 부르는 사람은 요즘도 쌍놈축에 든다. 양반의 뿌리를 가졌다고 자처하는 신혼부부가 첫아이를 낳아 말을 할 때 즈음해서 아빠이름은 '김자 동자 아자'라고 하게 가르치는 것도 양반소리 들으려는 욕심에서다. 예전에는 해자(解字)까지 해서 '날일(日)에 나무목(木) 버금아(亞)'라 하기까지 했다. 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을 보면 음도 읽기 어려운 희귀한 글자가 많다. 왕의 이름을 아래사람들이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어 어떤 문장에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를 골랐던 탓이다.

세종때 유계문(柳季聞)이란 인물이 경기도관찰사에 부임하면서 관찰사의 관(觀)자가 아버지 유관의 관자와 같다고 부임을 거부하여 아버지가 관(寬)으로 이름을 바꾼 뒤 임지로 갔다는 이야기는 조상의 이름을 기피하는 기휘(忌諱)사고가 어느 정도로 발달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다.

가끔 조선시대 관변 자료를 보다보면 '휘(諱)'라는 글자가 나온다. 분명히 다른 글자가 있어야 마땅한데 휘라는 말로는 해석이 안된다. 이는 공문서를 작성한 인물이 부친의 이름과 그 글자가 같아 쓸 수 없다는 뜻으로 대신 적어 놓은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양반들의 사례다. 상민이나 천민은 이름을 양반만큼 고고하게 지킬 이유도 없고, 특히 노비의 경우에는 성도 없는 경우도 많았다. 평민이 성을 가지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많지 않았고 대개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이 이러니 이름이야 부르기 좋은 대로 짓는 게 관습이었다. 예전의 노비문서에 나오는 노비의 이름은 보통 여자노비면 태어난 달을 따서 삼월이, 사월이로 부르거나 하는 짓을 그대로 붙여 촉새년(足金連) 같은 이름도 불렀고 남자는 말똥이(馬同), 개똥이(介同), 꾹쇠(國金) 같은 쉬운 한글이름을 붙였다.

상민이 자기 이름에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은 조금 먹고 살기가 나아지면서부터다.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가산을 일으킨 상민은 양반이 되려고 했다. 모든 것이 양반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들의 양반으로의 신분상승 노력은 지금 우리의 상상을 불허한다.

양반이라는 증명서는 우선 족보다. 족보를 둘러싼 일화는 옛날 한글소설 같은 데서는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다.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목숨까지 걸어서라도 족보를 가지려는 이들의 노력은 조선후기를 족보만들기 사회로 만든 장본인이다. 원래 현존하는 우리나라 족보중에 조선 전기 이전 것은 몇개 가문이 안된다. 거의 대부분은 임진왜란이후였고, 가장 많이 만들어 진 때가 19세기다. 요즘도 이문이 가장 많이 남는 책장사는 족보장사다. 요사이 나오는 대동보 중에 대성씨의 것은 전집류 두께로 50권이 넘는 것도 있다. 그 맨끄트머리에 자신과 아버지, 아들의 이름 석자가 적힌 것 때문에 아무리 고가를 불러도 서슴없이 사는 것이다.

19세기중반 쯤되면 왠만한 사람이면 다 양반이 된다. '이 양반아, 저 양반아' 하는 호칭은 요즘도 윗사람이 아니라 동년배나 아래 사람에게 하는 호칭이고 그리 듣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유행하던 시기가 19세기 중반이다.

그래서 족보로는 양반이냐 아니냐를 증명하기 어렵자 이번에는 문집을 가졌느냐로 따졌다. 족보야 이름 석자 적힌데 불과하지만 평생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은 전문적 한문교육을 받은 양반이 아니면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몰락양반들이 상민에서 신분상승한 새양반들의 문집을 지어주고 푼돈을 얻어 쓰는 문집장사도 한 때 유행을 했다. 현존하는 우리의 문화 유산 중에 양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무엇보다 문집류다. 대학도서관에 보관된 고서적의 8할은 문집이다. 이 문집이 양산된 것도 바로 19세기였다.

족보나 문집은 이름 석자를 제대로 가지려던 한 시대의 산물이었고 그 과정에서 양반 중심의 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약용이 이야기한대로 모두 양반되는 사회로 갔던 것이다.

이렇게 아끼던 이름 석자를 넉자 이상으로 바꾸라는 것이 1940년대 일제의 창씨개명이다. 한국민족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이 정책으로 전 한국인의 80%가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60대 이상은 한 번 쯤 일본 이름을 가진 경험이 있는 세대다. 속없는 영감님들이 지금도 옛날 학교 동창들 만나 술자리라도 벌리면 자연스럽게 서로 학창시절의 일본이름을 부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제 이름을 되찾은 해방이후에도 언제부터인가 자기 이름을 잃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집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의 자나 호와 다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소위 '검은 돈'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10조 단위로 나열되는 우리의 지하금융은 경제력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돈 소유자의 이름을 실명(失名)시켰다. 예전에도 재력을 가진 양반들이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경우는 있었다. 조선시대 유명한 상인들 중에는 개동이 식의 노비이름을 가진 자가 많다. 근검을 덕목으로 삼고 재산의 과다보유가 죄악시되는 성리학적 풍토와 또 장사는 천인이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양반관료가 노비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차명(借名)한 탓이었다. 그래도 이 경우는 탈세를 목적으로, 부패를 목적으로 하는 요즘의 실명(失名)과는 같지 않다.

여전히 전통적 농업중심 사회를 유지하던 일제때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투자할 곳이 적어 웬만한 부자들은 돈을 은행보다는 장농안에 넣어 두고 어느 정도 모이면 땅을 사거나 고리대를 해서 푼돈 뜯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규모는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고 돈이 갈 곳도 무수히 많다. 그 돈이 이름 없이 움직이면서 우리의 경제를 지배하던 것이 그동안의 금융실명제(失名制)였고 어처구니 없게도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예전의 상민들이 이름 석자를 제대로 가지자는 노력이 양반 중심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근대로 진입하는 기폭제가 되었듯이 실명제(實名制)는 이름찾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천민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만드는 뿌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갱제'를 살리는 실명제 보완이라는 미명 아래 검은 돈을 합리화하려는 정책을 만들고 있다. 김영삼 정권의 개혁이란게 이미 다들 물건너 가버린 것이지만 그래도 실명제라는 성과는 아직 남아 있는데 이것마저 버리면 이 정권에 대해 역사는 재벌이나 권력 가진자를 위한 시녀였다고 기록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