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백두대간의 끝가지 : 아미산

BoardLang.text_date 2007.12.18 작성자 홍순민

백두대간의 끝가지 : 아미산


홍순민(중세사 2분과)



경복궁의 중전 교태전의 뒤로 돌아들면 이젠 더 이상 건물이 이어지지 않고 나즈막한 산이 나온다. 이름하여 아미산(峨嵋山). 중국 산동성 박산현이라는 곳에 있는 명산의 이름이다. 이름은 그럴 듯하여 아미산이나 실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옮겨 쌓은 인공산이다. 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조그만 둔덕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미는 자못 깊다. 우리나라 삼천리 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향하여 달려가다가 금강산 조금 못미친 평강땅에서 서남방으로 한 갈래는 내니 이것이 한북정맥이다.

한북정맥이 연봉을 이루며 달려오다가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 북한산이요, 북한산에서 다시 한 단계 낮아진 갈래가 남으로 내려와 봉긋 솟은 봉우리가 백악산이요, 백악산이 더욱 낮아져 마지막 끝가지를 이룬 것이 바로 이 아미산이다. 아미산의 가지끝에 피어난 꽃송이가 교태전이요, 교태전에 이어 여러 건물들이 주렁주렁 꽃과 열매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경복궁이다. 아미산은 산줄기와 건물, 자연과 인공, 백두산과 경복궁이 만나는 접점이요, 양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로 얼싸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의 구현이다.

아미산은 교태전의 후원으로서 크고 길다란 돌을 쌓아 네 층의 단으로 조성한 화계(花階)이다. 지금은 그렇고 그런 나무들과 역시 그렇고 그런 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옛날 왕비가 이곳에 살 적에는 각종 기화요초가 서로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었을 것이다. 화초나 나무 외에 기묘하게 생긴 돌을 화강암으로 깎은 석분(石盆)에 담아 놓는 것도 있다. 괴석(怪石)이라고 한다.

괴석들이 놓인 윗 단에는 키가 보통 어른 키 가슴 정도되는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웬 석조물이 둘 서 있다. 아랫 부분은 무슨 받침대처럼 다듬어졌고, 윗 부분은 한 변이 50cm 가 조금 넘거나 못되게 직사각형으로 우묵하게 파였다. 무엇을 담아 놓았던 그릇인가 싶기도 한데 그 앞면을 보니 동쪽에 있는 것은 낙하담(落霞潭), 서쪽에 있는 것은 함월지(含月池)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소―깊은 웅덩이 담, 연못 지 등의 글자로 보면 이것은 돌연못―석지(石池)임을 알 수 있다. 괴석과 석지를 설치한 뜻은 이곳이 그러한 괴석과 연못, 돌과 물로 이루어진 절경이요 선경(仙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한다. 중국 사람들 같으면 아예 인공으로 어마어마한 산과 바다를 만들어 버리고, 일본 사람들은 돌이나 모래로 오밀조밀하게 만들어 요것은 바다요 요것은 산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데 비해 우리는 돌을 몇 가져다 놓거나 인공 연못을 조그맣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뜻을 부여한다. 자연을 인공으로 대체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끌어들이는 것이요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낙하담, 함월지. 노을이 떨어지는 깊은 웅덩이,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그 뜻이 자못 아취가 있다. "떨어지는 노을은 외로운 기러기와 나란히 날고(落霞與孤鶩齊飛)…"하는 왕발의 시와 "아미산의 달이 반쪽 바퀴로 이즈러진 가을에(峨嵋山月半輪秋)…"로 시작하는 이백의 시귀를 연상시킨다. 쓸쓸한 가을 분위기가 사무친다. 그러나 분위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해와 달, 다시 말하자면 음과 양이 어우러져 있다. 교태전이 천지, 음양, 남녀의 교합을 뜻하는 것과 상통하는 이름이다.

석지가 있는 윗 단에는 굴뚝 네 기가 서 있다. 붉은 벽돌을 육각형으로 사람 키 한 길 반은 되게 쌓고 그 위에 둘레를 돌아가며 기와를 얹고 가운데에는 집모양으로 연기 빠지는 구멍―연가(煙家)를 만들어 얹었다. 온돌로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 건물에서 굴뚝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러한 굴뚝을 집에 붙여 짓지 않고, 땅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 화계로 뽑아 내었다. 기능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연기를 더 잘 나가게 하고, 또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칫 집의 미관을 해치기 쉬운 굴뚝을 이렇게 따로 세워 놓고 그 면마다 돌아가며 귀면이나 봉황 등의 벽사상(僻邪像),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 당초문 등의 길상문(吉祥紋)을 구워 박아 넣었다. 칙칙하기 십상인 굴뚝이 오히려 각종 아름다움과 상징이 깃든 미술품으로 승화하였다. 기능만을 숭상하는 오늘날의 인텔리전스 빌딩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전이다. 지금 찾아주고 알아주는 이 적은 아미산은 이러한 아취와 상징, 슬기와 깊은 뜻은 빛바래고, 썰렁한 겨울 분위기만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