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말하는 사회질서, 고분벽화의 고구려 사람들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전근대 사회에서 의복은 신분을 드러내는 가장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모자와 옷, 신발의 형태, 장식, 재질이 다른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늬나 색깔, 크기가 신분차를 드러내는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정한 색깔이나 재질의 옷, 복잡한 장식을 더하거나 무늬를 넣은 옷은 만드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나 인력,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연 높은 신분과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나 신분층에만 차례가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자줏빛 망토가 로마황제만이 쓰는 옷으로 여겨지게 된 것도 지중해 항구도시 티레 연안에서 나는 소라고둥에서 얻을 수 있는 염료로 염색한 실로 만들었던 까닭이다. 독일의 한 화학자가 이 티레식 자주 염색법을 재현하고자 소라고둥에서 염료를 채취해 보았더니 자주색 염료 1.4g을 얻는 데 필요로 하는 고둥의 수가 12,000개였다고 한다. 로마황제가 사용할 자줏빛 망토 제작에 쓰일 염색옷감을 만들어내는 데에 필요로 하는 티레산 소라고둥의 수는 쉽게 헤아리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折風을 쓴다. 그 모양이 고깔과 같은데, 士人은 두 개의 새깃을 더 꽂는다. 貴人의 冠을 蘇骨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자줏빛 비단으로 만들어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다. 의복은 소매가 큰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은 속옷에 襈을 두른다.…공식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를 놓고 금은으로 장식한 옷을 입는다.
위에 제시한 자료는 중국의 역사서 『北史』에 실린 고구려인의 관습에 대한 기사 가운데 의복에 대한 부분이다. 고구려에도 머리에 쓰는 모자의 형태, 재질, 장식으로 신분지위를 나타내는 관습이 있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고깔 형태의 모자인 절풍은 모자에 더하는 장식물이 어떤 것이며, 얼마나 많은 지에 의해 이를 사용한 사람의 신분을 알게 한 경우이다. 의복의 재질로서 비단, 특히 자줏빛 비단은 貴人만을 위한 것이었고,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식물은 귀족이라도 아무나 사용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위아래 옷도 형태나 재질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구분되었는데, 고구려인의 관습에 대한 다른 기록까지 아울러 살펴보면 귀족은 보통 소매 크고 긴 저고리와 통 넓은 바지를 갖추어 입었다. 이런 옷은 눈에 잘 띠는 색깔로 염색된 위에 꽃점무늬나 마름모무늬가 아름답게 더해진 고급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평민이 입던 옷과 구별되었다. 평민들이 입은 통 좁은 바지와 소매가 짧은 저고리는 염색되지 않고 무늬도 더해지지 않은 거친 베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평민남자들은 특정한 형태의 모자를 쓰는 대신 검은 수건을 머리에 둘러 상투도 덮고 빛도 가렸다.
(그림1) 수산리벽화분 벽화: 시종들
신분과 경제력이 맞물려 돌아갔던 고대사회에서 평민이 비단이나 가는 베와 같은 고급천을 여유 있게 사용하여 만든 통 넓은 바지, 곧 大口袴로 불린 귀족용 바지를 입기는 현실적으로도 어려웠다. 평민이 입던 통 좁은 바지, 窮袴는 농사일과 각종 부역으로 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평범한 고구려 백성들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몸에 잘 맞는 옷이기도 했다. 바쁘게 부엌과 논밭, 길쌈을 위한 직기 사이를 늘 오가야 했던 고구려의 여염집 아낙네에게 소매 넓은 저고리는 오히려 번거롭지 않았겠는가. 직업상 빠른 몸놀림이 요구되었던 놀이꾼이나 귀족이 주관하는 사냥에 동원된 몰이꾼들은 통 좁은 바지의 아랫단을 길고 좁은 천으로 감싸는 脚絆을 더하기도 했다.
고구려 여인들은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허리에서 치맛단 끝까지 주름 선이 촘촘하게 잡힌 잔주름치마를 즐겨 입었다. 귀부인은 당연히 여러 색깔이 더해진 천들로 멋을 낸 색동주름치마를 입었지만, 하녀나 평범한 여인네는 단색의 주름치마로 만족해야 했다. 귀부인은 저고리의 소매 끝과 깃에 더해지는 襈도 정교한 무늬를 넣은 것을 썼다. 고분벽화의 인물행렬도에는 귀부인과 시녀들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이들이 걸친 옷으로 잘 구별되어 나타난다.
(그림2)수산리벽화분 벽화: 귀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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