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뜩이는 창끝, 빛나는 투구, 안악2호분 벽화의 문지기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남의 무덤을 파 시신을 인질로 삼아 금품을 요구하는‘掘塚’은 조선시대에 가장 악랄한 범죄로 여겨져 엄벌되었으나 양민으로 먹고 살 더 이상의 방도를 찾지 못하던 이들에게는 최후의 생존수단으로 선택되기도 했다. 굴총도 도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덤주인의 후손에게서 금품을 받은 뒤에는 시신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무덤 안에 껴묻은 값비싼 물품과 미라까지 챙겨서 내다파는 전형적인 도굴과는 구별된다. 도굴은 몇몇 사람들이 오래된 왕릉이나 귀족무덤을 찾아다니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 자리 잡은 구르나마을사람들처럼 수백 년 동안 조상부터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마을 단위 생업으로 삼았던 경우도 있다. 고구려 돌방무덤도 구조상 도굴의 손길을 타기 쉬웠다. 아이 머리보다 큰 돌들을 쓰거나 잘 다듬은 판석으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흙무지돌방무덤은 도굴하려는 사람들이 무덤입구를 열거나 천장부를 덮은 돌들을 깨기만 하면 내부로 들어서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무덤방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귀중한 물품들을 자루에 담아 나오기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고구려벽화고분 안에서 부러진 관못이나 관장식 조각 외에는 거의 아무런 유물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후기의 薄葬 관습 때문이라기보다는 일찍부터 도굴의 대상이 되어 여러 차례 도굴꾼들의 손길을 탔던 까닭이다. 5세기 중엽의 무덤인 안악2호분의 널길 벽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긴 창을 꼬나 쥔 갑주무사가 눈을 부릅뜨고 앞니를 한껏 드러낸 채 버티고 선 모습이 그려졌다. (그림1)안악2호분 벽화: 문지기 장수 무덤을 지키는 수문장수이다. 후기 고분벽화의 四神, 특히 청룡과 백호가 무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묘사된 것처럼 중기에는 力士나 武士의 무덤지킴이의 역할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안악3호분 앞방 돌기둥머리에 그려진 鬼面들의 역할을 역사나 무사가 이어받았다가 청룡과 백호에 그 역할을 넘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악2호분 벽화에 등장하는 문지기 장수들은 고구려 鐵騎武士의 복장을 했고 손에 쥔 창은 날이 길고 예리한 長矛槍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지금 그대로 써도 될 정도로 날이 예리하게 서 있다. 목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頸甲이 더해진 갑옷과 철판을 길게 잘라 좌우를 이어 만든 투구 끝의 장식술도 바람이 불면 금방 휘날릴 것 같다. 무덤을 지키려는 사람의 마음이 절실하게 담겨 있다고 느낄 정도로 문지기 장수를 그린 붓선이 생생하기만 하다. 수산리벽화분 벽화의 문지기 장수는 갑주를 걸치지 않은 평복차림이지만 눈을 부릅뜨고 앞니를 드러내며 바깥사람의 무덤 출입을 막으려는 기세는 안악2호분 벽화보다 한 수 앞서 나간다. 더욱이 왼손에는 장모를 세워 쥐었고, 오른손으로는 大刀를 치켜 들었다. 날등은 검고 날은 희게 나타낸 대도가 주는 섬뜩함이 보는 이의 눈길을 시리게 한다. 섬세한 필치를 자랑하는 수산리벽화분의 벽화담당 화가도 문지기 장수만은 힘 있는 존재로 형상화 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약수리벽화분 벽화의 문지기 역사는 대도를 꼬나든 채 무덤에 들어오려는 자를 내리치려는 자세이다. (그림2) 약수리벽화분 벽화: 문지기 역사 팔과 다리가 굵고 짧을 뿐 아니라 C자형 선으로 근육까지 두드러지게 모사된 역사형 문지기는 아예 팔소매는 걷어붙이고 바지는 잠방이 차림이다. 왼쪽 다리를 들어 앞으로 내딛을 듯이 왼쪽 다리를 굽혀 들고, 왼쪽 팔은 허리께에 갖다 댔으며 턱은 약간 쳐들며 실눈을 하고 입을 약간 벌린 채 대도를 쥔 오른 팔을 위로 들어 뒤로 약간 제킨 모습이 영락없이 침입자를 을러대며 칼로 내리치려는 형국이다. 이들 고분벽화의 무덤지킴이들이 손에 무기를 든 것은 삼실총 벽화의 문지기 역사나 문지기 갑주무사처럼 험상궂은 모습이나 무장한 모습만으로는 무덤을 지키는 효과를 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덤주인의 내세삶터는 무덤이 상징하는 우주를 받쳐 들던 벽화 속의 우주역사나 우주괴수, 支天龍에 의해 유지되기도 했지만 별세계로 침입하려는 자들을 막아내기에 골몰하며 무기를 몸에 지니기도 하고, 빼어 들고 날을 보이기도 하던 무사나 역사들에 의해 ‘벽화의 세계’만이라도 지켜졌던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