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를 확인시키는 그림, 동명왕릉 벽화의 연꽃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427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으로 옮겨졌다. 43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서울이었던 국내성, 4세기 후반부터는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로 주목받았던 집안은 이제 제국 고구려의 제2도시가 되었다. 조상들의 무덤이 줄지어있고, 대대로 물려받은 집과 토지, 집안의 오랜 내력이 어린 바위와 못, 숲이 있는 압록강변을 떠나지 않으려는 토착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수왕은 遷都를 단행했다. 역대 왕의 위패, 각종 神들을 위한 신당, 왕실 전래의 보물들이 새 서울의 궁궐과 종묘, 사직, 명당에 옮겨졌다. 장수왕은 새 서울 평양에서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이자 동아시아 4강체제의 구성원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그러나 평양이 제국의 새 얼굴로서의 위상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어감에도 불구하고 국내성으로의 還都를 주장하는 소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부 귀족집안은 국내성에 남아 있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며 귀족회의중심의 국가운영을 주장하는 자들이 세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어떤 귀족들은 평양에 불교사원이 늘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고, 또 다른 자들은 불교승려들이 국가정책에 적극 간여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마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은 이런 주장이나 태도에 대해 나름의 원칙을 마련하고 대응을 시도하지만 결국 반천도ㆍ반왕실세력과의 갈등 조절에 실패한다. 470년경 평양에서는 대규모 정변이 일어나고 전통귀족세력의 상당수가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도태된다. 평양의 동명왕릉은 왕릉급 대형 돌방무덤으로 5세기 중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북한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재조사 이전까지 이 무덤의 돌방 안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평양일대에서도 벽화가 없는 대형 돌방무덤의 존재가 드물지는 않았으므로 진주묘로 불리던 이 무덤 역시 무덤칸 안에 벽화가 그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5세기 양식의 대형 돌방무덤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실상 5세기 내내 왕위를 지켰던 장수왕의 시대(412~494)에 왕릉급 무덤에 묻힌 사람은 누구였을까를 두고 학자들은 논란을 벌였다. 그런데 1970년대 대성산성 일대 고구려 유적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학술조사과정에 진주묘가 벽화고분임이 확인되었다. 널방의 네 벽이 활짝 핀 연꽃으로 가득 채워졌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림1) 동명왕릉 널방 내부를 장식한 연꽃무늬 일정한 간격으로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진 연꽃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모두 104송이였다. 5세기에 그려진 평양지역의 다른 고분벽화와 달리 진주묘는 순수한 연꽃장식무늬 고분벽화임이 확인된 것이다. 5세기 중엽 고구려에서는 연꽃장식무늬를 주제로 한 고분벽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두 번째 서울이던 국내성일대에서 주로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광개토왕이 부친 고국양왕의 뜻을 이어 불교신앙의 확산에 힘을 쓰고 이를 위해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로 거론되던 평양에 9개의 절을 새로 짓도록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소수림왕 이래 서울이던 국내성일대에는 국가적 후원 아래 다수의 불교사원이 세워졌고 그로 말미암은 영향이 귀족사회에도 널리 번지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불교신앙의 영향권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평양에도 다수의 절을 짓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성지역에서 연꽃무늬가 고분벽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불교신앙이 확산되고 심화되었지만, 평양일대에서는 깊게 뿌리내린 기존문화의 전통 때문인지 국내성에서와 같은 현상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천도 후에도 연꽃무늬만으로 장식된 고분벽화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무덤칸의 일부 공간을 연꽃으로 장식한 사례들이 간간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중국과의 교통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남포일대, 위ㆍ진시대 중국문화 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안악지역 고분벽화에 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림2) 안악2호분 널방 내부의 비천과 공양인들 그런데 5세기 평양지역에서 순수한 연꽃무늬 장식 고분벽화가 출현한 것이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서울을 옮긴 뒤 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나라의 시조 동명성왕 주몽의 무덤을 평양에 새로 축조하게 한 듯하다. 새 왕의 즉위를 알리거나 국가 중대사 결정을 앞두고 제의장소로 쓰이던 졸본의 시조왕릉을 대신하는 곳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日月之子, 河伯之孫으로 여겨지던 시조왕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은 자’, 곧 如來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내외에 주지시키고자 장수왕은 신하들에게 무덤칸 내부가 淨土처럼 여겨지게 만들라고 영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널방이 蓮華藏世界처럼 느껴지도록 연꽃으로 가득한 공간이 된 것도 이로 말미암았을 수 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 후, 5세기 중엽의 무덤양식으로 대성산 기슭에 당시까지 평양일대에서는 유례가 없던 연꽃무늬로만 장식된 왕릉급 벽화고분이 출현한 까닭을 달리는 찾아내기 어렵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