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사람들] 왕건의 고승 포섭과 서남해지역 진출

BoardLang.text_date 2004.10.01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왕건의 고승 포섭과 서남해지역 진출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와 도선(道詵)

불교신앙의 시대에 고승의 위치는 대단하였다. 위로 국왕으로부터 지방의 호족, 그리고 일반 백성 및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계층을 초월한 모든 사람들이 고승을 떠받들었다. 따라서 난세에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는 자들은 으레껏 고승들의 지지를 받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고승들은 정치에 초연하여 좀처럼 정치적 소견을 표명하지 않았으며, 이런 점이 정치인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했다.

신라말기의 난세에도 모든 이들의 존숭을 한 몸에 받던 고승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사무외대사’라 불리우던 4인의 고승과 도선(道詵)이 그 대표격이라 할만하다. 사무외대사로 통칭된 4인의 고승은 진철(眞澈) 이엄(利嚴), 대경(大鏡) 여엄(麗嚴), 법경(法經) 경유(慶猷), 선각(先覺) 형미(逈微)를 말한다.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860~870년대에 출생하여 신라말․고려초에 활동했다는 시기적 공통점, 그들의 고향이 각각 태안, 보령, 흥덕(?), 영암(?)으로서 바닷가 출신이라는 공간적 공통점, 왕건과 결연(結緣)하여 고려 왕조의 개창과 통일과정에 기여했다는 정치적 성향의 공통점이 그것이다. 826년에 태어나 고려 왕조가 출현하기 전인 892년에 입적(入寂)한 도선(道詵)은 이들보다는 4~50년 정도 먼저 활동한 선배 고승으로서, 활동한 시기는 다르지만 공간과 정치적 성향의 측면에서는 공통점으로 보여준다.

왕건은 이들과 결연하여 정치적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고승을 탄압하던 궁예를 몰아내고 민심을 수습하여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사무외대사’와 도선은 왕건의 해양진출로 상에 위치한 해안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지지는 왕건의 서남해 진출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서남해 출신인 도선과 형미가 왕건에게 미친 영향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이들은 왕건가(王建家) 혹은 왕건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서남해지방의 호족과 백성들을 친왕건의 정치 성향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왕건과 도선․형미의 관계는 왕건이 서남해 쟁패전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배경의 하나로서 중시해야할 부분이다.

도선(道詵)과 왕건

도선은 826년에 영암에서 태어나 15세에 화엄사에 들어가 화엄학을 수학하다가 신라말 선종 9산문의 하나인 곡성 태안사(泰安寺) 동리산문(桐裏山門)의 혜철화상의 문하에 귀의하고,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다가 37세부터 광양 옥룡사(玉龍寺)에 주석하여 898년에 7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그는 일찍이 동리산문과 인연을 맺은 선종 승려였으며 특히 풍수지리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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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사지전경 (광양시청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그런 도선에 대해 고려의 역대 왕들은 특별히 존숭(尊崇)해 마지않았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중 제2조에서 도선이 정해놓은 곳에만 사원을 지을 것을 당부한 바 있고, 이후에 현종(顯宗)은 대선사(大禪師)의 호를 증시(贈諡)하였으며, 숙종(肅宗)은 왕사(王師)를 가시(加諡)하였다. 그리고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으며, 의종(毅宗)은 최유청(崔惟淸)에게 하명(下命)하여 그의 비문(「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을 찬술하였던 것이다. 이로보아 그는 고려의 건국 이전에 왕건가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고, 고려의 건국 이후에는 왕조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종(毅宗) 4년(1150)에 왕명을 받들어 최유청(崔惟淸)이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에 의하면 875년에 도선이 세조(世祖=왕건의 父인 龍建 혹은 王隆)에게 찾아가 2년 후에 왕자(王者)가 태어날 것임을 예언했다고 하고, 고려사에서는 민지(閔漬)의 편년강목을 세주(細注)로 인용하여 태조의 나이 17세에 도선이 다시 찾아와서 ‘삼계창생(三季蒼生)의 임금’이 되리라고 예언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바가 있다. 왕건이 그의 야망 실현을 위해서 도선이 찾아와 예언을 남겼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고, 또한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태조 때부터 고려 왕조가 지속적으로 도선을 존숭해 마지않았다는 것은, 고려의 건국과 운영의 과정에서 도선의 후광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건가가 도선과 직접 관계를 맺었든 아니면 조작적 관계 설정을 시도했든 간에, 그것은 용건 대부터 시작되었고 왕건 대에 더욱 보강해 갔을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도선이 서남해지방 출신이라는 점을 보태어서 생각한다면, 도선이 왕건에 대해 예언했다는 것은 소문만으로도 왕건이 서남해지방으로 진출해 가는데 있어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도선의 예언이 사실이었고 도선이 직접 그것을 서남해지방 해양세력에게 유포하였다고 한다면 그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왕건이 오다련에게 접근하여 그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도선의 예언’이 일정하게 작용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형미(逈微)와 왕건

 

다음에 왕건과 형미의 관계를 보자. 도선이 동리산문(桐裏山門) 혜철(慧哲)의 문인이었던데 반해, 형미는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체징(體澄)의 문인이었고, 또한 도선이 왕건과의 직접적 관련성 여부가 불확실한 것에 반해 형미는 왕건을 직접 만나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형미는 도선 못지 않은 서남해지방 출신 명망 고승으로서 왕건에 대한 확실한 지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강진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편광령탑비(先覺大師遍光靈塔碑)」에 의하면 형미는 무주(武州)의 바닷가, 즉 서남해지방에서 864년에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세에 보림사의 체징에게 찾아가 출가하고 882년에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891년에는 사신선 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후 10년 후인 905년에 영산강변의 국제항구인 회진(會津)을 통해 귀국한 형미는 지주소판(知州蘇判) 왕지본(王池本)의 귀의를 받고 월출산 남록(南麓)에 위치한 무위갑사(無爲甲寺)에 주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무렵에 왕건이 형미를 찾아가 그의 법제자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왕건은 912년에 다시 서남해지역 공략에 나서 이를 마무리지은 후에 형미를 만나 함께 철원으로 돌아갔으며, 형미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1년 전인 917년에 입적(入寂)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형미의 죽음에 대해 「선각대사비」에서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지만 궁예의 사설(邪說)과 갈등을 겪다가 혹은 왕건을 비호하다가 궁예에게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왕건은 919년 3월에 형미의 제자를 불러 개성의 오관산(五冠山)에 산사(山寺)를 수리하게 하고 석탑(石塔=부도)을 만들어 그의 사리를 모시도록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건의 형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형미는 왕건이 서남해지방에 진출하는데 중요한 협조자였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불교신앙시대인 당시에 호족 및 대중들의 존숭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승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은 곧 호족들의 지지를 평화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첩경이었다. 이 점에서 형미는 서남해지방 호족들의 왕건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고승을 통해서 서남해지방의 해양세력을 포섭한 왕건의 시도는 이후에도 벤치마킹되는 선례가 되었다. 고려 후기 최씨무인정권이 강진 만덕산 백련사의 원묘국사 요세와 월출산 무위사의 진각대사 혜심을 통해서 서남해지방 해양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려 했던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