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사람들] 남도 예술혼의 역사적 연원 : 한(恨)과 신명(神明)

BoardLang.text_date 2004.10.18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남도 예술혼의 역사적 연원 : 한(恨)과 신명(神明)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1. 한과 신명의 문화사

인간의 감정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이를 七情[喜怒哀樂愛惡慾]으로 표현하곤 하나,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어찌 몇 구절의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안다. 그래서 대개는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며, 그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한과 신명은 인간 감정의 양 극단에 위치한다. 한은 최고로 비통한 감정을, 신명은 최고로 환희스런 감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한은 가슴을 쥐어짜듯 아픈 감정이고, 신명은 신과 하나됨을 느끼는 환희의 감정이다. 일상생활에서 한과 신명의 극단적 감정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특별한 상황을 연출하여 한과 신명의 극단적 감정을 드러내곤 한다. 이것이 예술의 원초적인 모습이다. 예술의 원초적 경지에서 한과 신명은 항상 짝을 이룬다. 신명은 한을 전제로 존재하고, 한은 신명을 전제로 하여 존재한다. 신명과 한은 항상 서로 넘나들면서 울리고 웃긴다. 신명과 한은 예술혼의 빛과 그림자이다.

한과 신명의 연원을 따라 올라가 보면, 저 고대의 축제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자연이 주는 혹독한 시련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저 고대인들은 그 고통[恨]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자연을 신으로 섬겨 신과 하나됨의 경험[神明]을 더욱 찐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연출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다. 한과 신명의 박동, 이것이 고대인의 건강한 에너지였다.

자연에 대한 통제 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인간은 극단적 감정을 억누르는 도덕적 규범을 창출한다. 유교문화에서 그 대표적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유교는 인간의 본성에서 연원하는 네 가지의 도덕적 실마리로서 사단(四端)을 설정한다. 인(仁)의 발로(發露)로서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발로로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의 발로로서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의 발로로서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여기에 신(信)을 더하면 인간이 항상 지켜야할 도리로서 오상(五常)이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란 도덕적 규범[四端]에 의해 인간의 감정[七情]을 여하히 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논설한 이론이다. 이는 인간사회의 질서가 중시되면서,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표출을 저지하고 인간관계의 질서를 규정하는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게 됨을 의미한다. 자연 극단적 고통의 감정[恨]과 극단적 환희의 감정[神明]의 표출은 억압된다. 그리고 무난함과 점잖음과 고상함만 미덕이 되어 남는다.

우리나라에 유교문화가 들어왔으나, 초기 단계엔 정치적 규범에만 적용되고 삶의 규범에는 작용하지 못하여, 진솔한 고대적 감정은 당분간 지속되었다. 우리의 삶에 한과 신명의 역동적 교차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교의 도덕적 규범이 일상사에까지 본격 침투해 들어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리의 삶과 정서는 지양해야 할 교화(敎化)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지양되면서, 수 천년 동안 내려오던 정감어린 역동적 감성의 이력은 내면의 깊은 곳에 숨어버렸다. 이에 따라 우리는 유교적 덕목에 가장 충실한 인간형으로 급속하게 변해갔던 것던 것이고, 우리의 변화된 모습에 중국인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우리를 ‘동방지예의지국(東方之禮義之國)’이라 찬양할 정도였다.

유교적 인간형으로 자리잡게 된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겼고, 감정을 억제함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한과 신명의 ‘끼’가 발산되는 것을 천박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러한 억압 분위기 속에서 비아냥을 무릅쓰면서 한국인의 끼가 엉뚱한 형태로나마 발산되곤 했다. ‘아줌마’들의 ‘버스간 춤’이 그것이다. 지금은 좀 잠잠해 지긴 했지만, 시골 ‘아줌마’들이 관광버스 안에서 연출한 그 요란한 춤과 노래판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이를 우리는 꼴불견이라고 매도했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시대이래 강고하게 덧씌워온 도덕적 규범의 외피가 깨져나가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까지 내려온 인간 관계의 도덕적 관행과 질서가 붕괴되면서 정신적으로 혼돈의 상황에 빠지고 있다. 어른과 아이의 관계, 부부의 관계, 남녀의 관계 등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혼인제(동성동본금혼), 성씨제, 호주제 등에서 이러한 문제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새로운 문화의 탄생은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껍질이 깨지면서 새로운 도덕적 규범이 형성되기 마련이고, 더욱이 강고한 껍질 속에 숨어 있던 진솔하고도 역동적인 감성의 원형을 재발견할 수 있다. 그 감성의 원형이란 한과 신명 바로 그것이다. 한국인의 ‘끼’가, 그리고 오늘날 아시아의 대중문화를 요동치게 하는 ‘한류(韓流)’가 바로 그 감성으로부터 나오는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의 대중문화를 보면 우리 자신조차 놀라움을 금하기 어렵다. 한국 영화가 몇 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것쯤은 보통의 일이 되어 버렸고, 외국 연예인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청소년들은 그들로부터 벗어나 한국의 연예인들에게 매료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연예인들이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이른바 한류(韓流)의 열풍이다. 붉은 악마의 몸짓과 함성이 있는 역동적인 나라, 헐리우드를 압도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 한국.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던 한과 신명의 끼가 다시 떨쳐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얼마 전 목포 출신의 저명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은 우리의 한(恨)의 정서를 신명과 비통이 버물어진 복합적인 정서로 풀이하면서, 이러한 정서가 쇠퇴한 이유로 우리는 언필칭 일제의 탄압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우리 스스로가 이를 천박하게 여기고 억압했던 책임이 더 크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도 이와 비슷한 심정을 내비친 적이 있다. 이광수 등이 친일한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우리의 정서를 천박한 것처럼 그리고 선전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오늘날 대중문화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한류의 열풍이 폭발하는 현상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이런 현상의 흐름을, 서양의 천박한 대중문화를 흉내내면서 쏟아내는 폐수로 치부해버릴 것인지,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온 신명의 정서가 그 억눌림을 떨쳐버리고 시원하게 분출해 내는 청량제의 일종으로 간주할 것인지, 판단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열린 마음으로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남도 문화를 흔히 한의 문화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보면 신명의 문화이기도 하다. 결국 남도 문화는 한과 신명의 문화인 셈이다. 말하자면 고대 축제판에서 펼쳐지던 한과 신명의 예술혼이 가장 온전히 전승되는 곳이 바로 남도이다. 이것이 남도를 예향이라 부르는 역사적 연원이다. 따라서 예향 남도의 예술혼을 바로 보려면, 저 고대의 축제판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2. 한과 신명이 어우러진 남도문화의 흔적들

1) 사례1 : 진도의 다시래기

다시래기는 일명 다시락이라고도 하는데, '다시낳다' '다시생성하다' '여러사람이 모여서 즐거움을 갖는다'는 뜻이다. 진도 다시래기는 상가에서 출상 전날 밤에 상주와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四物 반주에 맞추어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가무극적 놀이이다. 죽음을 맞는 비통함[한(恨)]을 신명나는 축제로 승화시켜 한과 신명이 교차하는 축제판을 벌인다. 죽음의 슬픔을 다시 태어남(다시래기)의 기쁨으로 상쇄한다.

상두꾼들은 전문적인 잽이(굿쟁이)가 아니므로 다시래기패들이 나와 주역이 되어 상두꾼들과 함께 논다. 다시래기 행사의 연희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사당놀이 : 풍장(농악)을 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흥이 오르면 목청 좋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마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제창한다. 노래와 함께 춤도 추고 흥이 더욱 무르익으면 북놀이, 설장고가 시작되고, 이에 맞춰 북춤, 장구춤을 춘다.

② 사재놀이(촌극) : 일직사자․월직사자가 도사자의 명을 받아 공방울이란 자를 잡아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헤프닝을 촌극 형식으로 연출함.

③ 상제놀이 : 온갖 풍장 가락에 맞춰 꼽추춤을 추다가 다시래기판으로 들어감.(봉사, 봉사마누라, 땡중)

④ 봉사놀이 : 봉사와 봉사마누라, 땡중, 꼽추가 벌이는 촌극.

⑤ 상여놀이 : 빈상여를 유대꾼들이 메고 선소리꾼의 지휘에 따라 앞마당을 빙빙 돌고, 꽹과리, 장구, 북, 징을 간간히 쳐서 흥을 돋군다.

2) 사례 2 : 비금도의 밤달애

밤달애는 장례식 전날밤 동네 사람들이 초상집에 모여 상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노는 장례놀이다. 망자의 친구, 동민, 계원, 상두꾼들은 실의에 찬 상가에 모여 화톳불을 피우고 북․장고를 치면서 노래와 춤을 추고 고인의 행적을 더듬어 보기도 하며 밤샘을 한다. ‘밤달애’라는 말은 밤을 달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밤달애는 밤(夜)과 달래다의 고어인 달애의 복합어다.

밤달애놀이는 장례를 축제적으로 치르는 전통이므로 다양한 놀이와 연희가 들어 있다. 밤달애에서는 노래, 춤, 연극, 재담 등이 가리지 않고 연행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정형화된 양식이 수용되어 전승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남사당의 연희다. 남사당은 조선후기에 도서지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은 남사당의 연희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민속으로 정착시켰다. 외래의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 속에 수용하여 전승시킨 것이다. 

본래 남사당 노래는 소고춤과 함께 이루어지던 연희 종목이었으나 지금은 노래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남사당노래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남사당노래는 ①‘마당어우르는 노래’, ②‘주문가’, ③‘거사․사당 노래', ④‘매화타령’ ⑤잡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상 같은 순서로 부른다.

망자와 상주를 위로하기 위해 노는 전통은 <수서(隋書)> 고구려전의 「初經哭泣 葬則鼓舞作樂 以途之」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오랜 전통이라고 볼 때 밤달애는 역사적으로 연원이 오래된 장례놀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례3 : 판소리

판소리는 민중들의 한과 신명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녹여낸다. 관객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독특한 역동적인 미학이 생동한다. 우리는 판소리를 통해서 한과 신명의 양극을 넘나드는 감정의 깊이와 넓이를 발견할 수 있다. 남원의 동편제와 보성의 동편제로 분류되지만, 판소리는 남도 예술혼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