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모든 길은 개경(開京)으로

BoardLang.text_date 2004.06.04 작성자 정요근
모든 길은 개경(開京)으로

개경의 중심축 - 남대가(南大街)와 십자가(十字街)

 

고려(高麗)의 도읍인 개경은 중앙집권국가인 고려의 정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조운(漕運)이나 교역을 통해서 각 지방과 외국의 물산이 집결되는 경제 중심지, 각 방면의 내로라하는 지성(知性)들이 모여드는 지식 및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3세기 후반 원(元)의 간섭 이전까지 황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던 고려의 도읍으로서 개경은 10여만 호의 인구가 거주했을 정도로 번화하고 큰 도시였으며, 개경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羅城)을 중심으로 행정구획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23Km에 달하는 나성의 둘레에는 25개의 성문이 있었으므로, 개경에는 크고 작은 도로들이 사통팔달의 형태로 연결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도로들은 결코 무질서하게 연결되지는 않았다. 모든 도로는 황성(皇城)을 향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에서 시작되는 간선로가 있었다. 개경의 자연지형상 국왕의 본궐을 둘러싼 궁성(宮城)과 황성은 북서쪽에 치우쳐 위치하였으며, 광화문 밖 관청거리와 시전거리는 개경의 가장 큰 번화가였다. 관청거리에서 시작된 개경의 간선로는 배천(白川)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남대가로 연결되었으며, 이 남대가는 나성 내부 도로의 중심축이 되었다. 반면 나성 서쪽의 선의문(宣義門)에서 동쪽의 숭인문(崇仁門)을 연결하는 대로는 나성의 내부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 도로와 남대가가 만나는 지점을 십자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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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개경 복원도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개경사연구반)



개경의 요로(要路)를 확보하라

2성 6부를 위시한 고려의 중앙관서들은 대부분 광화문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하는 관청거리의 좌우에 줄지어 있었으며, 남대가 중에서 관청거리로부터 십자가에 이르는 구간은 조선시대 한양의 종로거리에 버금갈 만큼 번화했던 ‘시전거리’로서 개경 내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남대가와 십자가 일대는 관청과 상점 등 개경의 기반시설들이 집중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치상으로도 개경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관계로 주요한 사건들의 무대가 되곤 하였다. 특히 권력의 획득을 위해 벌어졌던 정치세력 간의 무력대결은 남대가와 십자가 일대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그 유명한 최충헌(崔忠憲), 최충수(崔忠粹) 형제의 시가전이었다. 이의민(李義旼)의 제거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마지막 남은 최고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두 형제는 결국 무력으로 최종 승자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전투의 승리를 위해서는 국왕이 거주하는 궁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였기에, 양측은 황성의 정문이던 광화문 밖과 십자가 일대에서 처절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동생을 제거하고 최고 집정자의 자리에 오른 최충헌은 십자가 근방에 대저택을 짓고 권세를 호령하였다.


한편 최충헌의 노비로서 노비해방의 구호를 내걸고 봉기를 계획하였던 만적(萬積)이 거사장소를 십자가 옆의 흥국사(興國寺)로 정한 사실도 궁성과 개경 전체를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남대가 일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권력의 막강함은 도로의 신설이나 확충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의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낙타교(駱駝橋)에서 저교(猪橋)까지 제방을 쌓고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였는바, 이로 인하여 그는 ‘신도재상(新道宰相)’이라고 불리었다. 즉 이의민은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도로를 이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최충헌이 집권 후에 시전(市廛)을 다시 열었을 때에도 시전이 위치한 남대가와 십자가 일대의 도로 정비가 전제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 역시 집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절대화하는 수단으로서 도로의 확장을 이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들은 십자가와 남대가가 개경의 모든 도로망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도 물산도 소식도 모두 개경으로



광화문과 십자가는 개경 도로들의 중심축일 뿐만 아니라, 고려 전체 도로망의 중심이 되었다. 십자가로부터 서북 방향은 서경(西京)과 벽란도(碧瀾渡) 등지로 연결되었으며, 남쪽으로는 강화도(江華島)와 조강(祖江,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구간) 방면, 동쪽으로는 동계와 교주도, 경상도 방면, 그리고 동남방면으로는 하삼도 방면으로 향하도록 편성되었다. 이들 도로상에는 역참(驛站)과 원(院)이 설치되어 있어서 왕래하는 이용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특히 나성 외곽의 사교(四郊)에는 각각 금교역(金郊驛), 도원역(桃源驛), 청교역(靑郊驛), 평리역(平理驛) 등이 설치되어 각 지방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청교역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왕래하는 모든 사신과 문서들이 거쳐야 하는 지금의 중앙우체국과 같은 곳이었기에,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청교역의 아전들이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사실도 중앙과 지방을 오가는 모든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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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개성 주변도 (출처 : 대동여지도)



한편, 선의문을 지나 서경과 벽란도 방면으로 향하는 서북방의 도로는 당시 국외나 변방으로부터의 소식을 신속하게 개경으로 전달하는 경로가 되었다. 특히 서교(西郊) 일대는 변방의 위급 상황에 가장 먼저 동요하는 지역이었다. 묘청의 난이나 거란의 침입 등과 같은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서교의 백성들은 불안감에 떨며 도성 내로 피난하곤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해상관문이자 국제무역항이었던 벽란도도 서교를 지나서 갈 수 있었던 만큼, 평화롭던 시절의 서교는 국외로부터의 소식뿐만 아니라 진기한 물산들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던 지역이었다.

반면 청교역을 지나 하삼도로 향하는 동남방의 도로 역시 국가적으로 매우 중시되는 도로였다. 당시에도 개경으로의 중앙집중화가 심했던 만큼 많은 백성들이 하삼도로부터 개경으로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중에는 이의민처럼 경군(京軍)과 같은 특별한 직역(職役)에 선발되어 개경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나, 상당수는 먹고 살기 힘들어 유리하다가 먹거리나 일거리를 찾아 개경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하삼도로부터 개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임진나루를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개경과 하삼도를 잇는 도로는 항상 이들 인파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주 익사 사고가 발생하였고, 조정에서는 이에 임진나루에 상설적인 배다리를 만들어 왕래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개경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임진나루 근처의 보통원(普通院)에 일종의 빈민 구제소를 설치하여 유리걸식하는 행인들의 굶주림을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하였다.

 

도로의 이용에는 신분의 구별이 없다?



이상과 같이 개경의 도로는 일차적으로 개경에 거주하거나 개경과 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려의 국가체제와 지배층의 통치행위가 구현되는 주요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도로는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용하였던 점에서 그 속에 권력자의 통치행위나 하층민의 애환 등 신분을 초월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양한 군상들은 결코 융화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빈번한 외국 사신의 영접과 마중을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서교의 도로를 통하여 강제로 금교역에 동원되었던 개경 하층민들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서교에서의 낙조(落照)를 감상하고자 그 도로를 이용하였던 지배층의 감성과 낭만이 서려 있지 않았을 것이며, 남교(南郊)의 도로를 떠돌며 걸식으로 생명을 부지하던 유랑민의 눈에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던 임진강변의 푸른 석벽이 결코 절경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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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나루 일대 (출처 : 파주시 홈페이지, www.pajuro.net)

(중세1분과 정요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