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개경 사람들은 어떤 채소를 먹었을까?

BoardLang.text_date 2004.11.08 작성자 박종진
개경 사람들은 어떤 채소를 먹었을까?

담근 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 겨울내내 반찬되네.

뿌리는 땅속에서 자꾸만 커가니

서리맞은 무 칼로 베어먹으니 배같이 달구나.

( 이규보,‘가포육영 家圃六詠’ 중 무(菁))

올 여름 토마토가 몸에 좋다는 보도가 나오자 시중의 토마토 값이 껑충 뛴 일이 있다. 최근 우리사회는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빈곤층들도 많은 반면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인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이렇게 성인병을 걱정하는 사람이 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식품 중의 하나가 채소이며, 특히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재배했다는 유기농 재배 채소는 단연 인기가 높다.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의 식료품 파는 곳에 가보면 배추와 무 등 전통적으로 많이 먹었던 채소뿐 아니라 이름도 생소한 채소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만큼 채소는 요즘 사람들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식품이다. 그렇지만 채소는 요즘 사람들만이 즐겼던 것은 아니다.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채소를 즐겨 먹었고, 또 어떻게 재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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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에서 파는 유기농 채소 (박종진, 2004. 11)

 

어떤 채소가 있었을까? 또 채소는 어떻게 쓰였을까?

고려시기엔 어떤 채소가 있었을까? 또 당시 채소는 어떻게 쓰였을까?  물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중국고대의 농서인 [제민요술]에 오이, 참외, 가지, 박, 아욱, 우엉, 파, 마늘, 무청, 부추, 생강 등의 재배법이 소개되어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채소는 곡물 못지않은 주요 식품이었다. [고려사]와 고려 문집에서도 여러 가지의 채소이름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고려중기 문인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 참외, 순채, 토란 등  여러 종류의 채소 이름이 보인다. 이 채소들은 간식이나 반찬으로 먹은 듯하다. 1064년(문종 18년)에 흉년이 들자 임진강변에 있던 보통원에 임시 급식소(진제장: 賑濟場)를 설치하고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죽과 채소를 준비하여 여행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채소가 중요한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채소가 선물로도 이용되었음은 고려중기의 관인 곽상은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은 과일이나 채소같은 작은 물건도 받지 않았다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고려후기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향약구급방]에서도 연근, 도라지, 토란, 아욱, 상치, 무, 배추, 우엉 같은 채소를 찾을 수 있다. 또 국가 제사인 원구제 친사의 때의 제사상에는 미나리, 죽순, 무[菁] 등이 올랐으며, 고려말 공양왕 2년에 정해진 제사상에도 채소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당시 채소가 식품, 선물, 약재, 제수 등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생강은 강소(薑所)가 있었던 것에서 귀한 약재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데, 1018년(현종 9)에는 전사한 장졸의 부모 처자에게 생강을 내려준 일도 있었다. 또 [고려사]에는 생강을 둘러싼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하니, 바로 명종 때 관리 박제검의 아들 박보광의 이야기이다. 박보광은 길에서 이소응(李紹膺)의 처가 데리고 있던 비복의 생강을 빼앗으려고 폭력을 휘둘렀다가 이소응의 노복들이 무기를 들고 집으로 몰려들자 도망하여 숨은 일도 있었으니, 당시 생강이 귀하긴 귀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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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사정(1707-1769)의 ‘서설홍청(鼠齧紅菁: 쥐가 홍당무를 파먹다)’. 간송미술관. 조선후기에는 채소그림이 많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채소가 깊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심어서 먹었을까?

그러면 당시에는 채소를 어떻게 심어서 먹었을까? 물론 농촌의 경우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집 주변의 텃밭이나 곡물을 심고 남은 작은 땅 혹은 논뚝 밭뚝에도 채소를 심었을 것이다. 그렇게 심은 채소는 판매용이라기 보다는 자급자족용이었을 것이다. 또 생강을 전문적으로 재배하여 국가에 바쳤던 강소(薑所)가 있었던 것에서 지방에는 주요 채소와 약재를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경같은 대도시에서는 어떻게 채소를 구했을까?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글 중에는 앞에서 인용한 이규보의 유명한 시 ‘가포육영’이 있다. 이것은 이규보가 텃밭에서 가꾼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 등 6개의 채소를 노래한 시이다. 이 시는 강화에 도읍이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에서 당시 도시의 관리들이 집 주변의 텃밭에서 채소를 심어서 먹었던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이규보는 채소 씨앗을 보내준 이수에게 보낸 시를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이규보는 그 시에서 “채마밭에 뿌릴 씨 군후께 얻었으니, 많은 종류 얻게 되어 나의 뜻과 정히 맞네. 파밭에 대공 솟기 애타게 기다리고, 오이넝쿨도 시렁에 곧 뻗으리....”라고 읊었는데, 여기서 채소씨앗이 좋은 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당시 관료들은 씨앗을 주고받으면서 집 주변의 땅에 채소를 심었던 듯하다.

채소밭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가꾸었을까?

그러면 당시 채소밭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채소를 가꾸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고려말 이곡이 쓴 ‘소포기(小圃記)’가 참고된다. 이에 의하면 이곡은 서울 복전방의 빌린집 공터에 작은 채소밭을 가꾸었는데, 그 밭은 길이가 2장 반, 너비가 그 1/3쯤 되었다고 한다. 그 밭의 크기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체로 길이 7.5미터, 폭 2.5미터 정도 되는데, 이곡은 이 밭에 8, 9개의 밭두둑을 만들어 채소 몇 가지를 심었다고 하니, 그 모습은 요즘 도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주말농장의 조그만 밭 정도가 아니었을까? ‘소포기’에 의하면 채소를 심은 첫해에는 아침마다 캐어 먹고, 남는 것은 이웃에도 나누어주었는데, 이듬해는 가뭄과 장마로 수확이 반밖에 안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가뭄과 늦은 비가 더 심하여 수확이 더 줄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도시에 살던 관리들이 집의 공터에 채소를 가꾸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 집 땅이 나쁠 경우 채소재배를 위해서 비옥한 땅을 새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앞에 소개한 이규보가 이수에게 보낸 시 말미에 붙은 주석에 의하면 이규보는 자기 집 땅이 척박해서 새로 비옥한 땅을 얻어서 채소를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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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항동에 있는 주말농장의 배추(박종진, 2004.11).

팔기 위해서 재배하기도 하였을까?

그런데 당시 개경 주변에서는 이규보나 이곡처럼 자기와 주변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채소를 심은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해서도 채소를 재배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고려사]에는 이런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고려 중기 국학학유를 지냈던 김수자는 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면서 채소를 길러서 팔아서 먹고살면서 아동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물론 이 경우 김수자는 전문적인 채소재배자는 아니었지만, 일시적으로 채소를 팔아서 먹고살았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왕족인 왕공(王珙)은 성품이 탐욕스러워 가노를 보내어 값을 주지 않고 시장 물품을 강탈하였고 심지어 땔나무와 채소 과일까지도 빼앗았으며, 판 사람이 혹 값을 요구하면 때리고 욕을 보여서 사람들의 고통이 컸다고 한다. 비록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여기서 개경의 시장에서 채소가 과일 땔나무와 함께 팔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같이 채소를 전문적으로 경작하는 농민은 없었겠지만 대도시 주변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수요에 맞추어 채소를 재배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개경 주위의 절에서도 채소를 경작하였고, 이 중의 일부는 유통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시대에는 절에서 마늘이나 파같은 채소를 경작하고 더 나아가서 이를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이 많아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이런 정황에서 보면 개경 주변의 크고 작은 절에서 다양한 채소를 경작하고 이를 시중에 판매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채소는 오래전부터 곡식을 보완하는 주요한 식량으로, 입맛을 돋구는 양념으로, 출출할 때 먹는 간식으로, 불편한 몸을 다스리는 약재로 널리 쓰였다. 이런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몸에 좋다는 채소도 무작정 많이 먹어서 될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이 되는 채소가 나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종진, 중세1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