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란도
들어가며
‘고려시대’라고 하면, 외세에 대한 굳건한 저항정신, 임금을 황제로 인식하던 자주성, 상대적으로 높았던 여성의 지위, 사상적․문화적인 다양성, 불교의 시대, 세계적 자랑거리인 금속활자와 대장경, 청자, 그리고 벽란도로 상징되는 대외적인 교류와 개방 등등의 키워드가 떠오른다. 외침에 대한 저항정신을 제외하면 확실히 같은 통일 왕조이면서 비슷하게 500년가량 유지한 조선왕조의 여러 이미지와는 대비되는 특징들이라 할 만하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고려의 대외적인 교류와 개방을 상징하는 예성강 벽란도와 그를 통한 국제 교역을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사진 1) 벽란도
국제무역항 벽란도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아침에 이 누각 밑을 출발하면, 한낮이 못되어 남만에 이를 것이다.
고려중기의 이규보(李奎報)는 벽란도의 누각 위에서 남방 이국(異國)을 향하는 장사배 등이 뱃머리를 잇대며 오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이렇게 번잡한 벽란도에서 밀수는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1205년(희종 원년) 반출 금지 물자를 가지고 몰래 벽란도를 빠져나가려던 송나라 상인을 안완이란 감독관이 붙잡아 매질하였다. 당시에 임금까지도 마음대로 바꾸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충헌은 오히려 안완과 그를 감독관으로 파견한 박득문을 파면시켰다. 벽란도의 물자 출입이 상당한 이권과 연계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고려를 찾은 일본 사람들
벽란도에는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의 國使, 또는 상인이나 승려들도 종종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수은, 유황, 진주, 악기, 해조류, 나전제품, 거울넣는 상자, 벼루넣는 상자, 향로, 부채, 빗, 칼, 감귤, 刀劍류, 색깔있는비단, 무늬넣은비단, 후추 등의 각종 토산물이나 동남아 등지의 물산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불상을 만들어 고려 임금에게 바치겠다는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같은 일본인들의 상당수는 고려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경상도 금주(金州 ; 지금의 김해)의 객관(客館)에서 일을 보고 돌아가야 했고 직접 벽란도에까지 오도록 허락받은 경우는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로서는 일본과의 교역에서 얻을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본상인들 중 일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자주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王則貞이란 상인은 고려 기록에 두 차례 보이는데, 1080년(문종 34)에는 문종 임금의 風疾(중풍으로 추정됨)을 치료할 의원을 요청하는 고려정부의 문서를 일본측에 전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고려 조정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이야기이고, 자주 개경을 찾은 상인들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유감스럽게도 고려측의 의원 요청은, 고려의 문서가 일본인들을 모멸한 부분이 있고, 정식 사신 대신 상인에게 부탁했다는 점 등의 이유로 거부되었다. 그러나 문종 대에 이어 선종 대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고려를 찾아왔으며, 뜸하기는 하나 일본 상인들이나 일본 지방정권의 방물 진헌은 고려말 왜구의 극성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편이다.
벽란도의 아라비아인, 그리고 ‘코레아’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이전에 벽란도와 개경 거리에서 대식국(大食國) 사람, 즉 아라비아 지역의 상인들만큼 눈빛이 특이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물론 이들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1세기에 100여명씩의 규모로 3차례 온 것이 전부이지만, 특이한 용모와 복식,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수은과 몰약, 점성향(占城香 ; 베트남 남부에서 나는 향) 등 이국적인 물품들로 인해 이들의 존재는 고려 사람들의 뇌리에 매우 인상적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사진2 : 자료출처 에듀넷) 아라비아 상인들
아라비아 지역의 상인들의 고려 방문은 이런 저런 면에서 매우 이채로웠기 때문인지 고려의 임금은 그들을 매우 따뜻이 맞이하여 환대를 베풀었고, 금과 비단 등 후한 하사품을 내려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우리나라를 일컫는 “코레아”라는 말은 이들 파란 눈의 아라비아인들을 통해 바깥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들이 3번 정도만 기록에 보이고 더 이상 고려를 찾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기록의 누락 가능성과 함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법하다. 이들은 굳이 고려에 오지 않고도 평소 자주 드나들며 거래하던 송나라의 상인들을 통해 고려의 물건과 고려에 대한 정보들을 확보하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벽란도에 직접 와서이든, 직접 오지 않고 벽란도를 드나든 송나라 상인들을 통해서 고려와 그 물산을 알았든, 벽란도가 ‘코레아’의 존재를 세상에 전하는 데에 큰 몫을 하였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송나라 상인
벽란도가 “코레아”의 세계화(?)에 단단한 초석이 되었음을 인정하더라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역시 송 상인들의 활약이다. 사실 벽란도를 가장 자주 드나들고 가장 많은 물량을 출입하게 한 외국인은 송 상인들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앞에 본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찾아오게 한 다리 역할을 하였다는 추측도 나올 정도이다.
(사진3) 고려의 대외무역도
송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한 것은 고려측의 공식 기록만 해도 1014년(현종 3)부터 1278년(충렬왕 4)까지 260여년간 120여 차례에 걸쳐 최소 5천여명의 규모에 이른다. 이러한 송 상인들이었기에 「예성강」이라는 고려 가요도 나왔을 터이다. 「예성강」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송 상인의 우두머리 하두강(賀頭綱)이라는 자는 예성강변에서 첫눈에 반한 미모의 여인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뺏기 위해 바둑을 청하고, 처음에는 일부러 지는 바둑을 두어 남편의 경계심을 푼다. 마음을 놓은 남편에게 그는 막대한 금품과 그의 아내를 걸고 내기 바둑을 두어 끝내 여인을 빼앗는다. 남편은 뉘우치는 마음으로 슬픈 노래를 불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미녀를 차지한 채 자기 나라로 돌아가던 하두강은 단단한 여인의 몸매무새 때문에 그녀를 범할 수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잘 나가던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맴돌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괴이히 여긴 하두강이 점을 치니, “여인의 정절이 대단하므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가 부서질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하두강은 하는 수없이 그 여인을 돌려보낸다. 이에 기쁨에 찬 여인이 노래를 불렀는데, 앞서 남편이 불렀던 노래와 함께 「예성강」이라는 고려가요의 기원이 된 것이다. 지금은 노래의 유래만 이와 같이 전할 뿐 노랫말 자체는 전하지 않아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송나라 상인들이 고려를 자주 찾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비단을 비롯한 이들이 가져온 물건들은 대도시 개경에 그들 물품의 소비자가 많았다. 게다가 고려의 임금은 그들에게 푸짐한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왜냐하면 임금과 왕실 귀족, 그리고 개경에 거주하는 고급 관료 등 상류층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물품들은 당시 서남아시아까지 진출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송나라 상인들이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오며
고려의 개방성과 관련하여 대식국 상인, 즉 아라비아 상인들을 거론하더라도 그 사실과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다. 사실 아라비아인들이 벽란도를 찾아온 것은 일본인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가지고 들어와 고려 지배층의 눈길을 모으고 막대한 경제적 부를 도로 가져간 송나라 상인들에 비할 바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벽란도를 드나든 송 상인들과 몇 번 안되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내항은 그 자체로 고려의 개방성과 활발한 대외무역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긴 하다. 또 그러한 교역으로 인해 고려의 수도 개경이 갖가지 화려하고 이채로운 외국 물품으로 가득차 멋쟁이 개경 주민들의 구매를 기다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송 상인이나 아라비아의 상인들처럼 적극적으로 해양 또는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 것은 아니었다. 송나라에 진출하며 무역에 종사한 고려의 장사꾼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20세기 후반을 통해 잠시 낙후되었던 중국이 하루가 다르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과거 화려한 비단과 차와 보석들을 가지고 고려의 벽란도를 드나들며 결코 적지 않은 부를 빼내가던 그 상인들의 나라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과 국제정치력을 가지고.
(중세 1분과 서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