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의천이 크게 깨달은 곳, 오관산 영통사

BoardLang.text_date 2005.07.12 작성자 안병우
의천이 크게 깨달은 곳, 오관산 영통사

보지 못하고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감촉을 통해 사물의 형체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모양을 그릴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해도 색을 칠할 수는 없겠다. 영통사에 가보지 못하고 글을 써야 하는 처지가 그와 같다. 청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다.

오관산 영통사야 워낙 유명한 절이어서 기록이 제법 남아 있고, 어차피 없어진 절이니 상상력을 발휘하여 쓰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민족 21에서 컴퓨터로 받아본 사진은 선명한 단청을 입힌 웅장한 건물들이었다. 언제 저렇게 복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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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복원한 영통사 전경

그렇지, 남한의 천태종단에서 영통사를 복원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기사를 찾아보니, 1년 여 공사 끝에 지난 달 중순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진은 복원 불사를 마친 직후에 촬영한 것이다. 대법당인 보광원을 비롯해 모두 스물 아홉 채의 건물을 지었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낸 기와만도 40만 장 가까이 될 정도로 큰 공사였다.

영통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과 관계가 깊은 절이기 때문에 천태종단이 복원한 것이다. 폐사를 남북이 힘을 합쳐 재건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남북이 영통사를 복원하면서 간절히 기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평화 통일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아닐까? 그러한 염원은 중생을 고해에서 구원하려던 대각국사 義天의 소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통사는 다섯 봉우리가 솟아오른 오관산 남쪽 靈通洞에 있다. 옛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花潭을 거쳐 올라가는 길은 꼬불꼬불하고, 산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나무는 울창하며, 이리저리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을 여러 번 건너야 영통동에 도착한다.

“흰 구름 깊고 먼 골엔 아마도 신선이 있을테지”라고 金九容이 읊은 仙界에 자리잡은 영통사. 그곳에서 고려 최고의 시인 李奎報는 “산에 들어서 맑은 시냇물 소리 들으니, 인간의 온갖 시비 쿵쿵 찧어 깨뜨려주네.”라고 노래하였다. 세상살이에서 부딪치는 온갖 시비를 모두 없애주는 시냇물 소리. 시인은 천 년 전에 그 소리를 들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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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강세황의 그림 영통동

오관산은 태조 왕건의 집안과 인연이 깊은 산이다. 건국 설화를 수록한 ‘高麗世系’에는 왕건의 조상 康忠이 오관산 摩訶岬, 즉 영통동에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보육 역시 摩訶岬에 庵子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날 신라의 술사가 찾아와 “이곳에 살고 있으면, 당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되리라”고 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장녀가 어느 날 곡령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천하가 잠기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동생 辰義에게 팔았다. 그 뒤 당 숙종이 천하를 주유하다가 고려에 들러 보육의 집에 묵으면서 진의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왕건의 할아버지 作帝建이다.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龍建을 낳았고, 용건의 아들이 바로 왕건이다. 유치한 수준의 설화이지만, 개성지방의 토호에 불과했던 왕건 가문을 꾸며주기에는 충분했다.

왕건 가문이 영통동 일대에 산 것은 사실이다. 이 일대가 왕실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므로, 영통사에는 태조의 아버지인 세조와 태조, 인종, 명종 같은 임금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왕들도 자주 행차하였다.

영통사는 현종 18년(1027)에 창건했으나 건물은 어느 땐가 다 없어지고, 오층석탑과 그 양쪽의 삼층석탑, 그리고 당간지주와 대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왼쪽의 당간지주와 오른쪽의 대각국사의 비석이다. 이 곳이 절이니, 잡된 생각과 욕심은 다 버리고 들어서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이 당간지주다. 영통사의 당간지주는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있다. 마치 너희들도 모두 따라서 해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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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영통사 복원전 전경(조선고적도보)

영통사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대각국사다. 그러므로 그의 비가 입구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왼쪽 뒷 부분에 부도가 있고, 그 뒤편으로 敬先院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있다. 그 안에 국사의 영정을 모신 것으로 보아 부도는 의천의 것으로 보인다. 국사를 친히 뵌 김부식에 의하면, 의천의 얼굴이 맑고 깨끗하여 청천백일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청천백일과 같은 귀골이 신선이 살만한 영통사에 거처하였던 것이다.

의천은 고려의 문물이 절정기에 도달하였다고 하는 시대의 임금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위대한 인물들이 대개 그러하듯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았다. 문종이 왕자들을 모아놓고 “누가 출가하여 부처를 공양하겠느냐” 라고 하니, 의천이 일어서서 “제가 출가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한마디로 국사의 앞날은 결정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 열 한 살이었다. 의천이 승려가 되어 처음 머문 곳이 영통사이다. 그 곳에서 의천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리하여 당대의 學僧이 되었다.

중국에 가보고 싶었으나 어머니와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한 의천은 제자 둘만 데리고 밀항하였다. 14개월 동안 머물면서 중국의 승려들과 화엄학과 천태학에 관해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고 불교 서적을 대규모로 수입해왔다. 어머니와 왕의 종용으로 귀국한 후에는 문종이 발원하여 창건한 興王寺의 주지를 맡아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송, 요, 일본 등에서 수집한 4천 여 권의 章疏 간행 작업에 착수했다. 그 목록으로 작성한 新編諸宗敎藏總錄 서문이 지금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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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영통사 대각국사비(서울대 도록)

한때 인주 이씨 세력에 밀려 해인사에 은거하기도 한 의천은 형인 숙종이 정변을 일으켜 즉위하자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 후 국청사에 주석하면서 천태교학을 완성하는 한편 숙종을 도와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6년 (1101)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영통사에 안치하였고, 시호를 大覺이라 하였다. 대각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숙종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영통사는 의천이 승려 생활을 시작한 곳이자 그의 사상이 성장한 곳이고, 영혼이 안식하는 곳이다.

그의 활동과 사상을 기록한 비문 작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윤관 가문과 김부식의 대립은 이미 널리 알려져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어디에나 정치는 스며 있다. 세상사 시비를 쓸어버릴 시냇물은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흐를 것인가.( 안병우, 중세1분과 )

* 이 글은 민족21 2005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민족21의 동의를 받고 이곳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