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사람들도 부동산 투기를 하였을까? 요즘 우리 사회에 최고 관심사의 하나는 부동산 투기다. 자고 일어나면 치솟는 부동산 가격으로 한숨짓는 사람들, 저편에서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 부동산 투기가 몰고 온 우리 사회 양극화의 한 단면이다. 특히 집은 부동산 열풍을 몰고 온 진원지다. 사진1. 최근 투기의 진원지로 주목되는 강남 일대의 전경. (2005년 1월1일 중세1분과 박종진 촬영) 그러면 고려시대에도 주택 투기가 있었을까? 고려인들도 주택 매매를 통한 시세 차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과연 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신분제 사회였던 중세인에게 의식주는 단지 먹고 입고 거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서양 중세에서도 음식은 지배계층의 우월함을 보일 수 있는 호기를 제공하였으며 귀족들은 그릇과 음식의 사치를 통해 자신들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옷의 사회적 의미는 훨씬 컸다. 그것은 개개 사회계층을 의미했고 결국 제복이 되었다. 중세인들은 잘 먹고 사는데 그치지 않고 힘 닿는데까지 외적 과시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한다. 집을 통한 과시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집은 사회적 분화가 표현되는 마지막 방식이었다고 한다. (쟈크 르 고프(저)유희수 옮김,서양중세문명문학과 지성사, 1992. 제 9장 망탈리테 감수성 태도) 고려인에게도 집은 생활에 필요한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개경의 집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명종때 산원동정이던 노극청의 아내는 형편이 어려워 백금 12근에 집을 팔았다. 무인정권기에 정존실은 붉은 혁대 제작공인·언광의 집을 은 35근에 사기로 한 일이 있었다. 또충선왕은 안향의 집을 은 50근에 사서 권준에게 주었다. 위의 기록에서 개경의 집은 백금 즉 은을 기준으로 환산되었으며 개인간에 자유롭게 매매가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집 한채의 값은 대략 은 10근에서 50근 정도였다. 10근 전후이던 노극청의 집은 그가 가난한 처지에 수년간 수리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썩 좋은 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충선왕이 사서 권준에게 주었던 50근 짜리 집은 그들의 지위로 보아 꽤 좋은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경에는 물론 이보다 싼집도 또 엄청나게 비싼 집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보면 왕성내 민가는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로 누추하고 크기는 두개의 서까래를 걸쳐놓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기와집이 10에 한 두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반면 대궐보다 화려했다는 권준의 집 같은 저택은 상당히 값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은 10근에서 50근 정도의 집값도 당시의 경제수준에 비추어 싼 편이 아니었다. 충렬왕때에는 은 한근이 쌀 50석이었고 은 한근으로 만들어진 은병의 가치는 은의 함량이나 시기등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났지만 공민왕대에는 은병 한개값이 포 100필에 해당하였다고 한다. 같은 시기 민가에는 포 한필의 저축도 없었다고 하니 고려시대에도 수도 요지의 집값은 역시 비쌌다. 집값은 지역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함유일의 집은 성의 동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와 아들은 좀 더 도성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 산업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무래도 도성 근처가 재테크에 유리하고 수요도 많았을 것이다. 관인층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여 정승동이라 이름 붙여진 대궐 동남쪽 부근도 관료들의 수요가 많은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지역은 상대적으로 값이 비쌌을 가능성이 크다. 다주택 소유자와 셋집살이 개경의 관인들은 대개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별업 또는 별서라고도 하며 이색이 지은 조씨임정기(趙氏林亭記)에 보면 경읍 가까운 곳에 사대부들이 설치한 별서(別墅)가 많았다고 한다. 즉 상층 관료들은 일반적으로 1가구 2주택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별업은 대개 경읍 근처 성동, 성남 ,앵계, 덕수현등으로 도성과 멀지 않고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있었다. 충선왕때 이혼(李混)은 성남에 별업을 두어 복산장이라 하고 빈객들과 거문고, 바둑등을 즐겼으며, 검교대장군이었던 방청련(房淸璉)도 도성 동쪽에 별업이 있었다. 조충(趙冲)은 별서를 마련해 샘을 파서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독락원(獨樂園)이라 이름지어 풍류를 즐겼으며, 이규보의 별업이었던 사가제(四可齋)도 그의 집에서 가까워 가끔 들러 독서 하고 술도 마시며 숙식을 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별서는 관인층의 별장, 또는 퇴직 관료들의 은거지로서의 의미가 컸으나 후대에는 별업이 원거리로 확대되어 가면서 농장의 개념이 커지게 되었다. 사진2. 조선 중종때 처사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자 낙향하여 은거지로 꾸민 별서 정원, 소쇄원의 전경( 2005년 7월 박종진 촬영) 그 외에도 집을 여러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컨대 의종때 김존중은 갑제(甲第) 즉 좋은 집을 4채나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명종때 상장군이었던 최세보는 일방(一坊)을 모두 차지하여 사방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공민왕때 재상이었던 지윤은 30명의 희첩가운데 집을 가지고 있던 여자가 12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과부가 된 기씨의 좋은 집을 탐해 그녀와 혼인을 하려고까지 하였다. 상류층이 여러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개경에는 집없는 세입자도 적지 않았다. 명종때에 남포현의 농민 출신인 백임지(白任至)가 효용(驍勇)으로 뽑혀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셋집살이를 하면서 나무를 해다 팔아 겨우 연명하다가 운 좋게도 내순검군으로 지내면서 왕의 눈에 들어 형부시랑이라는 고위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출세를 한 그는 처와 함께 하인을 거느리고 옛날 셋집 주인이었던 노파를 찾아가 융숭히 대접을 하니 노파가 “ 당신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지방에서 교대근무를 하는 군인이나 공장 또는 과거를 보기 위해 개경으로 올라오는 지방사람들 중에는 백임지와 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경에서도 주택을 이용해 시세 차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명종때 산원동정이던 노극청이 돈이 없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한참을 팔리지 않던 집을 극청이 없는 사이 그의 아내가 백금 12근을 받고 현덕수에게 팔았다. 이 집은 원래 은 9근에 산 집이었다. 그러므로 몇 년사이에 30%가 넘는 차익을 거둔 것이다. 주택 매매를 통해 상당한 시세 차익을 거둔 사례다. 그러나 노극청은 몇년간 살면서 수리도 안한 집을 어떻게 비싸게 팔 수 있는가 하고 현덕수를 찾아가 차익을 다시 돌려 주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사례를 통해 볼때 당시 개경의 집값은 시세변동폭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집 수리가 안된 낡은 집을 비싸게 파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 아니라 여겼던 노극청의 태도에서 집값에 영향을 주었던 요인은 오히려 집의 상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인들이 집을 투기의 수단으로 삼았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는 것이 축재의 수단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시세 차익을 통한 재테크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같다. 고려인에게 집은 중세적 특징으로 보이는 신분 과시적 의미가 더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인의 집 , 집가꾸기와 과시 고려의 상류층은 외적 과시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드러내려고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상류층의 집가꾸기나 집에 대한 사치는 대단하였다. 성종초부터 이미 군, 현의 부호들이 제도에 아랑곳없이 저마다 큰집을 지어 집안의 재력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백성을 괴롭게 하여 폐단이 많다는 지적이 보인다. 최자는 삼도부(三都賦)에서 개경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 공경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쳤는데, 엄청난 큰 누각은 봉황이 춤추는 듯 이무기가 기어 오르듯, 서늘한 마루와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 있고 금벽이 휘황하며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채전으로 땅을 깔고, 온갖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고 아름다움을 뽐내네” 이런 모습은 과장만이 아니었다. 크고 화려한 집의 정원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 앵무새 공작등 희귀한 새와 동물을 기르며 완상하였는데, 이런 것들은 일찌기 왕실에서 송나라 상인들로부터 수입하여 점차 권력층의 중요한 취미생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예컨대 무인정권기에 지주사 우공은 부귀를 누리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대궐곁에 집터를 잡아 집을 짓고 집안에 큰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가득 심고 거위와 오리를 놓아 길렀다. 정자와 꽃을 심은 담장, 대나무 전각등을 사치스럽게 건축하여 세상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주문화옥(朱門華屋) 화려한 집안으로 들어 오게 하였다고 한다.(동문선,권 66, 태재기(泰齋記)) 사진3. 자연을 끌어 들인 고려 정원의 모습을 간직한 청평사 정원 무인집정기 최씨 집안의 사치는 극에 달한 느낌이다. 최충헌은 근처 민가 100여채를 헐어 수 리에 달하는 화려한 집을 지었다. 십자각이라 칭해지던 건물은 모나게 하여 십(十) 자같이 하고 속을 정(井)자 같이 만들어 사방을 모두 거울로 꾸몄다. 광명이 안과 밖의 사물을 모두 비추어 번쩍거렸으며 갖가지 장식을 한 건물은 단청을 하여 휘황찬란 하였다고 한다. 또 아들 최우는 집에 큰 누각을 지었는데 누각 위에는 손님 1천 명을 앉힐 수 있고 누각 아래는 수레 1백 대를 나란히 놓을 만하였다고 한다. 동쪽에 불상을 안치한 감실을 두고 불사를 행하면 수백 명의 중들을 맞아들여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고, 누각 남쪽의 격구장은 길이가 무려 4백여 보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싼 담장이 수 리에 걸쳐 뻗쳐 있었다고 한다.(동국이상국집권24,「崔承制十字閣記」「又大樓記」) 이 밖에도 집에 큰 누각을 세워 벽을 금으로 장식하고 기둥에 붉은 옷칠을 한 사람도 있었으며 급기야 충숙왕이 권준의 집에 와서는 그 집의 아름다움을 둘러보고 “과인이 감히 당할 바 아니라.”고 탄식하였다 한다. 가옥의 사치와 화려함이 가히 왕실을 능가할 정도였던 것이다. 궁궐과 도성 주위의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권력층의 저택 그리고 송나라 사신 서긍이 본 벌집 개미집 같이 누추한 일반민의 주거지 이런 양극화된 형태가 어우러진 개경의 주거 모습은 신분제 사회인 중세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중세 1분과 개경사 연구반 이 혜 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