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인가? 무인집권기인가? 채 웅 석(중세1분과) 고려 의종 24년(1170) 8월 대장군 정중부와 산원 이고ㆍ이의방 등이 왕의 행차를 수행하였다가 보현원에서 순검군을 데리고 호종문신들을 살해하면서 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개경으로 돌아와서도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사람들은 비록 서리라고 하더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군사들을 선동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왕을 폐위하여 거제도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를 왕으로 세워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원종 11년(1270)까지 약 1백년 동안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커서, 혹자는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여기로 잡기도 하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사회의 변화를 파악할 때 전기와 후기의 분기로 잡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무신란ㆍ무신정변ㆍ무인정변, 무신집권기ㆍ무인집권기 등으로 부르고 있다. 정치권력상 큰 변동을 가져왔던 것을 고려하여 난보다는 정변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무신과 무인의 용어선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행 교과서에는 무신정변ㆍ무신집권기로 되어 있으나, 개설서나 연구논저 상으로는 통일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는 한 사람이 글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그 의미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지만, 무인정변ㆍ무인집권기로 쓰는 연구자 가운데 몇몇이 자기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 본다면 무인은 무를 연마하고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무반신료를 뜻하는 무신도 그 범주안에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이라고 하면 왕조의 관료라는 의미로 한정되어 그 독자성이 무시될 염려가 있다든지, 당시의 정치구조와 그 주도세력이 왕이나 문벌을 중심으로 한 기존 질서하의 그것과는 달랐다든지, 무신들은 국왕에게 절대 충성해야 하는 존재였지만 당시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 등에 주목하여 무신보다는 무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변 이전은 무신 그리고 이후는 무인이라고 구분하여 쓴 경우도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위 견해들을 고려하여 무신집권기와 무인집권기의 용어 선택기준을 생각해보면, 무신이라는 범주로 포섭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권력에 참여하였는가, 왕조의 공적 관료체제와 함께 그와는 다른 무인들의 독자적인 권력체제가 병존하면서 전자를 압도하였는가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조의 관료체제가 유지되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속에서 권력을 가지려면 관직체계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것과 구분되는 무인들의 독자적인 권력체제가 존재하였는지의 여부로 문제가 좁혀진다. 집권 초기에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정치하면서 문반이 차지했던 관직을 대거 무신에게 넘겼다. 권력자들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문객과 사병으로 흡수하여 자기세력을 구축하였으며, 그런 실력에 권력장악의 가부가 달렸다. 특히 최씨 집권기에는 집권자의 사적인 지배방식이 공식화하고 이를 토대로 최씨집권자는 기존의 관료제를 초월하는 독자적인 권위까지 갖게 되었다. 선행연구 가운데에는 최씨정권의 진양부가 빈객ㆍ심복집단으로서 막부와 같은 것이라고 파악한 견해도 있는데, 그렇다면 국왕권력과는 별개의 정치권력이 존재하여 기존의 관료제를 무력하게 만든 것이 되어 무인집권기로 부르기에 충분하다. 또한 무인정변ㆍ무인집권기라고 부르는 연구자들은 그것이 동일한 지배세력 안에서의 대립 항쟁의 결과였다기보다는 다른 두 신분층 사이에서의 항쟁이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부 무신들만의 정변이 아니라 문신 중심의 문벌귀족사회 속에서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그 역이 천시되었던 일반 군인들이 지지하고 참여하여 성공하였으며 이후 하층민 출신으로서 신분이 상승한 사례가 많아졌다고 파악하여 그 신분ㆍ계층변동상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당시 집권자들은 권력을 유지하는 데 관직과 공병조직을 이용하여 왕조체제에 의존하였다. 최씨정권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양부의 위상을 위와 같이 파악하는 것은 사료상 지나친 해석이라고 보이고 최씨정권의 중심정치기구는 교정도감이었다는 견해가 설득력이 더 있다. 또한 문객과 사병조직이 사적인 결합이었다고 하여도 왕조의 관직 부여가 그 결합을 유지 강화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문객과 사병들은 관직 임명이나 승진을 기대할 수 없다면 충성을 바치면서 결합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대개 관직을 갖거나 중앙군에 소속하여 공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12세기 전반기부터 사회변동기적 상황에 들어가면서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모반사건들이 이어졌다. 문종 26년(1072) 교위 거신의 모반사건을 시작으로 이자의의 난(1095), 승통 정의 모반사건(1112), 이자겸의 난(1126), 묘청의 난(1135) 등이 이어지고 의종대에도 종실 사이에 갈등이 심각하였다. 지배층이 분열하고 정치적 위기상항이 이어지는 가운데 개혁론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왕권을 보위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국왕 측근세력을 육성하게 되었다. 또 호위를 강화해야 하는 필요성이 커졌다. 1170년의 정변은 정치가 탄력성을 상실한 가운데 측근 문신ㆍ환관과 측근무신 사이에 일어난 권력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정변 참여세력 가운데 과격파들은 정변을 정당화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변을 확대하면서 사회모순의 책임을 문신들에게 돌리고 그들에게 불만을 분출시키게 하였다. 의종대의 정치가 파행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당화가 통할 수 있었다. 또한 정변 이후에도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문ㆍ무반의 대립구도를 지속시키고 무반의 공동이해관계를 강조하여 결속시키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1170년의 정변과 이후 무신집권자들의 교체과정은 12세기 초에서 13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지배층의 분열과 그에 따라 일어난 정치변란이라는 구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무신정변ㆍ무신집권기 또는 무인정변ㆍ무인집권기라는 용어의 선택문제는 고려사의 성격, 좁게는 고려중기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역사인식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