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무구정광탑 중수기」와 다보탑 남동신(중세사 1분과) 낭보 2007년 3월 9일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앙박물관)은 보도자료를 통하여,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묵서지편(墨書紙片)의 내용 일부를 공개하였다. 발표에 따르면, 묵서지편은 ① 「보협인다라니경 寶篋印陀羅尼經」, ②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 佛國寺无垢淨光塔重修記」(1024년, 이하 중수기), ③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1038년), ④ 「보시명공중승소명기 布施名公衆僧小名記」의 4종 문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두 번째 중수기 판독문과 관련 사진 3장을 공개한 것이다.(그림1, 그림2, 그림3) 그림 1) 중수기 첫 부분 ‘光淨’(붉은점 표시)은 ‘淨光’을 일부러 바꿔 쓴 것임.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그림 2) 중수기 본문 그림 3) 탑 부재(붉은 네모)와 長壽社(붉은 원)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불국사는 근대 이후 한국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여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아침 햇살에 빛나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학창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아가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역사상 인류가 성취한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문화재이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소되기 이전, 그러니까 원형에 좀더 가까운 불국사가 과연 어떠하였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문헌자료는 매우 적다.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인 김대성(金大城 ; ?~774)이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각각 석불사(석굴암)와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연기설화가 『삼국유사』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고려시대까지 올라가는 옛 문헌은 극히 적은 실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면, 우리가 불국사의 원형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우리가 늘상 바라보지만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판독이 시작된 묵서지편은 불국사의 원형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리라 기대된다. 이 글은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 근거하여 묵서지편의 발견 경위와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함으로써 역사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아울러 내용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생각을 한 두 가지 덧붙임으로써, 향후의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1966년 발견 당시 떡처럼 응고되어 있었던 것을, 문화재 보존 및 복원 기술의 향상 덕분에 이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무엇보다도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석가탑 사리장엄구의 발견 경위 1966년 9월 3일 한밤에 일단의 도굴꾼들이 석가탑 2번 탑신을 잭으로 들어 올려서 보물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들은 5일 밤에 3번 탑신을 다시 들어올렸지만 이번에도 보물을 찾지는 못하였다. 다음날 오후 2시경 때마침 불국사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감독이 석가탑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즉각 당국에 신고하였다. 조사해보니 2층 탑신과 3층 탑신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금이 갔으며, 탑 자체가 6도 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석가탑 손상이 지진 때문이냐 도굴 때문이냐를 둘러싸고 전국의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문화재위원회는 신속하게 전문가를 파견하여 석가탑 훼손이 도굴꾼들의 소행임을 밝히는 한편,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훼손된 석가탑을 해체·보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다보탑이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 보수된 것과 달리, 석가탑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처음 건립된 이래 1,2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중수된 적이 없다고 믿는 분위기가 역력하였다. 그만큼 세간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을 경이로운 유물들이 석가탑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팽배하였다. 마침내 10월 13일 역사적인 석가탑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 위로부터 상륜부와 제3층의 석재를 차례로 해체하여 내리고, 다시 제2층 옥개석을 조금 들었을 때, 과연 제2층 탑신석 위쪽에 사리공이 있었으며, 그 안에 사리장치가 온전하게 봉안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목재 장비가 석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면서, 2층 옥개석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추락 직전에 조사원들이 기민하게 대처하여 손상을 최소화 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 일체를 수습한 것은 그 직후였다. 이날의 긴박했던 순간을 훗날 한 원로학자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현장은 경악의 도가니에 빠졌는데, 그 때 제2탑신 속에서 다시 경이적인 사리장엄구가 무사히 나타났다.” 예기치 않았던 불상사로 이후의 조사 작업은 국립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박물관은 그해 11월 4일 석가탑에서 발견된 유물을 간략히 소개한 조사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림 4) 석가탑, 사리공 위치 그림 5) 사리공과 사리외함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보고서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경(無垢淨經) 석가탑 제2층 탑신석 윗쪽에 한 변이 41cm, 깊이 19cm되는 방형 사리공이 있는데, 여기에서 사리와 금동제 사리외함 등 도합 28점의 유물이 나왔는바(그림 4, 그림 5), 이들은 나중에 국보 제126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계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유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 1축으로, 비단에 쌓인 채 사리외함 안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미 부식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는데, 1990년 일본인 전문가가 복원 수리하여 비로소 일반에 전시될 수 있었다. 너비 약 6.5cm, 길이 약 640여cm에 달하는 두루마리 모양의 경전으로, 각 행 6~11자씩 약 63행이 현존한다. 「무구정경」은 탑 조성에 따르는 공덕을 설하는 대표적인 경전으로 704년 중국에서 번역되었다. 그리고 706년(성덕왕 5) 작성된 「황복사삼층석탑사리함명」에서 이 경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번역 직후 바로 신라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무구정경」은 신라 말까지 약 10기의 탑에서 발굴될 만큼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들어가면 「무구정경」이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대체될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무구정경」을 탑에 봉안하는 사례는 드물다는 점에서, 「무구정경」을 탑에 봉안하는 현상은 통일신라 탑신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목판으로 인쇄된 두루마리에는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 재위 기간(685~704년)에 새로 만든 글자 4자가 등장한다. 중국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무구정경이 중국에서 인쇄해서 신라에 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한때 국적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주로 대나무 펄프로 만든 종이를 사용한 데 반해서, 이 두루마리의 재질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닥나무 펄프라는 점에서, 신라에서 경을 인쇄하였다는 견해가 좀더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석가탑 건립의 하한선은 751년이므로, 그 때까지 세계 최고의 불경 인쇄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770년 인쇄)보다 20년 가량 앞서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간주된다.(그림 6, 그림 7) 그림 6) 무구정경(발견 직후) 그림 7) 무구정경(복원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보고서 ‘지(地, 붉은 원)’의 측천(則天) 문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보고서 묵서지편(墨書紙片) 한편 사리공과 사리외함 사이의 공간에서도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묵서지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즉 사리공 중앙 바닥에 비단에 쌓인 묵서지편이 놓여있고 그 위에 사리외함이 올려져 있었다. 사리탑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사리와 무구정경 등을 사리외함 내부에 봉안하였던 데 비해서, 묵서지편을 사리외함 밖에 안치한 이유는 앞으로 밝혀야 하겠으나, 우선 두 유물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묵서지편은 사리외함 밖에 있었기 때문에, 습도와 온도 변화라든가 부식 작용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종이 뭉치가 서로 달라붙어서 출토 당시 사방 약 7cm, 두께 약 2cm로 떡처럼 여러 겹으로 응고된 상태였다고 한다. 곳곳에 ‘주설(詋說)’, ‘주리(詋哩)’, ‘합(合)’, ‘직여(直如)’와 같은 먹으로 된 글씨를 확인하였지만, 당시 기술로는 낱장으로 분리하기 어려워서 ‘묵서명방형지속’(墨書銘方形紙束 : 먹글씨가 적힌 네모 모양의 종이 묶음)이란 이름으로 일단 현상 유지에 주력하였던 것이다.(그림 8, 그림 9) 그림 8) 묵서지편(발견 당시) 그림 9) 묵서지편(항온 항습 보존)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묵서지편은 원래 가로 50cm, 세로 30cm 가량 되는 종이 다섯 장을 이어서 한 장으로 만들고 이를 다시 상하 좌우로 여러 번 접어서 탑 안에 넣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접힌 부분은 떨어지고 종이는 뭉쳐지는 현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렇게 해서 떡처럼 뭉쳐진 묵서지편을 낱장으로 분리하기까지는 다시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중앙박물관은 1997년 9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본격적인 보존처리를 위한 작업에 착수하여, 마침내 110장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고 분리 순서에 따라 일련 번호를 매겼다. 그 과정에서 제 47번부터 제 78번 사이에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라는 제목의 문건이 존재하는데, 고려 정종 때인 1038년에 작성되었고 이두가 섞여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문건의 존재는 2005년 9월 연합뉴스를 통하여 처음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며, 그 이후에 이루어진 판독 및 해석의 성과가 지난 3월 언론에 비로소 공개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중수기의 마지막 두 장은 글씨가 씌어 지지 않은 백지임이 추가로 밝혀졌다. 1997년 중수기 존재가 처음 확인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실이 추가로 밝혀진 것도 있지만,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진 것도 있다. 초기에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제작 연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는데, 기존의 학설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일단 진정되는 국면이다. 대신 지금은 중수기의 내용 해석을 둘러싸고 학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박물관이 지난 3월에 판독문을 전격 공개함으로써, 관련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 검토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였다. 사안이 중요하였던 만큼 학계의 대응도 기민하여서, 같은 달 24일에 신라사학회(안승준․김태식 공동발표)가 중앙박물관의 1차 판독문을 수정하고 단락을 구분하여 행에 일련번호를 달았으며, 나아가 해석을 곁들인 내용 역주를 시도하였다. 이는 향후의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이 글은 이러한 기초 작업에 크게 도움 받았다. 중수기의 정체, 그리고 다보탑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의문점들 중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왜 중수기에서 언급한 유물 목록과 석가탑에서 출토된 유물이 일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컨대 언론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중수기에서 언급한 돌도끼가 석가탑 사리공에서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돌도끼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런데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는 의외로 중수기 안에 있다. 2005년 그 존재가 언론에 처음 확인된 이래 지금까지 중수기를 언급한 자료―중앙박물관의 보도자료, 주요 일간지의 기사, 그리고 신라사학회의 발표문―를 검토해보면, 모두들 하나의 대전제 위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수기는 ‘석가탑을 중수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되는데, 하나는 중수기가 석가탑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무구정경을 봉안한 탑을 무구정광탑이라 부르는데 석가탑에서 무구정경 1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중수기=석가탑중수기’라는 선입견에 젖어든 듯하다. 그러나 무구정광탑은 보통명사일 뿐 아니라, 무구정경을 봉안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무구정광탑이라 불리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석가탑과 다보탑 처럼 쌍탑인 경우, 특정 탑에 대한 기록이 반드시 그 탑에만 봉안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중수기 자체를 읽는다면, 그 내용이 석가탑이 아니라 다보탑에 더 어울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수기는 30쪽(백지 2쪽 별도), 93행에 걸쳐 글씨가 씌어져 있다. 신라사학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내용은 크게 1) 탑의 내력, 2) 사리함과 무구정경 등의 봉안, 3) 중수 때의 공양 품목, 담당자, 보시자 및 일지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두 번째 ‘사리함과 무구정경 등의 봉안’의 제일 앞 부분, 즉 판독문의 제6행부터 제14행까지는 탑을 해체하여 사리를 꺼내고 훼손된 석탑 부재를 일부 보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분에 등장하는 석탑 부재의 명칭이다. 먼저 탑의 해체를 기술한 부분에는 앙련대(仰蓮臺)와 화예(花蕊)와 통주(筒柱)의 세 부재가 등장한다. 여기서 통주는 대롱 모양의 기둥이란 뜻인데, 다보탑 상층부 제3층에서 대나무 다섯 마디 형상을 한 돌기둥 8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화예는 우리말로 꽃술인데, 역시 3층에 꽃술 모양을 한 기둥 8개가 8각 옥개석을 떠받들고 있다. 이 꽃술 모양의 부재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다보탑을 처음 조사하면서 ‘신발을 거꾸로 세운 모습’이라고 묘사하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보탑에 어울리지 않는 무미건조한 표현이다. 꽃술이 있으면 당연히 꽃이 있는 법. 통주가 떠받들고 있는 부재가 위로 활짝 핀 연꽃 모양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앙련대인 것이다. 다보탑을 자세히 보면 대나무 기둥[통주] 위에 활짝 핀 연화대좌[앙련대]가 있으며, 연꽃 위에 나지막한 8각형 돌담장이 꽃술[화예] 기둥을 감싸안고 있으며, 꽃술 기둥은 다시 8각 옥개석을 떠받들고 있다. 통주와 앙련대와 화예는 석가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보탑 고유의 부재로서, 이 세 부재로 장엄된 상층부 제3층이야말로 다보탑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8개의 꽃술 그 안쪽, 그러니까 꽃의 핵심에 8각 탑신석이 놓여 있는데, 아마도 그 안에 사리와 사리장엄구가 모셔져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인근의 장수사(長壽社), 남천(南川), 칠전원(柒田院) 등에서 조달하여 새로 교체한 부재는, 제석(苐石), 분복(盆覆), 화염(火焰), 유황(流皇), 천황(天皇), 사자(師子) 등 여섯 가지이다. 이들 역시 명칭은 생소하지만, 뜻을 풀이하면 어디에 해당하는지 정도는 추정할 수 있다. 제(苐)는 같은 중수기에서 제(第)와 통용되고 있으므로, 제석(苐石)은 제석(第石), 즉 차례돌이란 의미이다. 다보탑의 기단부 4면에는 각각 10단씩의 돌계단이 있는데, 제석은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기단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모습의 사자석일 것이다. 애초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서쪽 기단 위에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이상의 해석이 맞다면, 제석, 사자 역시 석가탑에는 없는 다보탑 고유의 부재인 셈이다.(그림 10, 그림 11)
남은 네 종의 부재 가운데 분복은 동이가 엎어졌다는 뜻이므로, 같은 모양을 형용한 지금의 복발(覆鉢)에 해당한다. 분복 내지 복발은 인도의 스투파에서 흔히 보는 거대한 봉분이 간략화된 것이다. 화염(火焰)은 탑의 상륜부 가운데 유일하게 불꽃 형상을 한 수연(水烟)으로 추정된다.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인도의 불전도(佛傳圖) 조각에는 간혹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 형상의 기둥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불탑에서 수연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월정사팔각구층탑의 상륜부를 보면 금속제 수연이 화염 형상을 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문제는 유황과 천황이다. 명칭은 물론 의미에서도 여기에 상당하는 부재를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둘 다 황(皇)자를 사용하였는데, 이 글자에는 깃달린 모자[冠] 혹은 꽃의 의미가 있으므로, 혹 상륜부 가운데 꽃무늬가 새겨진 보륜(寶輪)과 보개(寶蓋)가 아닐까 억측해 본다. 어찌되었든 상륜부를 구성하는 이 네 종의 부재는 다보탑만이 아니라 석가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그림 12, 그림 13) 그림 12) 다보탑 상륜부와 화예 그림 13) 석가탑 상륜부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쌍탑이면서도 서로 구조와 모양을 달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석가탑이 수많은 우리나라 삼층석탑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반면, 다보탑은 동아시아 탑 중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외형적 미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부재들은 석가탑과 호환이 불가능한, 그래서 다보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고유한 것들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수기에 등장하는 9종의 석탑 부재 가운데 4종(분복, 화염, 유황, 천황)은 석가탑과 다보탑에 공통되지만, 5종(앙련대, 화예, 통주, 제석, 사자)은 다보탑에만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수기가 석가탑이 아니라 다보탑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문건임을 역설한다. 만약 다보탑중수기가 맞다면, 우리는 이 자료 덕분에 11세기 초까지 올라가는 고유의 석탑(특히 다보탑) 부재 명칭을 아홉 가지나 발굴하게 된 셈이다. 남는 문제들 불국사 승려들은 1024년(현종 15) 다보탑을 중수하고 난 다음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무구정광탑’을 다보탑의 별칭으로 사용한 셈이다. 실제로 중수기에 보면 다보탑에 ‘무구정광다라니경 9편’과 ‘무구정광다라니경 1권’을 사리와 함께 봉안하였다고 한다. 물론 앞서 언급하였듯이 석가탑에서도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그렇다고 두 탑을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기에, 다보탑만을 무구정광탑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탑은? 묵서지편에는 또 다른 중수기가 존재한다. 그것이 서두에서 밝혔듯이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1038년, 이하 형지기)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대웅전 구역에서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므로, 당연히 서쪽 석탑이 석가탑이 된다. 당시에는 쌍탑을 이처럼 방위로 구분하여 불렀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석가탑을 서석탑이라 하였다면, 다보탑은 동석탑이 되는 셈인데, 그보다는 무구정광탑이란 이름을 선호한 듯하다. 무구정광탑이라는 보통명사가 적어도 불국사 안에서는 다보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보탑 중수기를 석가탑에 안치하였는가? 중수기는 두 군데에서 이 문건이 태평(太平) 4년(현종 15) 3월에 기록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판독문 제5행에서는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이라 하였는데, ‘현종’은 묘호(廟號)이고 ‘원문대왕’은 시호(諡號)로서, 모두 현종이 1031년 5월에 사망하고 난 이후에 추증된 것이다. 따라서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는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이미 신라사학회 발표자들이 1038년에 형지기를 만들면서 중수기도 그때 새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 작성시기는 1038년보다 더 나중인 고려 후기에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판독문 제2행에서 제5행 사이에서 ‘왕대력(王代曆)’을 인용하여 탑의 중수 내력을 간단하게 정리하였는데, ‘왕대력’은 현재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혹 『삼국유사』에 인용된 ‘왕대종록(王代宗錄)’과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저자 김관의(金寬毅)는 고려 의종대(1146~1170)에 활동한 인물이다. 따라서 두 책이 같다면, 그것은 이 문서의 필사 시기가 12세기 후반 이후로 내려감을 의미한다. 둘째는 판독문 제15행 끝에 ‘장수(長壽)’라는 글자가 있고 다음 한 글자가 일부밖에 보이지 않는데, 이 글자는 ‘사(社)’자로 추정된다(그림 2 참조). 고려 후기에 불교계에서 결사(結社) 운동이 성행하면서. 기왕의 절 이름에서 사(寺)를 사(社)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장수사는 김대성이 곰을 사냥한 장소에 곰을 위하여 세운 사찰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그 이름 끝자를 사(社)로 고쳐 표기한 것은 역시 이 문서가 결사운동이 성행한 고려 후기에 작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셋째는 문건 제목에서 ‘유가업(瑜伽業) 불국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불국사는 창건시부터 화엄학 승려들을 머물게 하였으며, 고려 전기에도 화엄종 승려인 원경왕사 낙진(1045~1114)이 주석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까지 화엄종 소속 사찰이었을 것이다. 다만 13세기 후반이 되면 법상종 승려인 혜영(1228~1994)이 머문다거나, 『삼국유사』에도 인용된 불국사의 ‘사중기(寺中記)’가 법상종의 연고권을 역사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몽항쟁기를 거치면서 소속 종파가 화엄종에서 법상종으로 바뀐 듯하다. 즉 중수기 제목은 13세기 후반 이후 불국사가 법상종 소속이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므로, 이 점에서도 이 문건은 13세기 후반 이후에 필사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최초의 중수기는 다보탑이 중수된 1024년에 작성되었겠지만, 묵서지편에 포함된 현행 중수기는 고려 후기에 새로 필사되어서 다른 문서와 함께 석가탑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중수기는 물론 「형지기」와 「보시승중명기」가 정확히 판독되면, 연대 문제가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한편 석가탑에서는 ‘무구정경’과 ‘묵서지편’ 이외에 비단에 겹겹이 쌓인 또 다른 두루마리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 유물은 금동제 사리기 외합의 외부에서 발견되었는데, 국보로 일괄 지정된 다른 유물과 달리 기타유물로 분류되어 있다. 비단으로 쌓인 상태라든가 크기 등에서 여러 모로 무구정경과 비슷하여, ‘쌍둥이 다라니경’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두루마리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어 접근자체가 불가능하며 현재 밀봉상태로 보존 중이다.(그림 14, 그림 15) 그림 14) 또 하나의 '두루마리 유물' 그림 15) 현재 밀봉 상태 동아일보 보도자료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자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돌도끼는 과연 어디로 갔는가? 지금까지는 중수기가 언급한 돌도끼를 엉뚱한 장소인 석가탑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수기를 올바로 해석하였다면, 돌도끼는 석가탑이 아니라 다보탑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난관이 있다. 1925년에 조선총독부가 다보탑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그 때 한국인들의 접근이 철저하게 차단된 가운데 탑에서 귀중한 유물이 다수 반출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해체 수리 당시의 보고서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돌도끼는 말할 것도 없고 다보탑 연꽃 속에 모셔진 사리와 사리장치도 영원히 미궁에 빠질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석가탑에서 발견된 유물과 석가탑 중수기인 형지기의 내용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형지기를 포함하여 묵서지편의 내용이 정확히 판독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무녕왕릉 발굴에서 뼈저리게 경험하였듯이, 지나친 조급증 때문에 천 수 백 년이나 된 문화유산을 하룻밤 새에 발굴해버리는 우를 다시 범해서는 곤란하다. 종이가 떡처럼 뭉쳐지는데 적지 않은 세월이 걸렸듯이, 이제 그것을 다시 펼쳐서 복원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불국사에 가서 아침 햇살에 빛나는 다보탑과 석가탑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 숭고한 아름다움에 무한한 경외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 탑 앞에서 모두 하나가 된다. 묵서지편을 통하여 석가탑과 다보탑의 진면목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모두가 하나일 것이다. (추기 : 이 글은 한국역사연구회가 운영하는 웹진에 올리기 위하여 역사대중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였으므로, 참고한 자료 및 사진의 출처를 일일이 각주를 다는 대신 말미에 일괄 소개하였다. 그리고 초고 완성 후 여러 선생님들께서 읽고 학술적인 보완을 주문하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정확한 판독문이 나온 이후에 정식 논문으로 보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7. 5. 10.) 『삼국유사』 『불국사지(외)』, 아세아문화사 『조선고적도보』신라편 정영호·진홍섭·황수영, 1997 『불국사삼층석탑 사리구와 문무대왕해중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동국대 개교80주년기념사업회, 1986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영인 및 해설』 국립중앙박물관 : http://www.museum.go.kr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 : http://gsprs.nricp.go.kr/index.jsp 안승준·김태식, 2007. 3「釋迦塔(无垢淨光塔) 重修記에 대한 초보적 검토」(신라사학회 제59차 학술발표회 요약본) 김태식 기자,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 발견, 보존처리 중」 연합뉴스 2005-9-14 김태식 기자, 「서기 1038년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 발견(종합)」 연합뉴스 2005-9-14 김용래 기자, 「석가탑 안에는 어떤 유물들이 있었나」 연합뉴스 2005-9-14, 신형준 기자, 「‘무구다라니’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 아닐 수도」『조선일보』2007년 3월 9일 A2면 조현욱 기자, 「석가탑 보수 때 새로 넣었나 원래 있던 것 꺼냈다 넣었나」『중앙일보』2007년 3월 10일 16면 윤완준 기자, 「‘쌍둥이 다라니경’ 또 하나의 ‘두루마리 유물’ 발견」『동아일보』2007년 3월 26일 A2면 신형준 기자, 「석가탑 중수기, 아직 제대로 해석 못해」『조선일보』2007년 3월 29일 A24면 신형준 기자, 「'석가탑 중수기 판독문‘에 백지 두 쪽 중앙박물관 판독 정확성 여부 논란」『조선일보』 2007년 4월 24일 A2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