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서양인 고문관들, 정책브레인이었나? 정보원이었나? 김현숙(근대사 1분과) 지구상에 국가와 정부가 탄생한 이래로 오랜 역사성을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아마도 정부기관의 공식ㆍ비공식적인 스파이 활동일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고구려나 신라, 백제의 스파이들이 국경을 종횡무진하면서 상대편 군부대의 동태와 정치적 움직임을 수집ㆍ보고하는 기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현대 한국에서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국내외 정보의 수집ㆍ작성ㆍ배포, 국가 기밀의 보안, 국가 안보 관련 범죄 수사 등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는 국정원이 공식적인 스파이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듯 국가를 운영하고 지배층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보활동은 필요악인 것이다. 그러면 대한제국기에도 정보요원이 있었는가? 물론이다. 고종황제의 비밀정보조직으로 제국익문사(帝國 益聞社)가 1902년 창설되어 61명의 요원들을 통해 국내 방첩과 해외정보를 수집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정부의 정보수집망은 어떻게 구축되고 운영되었을까? 먼저 정보는 지역과 분야, 내용에 따라 여러 종류로 분류되고, 대한제국 정부는 필요에 따라 행정ㆍ외교ㆍ군부 관리 및 개인적인 관계망을 동원하여 정보를 수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문제는 생소한 언어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해외분야, 특히 서양과의 관계에서 정보수집이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고종은 자신이 고용한 서양인 고문관들을 이용하여 정보를 캐내거나, 때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정보활동을 명하기도 하였다. 서양인 고문관들의 한국 도래 우리나라에서 서양인 고문관들의 고용은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까지 총 31명의 외국인들이 고종의 측근 관리로 등용되었다. 이들은 원래 국제법에 생소한 한국측 관리들을 대신하여 조약체결과 외국과의 외교적 분쟁 해결 및 근대화 정책을 입안ㆍ추진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그림 1) 고종의 두 번째 외교고문으로 고빙된 데니. 그는 청국의 조선 종주권을 국제법으로 부인한 『청한론』을 저술하였고, 원세개와의 투쟁의 선봉에 선 자이다. 대한제국에 고용된 고문관들은 학식과 외교적 능력을 겸비한 인사들로 조선에 부임하기 이전 이미 자국에서 외교관직이나 법관직 혹은 고위 행정직에 종사했던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이었다. 따라서 사람과 시기에 따라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연봉 12,000元에서 6,000元의 고액 봉급과 정ㆍ종 2품이나 정 3품 혹은 칙임관 2등에 해당되는 협판이나 회판, 찬의, 참의 등에 해당되는 고위직에서 근무하였다. 고종의 고문관들 중 몇몇은 침투하는 열강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도 있었지만, 일부는 고종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고종의 정보원 노릇을 기꺼이 담당하였다. 이들이 담당한 분야는 한국인들이 담당하기 어려운 외국인과 외국 공사관에 대한 첩보 활동이었다. 고문관들은 정기적으로 또한 급한 현안이 있을 시에는 외교가를 순방하여 각국의 동향과 정책을 탐지하고, 필요한 인물들을 만나 고종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파견된 러젠드르는 누구? 정보활동의 사료가 남아 있는 러젠드르(C.W. LeGendre: 18-1899)를 한 예로 고문관들의 스파이 활동을 보기로 하자. 원세개와 청국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종에 의해 선발된 러젠드르는 ‘청국 킬러’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주청미국영사로 재직할 당시 『청국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를 저술하였고, 일본의 외교 고문으로 대만정벌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인들에게 허여되었던 제주도 어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협상을 위해 일본 출장길을 떠난 것은 1891년 가을이었다. 일년이 넘는 장기 출장 동안 그는 공식적인 업무 외에도, 고종과 민종묵의 비밀 지령을 함께 수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옥균과 박영효의 감시업무였다. 당시 고종에게 김옥균 등 망명 개화파 인사들의 움직임은 일본의 대한침략과 연계될 가능성이 있었던 국가 안보상의 문제였다. 1884년 일본의 재야세력들과 군사를 조직하여 조선을 침공한다는 이른바 “大阪事件”을 일으켜 고종을 긴장시켰던 김옥균은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라와 홋카이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890년 10월 신병을 계기로 석방된 직후, 다시 대원군에게 밀서를 보내는 등 재기에 힘썼고,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김옥균은 고종 및 민씨 척족세력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1891년 5월 김옥균 암살을 위해 자객 이일식이 파견되었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그 해 가을 민종묵 통리기무아문 독판은 도일하는 러젠드르에게 김옥균 동태 파악을 명했던 것이다. 김옥균 미행과 첩보활동 러젠드르는 동경에 도착한 즉시 사설 탐정들을 고용하여 김옥균과 박영효의 일상생활의 궤적과 교우관계, 일본 정객들과의 친분관계, 재정관계 등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이들이 언제, 어디를 방문하는지, 누굴 만나고,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또한 그 내용과 결과를 분석ㆍ예측하고, 주기적으로 보고하였다. 러젠드르는 두개의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였다. 하나는 직접 고용한 사설탐정의 미행을 통해 일상생활의 움직임을 파악하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십수년 일본 정부에서 근무하면서 형성하였던 친분관계를 통해 수집된 김옥균의 정치활동과 자금 관계 등을 수집하였다. 그림 2)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 망명이후 정부에서 보낸 자객들과 첩보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러젠드르의 보고서를 잠시 보기로 하자. 그에 의하면 김옥균은 동경 유라쿠쵸(有樂町) 일대의 호텔과 여관에서 생활하면서 석방 이후 일본 재야 세력과 정치 유력자들과 접촉하고, 수시로 교토에 거주하고 있는 박영효와 망명객들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결국 1891년도 말 김옥균을 주축으로 하는 망명 그룹에서 중국인들과 일본인 추종자들 및 한국 측 망명객들과 함께 조선 정벌을 추진하여 현 민씨정권을 전복시킨다는 음모가 다시금 감지되었다. 이에 러젠드르는 김옥균의 일본 내 자금줄과 교류관계, 음모의 진척과정 등을 조사한 후 대책을 강구하였다. 원래 정보는 수집과 분석 그리고 대책과정이 각 파트의 전문가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수행되는데, 당시 러젠드르는 전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러젠드르에 의하면 그가 수집한 정보와 일본 정계 내 기류를 총체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일본군을 앞세우고 정벌한다는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기 힘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러한 계획이 밖으로 유출된 것은 김옥균 등이 민씨 척족들을 긴장시키고자 하는 의도적인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래도 사건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러젠드르는 외무성을 방문하여 외무대신에게 조선 정벌 등에 대한 진상을 밝힐 것과 김옥균 등의 감시활동을 철저히 해줄 것을 당부하며, 그런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조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민종묵에게는 김옥균의 자금줄의 원천은 조선이고, 조선 내에 연계 세력과 조직들이 건재하는 것으로 파악됨으로, 이에 대한 비밀 조사를 촉구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김옥균의 한국 공격이 현실화될 경우를 대비하여, 한국 측 인사들과 민비가 묵을 수 있는 안가는 동경에 마련하겠다고까지 건의하였다. 최고급 정보원인 서양인 고문관들 러젠드르의 사례 이외에도, 대한제국기 생산된 사료의 행간 넘어 간간이 비쳐지는 고문관들의 첩보활동은 주로 외교 정보 수집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젠드르는 대일 방곡령 사건이 발발하자 일본정부의 내부 동향과 허실에 대한 정보를 조병직에게 전달하였고, 삼국간섭기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탐지하고, 고종의 외교정책 수립에 정보를 제공하였다. 데니(O.N. Denny), 그레이트하우스(C.R. Greathouse), 샌즈(S.F. Sands) 등도 정기적으로 혹은 수시로 서울에 있는 외교가나 손탁호텔을 방문하여 각국 공사의 동태를 파악하고 전달하였다. 이 때 각 공사관에서 주최하는 티모임이나 정기적인 파티는 훌륭한 정보 수집 장소였다. 칵테일 한잔 마시면서 나누는 담소 속에서 각국 외교관들과 일본 첩보원들, 한국 관리들, 이권업자들은 필요한 정보를 캐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거나, 혹자는 정보를 맞교환하여 본국으로 전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 3) 독일 공사관의 파티 장면: 공사관 주최 파티는 훌륭한 정보 수집의 장이었다. 그림 4) 고종의 궁내부 고문으로 부임한 샌즈. 샌즈는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재직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화와 차관도입, 그리고 일본의 대한침략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이와 같이 서양인 고문관들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한국정부의 외교 협상가로서, 국제법 자문가로서, 고종의 정책 브레인으로서만 역할을 담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대외정보 수집창구가 없었던 당시 정보활동까지 마다하지 않는 팔방미인들이었고, 최고위급 정보원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