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의 인식과 역사적 사실 노영구(중세사 2분과) 역사를 하는 학자들은 언제나 엄격한 사료 비판과 이에 입각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생각된다. 그것이 소설가나 몽상가와 다른 역사학자들의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역사학자들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사료에만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구성하는 것일까? 아래 한 장의 그림의 해석을 두고 나타난 해석상의 논란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림 1> 임진왜란도 병풍 위의 그림은 와카야마현립박물관(和歌山縣立博物館)에 소장 중인 「임진왜란도병풍」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어느 읍성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조선의 세 부대가 읍성 서쪽에서 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중 앞에 선 조선군 부대는 일본군과 조우하여 궁시(弓矢)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래 이 그림에 대해서는 구원병을 존재로 인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는 성과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도 인정하고 있듯이 육군박물관에 보관 중인 「동래성순절도」와 「임진왜란도병풍」을 비교해보면 읍성의 전체적인 윤곽이나 주변 산세가 매우 유사할 뿐만 아니라 읍성을 방어하는 조선군이나 공격하는 일본군의 모습 등이 거의 흡사하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구원병의 존재로 인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구원병의 존재만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로 단정하기에는 이 전투의 실제 양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이 승리한 원인으로는 수성군(守城軍)의 분투와 함께 성 밖에서 응원한 여러 의병 부대의 적극적인 외곽 지원에 힘입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그러나 실제 여러 의병 부대의 양상을 보면 대부분의 부대가 진주성 근처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도중에 일본군에게 저지되었다. 일부 부대가 진주성 근처에 도달하였으나 그 응원 활동도 일본군을 직접 공격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두 야밤에 진주성 근처 산에 올라 횃불을 들거나 호각을 불어 일본군을 놀라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상황은 낮에 상당한 규모의 조선 응원군이 일본군과 직접 교전하는 모습을 묘사한 「임진왜란도병풍」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논란이 되는 조선 구원병의 존재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조선군의 대응 양상을 보면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경상도 내륙 지방인 상주(尙州)까지 일본군 수 백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내용의 관보(官報)가 전해진다. 이 지역 군사의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부산포 전투가 벌어진 그날 4월 14일이었다. 또한 동래에 인접한 밀양부 부사 박진은 부산포 함락을 듣고 곧바로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동래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동래성이 함락되자 곧바로 동래성 북쪽인 소산역(蘇山驛)에서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경상도 전역에 일본군의 침공 사실이 당일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경상좌병영 소속 군사들이 체계적으로 신속히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전쟁 초기 조선의 군사 동원 체제는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도병풍」에 나타난 구원병은 이러한 양상의 한 반영으로 보인다. 많은 의문과 다양한 반증 자료에도 불구하고 역사학 전공자마저 구원병의 존재 하나만으로 「임진왜란도병풍」을 제1차 진주성 전투로 판단한 것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존 인식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역사가가 가지는 기존 인식은 경우에 따라 역사적 사실(fact)마저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우리의 인식도 근본에서 재점검하고 그 오류를 점검할 필요성이 있음을 이 한 폭의 「임진왜란도병풍」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