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진실] 해방직후 유관순의 발굴

BoardLang.text_date 2009.03.03 작성자 정상우

해방직후 유관순의 발굴


정상우(근대사 분과)


사회자(이하 사): 유관순양을 세상에 알려지게 한 두 분 선생님이 여기 계신데,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때 동기를 신봉조 당시의 교장선생님과 박인덕 선생님이 직접 좀 말씀을 자세히 해 주세요.

신봉조(이하 신):....내가 이화학교 졸업생 중에서 굉장히 국가민족에 공헌 사람 있으면 그런 분을 선생님이 말씀해달라고 했지요....그때가 언제지요?

박인덕(이하 박): 그 때가 태평양 끝난 후, 해방을 당한 후에, 이화를 갔는데, 가서 신봉조 교장을 만났거든요....“아, 박선생 우리가 이렇게 해방되기까지 여러 남녀가 희생을 당했는데, 여자의 대표로 나서야 하겠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시냐”고. 내가 서슴지 않고 “아, 우리 이화의 학생으로 있던 유관순이”라고 했지요. 왜 유관순이를 택하느냐고 그래서, 나도 그 때 서대문 감옥에 5달 동안 있었거든요.

박:....하루는 들으니까 유관순이가 죽었대요. 어떻게 죽었냐니까 만세 날마다 부르다가 저놈들이 때려죽었대요. 걔는 죽도록 하는 거야. 목숨을 바쳤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 후에 언제든지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내가 선생으로서 한국 여성의 애국자로 유관순을 나타냈겠다. 하는 차에 신교장을 그 때 만나서 그랬지....그 피가 졸업하고 나가는 여학생의 독립운동, 우리나라가 있는 한 유관순이를 알려야 되겠다. 그 때 내가 잔타크 생각을 했어요. 한국의 잔타크라고 생각했어요. 나이도 비슷해.

신: 같아요. 열여섯살.

박: 네, 나이도 같아요. 신교장, 내가 이 세상에 가장 기쁘고 통괘한 것은 유관순이를 알리고 가는 거예요. 항간에서 김마리아씨를 추대하자고도 했지요. 물론 그도 많이 옥고를 당하고 맞고 터지고 했지만 다 하고 나와 정신했죠. 유관순이는 친히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놈 손에 매 맞아 죽었어. 하나 밖에 없어. 대단해요 정말, 코리아의 잔딱크구나 생각했어요. 생명을 내 놨으니까요. 어린애가.

<신봉조, 박인덕 대담 - 1978. 10. 7.>




식민지 시대 한국인 최초로 ‘이화(梨花)’의 교장으로 부임해 1960년까지 재직한신봉조. 역시 ‘이화(梨花)’ 출신으로 식민지 시대 희대의 ‘이혼’을 감행하고 해방이후 활발한 강연활동(주로 미국에서)과 교육활동을 벌인 박인덕.

  두 사람이 말년에 만나 자화자찬식의 대담을 벌였다. 주제는 ‘유관순’.

  ‘유관순’은 3ㆍ1운동을 초기에 계획ㆍ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을 뛰어넘어 3ㆍ1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를 정도의 인물이며, 최근의 고액권 화폐의 인물선정을 보고 있자면 한국 여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도 읽혀진다. 위의 대담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들이 ‘유관순’에 대해 이러한 상(像)을 갖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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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유관순 열사 기념관 전경(출처: 유관순기념관 www.yugwansun.com)

  해방 직후, 당시 이화 출신으로 국가에 헌신한 여성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신봉조의 개인적 바람과 병천만세운동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과 박인덕의 우연한 만남,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진 순간, 그것이 ‘유관순’은 그녀가 살던 시기를 훌쩍 뛰어 넘어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신봉조와 박인덕의 만남 이후인 1947년 이화(梨花)여중을 중심으로 하여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1947년 8월 신봉조를 비롯 정인보, 최현배, 설의식, 장지영 등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발기되어 9월 1일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이후 11월 말 명예회장 조병옥, 회장 오천석, 고문에는 서재필,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김규식, 위원에는 정인보, 최현배, 장지영 등 미군정의 관료를 비롯하여 해방 직후 이른바 ‘우익’계열의 주요인사들과 학계의 대표들이 대거 포진된 조직으로 거듭났다.

  기념사업회에서는 기념비나 동상 건립과 같은 기념활동 이외에도 아주 독특한 활동을 2가지 벌이는데, 바로 전기(傳記) 서술영화화이다. 이러한 매체가 갖는 대중적 영향력은 막대하지만 전문적인 지식과 자본, 기술력, 인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들이다. 이러한 사업들이 정부도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속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당시 기념사업회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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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이화학당(출처: 유관순기념관 www.yugwansun.com)

유관순 전기 간행에서도 이화(梨花)의 교장이었던 신봉조는 상당한 활동을 보인 것으로 추정되며, ‘당국(當局)의 후원하(後援下)’에 진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전기는 1948년 5월에 발표되는데, 이를 집필한 것은 목사이자 소설가이며 해방 이후 문교부 편수국 편수관을 지낸 전영택(田榮澤)이었다.

  당시 문교부장이자 유관순기념사업회의 회장이었던 오천석은 서문을 통해 해방 이후 사상의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그 원인을 청년들의 애국심부족이라고 파악하며, 유관순은 청년들이 부족한 애국심을 보여주는 좋은 선례로 추켜세웠으며 전영택은 이러한 유관순을 밝혀  건국정신을 확립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전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직한 성품과 불굴의 의지, 병천만세운동의 주도, 만세 과정에서 부모의 죽음, 체포와 고문 및 옥중 투쟁과 비참한 죽음.하지만 전영택이 목사였기 때문이었을까? 유관순 전기 곳곳에는 기독교적 색채가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기는 조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유관순의 모습으로 시작하며, 이 모습은 죽음 직전까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일제의 압제가 심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도 교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 밖에 없었다”고 서술되기도 한다. 즉 민족해방운동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가운데 유관순은 “신의 선택을 입은” 인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한편에서 영화 ‘유관순’이 제작되고 있었다. 이 역시 기념사업회의 조직과 함께 급속히 진행되어 1947년 9월 말부터 시작해 40여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영화 ‘유관순’은 윤봉춘이 감독을 맡았다. 그 역시 영화계에 들어오기 전 고향 회령(會寧) 장로교회 시무로 지역 교회일에 열심인 인물이었으며, 해방 이후 남한 영화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이후 “국가재건의 다난한 전도에 있어 대중교화와 민심계발”이라는 방향에서〈삼일혁명기〉,〈윤봉길의사〉,〈애국자의 아들〉 등 이른바 일련의 ‘광복영화’를 감독했으며, 영화〈유관순〉역시 이러한 방향에 위치한 것이었다.

  필름은 전하지 않지만 남아있는 시나리오를 통해 볼 때 이 작품이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대결구도를 뚜렷이 하면서 조선인의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고, 유관순잔다르크와 동일시하면서 유관순의 죽음을 기독교적 순교로,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불가분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었다.

  이러한 유관순의 전기는 이후 유관순 전기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평가되며, 영화〈유관순〉에 대해 신봉조는 “서울을 위시해 방방곡곡에서 영화를 보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어요. 애국자의 일제시대 당하던 생생한 사실이 영화로 나간 것이 처음일거요. 영화사상 최고의 인원이 동원된거요. 그러니 유관순하면 영화 보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거지”라며 영화의 파급력을 극찬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아는 유관순은 해방 직후 박인덕, 신봉조 등과 같이 ‘이화(梨花)’라는 연결고리 속에서,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의 대거 협조ㆍ참여 하에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 및 자본을 필요로 하며 대중적 영향력이 큰 부분에서 재탄생하였으며, 이 속에서 유관순은 기독교 정신과 애국심이 혼연일체 된 표상으로 재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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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유관순 동상(출처: 유관순기념관 www.yugwansun.com)

그렇다면 왜 그 많은 운동가 가운데 유관순일까?

  신봉조와 박인덕의 대담 말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재탄생은 또 다른 여성운동가로 3ㆍ1운동에 깊숙이 가담한 김마리아와의 경쟁 속에서 선택된 것이었다. 그 이유는 - 대담내용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듯이 - ‘유관순’이 죽어서 이다. 그 유관순은 죽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아마 김마리아가 ‘이화’ 출신이 아니었던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유관순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이화(梨花)’에 들어갈 정도의 ‘엘리트’였으며, 아직  어린 ‘소녀’였고, ‘애국심’ 발로의 결과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학살당했으며, 요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관순을 통해 우리들은 어린이 혹은 젊은 사람에 대해 떠올리는 ‘순수함’을 떠올린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관순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었으며, 그 순수함은 애국심이자 ‘우리 민족’ 혹은 ‘국민’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순수한 존재에 대한 잔혹한 고문은 더욱 자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곧바로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당한 탄압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닐까.

  유관순의 순수함은 이러한 막연한 순수함이라는 측면 외에도 존재한다.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유관순은 이후 행적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의 행적을 근거로 특정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 재단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관순은 또 다른 순수함을 담지하고 있었다. 이중의 순수함. 그들이 유관순을 선택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