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로 오려진 인천상륙작전의 진실
정진아(현대사 분과)
몇 년 전 나는 국가기관의 자료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내가 맡은 일은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에서 9월까지의 기사 중 중요기사를 선별하는 작업이었다. 6월, 7월, 8월, 순차적으로 신문을 훑어나가며 중요기사를 오려내던 나는 1950년 8월 기사를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8월 중순부터 “유엔군 인천으로 상륙 예정!”, “유엔군 상륙 작전도”와 같은 기사들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사진 1> 월미도를 향하는 함정(출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현대사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내 지식은 상식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6.25전쟁의 기선을 잡은”, “맥아더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유엔군 전략전술의 승리”라는 수사로 표현되는 인천상륙작전의 신화 속에는 공산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이라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었다.<사진 2> 미해병대의 월미도 공격(출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그 이미지 속에 맥아더의 전과는 극대화되었고 신화가 되었다. 그런데 기습작전이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되다니, 그것도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게다가 지도까지 제시해가며 자세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나는 내 상식이 가진 함정을 깨닫게 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의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총회의 추인을 받았다. 참전의사를 밝힌 국가들은 병참 지원과 파병규모 등 참전의 내용과 방식을 일본에 있는 유엔군사령부에 전달하고, 작전에 대한 지침을 전달받았다. 16개국과 더불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극비로 작전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16개국이나 되는 참전국들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작전지침을 전달하며 그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작전이 극비로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전이 결정된 후 유엔군이 곧 한국에 들어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문제는 언제, 어디로일 뿐이었다. 유엔군의 상륙지점으로는 인천과 더불어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이 함께 검토되었지만 8월 12일 유엔군의 상륙지점은 인천, D-day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그 직후 외신은 물론 한국의 신문들도 그것을 앞 다투어가며 보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사진 3> 9월의 월미도(출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공산군은 상륙지점이 인천이라는 것을 손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인천상륙작전을 막지 못한 것일까?
기존 연구는 ‘무지론’을 펴고 있지만, 나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본다. 공산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몰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낙동강 전투에서 전력을 소진한 공산군이 2개의 전선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공산군은 전쟁 초기 육군에서는 우세했을지 모르지만 해군과 공군력에 있어서는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예고하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주로 검색하고 이용했던 신문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후 사옥을 서울에 두고 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잠시 정간되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신문이 다시 발행된 것은 전쟁발발 3개월 여가 지난 10월 이후였다. 따라서 이 두 신문을 통해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내 상식의 함정을 깨달은 기사 역시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아니라 부산에서 발행된 『부산일보』와 『민주신보』에서였다. 이 내용을 웹진 「편견과 진실」 코너에 투고하리라 생각하고, 원고를 준비하던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자료가 없었던 것이다. 그간 수집된 근현대 신문자료와 내가 참여한 편찬자료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관련 기사는 실제로 상륙작전이 단행된 9월 15일부터 상세히 수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역사는 “가위와 풀의 역사”라고 했던가. 가위로 잘려진 역사는 실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되고, 풀로 붙여진 역사는 그 전후 맥락이 사라진다. 잘려진 역사를 복원하고 전후 맥락을 잇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면 나 역시 의도하지 않게 역사를 잘라낸 셈이다. 가위로 오려진 진실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