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역사의 전환점] 1971년의 김대중

BoardLang.text_date 2007.08.27 작성자 홍석률

1971년의 김대중


홍석률(현대사 분과)


  왜 1971년의 김대중인가?


  한 인물에 대해 그 생애 전반을 일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현재 한나라당에 있는 김문수와 이재오는 1980년대에 우리가 보았던 그 사람들인가?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물이지만 정치ㆍ사회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일 수 있다. 설사 해당 인물의 기본적인 정치, 이념적 지향이 바뀌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지위와 역할이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 혁명가 스탈린과 권력자 스탈린은 같은 인물이었던가?


  김대중은 사형수였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어느 시점의 김대중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는 1971년의 김대중을 이야기하려 한다.


  김대중은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현직 대통령 박정희와 1971년 4월에 거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때부터 김대중은 한국정치를 좌우하는 최고 지도자급 인물이 되었다. 그의 반대자들은 본격적으로 그를 “위험한 인물”로, 반면 지지자들은 “대단히 개혁적인 인물”로 보기 시작했다.


  어렵게 성장한 4수생 정치인  


  김대중은 아주 어렵게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이었다. 1924년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목포 앞바다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무렵 그는 청년 사업가였고,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품었다. 1954년 총선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했다.


  그는 야당인 민주당의 당원이 되었고, 1958년 민주당 노동부 부의장직을 맡았다. 「사상계」에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글도 썼다. 19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7.29 총선이 진행되어 그에게 3수 기회가 왔다. 인제에서 다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김대중은 가톨릭이었고, 민주당 신파의 영수 장면과 친분이 있었다. 장면은 총리가 되었고, 김대중은 여당인 민주당의 선전부장 겸 대변인이 되었다.


  마침내 1961년 5월 13일 인제에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알고 보면 그가 4수를 한 것은 대통령 선거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3일 후인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치인 김대중은 짧게 끝났지만 장면 정권기간 동안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다. 1963년 총선 때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대 김대중은 주로 야당 대변인 역할을 하며, 줄곧 국회의원직을 유지했다.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 경선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극적으로 승리했다. 예상 밖의 승리였다.


  참신하고, 개혁적인 야당 대통령 후보


  1971년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대통령의 손쉬운 승리를 예측했다. 선거전 초기에 주한 미국대사관은 경제개발의 업적 때문에 박대통령이 쉽게 당선될 것이며, 이번 선거에는 여당이 돈을 많이 쓸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효과적이고, 선풍적인 선거운동을 했다. 그는 야당 후보로 확정되지 마자 1970년 10월부터 남북교류론, 미ㆍ일ㆍ중ㆍ소 4대국의 한반도 안보보장론, 향토예비군 폐지 등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고, 인상적인 정책을 발표했다. 나아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부의 편중을 경계하며 이른바 ‘대중경제론’을 제기했다. 나름대로 그는 정책 선거운동을 했다.


  김대중은 나아가 용기와 적극성도 보여주었다. 그는 후보로 지명된 직후부터 시국 강연회 등의 명목으로 지방을 돌며 실질적인 대중동원에 들어갔다. 군사정권기 한국야당의 바람몰이 선거운동 모델을 정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김대중은 자신이 당선되어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신념하에 적극적으로 선거에 임했다. 때로는 경찰이 참석한 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을 검사하는 등 압박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가 주도하는 집회에는 많은 군중이 참여했다. 그는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해 불만이 있는 세력들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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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7대 대통령선거 중 효창운동장에서 유세하는 모습 (출처 : 김대중 도서관)


  박대통령은 애초부터 김대중과 같은 젊은 정치인과 경쟁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김대중의 선거운동이 예상 밖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미국대사관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는 측근인사에게 김대중에 대해 “무언가 해보라(do some thing)”고 지시하기도 했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여당 인사들도 선거결과에 대해 우려했다. 이에 박대통령을 설득해서 선거를 3일 앞두고 부산 유세에서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표하도록 했다. 당시 박대통령의 최대 약점은 너무 오래 집권했다는 것이었다. 1971년 4월 27일 선거 결과 박대통령이 결국 승리했다. 김대중 후보 측은 이를 부정선거라고 성토하였다.


  동일성과 차별성, 그 선택의 기로


  1971년의 김대중이 내건 선거 공약, 특히 남북교류론 등 통일정책과 관련된 공약들은 당시 상황을 볼 때 대단히 참신하고, 개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 주변상황을 볼 때 이러한 공약들은 기존 분단체제의 틀 자체를 허무는 것은 아니었다.


  1969년에 등장한 닉슨행정부는 데탕트 정책을 추구했고, 이미 한국정부에 보다 유화적인 통일정책을 권유하고 촉구해오고 있었다. 한국 정부도 내부적으로 제한적인 남북교류 및 접촉 등 보다 전향적인 통일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작업은 기존 주류 보수세력의 반공주의 정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춤거리고 있던 상태였다. 김대중의 통일, 대북정책은 닉슨 행정부가 추구했던 한반도 현상유지 정책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은 박정희보다도 먼저 남북한 유엔동시가입론을 주장했다.


  한편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대해 어떤 연구자는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의 변종”이라 했지만 최근 다른 연구자는 ‘발전주의’라는 면에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김대중은 기본적으로 보수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책, 특히 경제정책의 경우는 박정희 정권의 그것과 기본 틀에서 같을 수밖에 없다. 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반시장적일 수 없으며, 나아가 기존 세계체제의 틀 자체를 허무는 내용을 담보할 수도 없다. 다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에, 또한 기존의 세계 경제질서에 좀 더 소외된 계층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적응하겠다는 정도였다.


  실제 현실을 놓고 보면, 김대중은 그의 반대자들의 생각처럼 그리 위험한 사람도 아니었고, 일부 지지자들의 생각처럼 그리 진보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1971년의 선거 자체가 모든 정치적 선택의 가능성을 다 열어두었던 것도 아니었다.


  1971년 선거에서 부정선거 여부도 논란이 될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과연 선거를 통해 군부독재정권이 민간정부로 이전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선거과정에서 여당 인사들은 김대중이 당선되면 정치적 파국이 올 수 있다고 하면서, 공공연하게 군부쿠데타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김대중 후보도 선거 직전인 1971년 2월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국무부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만약 당선되고,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질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군부독재로부터 민간정부로의 이행은 기본적으로 6월민주항쟁이라는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지,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71년의 한국정치는 보수, 반공적 인사들만이 참여가 허용되는 대단히 협소한 공간 위에 존재했다. 김대중은 아마도 바로 그 경계선 근처, 이때까지만 해도 바깥쪽은 아니지만 바로 안쪽에 위치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군부독재가 더욱 강화되었을 때 한국의 주류 정치세력들은 그를 한국정치의 바깥으로 추방하려 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이 일어나기까지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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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운동 당시 부산 수영만에서 유세하는 모습 (출처: 김대중 도서관)


  또 다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 여권 후보들과 한나라당 후보의 차별성에 의미를 두고 선택을 가늠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기존 정치의 틀 자체를 바꾼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선택의 무의미함을 강조할 것이다. 물론 지금과 1971년의 정치 상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정치는 협소한 공간을 갖고 있고, 현실적으로 선거는 모든 정치적 선택의 여지를 다 열어 놓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과 같은 인물이 보여준 기존 주류 보수세력과의 동일성과 차별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러한 고민들이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 김대중은 아직도 한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한다.


  일부에게는 여전히 철저히 잠재워야할 위험한 불씨로, 일부에게는 민주ㆍ평화세력의 구심점으로, 또 다른 일부에게는 짜증나는 보수정치의 환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