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다리의 애환

BoardLang.text_date 2004.12.31 작성자 하원호
다리의 애환

하원호

1950년 12월 초 AP통신의 종군기자 막스 데스포는 대동강에서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북진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을 포기하기로 한 것은 12월 4일이었다. 유엔군은 운반할 수 없는 군수품과 보급품은 소각하고 탄약고와 유류저장고를 폭파한 뒤 대동강을 건너 임진강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중공군의 추격을 막으려고 대동강 철교를 폭파시켜 버렸다. 후퇴하던 데스포 일행이 대동강 철교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철교에 올라 있었다. 그들은 한겨울의 대동강을 헤엄쳐 철교에 간신히 이른 다음 망가진 교각을 잡고서 생사의 곡예를 벌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이때 막스 데스포가 찍은 한 장 의 사진 「폭파된 대동강 철교」는 어떤 말보다 6.25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증언해 주었고,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 중 하나인 이 사진으로 그는 1951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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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공언하던 이승만 정권이 야반도주하듯 남쪽으로 도망치고 난 뒤 폭파시킨 한강인도교의 참상은 이보다 더했다. 피난민들이 한강인도교를 건너고 있는 데도 그대로 폭파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가랑잎 떨어지듯 한강에 빠져 죽었던 것이다.

다리는 어느 나라 문학에서도 연결의 장소요 만남의 장소로 쓰이는 소재이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끊겨진 우리의 한강다리나 대동강철교는 단절과 이별을 상징하는 장소일 수밖에 없다. 이 다리들은 전쟁 후에 다시 복구되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된 우리의 현실 속에, 이산가족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끊겨진 다리가 이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다리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의 이야기다. 지금의 압록강 북동쪽 엄호수에 주몽일행이 이르렀는데 다리가 없었다. 주몽이 물을 향해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하다가 뒤쫓는 자들에게 잡히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 일행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다. 이 신화에서 다리는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과 신천지의 입구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주몽이 건너간 세계는 그가 개척할 희망의 곳이었고, 강 이쪽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땅이었다.

다리는 주몽이 강을 건너던 때보다 먼저 있어 왔겠지만,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다리는 고구려 때인 413년에 완공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서, 그 위치는 알 수 없고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대적인 공사로 진행된 듯하다. 그런데 1981년 여름 북한의 행정구역상 평양시 대동강구역 휴암동과 대성구역 사이에 있었던 고구려시대의 다리가 발견되었다. 조사발굴 사업은 휴암동 쪽에서 진행되었는데, 다리의 첫머리 부분 구조물은 10 ㎝ 정도의 두께로 덧쌓인 자갈과 모래층 밑에서 드러났다. 골조물의 대부분은 길이 670 ㎝ , 너비 38 ㎝ , 두께 26 ㎝ 가량 되는 밤나무 각재이다. 다리의 입구 부분에는 첫머리 부분에서부터 밖으로 부채살처럼 퍼진 깔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본래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다리의 첫머리 부분에는 교각과 교각 사이에 놓였던 골조가 땅에 묻힌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 천호동 쪽에서는 2개의 교각기둥이 강바닥에 박힌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다리는 쇠못이나 꺽쇠를 비롯한 그 어떤 쇠붙이도 쓰지 않고, 모든 이음새를 네 갈래로 오려내 맞추는 사개물림으로 해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이 다리는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427년(장수왕 15)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본격적이고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는 삼국시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삼국시대의 다리는 국가 정책으로 축조한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일부는 마을 자체의 필요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도 있었다. 일본에 다리 가설 기술을 전해 준 쪽도 백제였다. ꡔ일본서기ꡕ에 의하면, 612년에 백제의 토목기술자 노자공(路子公)이 일본에 건너가서 현재 일본의 3대 기물(奇物)의 하나로 불리는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는 신라때 건설되었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 뒤에도 수많은 사찰의 다리가 만들어 졌지만 절간의 다리라는 구조물은 천상의 불국(佛國)과 지상의 속세를 연결하는 상징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 같은 종교적 다리 보다는 우리 같은 속인들에게는 원효의 문천교에 더 마음이 끌린다. 원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 받칠 기둥 찍으련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과부로 있던 요석공주와 맺어주려고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게 했다. 관리는 문천교를 지나다가 원효를 만났는데 원효는 일부러 물 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게 되었고 요석궁으로 가서 옷을 말렸다. 얼마 후 요석공주는 아기를 가졌고 그 아이가 설총이었다. 원효의 다리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의 다리였고 세상을 열어나갈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유명한 다리는 말할 것도 없이 정몽주가 죽은 선죽교다. 개성 자남산(子男山)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놓인 돌다리로 단순교로는 세계 최초의 것이라고 하고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이다. 이미 죽음을 예견한 정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건너다 방원의 부하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 다리 위의 정몽주의 애잔한 죽음은 고려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지만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여는 시작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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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가장 큰 다리는 항상 가설된 것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만들어 졌던 한강의 배다리였다. 배를 엮어 강을 건널 수 있게 만든 부교(浮橋)인 이 배다리는 이미 고려 때도 임진강에 설치한 적이 있고, 연산군이 한강 남쪽의 청계산에서 사냥을 즐기려고 민간의 배 800 척을 동원해 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배다리는 정조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양주에서 화성으로 이장해 융릉을 만든 뒤 능에 참배하기 위해 처음에는 한강에 선창을 양쪽에 만들어 배를 타고 건넜지만, 1790년(정조 14)에 주교(舟橋)를 가설했다. 이 배다리의 운영과 관리는 주교사(舟橋司)가 맡았고, 배다리의 운영방안을 정한 책인 「주교지남」을 정조가 직접 편찬했다. ꡔ주교지남ꡕ과 ꡔ주교사절목ꡕ에 적힌 주교제작에는 교배선 38척, 좌우위호선 12척, 난간선 240척, 홍전문 3개를 설치하도록 했는데 홍전문은 주교의 남북과 중앙에 설치되었고, 배를 엮을 때 큰 배는 강 가운데 작은 배는 강변에 놓아 가운데가 높게 만들었다. 여기에 동원된 배들은 충청도의 조운선과 강화도에 있던 훈련도감의 배 등 관선들이었지만 점차 민간의 배도 징발했다. 나중에는 훈련도감 배와 서울의 경강상인들이 소유하던 경강사선(京江私船) 중에서 큰 것이 고정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경강상인들에게는 정기적으로 주교가설에 참여하는 대가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동미를 독점 운송하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경강선들은 관의 비호를 받으면서 조선후기 해운의 주류를 이루었고 경강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주요수단이기도 했다.

근대적 다리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900년 7월에 준공된 한강철교였다. 경인선 건설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근대의 상징물과 같았다.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낸 미국인 J. R. 모스는 한강철교 가설을 위해 미국에서 설계 및 철도교 자재가 도입했다가 공사도중에 일본이 부설권을 인수해서 준공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서의 원료수송과 상품수출을 위해 철도를 식민지 국가에 건설했다. 제국주의가 강요한 근대의 상징적 구조물은 무엇보다 철도였고, 철교는 그 구조물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한강철교는 단순한 우리 내부의 연결과 만남의 장소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의 수탈을 위한 거대한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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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압록강 철교는 경의선의 신의주역과 중국의 단둥(丹東)역 사이에 있다. 1909년 8월에 착공해 1911년 11월에 준공되었는데 공사동원 인원은 51만명에 이른다. 이 철교의 중앙에는 단선철도가, 양쪽에는 인도가 설치되었다. 이 철교는 가운데가 회전식으로 열려 배가 항해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사진 왼쪽 철교위의 네모난 구조물이 있는 곳이 90도로 회전해 배가 다니게 하는 곳이었다. 이 철교는 만들어질 당시 동양제일의 국경명물로 불리었다. 압록강이 국제하천인데다 철교의 길이가 당시로서는 가장 길었던 탓이다. 이 철교는 인도교를 겸하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독립운동을 하러가는 사람, 먹고 살기 힘들어 만주에 건너가는 사람, 만주 침략을 위해 간 일본 군대가 건넜고, 그리고 이광수가 상해임정에서의 망명생활이 힘들어 걸어서 건너와 일본경찰에게 자수하고 친일파의 길을 간 것도 이 철교에서 였다. 1934년 새로운 철교가 개통되면서 이 철교는 인도교로 사용되었다.

지금이야 한강만 해도 다리가 몇 개나 있는지 일일이 헤아리지 않으면 어렵고 또 새로운 다리가 금방 들어서는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대동강 다리같은 끊겨진 철교의 기억은 분단의 현실에서 지울 수 없는 상징물이 되어 있다. 또 엘리옷(Eliot, T. S)은 「황무지」에서 런던교의 붕괴를 현대 문명의 몰락으로 상징했지만, 김영삼정권 시절에 무너진 우리의 성수대교도 박정희 정권이후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 근대화의 허구를 보여주는 자화상이다.